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케이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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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케이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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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AFC 아시안컵




팀 케이힐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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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前 축구 선수


파일:c22.jpg

이름
팀 케이힐
Tim Cahill

본명
티모시 필리가 케이힐
Timothy Filiga Cahill[1]
출생
1979년 12월 6일 (44세)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
국적
[[호주|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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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사모아|

사모아
display: none; display: 사모아"
행정구
]]

신체
178cm / 체중 77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2], 미드필더[3] / 은퇴)
축구 경영인
소속
유스
시드니 올림픽 FC (1995~1997)
시드니 유나이티드 FC (1997)
밀월 FC (1997~1998)
프로
밀월 FC (1998~2004)
에버튼 FC (2004~2012)
뉴욕 레드불스 (2012~2015)
상하이 선화 (2015~2016)
저장 뤼청 (2016)
멜버른 시티 FC (2016~2017)
밀월 FC (2018)
잠셰드푸르 FC (2018~2019)
기타
호주 대표팀 (2022~ / 단장)
국가대표
108경기 50골[4] (호주 / 2004~2018)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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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
5. 은퇴 이후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팀 케이힐에 대한 언사
8. 여담



1. 개요[편집]


오스트레일리아의 전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로 호주의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중 한명인데 한국의 박지성과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어[5] 호주에서 축구를 안보는 사람들도 팀 케이힐은 알 정도이다. 사모아인 어머니와 아일랜드계 잉글랜드인 아버지 사이에서 형 Sean, 누나 Dorothy, 남동생 크리스와 함께 네 자녀 중 세 번째 자녀로 .태어났으며, 서사모아 청소년 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하였다.[6]

키는 178cm로 큰 편은 아니지만, 점프력이 매우 뛰어나다. 2011 아시안컵, 2015 아시안컵에서 한국 상대로 뛰었을때 보면 더 큰 한국 수비수보다 더 높게 점프를 한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아일랜드 출신이며 호주에 정착하기 전에 상선에서 일했으며 그곳에서 리깅 및 트롤 어선으로 일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고관절 부상을 입어 일을 할 수 없게 된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호텔 직원과 공장 노동자로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며 그의 가족이 임대료 때문에 자주 이사를 다녔다.

런던에서 자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팬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프리미어 리그 경기를 시청했다.

형제들과 매주 지역의 공원에서 축구 훈련을 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규율과 완벽주의적인 성격이 강해졌으며. 그의 가장 큰 영향은 사모아 문화와 규율, 근면, 인내에 대한 신념을 가르친 외할머니 에게서 나왔다.

에버튼 통산 프리미어리그 228경기를 출전하여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 입성 조건을 충족하였다

2. 클럽 경력[편집]


케이힐은 유소년 클럽 시드니 올림픽에서 5년을 보낸 뒤 그리스 문화를 배우고 심지어 그리스어까지 배웠던 케이힐은 코치가 자신이 너무 작고 느리다고 여겨져 방출되었으며 좌절에 낙담한 그는 속도와 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드니 근교의 리드콤에 있는 뉴사우스웨일스 스포츠 연구소에 합류했다. 같은 해, 그는 시드니 올림픽에서 18세 이하 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 결과 1군으로 승격되었고 15세의 나이로 클럽에서 뛰는 최연소 선수가 되었으며, 교체 선수로 데뷔를 하고 헤딩으로 첫 골을 넣었다.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18세 이하, 21세 이하, 성인팀을 통틀어 총 30골을 기록하며 클럽의 최고 득점자로 부상했다. 그 후 시드니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21세 이하 팀의 일원이 되었고, 그곳에서 필 파벨라 감독 밑에서 상당한 출전 시간을 받았고 결국 1997년 3월 22일 세인트 조지 스타디움에서 세인트 조지와의 0-0 리그 무승부 경기에서 교체 선수로 시니어 데뷔를 했다.

케이힐이 영국에 앨런 뱃스포드에게 재능을 시험받을 기회가 생겼는데 그에게 여행 비용을 대느라 1만 달러를 대출 받았고 가족들은 파산하고 빚을 지게 되었는데, 형은 빚을 갚고자 축구와 학업을 그만두고 기계공으로 하루종일 일했다고 전해진다.

