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 벅

덤프버전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문학상 수상자

20세기 [ 펼치기 · 접기 ]
1901년
1902년
1903년
1904년
1905년
쉴리 프뤼돔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테오도르 몸젠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호세 에체가라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Military_ensign_of_Vistula_Flotilla_of_Congress_Poland.svg.png
1906년
1907년
1908년
1909년
1910년
조수에 카르두치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러디어드 키플링
파일:영국 국기.svg
루돌프 오이켄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셀마 라겔뢰프
파일:스웨덴 국기.svg
파울 폰 하이제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1911년
1912년
1913년
1914년
1915년
모리스 마테를링크
파일:벨기에 국기.svg
게르하르트 하웁트만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파일:인도 제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로맹 롤랑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1916년
1917년
1918년
1919년
1920년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파일:스웨덴 국기.svg
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파일:덴마크 국기.svg
수상자 없음
카를 슈피텔러
파일:스위스 국기.svg
크누트 함순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1921년
1922년
1923년
1924년
1925년
아나톨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하신토 베나벤테
파일:스페인 국기(1785–1873, 1875–1931).svg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파일:폴란드 국기(1919-1927).svg
조지 버나드 쇼
파일:영국 국기.svg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26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
그라치아 델레다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앙리 베르그송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시그리드 운세트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토마스 만
파일:독일 국기(3:2 비율).svg
싱클레어 루이스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1931년
1932년
1933년
1934년
1935년
에릭 악셀 카를펠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존 골즈워디
파일:영국 국기.svg
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36년
1937년
1938년
1939년
1940년
유진 오닐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펄 벅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프란스 에밀 실란패
파일:핀란드 국기.svg
수상자 없음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1945년
수상자 없음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파일:덴마크 국기.svg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파일:칠레 국기.svg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1950년
헤르만 헤세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위스 국기.svg
앙드레 지드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파일:영국 국기.svg
윌리엄 포크너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버트런드 러셀
파일:영국 국기.svg
1951년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파일:스웨덴 국기.svg
프랑수아 모리아크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윈스턴 처칠
파일:영국 국기.svg
어니스트 헤밍웨이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할도르 락스네스
파일:아이슬란드 국기.svg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후안 라몬 히메네스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알베르 카뮈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파일:소련 국기.svg
살바토레 콰시모토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생존 페르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1961년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이보 안드리치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존 스타인벡
파일:미국 국기.svg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파일:그리스 국기(1822-1978).svg
장폴 사르트르
파일:프랑스 국기.svg
(수상 거부)
미하일 숄로호프
파일:소련 국기.svg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파일:독일 국기.svg 파일:스웨덴 국기.svg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가와바타 야스나리
파일:일본 국기.svg
사뮈엘 베케트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일:소련 국기.svg
1971년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파블로 네루다
파일:칠레 국기.svg
하인리히 뵐
파일:독일 국기.svg
패트릭 화이트
파일:호주 국기.svg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파일:스웨덴 국기.svg
에우제니오 몬탈레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76년
1977년
1978년
1979년
1980년
솔 벨로
파일:미국 국기.svg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파일:그리스 국기.svg
체스와프 미워시
파일:폴란드 국기(1928–1980).svg 파일:미국 국기.svg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엘리아스 카네티
파일: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국기(1971–1990).svg 파일:영국 국기.svg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윌리엄 골딩
파일:영국 국기.svg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파일:체코 국기.svg
클로드 시몽
파일:프랑스 국기.svg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월레 소잉카
파일:나이지리아 국기.svg
조지프 브로드스키
파일:미국 국기.svg
나기브 마푸즈
파일:이집트 국기.svg
카밀로 호세 셀라
파일:스페인 국기.svg
옥타비오 파스
파일:멕시코 국기.svg
1991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나딘 고디머
파일:남아프리카 연방 국기.svg
데릭 월컷
파일:세인트루시아 국기(1979–2002).svg.png
토니 모리슨
파일:미국 국기.svg
오에 겐자부로
파일:일본 국기.svg
셰이머스 히니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1996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파일:폴란드 국기.svg
다리오 포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주제 사라마구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귄터 그라스
파일:독일 국기.svg
가오싱젠
파일:프랑스 국기.svg




