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리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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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리치 사건
Incident at Petrich

기간
1925년 10월 19일 ~ 10월 29일
장소
불가리아 왕국 페트리치와 인근 그리스-불가리아 국경지대
교전국 및 교전세력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불가리아 왕국
IMRO(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그리스 공화국
지휘관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테오도로스 팡갈로스
병력

파일:불가리아 국기.svg 10,000명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20,000명

피해규모

50명 사망


125명 사망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이후



영어: Incident at Petrich (페트리치 사건) / War of the stray dog (길잃은 개의 전쟁)
그리스어: Επεισόδιο του Πετριτσίου (페트리치 사건)
불가리아어: Петрички инцидент (페트리치 사건)

1. 개요[편집]


1925년 10월 19일부터 10월 29일까지 10일 동안 불가리아와 그리스 사이의 국경지대와 페트리치에서 벌어진 그리스 제2공화국불가리아 왕국 사이의 무력 충돌 및 전쟁 위기.

2. 배경[편집]


제2차 발칸 전쟁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는 에게해 연안 마케도니아트라키아 지역을 손에 얻었다. 하지만 이 지역은 그리스인 외에도 상당수의 불가리아인튀르키예인들이 거주했고 그리스는 북부 지역에 강경한 그리스화 정책을 펼친다. 하지만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서의 패전 이후 그리스 사회에 불어온 위기감에 따라 그리스 정계는 북부에서의 그리스화 정책의 성과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안해 하였고 이는 후술할 충돌사태에서 그리스가 강경대응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불가리아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 이후 IMRO(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라는 이름의 마케도니아 민족주의 반군이 준동한다. IMRO는 불가리아의 피린 마케도니아[1]를 중심으로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와 유고슬라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지속적으로 습격하였고 내부적으로 혼란하고 군 규모 제한까지 있던 불가리아는 이를 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오히려 좌익-농민 계열 총리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가 암살당하고 보리스 3세의 근왕파 우익 정부 정권이 수립되기도 하였다. 불가리아의 IMRO 억제 실패는 불가리아의 대그리스, 대유고슬라비아 관계를 악화시켰고 후술할 사건의 확전에 영향을 끼쳤다.

3. 전개[편집]


1925년 10월 18일 밤, 그리스군 병영을 뛰쳐나간 개를 쫓던 한 병사가 실수로 국경을 넘었고, 불가리아군 측에서 그를 사살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2] 더군더나 불가리아군은 이 사태를 그리스의 침공으로 오인, 비상이 걸려 상부에서 반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불가리아군은 명령을 받아들여 벨라시타 국경선을 넘어 그리스 보초병과 일직장교를 11명을 사살한다.

불가리아 측에서는 실수였음을 주장하며 유감을 표했지만, 테오도로스 팡갈로스 장군의 군사정권이 통치하고 있었던 그리스 제2공화국불가리아 왕국에 48시간 이내에 관련자를 처벌하고 사과할 것과 유가족에게 보상금을[3]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10월 22일 페트리치를 무력 점령을 위해 군대를 보내고 그리스군과 불가리아군 간의 무력충돌로 격화된다.[4]

불가리아는 사태가 그리스와의 무력충돌로 번지자마자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국제연맹은 곧바로 중재에 나서 즉시 휴전을 명령, 사태의 격화를 그리스군의 불가리아 침공으로 판단하여 그리스에 45,000파운드를 2개월에 걸쳐 불가리아 측에 지불할 것과 그리스군의 철군 결정을 내렸고, 양 국은 이 결정을 수용하면서 이 분쟁이 끝이 났다.

4. 이후[편집]


그리스는 국제연맹의 결정을 수용하기는 하였으나 2년 전 이탈리아 왕국이 그리스의 코르푸 섬을 점령한 코르푸 사건에서와는 다른 대처에[5] 불만을 표하였고 이는 국제연맹이 강대국들과 소국들에 다른 잣대를 부여한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고[6] 국제연맹의 약화에 이바지했다.

그리스의 팡갈로스 정권은 페트리치 사건의 불과 몇달 전에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해 기반이 위태위태했는데 이 사건에서의 실패와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과의 불리한 통상조약 체결에 대한 분노로 10달 뒤 무혈 쿠데타로 붕괴한다.

불가리아 정계에서도 이 사건의 조기대응에 실패한 알렉산더르 찬코프 총리에 대한 비난이 줄을 이은데다가 설상가상 국가 부채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여 1926년 찬코프가 실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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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트리치는 피린 마케도니아 주의 주도이다.[2] 이는 페트리치 사건이 "길잃은 개의 전쟁"이라는 이명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3] 총합 2백만 프랑스 프랑[4] 당대의 신문기사들 일부는 그리스군이 페트리치를 점령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실제로는 페트리치에서의 전투 이전에 국제연맹의 명령으로 페트리치에서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5] 코르푸 사건 당시에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에 강경하게 대처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그리스에게 이탈리아가 내건 분쟁의 명분에 따라 배상금을 지불할 것을 명하였다.[6] 사실 이는 1920년의 빌뉴스 위기에서도 세워진 선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