2.1. 밀월 FC 1기[편집]



파일:timcahill290118a.jpg


자국의 시드니 유나이티드 유스팀을 거쳐 밀월 유스 팀에서 1년을 보낸 뒤, 1998년 5월 2일 AFC 본머스전에 출전하며 프로 데뷔를 한 케이힐은 다음 시즌부터 1군 레귤러 멤버로 활약하며 1998-98 시즌에 풋볼 리그 컵 결승 진출을 이끌었고, 2000-01 시즌에는 3부리그에서 구단 역사상 최다 승점인 93점을 기록하며 2부리그 승격을 확정짓는데 견인했다.

밀월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냈던 2003-04 시즌에는 선덜랜드 AFC와의 FA컵 준결승전에서 결승골을 터트리며 구단 역사상 최초로 결승 진출시켰고, UEFA 컵 진출권까지 확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결승에서는 아쉽게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만나 전력 차를 실감하며 0:3으로 패하면서 아쉽게 우승컵을 안기지는 못했지만, 팀의 중심 선수로 활약하며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케이힐은 밀월에서 6시즌동안 249경기에 출전하여 56골을 기록했다.


2.2. 에버튼 FC[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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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 시즌을 앞두고, 그는 150만 파운드에 에버튼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에버튼에서 케이힐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첫 시즌부터 최상위 리그인 프리미어 리그에서 주전으로 맹활약 했다. 그는 구단 최다 득점자였으며, 팀을 4위로 이끌어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으로 보내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7]

이후에도 케이힐은 미켈 아르테타, 리온 오스만, 마루앙 펠라이니 등 훌륭한 미드필더들과 함께 에버튼의 강력한 미드필더 진을 형성하여 에버튼을 중상위권 팀으로 유지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고 2006년 10월, 케이힐은 발롱도르 50인 후보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는 무릎과 발 부상으로 2006-07 시즌의 대부분을 결장했지만 시즌이 끝날 무렵 5년 연장 계약을 체결했다.

케이힐은 2007-08 시즌 도중 부상에서 복귀하여 2007년 10월 25일 수페르리가 엘라다라리사 FC 와의 홈 경기인 클럽의 첫 번째 UEFA 컵 조별리그 경기에서 14분 만에 다이빙 헤딩슛으로 득점하여 3-1 승리를 거두었고 10월 31일 리그 컵에서 루턴 타운을 상대로 연장전 승리를 거두며 에버턴을 5년여 만에 첫 리그 컵 8강에 진출시켰다. 그의 에버턴 소속 100번째 프리미어 리그 출전 경기는 선더랜드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야쿠부 등 공격수들이 줄부상을 당한 2008-09 시즌에는 사실상의 공격수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 역할에서 1월 19일 그는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후반 동점골을 기록하여 딕시 딘 이후 안필드에서 통산 세번의 득점을 올린 첫 번째 에버튼 선수가 되었다. 그의 통산 100번째 골은 2009년 1월 28일 구디슨에서 열린 아스널과의 경기에서 기록하였는데 리버풀에 이어서 2경기 연속골이다.

2009-10 시즌 후반에 FA컵 3라운드에서 칼라일 유나이티드 FC를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며 에버턴 소속으로 50번째 골을 기록했으며 2010년 4월 25일, 풀럼과의 경기에서는 에버튼 소속으로 200번째 출전을 달성했다.
에버튼 팬들은 그가 약간 키가 작고 날씬하기 때문에 찰스 디킨스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Tiny Tim"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2010년 4월 14일 아스톤 빌라 FC를 상대로 두 골을 기록했는데, 두 골 모두 헤딩으로 득점하여 시즌 골 기록을 9골로 늘렸으며 3일 후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케이힐은 90분에 결승골을 터뜨려 에버턴에게 3-2 승리를 안겨주었다.

2010-11 시즌 아시안컵에 차출되기 전 전반기에는 리그에서 8골을 넣을 정도로 득점 감각이 뛰어났으나 아시안컵에서 발 부상을 안고 오면서 후반기에는 침묵했다. 이 골가뭄은 2011-12시즌까지 이어져 2010년 12월 맨시티전 득점 이후 2012년 1월 블랙번전에서 득점하기 전까지 34경기 연속으로 무득점을 기록했었다.

2011-12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날 것으로 밝혀지면서 8년간 에버튼 생활을 마무리할 것으로 보인다.