펄 벅
Pearl Buck


파일:9ff18d29a79315e3b7b99ede3464a84f.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193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본명
펄 사이든스트리커 벅
Pearl Sydenstricker Buck
중국명
싸이전주[1]
賽珍珠
한글명
박진주[2]
朴眞珠
출생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힐스보로
사망
1973년 3월 6일 (향년 80세)
미국 버몬트주 댄비
국적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직업
소설가, 교사
학력
코넬 대학교
랜돌프 칼리지
수상
퓰리처상 (1932)
노벨문학상 (1938)
배우자
존 로싱 벅 (1917년 ~ 1935년, 이혼)
리처드 존 월시 (1935년 ~ 1960년, 사별)
종교
개신교 (남장로회)
서명
파일:Pearl_S_Buck_signature.svg

1. 개요
2. 생애
3. 한국 관련
4. 중국 관련



1. 개요[편집]


미국의 소설가. 장편 첫 작품 《동풍·서풍》을 비롯해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왕룽을 중심으로 그 처와 아들들 일가의 역사를 그린 장편 《대지》 등이 대표 작품이다. 또 미국의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2. 생애[편집]


미국에서 태어나고 생후 3개월 만에 미국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서 자랐다. 선교 활동에만 열중하고 가정에는 무신경한[3][4] 아버지 때문에 외로운 유년시절을 지냈지만,[5] 오랜 중국 생활은 벅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중국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였다. 청 말기에는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 역할을 하는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에 대한 반감이 팽배해 있어서 물리적 테러도 빈번했는데, 펄 벅은 폭동이 일어나서 목숨이 위협받게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이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며 동양인이 아닌 백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자각했다고 한다.[6] 그 전에는 명백한 구분 없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했다는 뜻이 된다.

그녀의 부모님은 미국인이었지만, 중국인 유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영어, 중국어를 함께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중국의 고전문학 삼국지, 수호전 등을 원서로 읽으며 자라났으며, 훗날 미국에서 이 소설들이 출판될 때 번역을 맡기도 했다. 1910년 대학교를 다니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때 펄 벅의 미국 대학 생활은 처음으로 미국에서 살아보게 된 경험이었다고 한다. 미국에 있을 때도 지나치게 중국화된 성격과 사고방식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1917년 농업경제학자 존 로싱 벅과 결혼하면서 벅이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고 난징 대학, 난둥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26년 일시 귀국해 코넬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고 이혼 후 출판사 사장과 재혼하게 된다. 1932년 뉴욕에서 했던 강의에서 "중국에는 선교사가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다른 비(非)기독교 국가에서 선교할 때 오만함을 버리길 바랍니다"라고 발언한 것이 문제가 되어 장로파 전도 위원에게 비난받아 선교사 직위를 사임했다.[7] 펄 벅은 미국내 아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을 지적하며 그들의 인권에 대해 외쳤고 마찬가지로 그 당시 차별이 심하던 흑인 인권에도 관심을 보여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심각한 지적 장애를 가진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이 딸은 벅 인생의 가장 큰 아픔이 되었다.[8] 이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입양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으로 한국과 중국에서 미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의 입양을 주선하는 펄 벅 재단을 1964년에 설립하게 된다. 이 단체는 한국전쟁 이후 혼혈아들의 미국 입양을 알선해 주는 대표적인 단체로 자리잡는다.

