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아이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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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아이마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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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심볼.svg







Selección de fútbol de Argentina

파일:아이마르 2022 월드컵.jpg

이름
파블로 아이마르
Pablo Aimar
본명
파블로 세사르 아이마르 히오르다노
Pablo César Aimar Giordano
출생
1979년 11월 3일 (44세) /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주 리오쿠아르토시
국적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display: none; display: 아르헨티나"
행정구
]]

신체
170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축구 코치
축구 감독
소속
선수
에스투디안테스 리오 콰르토 (1985~1993 / 유스)
리버 플레이트 (1993~1996 / 유스)
리버 플레이트 (1996~2000)
발렌시아 CF (2001~2006)
레알 사라고사 (2006~2008)
SL 벤피카 (2008~2013)
조호르 다룰 탁짐 FC (2013~2014)
리버 플레이트 (2015)
AA 에스투디안테스 (2018)
감독
아르헨티나 U-17 대표팀 (2017~ )
아르헨티나 대표팀 (2018~ / 코치)
국가대표
파일: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2성)엠블럼.svg 52경기 8골 (아르헨티나 / 1999~2009)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6. 아이마르에 대한 헌사
7. 여담



1. 개요[편집]


아르헨티나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7년부터 아르헨티나 U-17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으며 2018년부터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코치도 함께 맡고 있다.

별명은 '어릿 광대'라는 뜻의 'El Payaso' 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주는 선수라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알렉스 퍼거슨 등 수 많은 축구계의 유명 인사들에게서 환송과 찬사를 받은 선수였으며, 현대의 축구 황제이자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후배인 리오넬 메시로부터, 직접 지목을 받아 존경을 전해 받은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잘 생기고 곱상한 외모와 뛰어난 실력으로 스타성을 인정 받았고, 보기 드물게 아시아권에서 인기가 많았던 남미 선수 중 하나였다. 일본에서의 인기가 특히 뛰어났고, 한국에서 역시 2002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해서 많은 팬들이 생겼다. 클럽에서의 전성기는 보통 라리가를 제패하던 발렌시아 시절을 전성기로 다룬다.


2. 선수 경력[편집]


축구선수 출신이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축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지역팀인 에스투디안테에서 성장을 하다가 16세의 나이에 아르헨티나의 명문 CA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하였다. 특히 자신의 우상이자 CA 리버 플레이트의 신적 존재인 아리엘 오르테가의 영향을 받으며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1997년에 그는 프로선수로서 데뷔하게 되면서 발렌시아 CF로 이적한 오르테가의 10번을 물려받았고 오르테가 못지않은 플레이와 뛰어난 개인기를 선보이며 '그의 플레이는 광대가 재주를 부리는 것과 같다' 라는 찬사를 팬들에게 받았다. 이 때의 뛰어난 활약으로 그는 어릿광대라는 애칭을 얻었다. 또 얼마 후엔 아르헨티나의 키는 작지만 뛰어난 기술과 재능을 지닌 선수들이 받게되는 제 2의 마라도나라는 수식어까지 달게 됐다.

2000년발렌시아 CF에서 적응을 실패한 오르테가가 다시 돌아오면서, 그와 공존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걱정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오르테가가 윙포워드로 뛰면서 포지션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함께 아르헨티나 리그의 전반기 우승을 이끌어냈다. 이후 2001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발렌시아로 이적하였다.

이적 직후 초반기에는 다른 리그 템포에 못 따라가는 모습을 모였으나 이내 적응하며 팀의 핵심 플레이메이커로 자리 잡았다. 이적하자마자 챔피언스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발렌시아는 준우승을 하였다. 특히나, 맨유와 아스날의 중원을 휘저으며 특유의 드리블로 농락하는 모습은 가히 일품이었다. 가이즈카 멘디에타라치오로 이적하며 발렌시아에 위기가 도래할 것 처럼 보였으나, 라파엘 베니테스가 부임하면서 아이마르는 발렌시아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 때는 국내 커뮤니티들 뿐 아니라 스페인 현지에서도 지네딘 지단을 이을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놓고 호나우지뉴와 라이벌 관계를 짧게나마 다투었다.

