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튼 대전차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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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 대전차군단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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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튼 대전차군단 (1970)
Patton


파일:e755b9325bed138dc84e9b3d9fddbc31.jpg

장르
드라마, 전쟁
감독
프랭클린 J. 샤프너
원작
라디슬라스 파라고 - 전기 《Patton: Ordeal and Triumph》
오마 브래들리 - 전기 《A Soldier's Story》
각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에드먼드 H.노스
제작
프랭크 카퍼
프랭크 맥카시
출연
조지 C. 스콧
칼 말든
스테픈 영 외
촬영
프레드 J.코넥캠프
러스 메이어
음악
제리 골드스미스
편집
휴 S.파울러
개봉
파일:미국 국기.svg 1970년 2월 4일
파일:캐나다 국기.svg 1970년 4월 2일
파일:영국 국기.svg 1970년 5월 2일
상영 시간
172분
상영등급
파일:영등위_15세이상_2021.svg 15세 이상 관람가
1. 개요
2. 험난했던 제작 과정
3. 여담


1. 개요[편집]


"조국을 위해 죽겠다고 말하지 마라. 그런 자는 조국을 위해 죽겠다는 다른 등신새끼가 있어야지만 성공한다."


"길에서 여자를 트럭에 태우려고 하는 세 남자 앞에 나서서 총을 겨누고, 여자를 내버려 두라고 그랬댑니다. 여자는 그 중 한 남자의 약혼녀였고, 둘은 승차를 도와준 것 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던거죠. 둘시네아의 정절을 지킨 돈키호테입니다. 그는 현대에 태어난 중세 시대 기사입니다." - 독일군 정보장교 슈타이거 소령이 상관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에게 패튼에 대해 보고하며.


"이제부터 누구든 각반, 철모, 타이가 없거나, 군화가 광나지 않고 복장을 단속하지 않는 놈이 보이면, 가죽을 벗겨버리겠다."- 아프리카 전선에 부임해 개판 5분전의 부대상황을 점검하고 나서.


병사: "장군님! 어디 가십니까?"

패튼: "베를린! 내가 가서 사방에 얼굴이 도배된 새끼를 직접 쏴죽일 거다!"




빠삐용, 혹성 탈출 등의 영화로 알려진 프랭클린 J. 샤프너(1920~1989)가 감독한 1970년 영화. 조지 S. 패튼에 대하여 가장 잘 그려낸 영화로 평가 받는다. 조지 C. 스콧, 칼 말든 주연. 원작은 라디슬라스 파라고(Ladislas Farago)가 쓴 패튼의 전기인 《패튼: 시련과 승리(Patton: Ordeal and Triumph)》와, 오마 브래들리 원수가 쓴 회고록 《한 병사의 이야기(A Soldier's Story)》. 각본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음악은 제리 골드스미스.

원제는 간단히 Patton이지만 한국에선 일본 개봉명인 パットン大戦車軍団을 그대로 베끼다 보니 패튼 대전차군단이 되어 버렸다.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업자들이 서양 영화를 들여올 때 타성적으로 일본 타이틀을 베껴쓰는 사례가 빈번했다.


2. 험난했던 제작 과정[편집]


그동안 조지 S. 패튼의 삶이 여러 번 영화화될 뻔 했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구타 사건 등으로 이런 저런 물의를 일으켰고 전쟁에 미친 사람으로 그려지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이 한 이유. 아내 비트리스 배닝 에이어 패튼 (Beatrice Banning Ayer,1886~1953)은 적어도 가정에서 엄격하면서도 상냥한 남편을 전쟁 미치광이로 나오는 걸 보기 싫다고 결사거부했다. 그래도, 이전부터 꾸준히 영화로 만들고자 준비했는데 우선, 20세기 폭스는 1951년 오마 브래들리가 쓴 자서전 <A Soldier 's Story> 영화 판권을 일단 사두었다. 베아트리스가 죽고 나서도 군인과 결혼한 딸 루스나 아들이자 현역 미군장교이던 패튼 4세(1923~2004, 6.25 전쟁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여 중장까지 올랐다) 역시 영화화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폭스 측은 계속 준비했고 패튼에 대하여 매우 정확하게 썼다고 평가받던 헝가리 출신 역사가인 라디슬라스 파라고(1906~1980)가 쓴< Patton : Ordeal and Triumph>도 1963년에 영화 판권을 사둬서, 이 책과 브래들리가 쓴 책을 바탕으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각본을 썼으며 공동 각본을 쓴 에드먼드 할 노스(Edmund H. North,1911~1990)는 나중에 참여했다.

