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첸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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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첸 라마
པན་ཆེན་བླ་མ

현직
게둔 최키 니마 / 제11대[1]
즉위일
1995년 5월 14일
종교
티베트 불교
관저
타쉬룬포 사원

1. 소개
2. 역사
3. 박지원과의 만남



1. 소개[편집]


달라이 라마와 함께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2] 티베트 자치구 르카쩌시(市)에 위치한 타쉬룬포 사원의 수장이자 티베트 불교 서열 2위다.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세속적인 권력이 없음에도 판첸 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달라이 라마의 환생자를 찾는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판첸'이라는 말은 대학자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단어인 '판디타(paṇḍita)'에서 왔는데 이는 판첸 라마가 어릴 때 달라이 라마의 교육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2. 역사[편집]


5대 달라이 라마가 서열 2위로 인정하면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정치 등 세속적인 권력이 있는 달라이 라마와는 달리 세속적인 권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사실 본래는 판첸 라마도 독자적인 자치권역 내에서 제한적으로나마 세속적인 권력을 가졌으나 달라이 라마 13세판첸 라마 9세로부터 독자적인 자치권역을 몰수하고 앞으로 판첸 라마는 종교 지도자로서만 활동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바람에 결국 이후의 판첸 라마(어용 판첸 라마인 기알첸 노르부도 포함)는 모두 세속적인 권력이 없는 작위가 되었다.

판첸 라마 10세는 달라이 라마와 같이 인도로 망명하는 걸 거부하고 중국에 협조하는 노선을 취했다. 판첸 라마는 중국 정부에 티베트에 행해지는 개혁이 너무 극좌적이라고 수정을 요구했지만 마오쩌둥은 판첸 라마를 인민의 적이라고 비난하고 판첸 라마를 지지한 통일전선부장 리웨이한을 굴종주의자로 몰아 그가 티베트인들게 비굴하게 굴었다고 숙청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판첸 라마도 박해를 받아 연금되었고 마오쩌둥 사후 중국에 저항하다가 다시 연금되어 1989년 사망했다.

현재 판첸 라마 11세는 중국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9년에 판첸 라마 10세가 사망하자 달라이 라마 14세게둔 최키 니마(དགེ་འདུན་ཆོས་ཀྱི་ཉི་མ་་)라는 소년을 판첸 라마 11세, 즉 판첸 라마의 환생자라고 선언했는데 중국공산당은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판첸 라마 11세 본인과 그 가족은 단 3일만에 납치하였고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대신 중국 정부는 자신들이 인정한 기알첸 노르부(ཆོས་ཀྱི་རྒྱལ་པོ་་)를 판첸 라마 11세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여 옹립하였으며 그가 진짜라고 주장한다. 참고로 기알첸 노르부의 부모는 공산당원이고 그도 친 중국공산당 성향이다. 현 달라이 라마 14세티베트 망명정부,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은 그를 진정한 판첸 라마로 인정하지 않으며 현재까지 실종된 정통 판첸 라마인 게둔 최키 니마의 행방을 밝힐 것을 중국 정부에 요청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자신들이 인정하는 판첸 라마 11세를 멋대로 옹립한 것만 보면 마치 중국교황청을 무시하고 중국천주교애국회를 통해 멋대로 주교를 임명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지만 이에 더하여 달라이 라마가 지명한 공식 판첸 라마 11세를 납치했다는 것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판첸 라마 11세 당사자와 그 가족의 인권(어쩌면 생명)을 송두리째 짓밟은 것일 뿐 아니라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가 후계자를 상호 지명하며 계승해 오던 티베트 불교 고유의 환생 제도 전통을 뿌리째 허물어 버렸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나아가 현재의 달라이 라마 14세가 사망하게 되면 환생한 달라이 라마를 찾는(차기 달라이 라마를 지명할) 권한을 가질 판첸 라마 자리를 중국공산당이 빼앗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달라이 라마는 워낙 세간의 이목이 많아 건드리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가 죽으면 다음 공산당의 꼭두각시인 어용 판첸 라마를 이용해 달라이 라마는 우리 입맛에 맞는 사람을 앉히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이에 달라이 라마는 이제 (달라이 라마 14세를 끝으로) 환생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는데 국가 무신론을 주창하는 중국 정부가 "달라이 라마는 당연히 환생할 것."이라고 반박하는 궤변을 선보인 건 덤.[3]


