펠리페 곤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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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카를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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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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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포 수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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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곤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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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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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노 라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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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스페인 사회노동당 로고.svg 스페인 사회노동당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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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몬 라모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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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돌포 요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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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곤살레스
제4대
호아킨 알무니아
제5대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제6대
알프레도 페레스 루발카바
제7대
페드로 산체스

인민당 대표 · 팔랑헤당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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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스페인의 방송국 안테나3가 스페인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 100명'을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후안 카를로스 1세
미겔 데 세르반테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소피아 왕대비
아돌포 수아레스
6위
7위
8위
9위
10위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
펠리페 6세
파블로 피카소
예수의 테레사
펠리페 곤살레스
11위부터는 영문 위키 참고.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스페인 왕국 제3대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 마르케스
Felipe González Márquez



파일:Felipe González Márquez.jpg

출생
1942년 3월 5일 (82세)
스페인국 세비야 베야비스타
국적
[[스페인|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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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볼리비아|

볼리비아
display: none; display: 볼리비아"
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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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기
제3대 총리
1982년 12월 2일 ~ 1996년 5월 5일
서명
파일:곤살레스 총리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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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세비야 대학교 (법학)
배우자
카르멘 로메로 로페스 (1969~2008, 이혼)
마르 가르시아 바퀘로 (2012~)
자녀
3명
종교
가톨릭
소속 정당

약력
스페인 사회노동당 서기장
스페인 하원의원[1]
스페인 총리

1. 개요
2. 생애
2.1. 총리로서
2.2. 정계 은퇴 이후
3. 비판
4. 여담


1. 개요[편집]


스페인의 정치인.

제3대 총리직을 역임하였으며 1974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23년간 진보 정당인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서기장[2]직을 맡았다. 스페인의 민주화 이후 선출된 첫 사회주의 성향 총리이며, 현재까지 스페인 사회노동당이 배출한 세명의 총리(펠리페 곤살레스,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 페드로 산체스)중 한명이다. 그리고 역대 스페인 총리중 가장 오래 집권한 총리이기도 하다.


2. 생애[편집]


1942년 세비야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0년대 세비야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였으며 이후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코 정권 하에서 좌파 활동이 금지되어있었으나 그는 여러 노동조직에서 활동하였고 프랑스에서 망명 활동을 하던 스페인 사회노동당에도 가입했다. 그는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사회노동당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1974년에는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서기장직에 올랐다.

1977년 스페인이 민주화되자 귀국하여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선거를 이끌었다. 1977년 스페인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은 전체 2위의 득표를 하였으며 350석중 118석을 확보하였다.


2.1. 총리로서[편집]


1979년 스페인 총선거에서는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의 인기로 인하여 3석을 잃었지만, 수아레스 총리의 퇴임 직후 치러진 1982년 스페인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은 48.1%에 350석중 무려 202석을 얻는 초압승을 거두며 집권하였다. 그리고 사회노동당의 당수였던 펠리페 곤살레스도 총리직에 오르게 되는데, 이는 1930년대 이후 스페인에서 배출된 첫번째 사회주의 성향의 총리였다.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는 거침 없는 개혁 행보와 민주화 추구로 인하여 국민적인 인기가 높았다. 그 결과 1990년대 실각할때까지 사회노동당의 의석 수가 꾸준히 감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펠리페 곤살레스는 4번이나 총리직을 연임할 수 있었다.

그는 총리로 선출되자마자 유럽 공동체 가입을 추진하였으며, 1983년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유럽 연합에 가입하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복지 정책 확충에 신경썼다. 전국을 잇는 고속도로망을 신설하였고 무상 교육의 연령을 14세에서 16세로 끌어 올렸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반발을 무릅쓰고 스페인에서 최초로 제한적인 낙태법을 도입하였다. 주40시간 노동제의 도입이 이뤄졌으며 유급 휴일은 30일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면서도 1990년대에는 민영 텔레비전 방송국의 개국을 허용하는 등 보수적인 정책도 추구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특히 복지정책을 늘리는 대신에 공기업의 구조조정을 시행하면서 노동유연화 조치를 취했고, 그 결과로 스페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고용안정을 희생하는 조치에도 베이비붐 세대들과 여성들의 노동활동 증가로 실업률은 곤살레스 정권기 내내 10%대를 웃돌았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직후에 경기침체가 재개되면서 실업률은 20%를 웃돌기도 했다.[3] 비록 1985년부터 1992년까지 스페인의 경제는 연 4%대의 성장률로 호조를 보였지만, 실업률은 여전히 10%를 웃돌았다. 그나마 실업급여의 인상과 적용폭 확대로 사회불안을 어느정도 억제하는데에는 성공했고, 이것이 곤살레스의 장수비결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노동당은 지속적으로 의석이 줄어들었으므로 다른 좌파 정당들과 연합해야했는데 이 점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3년 스페인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은 350석중 159석을 얻는데 그치며[4] 단독 과반을 상실했고, 이후 여러 지역주의 정당들과 연합하였는데 그 결과 필요한 법안 통과를 위해 지역주의 정당들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양새가 되었다. 경제 침체와 ETA의 테러 역시 곤살레스 총리의 지지율을 깎아먹었다. 결정적으로 1996년 스페인 총선거를 앞두고 사회노동당 소속 장관들의 부패 스캔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지지율은 급락하게 되었다.