결국 아내 베아트리스가 죽고 나서 15년이 지난 1968년에서야 드디어 후손들에게 여러 조건 하에 영화 제작을 허락받았다. 막상 영화로 만들어지자 오마 브래들리 미 육군 원수도 비록 내 자서전에서 썼듯이 그에게 당신은 너무 전쟁을 즐긴다라고 생전 그에게 비난하던 말을 했으나, 영화가 선배인 패튼을 너무 미치광이로 그려내지 않길 바란다는 말도 했다.

제작진은 1969년 2월부터 스페인모로코를 오고가면서 영화 촬영을 시작하며 영화 판권을 사두고 거의 20년만에 영화가 만들어지게 된 셈이다. 흥행 성공과 같이 197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개 부문에 후보에 올라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주연상, 최우수 감독상, 최우수 각본상,최우수 편집상,최우수 시각효과상, 모두 6개 부문을 석권했다. 우습게도 예전 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는 92년쯤에 지옥의 묵시록 감독인 코폴라가 이런 지옥의 묵시록과 정반대 같은 각본을 쓰다니 믿기지 않는다고 평한 바 있는데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패튼을 찬양하지 않고 전쟁을 멋지다고 찬양하지도 않는다(...). 1260만 달러로 만들어져 미국에서 6,18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흥행도 성공했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시절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PTSD 개념이 없던 시절, 쇼크에 시달리는 병사에게 욕설을 퍼붓고 끌어내라고 했던 일화를 각색.[1]


아르덴 대공세 때 악천후로 인해 진격 속도가 느려지자 군목을 불러 '보급을 받아 독일군을 죽일 수 있게 날씨가 개도록 기도해달라' 부탁을 하기도 한다.[2]


3. 여담[편집]


영화상에선 패튼의 모습은 전쟁광으로 실제 패튼과 매우 똑같다. 역시 명연기답게... 영화상에서 유럽 전선에 금방 파병되어 지칠대로 지친 아군에게 쉴 시간을 줄 것을 요구하던 대대장 대신 대대참모인 소령에게 지휘권을 주면서 닥치고 돌격하라는 명령[3]을 내린 후 차를 타고 떠날 때, 소령이 멀어져가는 패튼을 가리키며 "대대장님, 저 개새끼가 뒈져버리길 바라는 병사가 5만 명은 됩니다."라고 욕을 퍼붓자, 대대장이 아무 말없이 무언의 공감을 한다든지, 이 전투 이후 미군이 이겼지만 미군 사상자도 장난이 아니었기에 붕대와 피투성이로 미군 부상병들이 곁을 지나면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가거나, 멀어져가는 그를 보고 미군 사병들이 "저기 보라구! 피와 배짱의 미친 장군이 나간다!", "그래, 우리의 피와 놈의 배짱."[4] 이런 대사들 보면 그가 전쟁터에서 부하들에게 어떤 소리 들었는지 알만하다. 극중 이탈리아에서 한 농부가 당나귀들을 끌고가다 다리 위에서 당나귀들이 말을 듣지 않아 미군 진군이 늦춰지자 직접 가서 그 당나귀들을 전부 쏴죽이고 치워버린 일도 역시 재현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패튼이 실제로 일으킨 실화다.

전사자가 가득한 전쟁터에 가서는 "하느님, 용서하십시오. 저는 이게 피와 살이 튀는 전쟁이 너무 좋습니다."