01/02 시즌 31년만에 리그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03/04시즌에는 잔부상으로 후반기를 많이 결장하였으나 리그 우승과 더불어 UEFA컵 우승까지 이뤄냈다. 하지만 라파엘 베니테스가 발렌시아에서 리버풀로 떠나면서 자신의 주 포지션이 아닌 섀도우 스트라이커와 측면 미드필더로 뛰면서 점점 부진에 빠졌고, 부상이 겹치면서 서서히 주전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엄밀히 따지면 후임으로 왔던 라니에리키케 플로레스와 전술적인 마찰은 있었지만 플레잉 타임을 놓고 보면 주전급에 가까웠으며 키케는 아이마르를 어떻게든 쓰려는 노력을 보이긴 했다. 하지만 4-2-3-1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내지 4-4-1-1 쳐진 세컨드 스트라이커보다 플랫한 포메이션을 추구했던 키케와도 결국 전술적인 마찰을 피하지 못하며, 2006년에는 당시 리버풀 FC 감독이며 아이마르를 지도했던 라파엘 베니테스가 리버풀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을 하기도 했으나 당찬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던 레알 사라고사로 이적하였다. 이 당시 사라고사는 아이마르와 디에고 밀리토의 이적으로 상당히 주목받는 클럽이었고, 한준희 해설위원은 라리가 돌풍의 팀으로 꼽기도 했다. 아이마르와 밀리토 듀오의 활약으로 사라고사는 06/07 시즌 리그 6위로 UEFA컵 진출을 따내기도 했는데 07/08시즌 들어, 밀리토와 아이마르의 동반 부상 아웃으로 인해 팀은 겉잡을 수 없이 추락하였고, 달레산드로의 기행와 팀 분위기를 망치는 행동들에 사라고사는 끝끝내 강등당하고 말았다.

이후 강등된 사라고사에서 SL 벤피카로 이적하였다. 강등된 사라고사는 여러 클럽들의 이적시장 맛집이 되었고, 아이마르 역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었다. 빅리그 클럽들이 그를 데려오기 위해 오퍼를 넣었지만, 후이 코스타와 발렌시아에서 이미 인연이 있었던 키케 플로레스는 아이마르 영입에 공을 기울여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벤피카 이적 초반기에는 전 시즌 시즌 아웃급이었던 부상이 발목을 잡아 부진하였으나, 이후 벤피카의 핵심 미드필더로 자리잡아 리그와 유럽대항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 시절에는 곤살로 이과인과 함께 아르헨티나 국대로 다시 발탁되기도 했으며, 리오넬 메시도 자신의 우상은 아이마르라며 그를 추켜세워주기도 했다.

2013년 6월, 5년간의 SL 벤피카 생활을 마치고 떠나겠다고 선언하였다. "대단한 5년이었다."라고 벤피카 측에 감사의 표시를 남겼으며, 이후 2013년 8월 말레이시아의 프로 축구 구단인 조호르 다룰 탁짐 FC과 2년 계약을 맺고 말레이시아 슈퍼 리그에 진출하였으나 외국인 선수 제한에 걸려 2014년 1월에야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2] 그러나 여기서도 고질적인 부상 문제가 발목을 잡아 2014 시즌동안 8경기를 뛰고 4개월만인 2014년 4월, 부상 문제로 결국 팀에서 방출되었다.

2014년에는 무적(계약이 없는) 선수 신세. 2014 브라질 월드컵이 끝나고 많은 선수들이 소속 팀을 옮기는 시즌이지만, 그가 새 소속팀을 구할 수 있을지 아니면 이대로 은퇴를 할지는 지켜봐야 될 것이다.

2015년 여름 고향인 CA 리버 플레이트로 자유 이적하였다가 고질적인 오른 발목 부상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7월 16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메시SNS를 통해 우상의 은퇴를 알리고 그의 앞길을 축복했다. #


3. 지도자 경력[편집]


2017년 7월 14일 아르헨티나 U-17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2018년 호르헤 삼파올리가 사실상 경질된 후 현재 리오넬 스칼로니와 함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대행을 맡고있다. 이후 스칼로니를 보좌하며 코파 아메리카 우승에 기여한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도 코치진으로 참여했다. 조별예선 멕시코전에서 리오넬 메시가 죽을 힘을 다해 뛰어다니다 골을 집어넣자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격하게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스칼로니 감독이 겨우 진정시켰을 정도.# [3][4]그리고 결국 자신을 우상으로 여기는 리오넬 메시에게 코파 아메리카와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는 데 성공한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리버 플레이트 시절과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부터 이미 기량이 완성된 선수였다. 같은 국적의 선배였던 드리블 귀신인 아리엘 오르테가의 뒤를 이어서 '제2의 마라도나' 호칭을 물려 받았다. 또한 요한 크루이프의 극찬을 받은 적도 있다. 마라도나처럼 창조적이고 기술적이었으나, 마라도나와는 다르게 결정력과 몸싸움 능력이 부족한 게 흠이었다.

