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릭 클라위버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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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클라위버르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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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UEFA 유로 2000 심볼.svg







네덜란드의 축구감독


이름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Patrick Kluivert

본명
파트릭 스테판 클라위버르트
Patrick Stephan Kluivert
출생
1976년 7월 1일 (47세)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주 암스테르담시
국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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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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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수리남|

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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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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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퀴라소|
]] 퀴라소
신체
188cm / 체중 100kg[2]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축구행정가
가족
아버지 케네스 클라위버르트
어머니 리드비나 클라위버르트
장남 저스틴 클라위버르트
차남 퀸시 클라위버르트
삼남 루벤 클라위버르트
사남 셰인 클라위버르트
소속
선수
AFC 아약스 (1994~1997)
AC 밀란 (1997~1998)
FC 바르셀로나 (1998~2004)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2004~2005)
발렌시아 CF (2005~2006)
PSV 에인트호번 (2006~2007)
릴 OSC (2007~2008)
감독
AZ 알크마르 (2008~2010 / 수석코치)
브리즈번 로어 (2010 / 수석코치)
NEC (2010~2011 / 수석코치)
FC 트벤테 II (2011~2012)
네덜란드 대표팀 (2012~2014 / 수석코치)
퀴라소 대표팀 (2015~2016)
아약스 A1 (2016)
카메룬 대표팀 (2018~2019 / 수석코치)
퀴라소 대표팀 (2021 / 감독대행)
아다나 데미르스포르 (2023)
기타
파리 생제르맹 FC (2016~2017 / 단장)
라리가 앰버서더
FC 바르셀로나 (2019~2021 / 유스 풋볼 디렉터)
국가대표
79경기 40골[3] (네덜란드 / 1994~2004)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출전 기록
6. 기타



1. 개요[편집]


네덜란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후에 국대에서 주전경쟁을 할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같은 날 태어났다. FC 바르셀로나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흥기를 함께 했지만, 이후로는 끝없이 추락한 스트라이커.

안드리 셰브첸코는 30대 초반 새로운 리그의 적응과 마누라의 등쌀 등 주변의 상황으로 인한 잘못된 선택을 보여줬다면, 클라위버르트는 부상과 슬럼프 등의 멘탈 문제로 얼마나 망가졌는지 잘 보여줬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2.1.1. AFC 아약스[편집]


유럽에서 알아주는 AFC 아약스의 유스출신으로 데뷔시즌 이미 네덜란드의 전설이였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필두로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로날트 더부르, 에드가 다비즈, 클라렌스 세도르프, 에드빈 판데르사르, 마이클 레이저허르 등 당시 햇병아리 선수들과 함께 당시 최강팀이였던 AC 밀란을 꺾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견인한다.[4] 클라위버르트는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고 전세계의 주목과 함께 특히 마르코 판바스턴의 은퇴이후 다니엘 마싸로, 데얀 사비체비치로 만족하지 못해 반 바스텐의 후계자를 찾던 AC 밀란의 관심을 끌게 된다.

이후 2시즌을 주전으로 활약하다 AC 밀란으로 이적한다.


2.1.2. AC 밀란[편집]


당시 초특급 유망주로 꼽히던 에드가 다비즈, 옌스 레만와 함께 AC 밀란으로 향하지만 다비즈는 당시 최고의 딥 라잉 미드필더 였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에게, 레만은 세바스티안 로시[5]에게 밀려 입지가 좋지 않았다. 입단 당시 마르코 판바스턴의 후계자로 주목을 받던 클라위버르트 역시 로베르토 바조, 조지 웨아등에게 밀려 후보 신세로 전락하자 불만을 품고 1년만에 팀을 떠나게 된다.[6]