2012년 5월 13일, 에서 치러진 뉴캐슬과의 최종전에서 경기 종료 후 상대 미드필더인 요앙 카바예와 언쟁을 오간 뒤 폭력적인 행동으로 퇴장을 당하면서 아쉬운 마무리를 했다. 이후 케이힐은 "클럽과 팬들을 포함한 에버튼의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지난 8년 동안 에버튼 선수가 된 것은 특권이었고 매우 영광이었다. 떠나는 결정은 어려웠지만, 나는 항상 에버튼을 지원할 것이며, 클럽의 미래에 행운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히면서 팬들의 심금을 울렸다.

프리미어 리그 통산 228경기 56골 23도움 에버튼 통산 278경기 69골 29도움을 기록하였는데 프리미어 리그 최다 득점 에버튼 구단 역대 3위의 기록이다.#

강팀에게 기록한 순도 높은 골과 도움들도 많았는데 아스널에게서 통산 4골 1도움 리버풀에게 통산 5골, 첼시에게 통산 3도움, 맨유에게 통산 2골, 토트넘[8]에게 2골을 기록하였으며 본격적으로 강팀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2009-10 맨시티에게서 2골 1도움을 기록하였다.

2.3. 뉴욕 레드불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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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26일, 케이힐은 뉴욕 레드불스로 이적하면서 MLS로 진출했다. 이로써 프리미어 리그에서 수년간 상대했던 티에리 앙리와 같은 팀에서 재회하게 됐다.

2013년 10월 20일, 휴스턴 다이너모와의 경기에서 8초만에 득점하여 MLS 역사상 가장 빠른 득점 기록을 세웠다.[9]

레드불스에서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며 2013 시즌이 끝난 뒤 MLS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2015년 1월 26일, 아시안컵 4강 UAE전을 앞둔 묘한 시점에서 UAE의 알 와다 이적설이 나왔다. 미국 생활을 마치고 A리그로의 리턴을 기대했던 호주 팬들은 무척 아쉬워하는 중이다. 스타 플레이어가 은퇴를 앞두고 중동에 가는 것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2.4. 상하이 선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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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일, 상하이 선화로 이적하였다.

2015 시즌이 끝난 뒤 상하이와 연장 계약을 체결했지만 새로 부임한 그레고리오 만자노 감독이 전력외 통보를 하며 결국 2016년 2월 16일자로 팀과 계약을 해지하였다. 위약금은 두둑히 챙길듯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2월 17일날 케이힐의 에이전트가 한국에 체류중이라 하며 K리그행도 적극적으로 검토중이라고 한다. 중국 슈퍼리그 항저우 그린타운 에서도 관심 보이고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항저우 부회장은 케이힐 영입에 부인한 상태 48시간 안에는 거취가 결정될 거라고 한다.

나이가 많긴해도 지난 중국리그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여줌으로 아시아리그 에서 검증받은거나 마찬가지기에 많은 팬들이 그의 K리그 행을 바라고 있는 중이다. 2월 19일 오후에 나온 기사로는 중국, 일본, 한국 세곳에서 영입제안을 받았고, 호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현재 K리그에서 수원 삼성 블루윙즈, 울산 현대, 포항 스틸러스, 제주 유나이티드, 성남 FC, 서울 이랜드가 관심을 가지고있고 이중 약 3구단이 정식 오퍼를 보냈다는 루머가 있다.


2.5. 항저우 뤼청[편집]


2016년 2월 21일 강하게 링크되었던 항저우 그린타운(항저우 뤼청)과 6월까지의 단기계약을 맺었다. 항저우 감독으로 홍명보가 부임한 상태라 이래저래 국내 언론에 많이 노출될 듯 싶다.


2.6. 멜버른 시티 FC[편집]


계약기간 종료 후 재계약을 맺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와 2016년 8월 11일, 멜버른 시티 FC에 3년 계약의 조건으로 입단했다. 2년동안은 선수로 활약하고, 3년차부터는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한다.

10월 15일 멜버른 빅토리 FC와의 맬버른 더비에서 A-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후반 27분 35m 거리에서 환상적인 발리슛으로 득점을 신고했고, 더비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결과는 4:1.

2017년 2월 4일, 멜버른 빅토리와의 경기에서 1:1 동점 상황에서 교체로 출전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두번째 골 실점에 대해[10] 핀정에 항의하다가 심판에게 모욕적인 언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퇴장을 당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났다. 호주 축구 역사상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에 퇴장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2017년 12월 6일, 소속팀과 계약을 해지하였다. # 그러나 호주가 월드컵에 진출했고, 본인도 자신의 커리어를 월드컵에서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그러기 위해선 월드컵 개막 전까지 뛸 팀을 찾아야 했다.