아이마르가 당대 보통의 플레이메이커들과 차별화 되었던 최대의 특징은 카카와 마찬가지로 빠른 주력에 의한 볼 운반과 키핑이었다. 다만 농구의 포인트 포워드에 가까운 하이브리드 형태의 플레이메이커였던 카카와는 달리, 아이마르는 다소 순수하게 경기 운영에 힘을 쏟는 플레이메이커였다. 당대의 지네딘 지단,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등을 위시한 플레이메이커들과는 다르게, 작고 빠르며 역동적인 경기 운영을 즐겨하던 선수였다. 이는 전성기를 보냈던 팀인 발렌시아의 사정상 다소 반강제적인 부분도 있었다.

전성기 시절인 발렌시아 시절엔 아주 가끔씩 통쾌한 슛으로 골을 기록한 적들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론 슛팅을 많이 때리는 편은 아니었고 체구에 걸맞게 슛 파워는 다소 빈약했다.

실제 골 기록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후안 로만 리켈메비야레알에서 좋은 득점력을 보여주었던 것과 비교하면 아쉬운 부분이었다. 다만 이것은 그의 결정력의 문제라기보단 당시 발렌시아의 부흥을 이끌었던 헥토르 쿠페르라파엘 베니테즈의 전술이 극도로 수비적인 4-2-3-1 시스템이었기 때문인데, 아이마르는 이적 첫시즌엔 어울리지 않는 섀도우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뛰었으며, 베니테즈 감독 부임 이후로는 수비적인 역습 시스템 속에서 비센테 로드리게스와 함께 거의 모든 볼 운반과 패스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골까지 넣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발렌시아는 디에고 시메오네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같은 저득점-저실점 운영을 하는 팀이었으며, 3년간 리그에서 두번이나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경기당 골 기록은 처참했으며, 이는 아이마르의 책임이 아닌 최전방의 득점원들인 욘 카레브와 살바 바예스타 등의 부진이 매우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후 공격형 미드필더 기용을 선호하지 않는 컴팩트한 전술을 운용하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키케 산체스 플로레스 감독을 거치면서 아이마르도 자연스럽게 부침을 겪었다.

당시 발렌시아의 전술은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자레스로베르토 아얄라가 이끄는 막강한 수비진 그리고 다비드 알벨다루벤 바라하가 지켜 주는 철통 방어 속에서, 공격 시엔 아이마르에게 일단 볼을 주고 서커스를 시키는 것이었다. 아이마르가 홀로 우격다짐으로 무언가를 창조해내면, 스페인의 램파드라 불리우던 루벤 바라하가 공격 상황에 난입하여 해결하거나, 욘 카레브가 포스트 플레이를 하거나, 비센테 로드리게스파비우 아우렐리우가 개인 기량으로 골을 넣는 것이 주된 패턴이었다. 이후, 빈공 문제는 다비드 비야가 영입되면서 다소 해소되었으나, 아이마르의 입지는 옛날같지 않았다.

아이마르의 최대의 장점은 예측하기 어려운 유니크한 테크닉과 상황 판단, 팀플레이였다. 볼을 갖고 묘기를 부리는 듯 기묘한 테크닉이 뛰어나면서도 동시에 실용적인 기술들을 많이 구사했다. 호나우지뉴처럼 화려한 헛다리 등의 삼바 축구식 기술들은 구사하지 않았으며, 엔조 프란체스콜리 같은 남미의 엔간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간결한 테크닉을 많이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바르셀로나를 상대할 때의 기술들이나, 맨유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의 활약에서 잘 나타난다.

남미 역사상 손꼽히는 플레이메이커 중 하나인 라이벌 리켈메와 비교하면 경기 지배력과 운영 능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일찍이 쿠페르 감독 밑에서 유럽 축구를 접하며 몸소 익혔던 아이마르는 플레이에 좀 더 유동성이 있었고, 덕분에 전방에서 수비하는 것에도 적극적인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거친 태클들도 마다하지 않으며 부지런히 뛰었으며, 당시 남미 테크니션들에게선 매우 보기 드물게 이타적이었다. 실제로 공을 끄는 플레이보다는 짧은 패스 위주의 경기 운영에 적재적소의 드리블과 돌파를 더하던 유형이었다.