수십여 년을 중국에서 살아온 만큼 중국에 대한 애정이 깊어 동아시아의 실정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다. 그 당시 동아시아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대체로 대지 이후의 작품들은 펄 벅 본인의 생생한 체험에서 우러나지 않고 취재한 정보를 토대로 집필된 것이 많은데다, 다작 성향이 너무 지나쳐서 대지만큼의 엄청난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인 <살아있는 갈대>[9] 같은 경우 한국이(당대의 서양인들이 흔히 생각하던 '미개한 동양'의 이미지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고도화된 정치적 체계를 갖춘 사회였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대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다. 오히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한국인 등장 인물들은 '긍정적인 면모가 과장되는 방향으로' 왜곡되어 있다. 왜냐하면, 펄 벅이 <살아있는 갈대>를 쓴 목적은 '당대 한국의 현실과 정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은 역사적으로 고도화된 문명적 사회 구조를 갖춘 나라로서 스스로 국가를 운영하고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미국인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 이 작품은 1963년에 출판된 작품이고, 그 한해 전인 62년에는 펄벅과 존 F. 케네디의 유명한 대화, 즉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는 것은 너무 큰 비용이 든다. 과거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하고 우리(미국)는 빠져 나와야 할 것 같다고 말하는 케네디에게 펄 벅이 "그건 우리(미국)에게 다시 영국 지배 하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받아치는 사건이 있었다. 이런 시대적 맥락을 통해 보면 <살아있는 갈대>가 씌여진 동기를 아주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케네디로 대표되는 보통의 미국인 대부분은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현실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하기에 "어차피 다 비슷한 동넨데 그냥 옆 나라에 맡기면 친하게 지내지 않겠어?" 정도로 안이하게 판단하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설명하기 위해 <수백년 이상의 전통 위에서 성립된 반일 독립운동 성향의 사회적 엘리트>를 이상화하여 제시함으로써 "이런 인물들도 있는데, 이들이 일본 밑으로 들어가려 하겠느냐"고 반박한 것이다.

상세한 고증 측면에 있어서도, <살아있는 갈대>의 가장 큰 고증 오류로 꼽히는 것이 동인서인 개념을 양반의 동반/서반과 등치시킨 것이다. 취재된 정보를 통해 쓴 것 치고도 그 정보가 별로 상세하고 정확하지 못 했던 것. 하지만 이 역시 책이 쓰여진 목적에 비추어보면 그리 큰 흠결이 아니다. 펄 벅에게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 ~ 일제 강점기의 한국 정치사를 정확하게 고증하여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는 수백 년에 걸쳐 고도화된 정치 구조를 건설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 따라서 "동반은 문반이고 서반은 무반이지만 동인 서인은 이와 별개로 김효원의 추종자와 심의겸의 추종자들로부터 나눠진 당파인데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굳이 줄줄이 설명할 필요가 없고, 그냥 문인 귀족과 무인 귀족의 당파가 나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고도화된 정치 구조, 특히 이러한 역할 분담이 일어날 정도의 체계적인 행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했던 것.

결국 대지 이후 다작 시대의 펄 벅 작품은 작품성 자체보다는 반 제국주의/식민주의, 여권 신장, 아동 보호, 인종 차별 반대와 같은 작가의 정치적 의도를 전달하는 것을 더 중시하고, 또한 각종 복지 사업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많이 쓰는 것을 우선시했던 것.(펄 벅은 당대 미국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하나였다.) 결국 이 시기의 작품들은 펄 벅이라는 위인의 업적과 위대함의 증거는 될 수 있어도 문학적으로는 그리 높게 평가받기 힘들다. 다만 펄 벅 자신이 당시 미국의 작가나 저술가 중에서는 중국 및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도 자체가 가장 높은 인물이었기에 부족한 정보를 토대로 쓰여진 작품이라도 당대 기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정확도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

또한, 대지(소설) 문서에서 다뤄진 문제와 비교해 보는 것도 가능하다. 활동 당시 펄 벅을 둘러싼 논란 중에는 동아시아인(한국인/중국인) 작가나 지식인들의 방어적 태도로부터 기인한 문제도 많았다. 동양인 작가나 지식인의 관점에서는 외부인(서양인)인 펄 벅이 동양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것을 '서구 우월주의자들의 비하'와 다르지 않다고 보아 격분한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 그리고 펄 벅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애매한 명분론에 기대어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야말로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왜곡과 다를 것이 없다"고 반론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서양인 독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펄 벅 자신도 방어적인 태도, 즉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서구 독자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양 사회의 나쁜 점은 드러내지 않고 좋은 점만 강조하려는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이 역시 펄 벅이 가지고 있던 중간자로서의 입장을 보여주는 예시의 하나.