2.1.3. FC 바르셀로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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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FC 바르셀로나로 헐값에 이적하여, 1년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한 호나우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최전방 공격수로 낙점된다.[7] 아약스 시절 자신을 이끌었던 루이 판할 감독과 재회하면서 드디어 기량을 만개하여, 히바우두, 클라위버르트, 루이스 피구라는 당시 역대 최강급 공격진의 일원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운이 없었는지 팀을 떠날 때까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8] UEFA 유로 2000을 정점으로 슬슬 기량 하략이 눈에 띄었지만, 당시 바르샤는 루이 판할을 다시 기용하면서 히바우두와 세르히는 재계약을 포기하고 각각 AC 밀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자유계약으로 이적해버리고, 기껏 영입한 히카르두 콰레스마, 시망 사브로자, 후안 로만 리켈메 등은 이상한 포지션에 세우는 기행을 선보이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클라위버르트는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투톱을 이루며 그럭저럭 스텟을 쌓아주었지만 전성기만큼의 임팩트는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바르샤는 2003-04 시즌 들어 판 할을 경질하고, 네덜란드 국대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클럽팀 감독 경험으로는 스파르타를 강등으로 인도한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임명하는 초 강수를 둔다. 레이카르트도 전반기에는 클라위버르트를 기용하였으나, 눈이 썩는 경기력으로 부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다 결국 사비올라에게 주전경쟁에서 밀린다.[9] 시즌이 끝나고 2004-05 여름 이적시장에서 마요르카의 떠오르던 공격수 사무엘 에투의 영입으로 결국 팀을 떠나게 된다.[10] 바르셀로나 시절 기록은 182경기 90골로 경기당 약 0.5골 꼴.


2.1.4. 뉴캐슬 유나이티드 FC[편집]


클라위버르트의 새로운 안식처는 2000년대 초반 매년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노리던 프리미어 리그 상위권 팀 뉴캐슬 유나이티드 FC였다. 비록 직전 시즌 바르샤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주전에서 밀리는 등 부침이 있긴 했지만 맨유에서 뛰던 판니스텔로이를 밀어낸 부동의 네덜란드 원톱 스트라이커였고, 아직 나이도 20대 후반으로 젊었던지라 대부분 지난 시즌의 모습은 일시적인 부진으로 보았기에 클라위버르트의 영입이 성사되자 팬들과 언론의 기대는 대단하였다. 심지어 아스톤 빌라 원정 경기에서는 홈팀 빌라의 꼬마 팬들이 상대팀 선수인 그에게 사인을 받을 정도였으니 뉴캐슬 팬들의 기대는 더 대단했다.

위에서 언급된 아스톤 빌라와의 리그 4차전 원정 경기에서 전반전에 동점골을 집어넣으면서 리그 첫 번째 득점을 터트렸고[11], 순조롭게 적응 할 수 있을 듯 했으나..

뉴캐슬은 아스톤 빌라전 종료 후 성적 부진 및 선수단 관리 실패 등을 이유로 클라위버르트를 데려왔던 바비 롭슨 감독을 경질하고 막장 감독으로 유명한 그레이엄 수네스를 선임했는데.. 이후 경기력, 성적, 팀 분위기[12]가 모두 개판으로 치닫는 막장 상황이 되버린데다 클라위버르트 본인도 리그 적응 실패, 부상 및 부진이 겹치면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 하고 리그 25경기 6골로 직전 시즌처럼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13]

당시 뉴캐슬의 상태가 워낙 막장이었기에 리그 최다 득점자가 벨라미[14]와 시어러의 7골일 정도로 빈공에 시달려서 클라위버르트는 리그 6골로도 팀 내 득점 2위에 오르긴 했으나 시즌 초 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리그 탑급 공격수로서의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했기에 한 시즌 만에 발렌시아 CF로 이적하게 된다. AC 밀란 시절 이후 최대의 흑역사였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이 시절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배경으로 한 영화 Goal이 촬영되어서 영화에 그의 득점장면도 나온다.