3. 박지원과의 만남[편집]


연암 박지원열하일기에 관련 기록이 있다. 원문에는 한자 음차인 반선액이덕니(班禪額爾德尼)라고 나온다.[4] 건륭제의 환갑잔치를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조선 사절단이 열하에서 판첸 라마와 마주쳤다. 건륭제의 호의 어린 지시로[5] 라마를 접견한 조선 사절이 무려 4단의 통역[6]을 거쳐 인사를 올리니 판첸 라마는 목제 불상을 주었다고 한다. 이 때의 판첸 라마는 판첸 라마 6세라고 한다. 조선 사절단이 판첸 라마와 만난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에 박지원열하일기에서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으며 중국티베트, 조선과의 관계에 대해 서술한 매우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다.

당시 황제가 승려를 스승격으로 삼을 만큼 불교를 존중하던 청나라와 달리 조선은 건국 이래 수백년간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억제하고 천대해 왔기 때문에 승려에 대한 이미지가 대단히 좋지 않았다. 조선 사신들은 중놈 따위(판첸 라마)와 만나야 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해 충격과 공포를 느꼈으며 황제의 명으로 판첸 라마에게 절을 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게 되자 양반부터 하인까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판첸 라마를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한 통역관은 "차라리 내 목을 자르라!!"며 팔뚝질을 해댔다고 한다.[7][8] 불교 국가였던 고려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결국 판첸 라마와 대면하는 순간 사절단을 이끄는 박명원[9]이 모른 척하고 절을 안 하고 그냥 자리에 앉아 버렸다. 이런 조선 사신들의 태도를 본 건륭제는 삐져서 조선 사신들의 일정을 당겨 예상보다 일찍 열하에서 돌려보냈다. 사절단이 열하로 갈 때는 황제의 명령으로 청나라 관료들이 여러가지 편의를 제공해 줬는데 사절단이 떠날 때는 사절단이 판첸 라마를 대한 태도 때문에 황제의 기분이 상한 걸 청나라 관료들도 알아서 대놓고 사절단을 박대했다고 한다. 사실 이는 굉장히 다행스럽게 사태가 종결된 것인데 박명원은 목숨을 내놓고 황제의 명을 거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이라면 죽고 못사는 조선의 일선급 사절이 청나라 황제의 명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의아할 수 있겠지만 당시 조선에게 '중국'이란 청이 아니었다. 조선이 그토록 충성해 마지 않던 그 중국은 곧 멸망한 명나라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청은 조선 입장에선 중국과 천조를 참칭하는 잘 나가는 오랑캐 무리에 불과했다. 더구나 두 번(정묘호란, 병자호란)에 걸쳐 직접적인 군사적 타격을 당하고 국왕까지 굴욕을 당했던 터라 조선인들의 청에 대한 감정은 절대 좋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사절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박명원의 8촌 동생이었던 박지원은 극형까진 몰라도 십중팔구 귀양살이를 가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그런데 열하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박지원은 그 상황을 즐거워했다! "귀양을 가게 된다면 이런 기회에 남들 못 가보는 지역을 가 보게 되니 아싸 조쿠나!" 같은 반응을 보였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그나마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그래도 이 일에 화가 나긴 났는지 건륭제는 이후 조선 사절단이 열하에서 베이징으로 돌아갈 때 아무런 혜택도 주지 않고 냉대했다.