이런 면에서 펄 벅의 문학을 정치적이고 사회 변혁적인 성격과 함께 문학적, 휴머니즘적인 성격을 내포하는참여문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한국 관련[편집]


한국은 고상한 국민들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다.

펄 벅의 소설 《The Living Reed》 서문 中


한국에도 여러 번 와서 정·재계 관계자 및 문학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서울대학교 장왕록 교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어 대지 3부작의 초기 번역을 장교수가 맡았다. 장왕록 교수의 딸인 장영희 서강대 교수가 번역한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원제: The Living Reed)는 한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책의 초판본 표지에는 '아리랑' 가사가 쓰여있고, 서문에 한국을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언급하는 등 한국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영미 언론에서 대지 이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대장 노릇을 하던 시절에 쓴 《일본 내막기》의 서평과 추천서를 남겼으며,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1968년)를 집필하기도 했다. 또한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와의 교분도 있었는데, 후일 그녀의 작품에 '김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고, 스스로 박진주(펄을 번역한 이름)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 쓰기도 하는 등 여러 점을 미루어 볼 때 한국에 대한 애착이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도 활발히 복지 사업을 벌였다. 부천에 있던 유한양행 소사 공장이 이사를 가자 유일한의 도움으로 그 부지를 매입, 1964년 한국펄벅재단 소사희망원을 설립했다. 그리고 1975년 문을 닫을 때까지 9년간 8번이나 소사희망원을 방문해 아이들을 직접 씻기고 돌봤다. 소사희망원이 문을 닫은 후에는 부지가 일반에 매각되고 주거지가 되었지만, 2006년 부천문화재단이 부지 일부를 매입하여 소사희망원 건물 한 동을 복원, 펄벅기념관을 세웠다.

일설에 의하면, 1962년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이 펄 벅한테 “내 생각에는 동맹 관계라고 미군이 너무 퍼주는데, 그만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우리는 빠져 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맡도록 해야 할 것 같소."라고 말하자,[10] 그녀는 "그들은 서로 같은 인종 같아 보일지 몰라도 서로 불공정했던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서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힘 있던 쪽에 다시 통제권을 주겠다는 소리는, 마치 우리 미국이 예전처럼 영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소리와 같습니다."라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이에 케네디도 농담이었다며 물러섰다고.

그녀가 세운 펄벅 재단의 고아원의 아이들이 후에 함중아와 양키스를 구성하면서 한국 음악사에 큰 획을 남기기도 했다.[11]


펄벅 재단이 당시 국내 어린 혼혈고아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고 영향을 미쳤는지는 당시 미군 혼혈고아들의 삶을 다룬 KBS 다큐 <25시 아메리안들>를 참고하면 좋다.

4. 중국 관련[편집]


펄 벅은 중국을 떠나온 뒤 중국에 꼭 다시 가고 싶어했으나, 마오쩌둥 정권 하의 공산주의 중국에서 펄벅은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중국을 왜곡한 작가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입국이 불허되었고, 죽기 몇년 전 리처드 닉슨의 중국 방문 때도 동행이 거절되었다. 미완성 유작도 대지 4부인 붉은 대지로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을 그리며 쓰다가 끝내지 못하고 1973년 3월, 80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설의 묘사를 들여다 보면 펄 벅은 특별한 사상적 주장 없이, 그저 중국 하층민들의 생활을 핍진할 정도의 현실적인 묘사로 (거기다 다분히 동정과 애정을 가진 필체로) 그려 나갔을 뿐이다. 근데 정작 펄 벅을 비난한 루쉰은 작중에서 같은 중국인들을 미개하고 타락한 사람들로 그리며 각성을 촉구하고 있고, 그 중국인을 피해망상에 찌든 미치광이나 정신병자(아Q는 약과다)로 묘사하며 아주 가차없이 비난했는데도, 마오쩌둥을 비롯한 정치인이나 중국의 지식인이나 문학가들은 그를 다른 부분에 대해서 비판했으면 했지 중국인에 대해서 폄하했다며 까진 않았다. 이는 당시 자격지심에 시달리던 상당수 동양인들이 "까도 우리가 까!"라는 식으로 다른 인종이 동양인을 조금이라도 안 좋게 묘사하는걸 못 견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12]