여기에서 오마 브래들리"선배님과 제가 다른 게 뭔지 아십니까? 전 훈련을 받아서 이 일을 하죠. 하지만 선배님은 전쟁이 즐거워서 전쟁을 하십니다."라고 일침을 놓는데, 패튼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다.

그의 유족들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패튼의 손자이자 영화각본가, 소설가인 벤자민 패튼(1965 ~ )은 "이 영화를 통해서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다."고 하고, 외손자는 "내가 어릴 적 뵈었던 외조부의 모습과 똑같다."고 말했다. 연기력의 승리.


카세린 전투에서 롬멜의 전차부대를 격파하고 "에르빈 롬멜, 이 등신같은 자식, 네 책을 읽었단 말이다!"라고 외친다.[5]

전차로는 그 당시의 전차를 거의 쓰지 않고 M47 패튼, M48 패튼이 미국, 독일 양측에서 등장한다. 패튼 영화에는 패튼 전차지 드물게 M24 채피,[6] M41 워커 불독, M44 SPH가 나오며, M7 프리스트 자리는 M37 HMC로 대체해 작중 나오는 자주포는 보통 M37이다. 이 장비들은 촬영지이기도 한 스페인의 육군 장비들을 대여해서 촬영했다.

배우 조지 C. 스콧베니토 무솔리니를 다룬 드라마 3부작 <Mussolini: The Untold Story> (한국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1992년 2월 2일부터 5일까지 4부작으로 나누어서 KBS2에서 오전 12시(2일에만 오후 1시)에 더빙 방영)에서 무솔리니 역을 맡기도 했다. 연기를 너무 잘 해서 마치 그가 이런 독불장군 전쟁광들을 흠모하는 사람처럼 오해받는 경우도 있는데, 스콧은 그냥 훌륭한 배우였을 뿐 절대 이런 인물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는 아카데미 위원회에 자신에게 패튼 역으로 아카데미상을 시상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했는데, 그럼에도 아카데미가 남우주연상을 그에게 안기려고 하자 시상식에 나타나지도 않아 프로듀서가 대리로 수상했다. 평소에도 "모든 연기는 그 자체로서 독특하며, 이를 서로 비교하고 경쟁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배우는 오직 자기 자신과만 경쟁해야 한다" 등의 말을 하며 아카데미상 자체를 부정하던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도 극장 개봉하고 1975년 7월 26일, 8월 2일에 1, 2부로 나누어서 주말의 명화에서 더빙 방영했다. 1982년에 KBS1에서 한국어로 더빙되어 방영한 바 있다. 이 때 패튼의 성우는 김병관. VHS도 대우 폭스비디오 클럽을 통해 1992년에 출시. 이후 1995년 6.25 특집으로 6월 24일 오후 12시 40분에 MBC에서 더빙 방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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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패튼은 이 일 때문에 강제 퇴역당할 뻔했다. 게다가 그 뒤에 또 한번 병사를 구타하는 사고를 쳤는데, 이번에는 참호족 환자였다. 이건 더 여파가 컸는데 앞의 PTSD와는 달리 참호족은 1차 세계대전의 경험으로 인해 이미 널리 알려진 질병이어서 패튼이 뭐라 변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패튼은 한동안 한직으로 쫒겨나야 했다. 당시 구타당한 병사 본인도 패튼에게 "전 물이 고인 참호에 일주일 넘게 처박혀 있었습니다."라고 또박또박 대답했고, 패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병사에게 사과해야 했다.[2] 그리고 다음날 정말로 날씨가 맑아졌다. 이 일화는 마찬가지로 실화다.[3] 사실 나치 독일군도 설마? 그렇게 지쳤는데 금방 공격할까?라고 생각했고 패튼의 닥치고 공격 명령으로 미군이 이겼지만 미군은 그만큼 사상자가 많았다.[4] 영어에서 배짱(gut)있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내장이라는 뜻이다. 즉 피와 사람 내장으로 범벅이 됐다는 뜻도 된다.[5] 정작 롬멜은 저 장면에서 병 때문에 본국으로 소환되어 자리에 없었다(...)[6] 유일하게 작 중 시간대와 동일한 전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