2.1.5. 발렌시아 CF[편집]


이미 기량이 하락한 클라위버르트를 영입한 구단은 발렌시아 CF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완전히 유리몸으로 전락하면서 시즌의 대부분을 부상으로 날려버렸고, 출장한 경기들에서도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당시 떠오르던 신예 다비드 비야에게 완전히 밀려버려 10경기 1골을 기록하는데 그치는 최악의 커리어를 기록하고 1년 후 다시 팀을 떠나게 된다. 이때의 실책으로 2006 독일 월드컵 참가가 물거품이 되었다.


2.1.6. 이후[편집]


이후 2006-07 시즌은 네덜란드로 복귀하나 아약스가 아니라 아약스의 라이벌인 PSV에서 뛰었고, 2007-08 시즌을 프랑스의 릴 OSC에서 보내나 이때도 계속 된 부상 및 부진으로 인해 각각 리그 3골과 4골이라는 전부 기대 이하의 활약을 보이며 쓸쓸하게 은퇴하게 된다. 특히 PSV 시절 자신의 친정팀이라고 할 수 있는 아약스와의 홈경기에서 골을 넣었으나 당시 경기에서 팀이 지고 있던 상황 탓도 있고(당시 결과는 1-5로 PSV가 패배) 그다지 기뻐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아약스 팬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기도. 전성기 시절 전 세계를 호령했던 스트라이커의 말년이 이렇게 허무할줄 누가 알았는가. 동갑내기 판니스텔로이가 2006-07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피치치를 수상하고 UEFA 유로 2008에 참가하는 등 계속 멋진 활약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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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트 판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등 네덜란드의 쟁쟁한 스트라이커들이 등장하기 전 유로 2000까지는 세컨드 스트라이커 데니스 베르캄프와 콤비를 이룬 부동의 원톱 스트라이커였다. 통산 79경기 40골로빈 반 페르시가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네덜란드 국가대표 최다 골 기록 보유자였다. 이후 휜텔라르도 클라위버르트의 득점 기록을 경신하면서, 현재는 네덜란드 국가대표 3위의 골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UEFA 유로 1996에서는 부상으로 거의 뛰지 못하다가 조별리그 3차전이었던 잉글랜드전에서 골을 넣는 평범한 활약을 보였다.[15]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첫 경기 벨기에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 벨기에 수비수 스탈렌스의 '강간범'이라는 욕설에 분을 참지 못하고 팔꿈치로 가슴을 가격해 퇴장을 당하는 바람에 조별리그 2차 한국전에 출전하진 못했으나 8강 아르헨티나전과 4강 브라질전에 연속 골을 넣으며 존재감을 과시했다.[16] 당시 한국의 방송이나 신문지상에서는 주전공격수인 클라위버르트가 한국전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네덜란드와 해볼만 하다라는 정말이지 상상하기 힘든, 그야말로 드립을 치기도 했을 정도.[17]

이후 클라위버르트는 UEFA 유로 2000에서 유고슬라비아해트트릭 포함, 5골을 넣어 공동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4강전에서 프란체스코 톨도가 지키는 이탈리아를 뚫지 못하고 그만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2002년 월드컵은 예선 탈락해 버렸고,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UEFA 유로 2004 때는 국대 승선은 했으나 딕 아드보카트가 그를 여러 가지 문제로 기용하지 않아 결국 UEFA 유로 2004가 마지막 국대가 되었다. 그리고 몇달 후인 2004년 10월, 데니스 베르캄프가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대표팀 최다 득점 기록(37골)을 갈아치웠으나[18], 이 해가 클라위버르트가 국가대표로 뛴 마지막해였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튼튼한 피지컬과 터프한 플레이로 최전방을 초토화시키던 스트라이커로 전성기 시절 헤딩슛과 타겟맨으로써 골 결정력은 물론이고 상대 센터백을 몸싸움으로 괴롭히는 터프한 플레이에 능했다. 이때문에 센터 포워드나 전통적인 투 톱의 빅 타겟으로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다. FC 바르셀로나에서는 우측 루이스 피구,좌측 히바우두 두 윙포워드의 공간을 확보하고 찬스를 골로 만드는 원톱 플레이를 주로 했고, 네덜란드 국가대표에서도 같은 원톱 롤을 소화했다. 바르셀로나가 잠깐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이 들어와서 4-4-2로 전환했을때도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함께 투톱으로 나서서 제 역할을 해냈다. 한마디로 만능 공격수. 심지어 양발에 중거리 슛 역시 위협적이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는 원톱으로써 기량이 출중해서 뤼트 판니스텔로이, 로이 마카이, 피에르 판호이동크,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등의 출중한 스트라이커를 전부 밀어버렸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동의 원톱. 이 당시 로이 마카이라리가의 득점왕 출신. 하셀바잉크, 판니스텔로이EPL 득점왕 출신이었다.[19] 그리고 판호이동크는 리그 수준이 약간 떨어져있긴해도 에레디비시에서 득점왕을 석권한 선수다.