벅에 대한 이런 평가를 정착시킨 인물 중 하나가 루쉰인데, 사실 이건 펄 벅의 작품을 죄다 중역판으로 읽어서 생긴 오해라는 의견도 있다. 다만 북미의 중국인 작가 중에서도 의외로 벅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는 중국에서도 객관적인 평가를 받아 인식이 많이 바뀌었고 펄 벅의 작품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진 지 오래다. 중국 매체가 선정하는 세계 명작 추천서나 반드시 읽어야 하는 영미 문학 중에 펄벅의 대지는 항상 목록에 오른다. 청 말기 - 군벌 난립 - 혁명기를 다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대지 3부작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지(소설) 항목이나 루쉰 항목에도 구구절절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사실 이 문제는 펄 벅 자신이 가진 복잡한 정체성과도 연관된 문제이다. 자서전에서도 밝힌 것처럼 젊은 시절의 펄 벅은 중국인에 속할 수도, 미국인에 속할 수도 없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고민했고, 펄 벅 자신이 작가로서 불후의 명성을 쌓아감에 따라 이는 단순히 개인의 정체성 문제를 넘어 펄 벅이라는 역사적 위인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관한 문제가 된 것. 말하자면 서구 문화권(유럽+미주)에서 펄 벅은 동양의 사회와 문화, 문명을 소개하는 대변인이었지만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펄 벅 역시 백인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으며 펄 벅 자신도 청소년기의 반 백인 테러에서 인식한 것처럼 중국에서 성장했지만 중국인이 될 수는 없던 자신을 인식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실제로 펄 벅의 자서전을 보면 동양에 대한 비하적 편견에 사로잡힌 서양인들을 사정없이 비판하면서도 동양(특히 자신이 성장한 중국)에서 뭔가 참혹하고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이 미개한 동양놈들!' 이라고 화를 냈다가 잠시 후 왜 그런 차별적인 생각을 했는지 크게 후회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13]