사실 숭유억불을 국책으로 하는 조선 양반의 입장으로써, 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이 사람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단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심각한 정치 비화로 확대될 수도 있었던 일이다. 반대 당파에서 "저 놈들이 중놈한테 절했대요! 이거 아주 나라 망신이구만?" 이러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10] 더군다나 유교 윤리에서는 자기 목숨 살자고 신념을 굽히는 것을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박지원열하일기에 "우리나라의 선비로서 한번 불교와 연관되면 평생 놀림감이 되는 것이 현실이니 저리 당당하게 나가는 것이겠지만, 만약 황상에게 활불(活佛)[11]이 이 사실을 알리면 큰일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때 받은 불상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열하일기에 나오지 않지만 이전 사례처럼 처리한 듯하다. 열하일기에 따르면 이전 사신들은 억지로 받았던 불상을 압록강에 흘려보냈다고 한다. 청나라 땅에서 버렸다가 걸리면 황제에게 모가지 당할 것이고 조선까지 가져가더라도 왕이 진노하거나 반대파에게 꼬투리 잡히면 모가지 당할 것이니 조선도 아니고 청나라도 아닌 국경 지대에서 조용히 처리했다. 지나간 얘기지만 만약 저 불상이 현재에도 남아 있었다면 못해도 보물급 문화재다.

그런데 일성록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와 박명원이 사행길에 대한 대화를 하면서 황제가 줬다는 불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정조가 불상의 처분에 대해 묻자 박명원은 "평안북도 영변의 모 에 봉안했다"고 답한다. 이 불상이 판첸 라마가 선물로 준 그 불상인지, 아니면 판첸 라마의 것과는 별도로 건륭제가 따로 하사한 불상인지는 불분명한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분명히 국보급 문화재인데 북한에 있어서 조사는 불가능하다. 영변에 있는 절은 크게는 3군데가 있는데 영변 3대 사찰인 천주사와 보현사, 서운사 중에서 한 군데에 봉안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위 3군데의 사찰들 모두 6.25 전쟁 때 폭격으로 건물들과 문화재가 소실되어서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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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알첸 노르부라고 중국공산당에서 앉혀 놓은 바지사장이 하나 있긴 한데 대부분의 티베트인과 국제사회는 그를 판첸 라마로 인정하지 않는다. 정통은 이쪽이다.[2] 달라이 라마처럼 겔룩빠다.[3] 사실 환생이라고 하니까 이상해 보이는 거지 상술했듯 교황청을 무시하고 주교를 임명하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중공의 입장은 '환생은 뚤꾸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믿는 것'이란 논리인데 노골적으로 해석하면 '뚤꾸 자의에 의한 환생 그딴 거 없고 그냥 신도들이 그렇게 믿는 종교적 문화'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중공은 관할 내 모든 종교 문화와 의례, 행정은 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환생(중공 입장에선 그 틀 안의 달라이 라마 승계)도 그 주장에 포함된 것뿐이다. [4] 병음은 bānchán éěrdéní. 티베트어인 '판첸 라마'가 아니고 만주어인 '판천 어르더니'를 음차한 것이다. '판천'은 판첸을 뜻하고 '어르더니'는 만주어로 '존귀한 사람'이란 뜻이다.[5] 건륭제티베트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베이징에 티베트 불교 을 세웠으며 판첸 라마를 초청해서 대규모 법회를 열기도 했다. 조선 사절단에게 판첸 라마를 만나게 한 것도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 먼 길을 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존대하는 인사를 만날 수 있게 해준 것이다.[6] 한국어중국어만주어티베트어.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하기 전이었다면 한국어에서 바로 만주어로 통역했겠지만 이 때는 청나라가 중원에 입관하여 완전히 자리잡은 관계로 청나라에서 중국어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7] 다행히도 조선인들끼리 있을 때 팔뚝질을 했다. 만약 공개석상에서 했다면 자기 목뿐만 아니라 삼족의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른다.[8] 그런데 열하일기에는 판첸 라마가 보는 앞에서 팔뚝질을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9] 영조의 사위(부마). 영조가 가장 총애한 딸인 화평옹주의 남편이다.[10] 그나마 박지원은 노론계라 좀 덜하겠지만.[11] '살아 있는 부처님'이란 뜻으로, 판첸 라마에 대한 존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