4. 지도자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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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코치 라이선스를 취득했고 2달 후인 6월에는 루이 판 할의 의 부름을 받고 2008/09시즌 알크마르 잔스트레이크의 수석코치로 임명됐다. 1년 반 가량 AZ의 수석코치로 활동하다 2010년 1월 호주로 건너가 A리그의 브리즈번 로어 의 수석코치로 약 5개월간 단기간으로 활동했다. 2010년 8월에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와 NEC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어 한 시즌간 팀을 지휘했다. 2011년 여름 네덜란드 트렌테의 산하 유스팀인 트렌테 II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유스 지역리그를 우승시키기도 했고 2012년 여름 루이 판할의 요청에 따라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코치로 임명됐다. 그 후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네덜란드 대표팀을 3위로 이끌기도 했고 월드컵이 끝난 직후 반 할과 함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3월 북중미 카리브해에 위치한 퀴라소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됐다. 곧 바로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전을 치뤘는데 1차예선에선 몬트세랫을, 2차예선전은 쿠바를 상대로 승리를 거둬 3차예선에 진출했으나 엘살바도르에게 0:2로 패배당해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2015년 9월 10일 6개월간의 재직을 끝으로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에서 물러날것임을 발표했다. 그 이후로도 기술고문역으로 퀴라소 축구 대표팀의 자문을 해주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2016년 2월 캐리비언 컵에 참가하게 된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에 복귀함을 발표했다. 한달 후인 2016년 3월 2일 아약스 유소년팀인 아약스 A1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2016/17시즌 유스리그를 지휘하게 됐다.

그렇게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과 아약스 A1의 감독직을 겸임하는듯 했으나 캐리비언 컵이 끝난 직후 퀴라소 대표팀에서 사직했고 2016년 7월 14일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단장직 제의를 받자 아약스 A1에서의 짧은 감독 생활을 마무리 짓고 파리 생제르맹의 단장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단장에 부임한 이후 레알 마드리드헤세를 영입했으나 결과는 대실패였고, 전 달에 영입되었던 벤아르파크리호비악도 모두 망했다. 이적생 중에서는 토마 뫼니에만이 유일한 성공작.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율리안 드락슬러를 영입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부진한 영입 실적 때문인지 2017/18 시즌을 앞두고 PSG 단장직에서 공식 사임을 발표했다. 단장 직에서 물러난 이후 카탈루냐로 이사 하였는데, 막내 아들인 셰인이 바르셀로나의 유스 아카데미에서 축구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2018년에는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는 친구 클라렌스 세도르프를 따라서 같은 팀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2019년 카메룬 대표팀에서 물러난 이후 한동안 행정가의 길을 걷다가 2021년 5월, 거스 히딩크 감독이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아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된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일단 2022 카타르 월드컵 2차 예선 기간까지 팀을 지휘하게 되며, 이 기간동안 바르셀로나 유소년 디렉터를 겸직하게 된다. 과테말라 대표팀을 다득점으로 밀어내고 2차예선에 올랐으나, 파나마 대표팀에 패하며 최종예선에는 오르지 못한다.

