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로 칼로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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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칼로미노의 역임 직책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카를로스 이솔라
(1919)

페드로 칼로미노
(1919~1921)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1922~1923)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1922~1923)

페드로 칼로미노
(1923)

아메리코 테소리에레
(1923~1925)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www.ole.com.ar/Calomino-tapa-revista-epoca_OLEIMA20120105_0095_26.jpg

이름
페드로 블레오 포우르놀
Pedro Bleo Fournol
출생
1892년 3월 13일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사망
1950년 1월 12일(향년 57세)
국적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아르헨티나
신체
불명
포지션
아웃사이드 포워드
소속 클럽
CA 보카 주니어스 (1911-1913)
히스파노 아르헨티노 (1914)
CA 보카 주니어스 (1915-1924)
국가대표
37경기 5골(아르헨티나 / 1912~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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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번호
-[1]


1. 개요
2. 생애
2.1. 선수 생활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4. 뒷이야기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의 前 축구선수로 바이시클 킥헛다리 짚기의 창시자다.[1]


2. 생애[편집]



2.1. 선수 생활[편집]


그의 부모는 프랑스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본명을 쓰는 다른 선수와 달리 그는 칼로미노라는 별명을 사용했다. 칼로미노는 집에서 불리던 별명으로 북쪽 성당 내 아마추어 팀에서 뛸 때 가족들이 칭찬의 의미로 붙였다한다.

칼로미노는 1911년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데뷔했고 아르헨티노에서 2차례 잠시 외유한 것[2]을 빼면 모든 선수 생활을 보카에서 보냈다. 보카에서 총 228게임을 뛰었으며 여러 가지 우승컵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국가대표팀에서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여러 차례 출전하였고 한 차례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편집]


페드로 칼로미노는 아르헨티나의 초기 축구계에서 가장 뛰어난 윙어로 평가된다.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지션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거친 수비에 대한 대비책으로 정지하는 페이크를 무기로 삼았다. 그의 별명은 미치광이였는데 관중들의 환호를 이끌어내면서 상대 수비수에게 굴욕을 안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시대는 다르지만 레오니다스 다시우바, 페트로닐류 지브리투와 같은 선수들과 함께 바이시클 킥 그리고 알까기헛다리 짚기의 선구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는 정확한 드리블과 빠른 가속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4. 뒷이야기[편집]


  • 그는 필드에서 흉포한 면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한다.
  • 이탈리아 출신 서포터들과 특히 친했다 한다.


5. 수상[편집]



5.1. 클럽[편집]




5.2. 국가대표[편집]



[1] 바이시클 킥의 시작에는 여러 설이 있지만 정확한 유래는 사실 불분명하다.[2] 1914년에 1년간 아르헨티노에서 보냈을 때 새 경영자 후안 브리체토가 오자마자 한 일은 칼로미노를 다시 보카로 부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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