당초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곤살레스를 대체할 총리 후보를 물색하고 있었으나, 펠리페 곤살레스 개인이 기본적으로 유능하고 인기도 좋았던데다가 당 장악력도 뛰어나서 그를 대체할 후보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하비에르 솔라나가 유력했었지만 솔라나는 NATO의 사무총장직을 맡게되면서 정치계를 떠났고, 그렇게 그가 임시로 대표직을 맡은 채 1996년 스페인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사회노동당은 예상보다는 선전했지만 결국 인민당에게 근소한 표차로 패배했고, 범 우파진영이 근소하게나마 과반을 차지함에 따라서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가 총리에 새로 선출되었고 곤살레스는 14년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년 뒤에는 사회노동당의 대표직도 호아킨 알무니아에게 물려줬다. 2004년에는 국회의원직까지 내려놓으며 정치계에서 은퇴하였다.

2.2. 정계 은퇴 이후[편집]


정계 은퇴 이후에는 여러 정치적인 발언들을 포함하여 활발한 사회 운동을 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 각종 대외 사건에서 활약하며 의외의 외교관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2014년 포데모스가 큰 인기를 얻으며 신흥 좌파 정당으로 부상하자,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사회노동당을 돕기도 하였다. 하지만 2018년에 정권을 탈한하는 과정에서 포데모스와 카탈루냐 지역주의 정당과의 연합을 두고서 갑론을박이 일자, 그는 카탈루냐 공화좌파당과의 부분적 연대를 지지한 페드로 산체스 당수를 비판하였고, 페드로 산체스도 포데모스와의 연정을 딱히 원하지 않던 만큼 2019년 총선에서 시민당과 연정을 구성했지만, 의석이 애매하게 나와버린데다가 시민당의 지지율이 망해버리자 포데모스와의 연정을 수립했다. 원래 경제정책적인 면에서 당대에도 꽤 중도화된 정책을 펼쳤던지라, 사회노동당내에서도 우파 스탠스에 위치해있다.


3. 비판[편집]


1983년에서 1987년까지 바스크 지역에서 활동한 조직 GAL과의 관계가 주요한 비판점이다. 당시 바스크는 ETA와 GAL의 갈등이 심각했는데, GAL은 ETA 조직원들을 불법적으로 납치, 살해하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GAL은 심지어 바스크의 일반 시민까지 공격한 적이 있다. GAL의 활동은 1980년대부터 큰 논란이 되었으며 이는 펠리페 곤살레스의 인기가 하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던 2020년,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가 GAL의 설립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CIA의 기밀 문서 해제를 통해 공개되며 그는 국내외적인 비판을 받게 되었다.

정작 그러면서 자신은 바스크 민족주의 정당과 테러 조직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실각의 원인을 마련하였다는 점이 스페인 정치사의 아이러니이다.


4. 여담[편집]


  • 특이하게 취미가 분재 가꾸기라고 한다. 총리 시절에는 지중해에서 나는 나무들을 몇개씩 길렀으며, 총리직을 사임한 이후 그는 이를 모두 왕립 식물원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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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 볼리비아의 대통령이었던 에보 모랄레스가 그에게 볼리비아 국적을 수여하였다.[2] 사회노동당의 실질적 당수라고 할 수 있다.[3] 스페인의 실업문제가 그나마 해결된것은 후임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때였으며, 건설경기를 부양해서 대량의 건설직 일자리를 창출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때 실업률이 낮아진 대신에 부동산 거품이 심각해졌고 결국 2008년 세계금융위기라는 직격탄을 맞으면서 스페인의 실업률은 20%, 청년실업률은 40%를 넘기에 이르고, 국가채무 비율도 금융위기 이전에 30%대였던것이 금융위기가 터진 후에 은행구제에 대량의 재정을 소모하면서 100%를 초과하는 등 파산상태에 직면했고, 그 후유증이 현재까지 이어지고있는 것이다. 사실 곤살레스 정권기때에도 집권 초반에는 부동산 가격이 급속히 상승했지만 1990년 기점으로 해서 부동산붐이 잠잠해진 상태였다. [4] 사실 원래 보수 정당인 인민당과 초접전이 예상되었으나, 선거 일주일 전의 TV 토론에서 펠리페 곤살레스가 인민당의 대표였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를 관광태우며 겨우 격차를 벌려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