2023년 6월 30일, 아다나 데미르스포르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2년 계약.# 이후 2023년 12월 4일에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 발롱도르 후보: 1995 (5위)
  • UEFA 유로 골든부츠: 2000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0
  • 네덜란드 올해의 유망주: 1995
  • FIFA 100: 2004
  • 브라보상: 1995


5.3. 출전 기록[편집]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94/95
AFC 아약스
에레디비시
25
18
2
1
10
2
1995/96
AFC 아약스
에레디비시
28
15
2
1
8
5
1996/97
AFC 아약스
에레디비시
17
6
1
0
4
2
1997/98
AC 밀란
세리에 A
27
6
4
3
-
-
1998/99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5
15
3
1
-
-
1999/00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6
15
2
1
14
7
2000/01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1
18
5
2
12
5
2001/02
FC 바르셀로나
리리가
33
18
0
0
17
7
2002/03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36
16
0
0
15
5
2003/04
FC 바르셀로나
라리가
21
8
2
0
3
2
2004/05
뉴캐슬 유나이티드
프리미어리그
25
6
6
2
6
5
2005/06
발렌시아 C.F
라리가
10
1
2
0
-
-
2006/07
PSV 에인트호번
에레디비시
16
3
2
0
3
0
2007/08
릴 OSC
리그 1
13
4
1
0
-
-


6. 기타[편집]


네덜란드어 표기법으로는 클라위버르트가 맞지만 현역 시절부터 굳어진 클루이베르트라는 표기를 쓰는 경우가 많다. 피파 온라인에서 쓰이는 클라위베르트라는 표기도 많이 쓰인다.

뤼트 판니스텔로이와 같은 날 태어났다. 188cm의 키와 80kg 중후반의 체격까지 비슷했으며 둘 다 네덜란드 국가대표이며 포지션 역시 9번으로 완벽하게 똑같아 화제가 되었다. 다만 둘의 전성기 시기는 전혀 겹치지 않는데 클라위버르트가 데뷔하자마자 전성기를 달리며 90년대 후반기를 대표했다면 판니스텔로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한 2000년대 초반기였다. 이 시기의 클라위버르트는 전성기를 지나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클라위버르트 본인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네덜란드 국가대표 입장에선 다행인 케이스다.

기량이 한순간에 몰락한 선수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신체와 경험이 완숙되어 가장 기량이 빛난다는 20대 후반에 저니맨이 되어 소속팀마다 이정도로 망한 월드 클래스급 공격수를 찾는 것이 어려울 정도.[20] 특히 2006-07 시즌 동갑내기의 같은 국적소속 판니스텔로이라리가에서 25골을 넣어 득점왕에 오른 것과 대조적이다.

기량이 빨리 몰락한 이유는 다른 거 없다. 불성실한 데다 멘탈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이 선수가 친 가장 큰 사고는 1995년 아약스 시절 일으킨 교통사고로 피해자가 사망했고 운전면허 박탈에 240시간 사회봉사를 선고받은 것.[21] 이것도 당시 죄질에 비해 낮은 형량이었다고 언론에서 까였고 1997년에는 집단 성폭행 혐의에 연루되기도 했다. 아약스를 떠나 해외로 간건 이런 문제때문이었다. 클라위버르트와 비슷한 이유로 몰락한 스트라이커로는 세리에 팬들의 자랑이였다가 금지어까지 추락한 아드리아누가 있다.

불성실하고 방탕했었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지도자로 전향한 후에는 차근 차근 커리어를 쌓으며 성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월드 클래스 포워드였다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 공격수 조련에 일가견을 보이는 모습. 대표적으로 한때 토트넘 홋스퍼 FC에서 뛰었던 무사 뎀벨레의 경우 클루이베르트와 함께 한 시즌에 커리어 처음으로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등 빼어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현재의 지도력만 꾸준히 보여준다면 조만간 1군 팀 감독으로써의 모습을 볼 수 있을듯. 그리고 2015년 퀴라소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팀을 2018년 월드컵 3차 예선에 진출시켜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입증하는 중.