이는 훗날 리오넬 메시에게도 영감을 주는 부분이었다. 현재 메시의 플레이스타일은 아이마르한테서 가져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소년 시절 메시는 작은 신장과 불리한 신체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드리블과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던 아이마르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으며 자신의 우상임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자신의 드리블과 패스가 아무리 뛰어나도 동료들과 연계하려는 이타적인 후속 무브먼트가 곧바로 동반되지 않으면, 2:1 패스와 공간 창출은 힘든 것이기 때문에 아이마르는 늘 2:1 패스를 노렸고, 이것을 매우 잘했다. 이러한 부분은 당시 본인 위주의 정적인 움직임에만 머물던 클래식한 10번들에게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이마르는 기술적이면서 동시에 헌신적이었으며, 이타적이고 경기 운영이 뛰어났다. 빠른 속공 게임과 정적인 지공 게임을 모두 컨트롤 할 수 있는 운영 위주의 플레이메이커였으며, 그 시대의 공격형 미드필더답게 스탯 생산성은 현대의 선수들에 비해서 뛰어나지 못했으나, 그것을 상회하는 높은 클래스를 가진 선수였고, 2000년대 초중반 카카와 더불어 '남미에서 건너온 재능이 유럽식 경기 운영을 받아 들여 성공을 이룬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로 남아 있다.


5. 기록[편집]



5.1. 선수[편집]



5.1.1. 대회 기록[편집]


  • CA 리버 플레이트 (1996~2000, 2015)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1997 A[5], 1999 A, 2000 C[6]
    • 수페르코파 수다메리카나: 1997






5.1.2. 개인 수상[편집]




5.2. 감독[편집]



5.2.1. 대회 기록[편집]


  • 아르헨티나 U-17 축구 국가대표팀 (2017~ )
    • 남미 U-17 챔피언십: 2019


6. 아이마르에 대한 헌사[편집]


파일:pabloaimaratz.jpg

당신의 마법을 즐길 수 있도록 허락해줘서 고맙다.

나의 우상이자 최고의 선수인 파블로 아이마르가 은퇴를 발표했다. 그의 삶 다음 페이지도 최고가 되길 기원한다.

리오넬 메시


아이마르는 현역 선수들 가운데 내가 돈을 지불하고 플레이를 보고 싶은 유일한 선수다. 지난 몇 년간 아르헨티나 최고의 선수다. 리켈메사비올라보다 뛰어나다.

디에고 마라도나


아이마르가 위대한 선수가 될 것이라는 증거가 되는 경기였다. 그는 모든 걸 다 가졌다. 완벽한 볼 컨트롤, 훌륭한 포지션 감각. 아이마르는 그의 동료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빼어난 터치까지 갖췄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아이마르는 유럽에서도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선수다. 아직 어리지만 이미 훌륭하고, 앞으로 점점 더 발전할 것이다. 몇 년 뒤 그가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나? 이렇게까지 기대되는 선수를 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다.

요한 크루이프


아이마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수년 전 발렌시아에서 활약했던 굉장히 재능이 뛰어난 선수다. 우리는 그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알렉스 퍼거슨


아이마르 또한 최고의 선수이다. 리켈메와 마찬가지로 아이마르에겐 다른 선수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재능이 있다. 이 둘은 스스로 경기를 결정 지을 수 있는 선수들이다.

후안 파블로 소린



7.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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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로만 리켈메와 함께

리켈메와 아이마르 둘은 서로 CA 리버 플레이트CA 보카 주니어스,발렌시아 CF비야레알 CF의 플레이메이커 이면서 국가대표에서 주전 경쟁을 하는 라이벌 관계와 마찬가지인데 서로 친한사이다. 간혹 몇몇 리켈메 팬들이 국가대표에서 아이마르가 리켈메 백업이었다고 펌하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이마르가 부상으로 폼이 많이 떨어진 사이 리켈메가 크게 활약한 시기에 국한된 이야기일 뿐이다. 리켈메 팬들은 절대 그런 소재로 공격하면 안될 것이 아이마르는 22세때 무려 아르헨티나 역사상 역대급 드림팀이라는 01-02 국가대표에 발탁돼서 대표팀 핵심자리인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새로운 천재의 탄생이라는 신선한 존재감을 어필했다. 반면 그 당시 리켈메는 유럽진출이 지연되고 있었고 대표팀은 커녕 해외축구팬 들에게 생소했었다.