펄 벅은 이런 소신 때문에 기나긴 기간 동안 고통을 겪었다. 국민당 정권이 패배하자 공산주의의 손에 중국을 버려둔 기독교 선교사들, 기독교 문명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난했고, 이 결과 엉뚱하게도 미국 공산주의자들은 펄 벅을 공산주의에 끌어들이려 하는가 하면 FBI는 그녀를 비애국적 빨갱이로 간주하며 탄압했다.[14] 그러나 닉슨 정권에서 중국과의 해빙 무드가 조성되자 펄 벅의 혜안이 조명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도 펄 벅의 평가는 급상승했다. 펄 벅은 '펄'에서 딴 채진주(사이쩐추)라는 중국 이름을 가졌고, 생가는 보존되어 기념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묘비에도 중국 이름이 새겨졌을 정도.[15] 현재 펄 벅의 소설은 미국에서 중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동정적 여론을 조성해 대전기, 전간기의 대중국 정책에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동양적 가치를 서양적 가치와 별개의 것으로 분리해 보면서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던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깨는 동시에 중국적, 기독교적 페미니즘 문학에 크게 공헌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23 20:19:58에 나무위키 펄 벅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중국어에 능통했던 본인이 사용했던 중국 이름이다. 싸이는 자신의 친정 성의 발음의 음역에서 한 글자를 딴 것이고 진주는 본명을 그대로 번역한 것.[2] 그녀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스스로 지어서 사용한 이름으로, 진주는 Pearl의 뜻에서, 박(朴)은 벅(Buck)에서 따온 것이다.[3] 심지어 펄 벅의 아버지는 벅을 대학에 보내는 것보다는 그 돈을 자신의 선교 사업에 사용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딸의 미래에 대해 무관심했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한 펄 벅에게 있어서 미국에서의 대학 교육은 곧 미국인으로서의 사회화의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펄의 아버지인 압솔름은 딸이 '중국인 사회에도, 미국인 사회에도 속하지 못한 일종의 국제적 미아' 가 되더라도 아무렇지 않다고 여길 정도로 딸과 가정에 무관심했다.[4] 다만 기독교는 가정을 중요시한다. 심지어 가정을 버린 자는 배교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할 정도로 가정을 소중히 하는 종교다.[5] 심지어 펄 벅의 아버지는 딸의 작품마저 무시했다. 그녀가 노벨문학상을 타게 한 '대지'도 죽을 때까지 한 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벅은 선교사들 사이에서 소외당해 쫓겨난 아버지를 위해 대학에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도 했다.[6] 반서양인 폭동에 휘말릴 뻔한 일도 있다. 가뭄이 서양인들 탓이라고 생각한 동네 사람들이 펄 벅 일가를 습격하기로 했는데, 한 이웃에게 귀띔을 받은 펄 벅의 어머니(아버지는 다른 지역에 가 있었다)는 도망치거나 공포에 떠는 대신, 온 집안에 불을 켜고 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차와 케이크를 준비해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차리고 폭도들을 맞이했다. 그래서 이미 펄 벅 일가를 알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었던 폭도들은 웃으면서 환대하는 펄 벅의 어머니와 평소처럼 무릎에 올라앉는 아이들을 보고 어물거리다가 차 대접만 받고 물러갔다고 한다.[7] 다만 실제 당시 일부 선교사들이 꽤 오만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다. 구한말 윤치호의 일기에도 선교사들에 대한 실망과 불평이 등장한다. 한 예로, 레르 목사가 중국인 신도들에게 설교를 하는데 '일본이 중국을 이겨서 대만을 얻었다'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해 화를 돋구기도 했다고.[8] 그 당시엔 지적 장애나 정신병이 매우 혐오스런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는 치부여서 벅은 딸의 존재를 감추어야 했는데, 노벨상 수상 때도 기자들에게 이 문제로 시달렸다고 한다. 이 경험을 벅은 <자라지 않는 아이>라는 책으로 풀어냈다. '대지'에서도 왕룽의 딸 중 하나가 지적 장애를 가진 백치로 나오는 것도 이 영향인 듯.[9] 소설의 주인공인 김일한은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박사이다.[10] 케네디의 재임기에 한국은 4.19 혁명, 5.16 군사정변을 비롯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인 빈곤, 저개발 상태에 허덕였으며, 케네디는 그러한 한국의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11] 단, 함중아는 고아가 아니었다. 둘째 형이 살던 파주시로 올라가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하던 중 펄 벅재단 소속의 고아원에 배달갔다가 그 자리에서 얼떨결에 입소하게 된 것이다.[12] 굳이 동양인이 아니더라도, 미국만 봐도 흑인이 흑인 보고 니그로라며 비하어를 쓰는 건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만, 백인이 흑인 보고 니그로라고 하면 바로 주먹 날아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펄벅은 비하어를 쓴 것도 아니고 하층민 묘사했다고 이러니 좀 억울할 법도 하겠지만. 거기에 그 시기 이소룡이 중국인 카뮤니티에서 소외된 것이 백인과 흑인한테 중국무술을 가르쳤다는 것이다.[13] 여담으로 상기한 유일한 회장과의 인연은 배우자인 호미리 선생과의 친분도 의미한다. 중국계 미국인과 미국계 중국인이 될 뻔한 미국인의 교류가 그러한 경계인을 체험한 그들만의 고민을 서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14] 정작 펄 벅 본인은 공산주의를 중국과 그 전통 가치를 오염시키는 외국 사상으로 보아 비난했다.[15] 중국의 경우 펄 벅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바이두 백과나 위키백과의 항목 이름도 전부 중국 이름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