전처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3명, 그리고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또 아들을 낳아서 아들이 무려 4명이나 있다. 전부인 하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3명, 퀸시, 저스틴, 루벤은 모두 아약스의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막내 아들인 셰인도 바르셀로나의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것이 확인 되었다.

아들들 중에서 외모가 가장 아버지와 많이 빼닮은 저스틴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주로 측면에서 플레이를 하는데, 기술이 좋아, 동년배들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재능으로 꼽히고 있고, 아약스에서도 기대가 크다고 한다. 결국 아약스와 정식으로 프로선수 계약을 체결하였고, 16-17 시즌에는 아약스 유스의 최고 단계인 A1에서 뛰게 된다고 한다. 마침 클루이베르트도 16-17시즌 부터 A1의 코치로 일하게 되어, 아들을 직접 지도할 수 있게 되었지만, 클라위버르트는 파리 생제르맹의 단장으로 바로 자리를 옮겼고, 저스틴은 융 아약스로 콜업되어, 에이르스터 디비지 에서 뛰고 있다. 융 아약스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16-17시즌 후반기의 시작과 함께 1군으로 콜업 되었고, 데뷔전을 화려하게 치렀다. 18-19시즌 부터 저스틴은 AS로마에서 뛰게 되었다.

셰인 역시 아버지나 형처럼 재능이 있는지 (2017년 기준으로) 9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미디어의 관심을 받고 있으며 나이키와 4년 계약을 맺음으로서, 나이키가 스폰하는 선수들 중 가장 어린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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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2016 아시안 스마일 컵'에 초대받아 잠브로타박지성을 비롯해 이동국, 이천수, 김병지, 지소연 등 한국 축구의 전현직 스타들, 송중기와 유재석을 비롯한 런닝맨 멤버들과 피치를 누볐다. 이날 클라위버르트는 결승골을 터뜨리며 FC 스마일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2022년 11월 11일 글로벌 아카데미 플랫폼 '레전드 아카데미'의 홍보차 내한하여 유소년 코칭 및 자선경기를 진행했다.