파일:1_johnamor.jpg

남동생이 한 명 있다. 이름은 안드레스 아이마르로 그 또한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뛴 축구선수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망주로 여겨졌으나 별다른 성장을 못 이루고 아르헨티나 리그 안에서 여기저기 이적을 다니며 2014년에 커리어를 마감했다.

여담으로 디에고 마라도나지네딘 지단을 좋아한다고 한다. 별명은 파블리토와 어릿광대 등이다. 하비에르 사비올라와 친하고, 그의 어머니는 제2의 부모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수줍음을 잘타는 성격이고, 기자단과 말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독서와 음악 감상을 즐긴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이며, 파티를 즐기지 않는 편이다. 자신이 축구 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여자들은 자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리오넬 메시가 자신의 우상이라고 여러번 지목한 것으로 유명하다. 얼마나 존경하는지, 스스로 아이마르를 넘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도 메시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답변을 남겼다. 12-13 시즌 당시에는 챔피언스 리그에서 둘이 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데, 경기 후 메시의 표정을 보자.# 2014년 발롱도르 시상식 당시엔 아이마르가 메시에게 영상 편지를 띄우는 이벤트가 마련된 것이 상당히 유명한 일화인데, 상영된 영상 메시지 속에서 메시에게 아직도 어린시절에 축구를 즐겼던 것처럼 축구를 하는게 즐겁냐는 질문을 던졌다. 메시의 대답은 긍정. 영상 당시 FC 바르셀로나는 메시와 루이스 엔리케 감독과의 불화설 및 연이은 패배 때문에 흔들리던 시기였는데 우연의 일치인진 몰라도 이 영상편지를 본 이후 메시는 불화설과 갈등을 봉합하고 충공깽급 활약을 펼치며 트레블을 이끄는 주역이 된다. 팬들 사이에선 우상인 아이마르의 메시지가 메시의 동기부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냐는 이야기도 있다.

인터넷 정보가 비교적 정확하지 않았던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유독 아이마르가 의대 출신이라는 이상한 유언비어가 정설로 퍼져 있었다. 당시 한국에선 외국 배우, 가수, 스포츠 선수 등을 가리지 않고 이상하리만치 듣도 보도 못한 유언비어들이 날조되었던 경우가 많은데 아이마르도 그중 하나였다. 아이마르 관련된 게시글이면 의대 출신이라던지, 치대 출신이라던지 하는 댓글들이 당연하다는듯이 달렸었다. 물론 당연히 낭설이었다.

애초에 대학을 온전히 졸업하고서 20대 중반이 돼서야 프로 축구 선수로 데뷔해 성공하는 것은 유럽이나 남미 등지에선 불가능하다. 북미권이나 한국, 일본 등에선 적지 않은 선수들이 우선 20대 초중반까지 대학에 다니면서 대학 축구팀에서 경력을 쌓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듯이 프로팀에 들어가는 것과 달리 유럽이나 남미에선 일찍이 10대 중후반부터 프로에 데뷔하는 게 비일비재하고 곧바로 프로 직업인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 프리미어 리그 등에서 현역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의대 공부를 했다거나 그외 기타 교육 및 자격증 등 자기 개발을 하는 사례들도 보도가 되었으며,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도 많겠으나 전반적으로 축구 선수에게 인문학적인 대학 교육은 여전히 거리가 먼 영역이다. 아이마르의 경우, 유소년 시절 축구뿐 아니라 학교 공부도 워낙 잘 해서 의대에 지망할 수도 있었지만 프로의 길을 위해서 포기했다는 기사가 과거에 나왔는데 그게 와전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그마저도 당시 잘못된 뉴스가 전파되어 들어 온 설이나 루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 공격형 미드필더[2] 2013년 시즌까지 말레이시아 슈퍼 리그는 2명의 외국인 선수만을 선수 명단에 올릴 수 있었으나, 2014년 시즌부터 아시아 쿼터 1명을 포함한 4명으로 확장되었다. 말레이시아 리그는 1월부터 새 시즌이 시작되므로 6개월간 출전하지 못했던 것.[3] 그러는 스칼로니 감독 자신도 메시가 골을 넣기 직전에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거나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4] 두 사람이 이토록 긴장한 이유는 첫 경기인 사우디전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기력이 점차 올라오면서 결국 결승까지 도달하고 우승까지 이뤄냈지만, 멕시코전 때 아르헨티나는 우승은 커녕 최약체 사우디에게도 패배당할 정도면 조별예선 탈락 위기라고 연일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다.[5] Apertura(아페르투라)[6] Clausura(클라우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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