[1] 아버지는 수리남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적 있는 수리남인, 어머니는 퀴라소에서 태어난 수리남계 퀴라소인으로 수리남에서 결혼해 가정을 꾸린 후 파트릭이 태어나기 6년 전인 1970년 수리남에서 네덜란드로 이민을 갔다.[2] 선수시절 87kg[3] 대표팀 역대 득점 4위[4] 이 우승을 마지막으로 아약스는 현재까지 챔스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감독은 이후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등에서 성공적인 감독생활을 했으나 특유의 똥고집으로 최악의 결과를 도출시키고 항상 경질된 루이 판할. 그 중 압권은 히바우두를 왼쪽날개로 고정시켜버린것. 요즘 축구판으로 따지면 리오넬 메시를 왼쪽 윙포워드만으로 출전시키는 정신나간 짓을 벌였다고 비유할수 있다.[5] 밀란 제너레이션 시절의 주전 골키퍼. 클럽에서의 위용과 다르게 국가대표에서는 시대별로 디노 조프, 잔루카 팔리우카, 잔루이지 부폰 등에게 밀려서 인지도가 낮은편.[6] 세리에 A 경기는 당시는 18팀 34경기 체제였는데 클라위버르트는 26경기를 출전하여 7골을 넣었다. 어린 선수치고 적지 않은 골을 넣었지만 팀의 레전드인 판바스턴의 후계자이자 즉시 전력감으로 데려온 선수치곤 실망스러웠다, 이후 밀란은 2년 후에 안드리 셰브첸코를 영입하고 나서야 판바스턴 이후 확고한 주전 스트라이커를 손에 넣는다.[7] 호나우두의 후계로 영입된 선수는 히바우두지만 상기했다시피 판 할감독은 히바우두를 왼쪽 윙포워드로 고정시킨다.[8] 바르셀로나의 대외컵 암흑기 시즌은 드림팀 1기 말년이던 1994년도 AC 밀란에게 결승전에서 4:0으로 떡실신 당한후부터 2004-05 시즌 전까지 계속 유지된다. 심지어 클라위버르트 합류 전 시즌에는 솁첸코에게 농락당하며 예선에서 떨어지는 수모까지 겪는다.[9] 참고로 사비올라는 빅&스몰의 투톱 스트라이커로 바르샤식 4-3-3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수이다. 이런 타입의 선수에게 밀렸다는 것은...[10] 이 직후 4-3-3 전술을 채용함으로써 투톱 전문인 하비에르 사비올라 역시 임대를 전전한다. 사비올라의 경우 팀을 제대로 잘못 만나 망한 케이스지만.[11] 경기는 이후 뉴캐슬이 3골을 더 얻어맞으며 2:4로 패배했다.[12] 당시 뉴캐슬에는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선수들이 다소 있었으나 롭슨 감독이 해당 선수들에게 아버지 소리를 들을 정도로 통제하고 있었기에 자잘한 트러블들이 자주 터지거나 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들은 있어도 심각한 문제가 터지진 않고 어떻게 유지되고 있었으나, 롭슨 감독이 경질 당한 후 후임으로 온 수네스가 특정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팀에서 배제하거나 엉뚱한 포지션으로 기용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자 해당 선수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했고.. 나중엔 하다하다 리그 경기에서 같은 뉴캐슬 선수들끼리 서로 주먹을 날리며 싸움이 일어나 상대팀 선수가 말릴 정도로 막장이 되었다.[13] 그나마 컵대회에서는 좀 달라서 FA컵 16강에서 쿼드러플에 도전했던 무리뉴 1년차의 첼시를 상대로 1-0 승리를 이끄는 결승골을 성공시키고 8강전에선 토트넘을 상대로 선제 결승골을 뽑아내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UEFA컵에서는 1차 예선에서 4골을 뽑아내는 등의 모습을 보여서 시즌 37경기 13골로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은 달성할 수 있었다.[14] 수네스와의 불화로 인해 반 시즌만 뛰고 겨울 이적시장에서 셀틱으로 임대 이적 했다.[15] 물론 이 득점은 네덜란드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득점이었다. 클라위버르트의 이 골이 만회골이었는데, 만약 이 골이 없었다면 네덜란드는 스코틀랜드에게 득실차에서 밀려 토너먼트에 진출하지도 못할뻔 했기 때문이다.[16] 물론 4강 브라질전에서는 무수한 찬스들을 날려 먹긴 했다. 그나마 동점골을 넣어 위안을 삼아야했다.[17] 당시 한국 경기에 뛰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네덜란드 부동의 국대 스트라이커라는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라는 말은 사실과는 다르다. 신문기사만 검색해봐도 알 수 있지만, 이미 1998년 즈음에는 유럽 축구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쌓여가는 시기였다. 당시에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의 세부적인 사항들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AC 밀란이라는 명문팀에서 뛰는 클라위버르트가 데니스 베르캄프와 더불어 주전 투톱이고, 클라렌스 세도르프가 미들의 핵이라는 사실은 국내에 잘 알려져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들과의 격차를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다.[18] 클라위버르트의 최종 네덜란드 대표팀 기록은 40골.[19] 그러나 판니스텔로이가 득점왕을 먹은건 02-03 시즌이며 클라위버르트는 하향세를 타고 있었다. 즉 판니스텔로이가 전성기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과 달라서 반니를 그냥 묻어버렸다고 보기엔 무리가 조금 있다. 그냥 UEFA 유로 2000까지 부동의 주전이었다고 생각하자.[20] 반등에 성공한 셰브첸코는 제쳐두더라도 이 분이 뒤를 이어가고 계신다.[21] 때문에 미국 투어에는 입국 금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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