2.7. 밀월 FC 2기[편집]


본인이 프로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밀월 FC에 2018년 1월, 단기 계약을 맺으며 입단했고, 2017-18 시즌이 끝난 뒤 팀을 떠났다.


2.8. 잠셰드푸르 FC[편집]


그리고 2018-19 시즌 인도 슈퍼리그 잠셰드푸르 FC와 계약을 맺으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2019년 3월 28일, 현역 은퇴 소식을 알렸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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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힐은 2004년 3월 30일 런던 로프터스 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친선경기에서 호주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으며 2004년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Cahill은 2004 OFC 네이션스컵에서 호주 대표팀으로 출전하여 6골을 넣으며 대회 득점 2위로 대회를 마쳤고, 최종 라운드에서도 득점 1위에 올랐으며 호주는 역사상 네 번째로 대회에서 우승했다. 대회에서 우승한 호주는 2006 월드컵 지역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에서 승부차기 끝에 우루과이를 꺾고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는데 케이힐도 이 경기에 출전하였다.

2004년 오세아니아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아시아 축구 연맹 가입 이후 유럽에서 성공한 아시아축구연맹 지역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FIFA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다. 이 때 넣었던 2골이 그 유명한 일본을 침몰시킨 대역전 경기이다! 히딩크 감독이 바로 '정의가 승리했다'라고 포효했던 그 경기다.[11]

현재까지 FIFA 월드컵에서 총 5골을 넣어 오스트레일리아 선수 중 FIFA 월드컵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에 올랐다. 호주가 2007년 아시아축구연맹에 가입한 이후 처음으로 출전한 2007 AFC 아시안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초로 AFC 아시안컵에서 골을 넣은 선수가 되었다.

2010년 FIFA 남아공 월드컵 독일과의 경기 중 후반 11분에 다이렉트 퇴장을 당해서 가나전에 뛰지 못했다. 이후 세르비아와의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자신보다 약 10cm가 더 큰 네마냐 비디치와의 공중경합에서 완전히 승리하여 날카로운 헤더를 성공시키며 2-1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독일에 0-4로 지고 가나와의 경기에서 어처구니없는 1-1 무승부 때문에 골득실에서 가나에 밀리며 조 3위로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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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힐은 골을 넣으면 언제나 코너로 달려가 섀도 복싱을 하는 세레머니로도 유명하다.


3.1. 2006 월드컵[편집]


F조에 브라질, 일본, 크로아티아와 속했다. 일본전에서 2골로 3대1 승리, 크로아티아전 0대0 무승부, 브라질전 0대2로 1승1무1패, 조 2위로 16강 진출했다. 16강에서 만난 이탈리아와 비등비등하게 경기했지만 막바지에 PK를 내줘 0:1로 졌다.


3.2. 2007 아시안컵[편집]


호주는 4포트 배정을 받았다. 오만전에서 1골을 넣고 1대1, 이라크전 1대3 패, 태국전 4대0. 1승1무1패로 A조 2위로 8강에 갔다. 8강에서 일본과 1:1, 승부차기 3:4로 졌다.


3.3. 2010 월드컵[편집]


D조 독일, 가나, 세르비아와 한 조. 독일전 0대4 패, 팀케이힐은 후반 10분경에 퇴장당했다. 가나전 1대1 무, 세르비아전은 1골을 넣고 2대1 승리했다. 1승1무1패로 가나와 동률이지만, 가나는 2득점 2실점, 호주는 3득점 6실점으로 골득실로 탈락했다.


3.4. 2011 아시안컵[편집]


호주는 2포트를 받았다. C조에 바레인, 한국, 인도와 함께 호주가 포함되었다. 인도전 2골을 넣고 4대0 승, 한국전 1대1 무승부, 바레인전 1대0 승리를 했다. 골득실에서 호주는 6득점 1실점, 한국은 7득점 3실점으로 앞선 호주가 조 1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8강 이라크전에서 연장 후반에 득점, 1대0 승, 4강전 우즈베키스탄전 6대0 승리를 했다. 결승전에서 일본과의 연장전 혈투 끝에 리 타다나리(이충성)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3.5. 2014년 브라질 월드컵[편집]


일본, 이란, 한국과 함께 월드컵 3포트를 받았다.
B조 조별예선에서 칠레네덜란드를 상대로 각각 1골을 넣었으나, 팀은 칠레전 1:3과 네덜란드전 2:3으로 모두 패배. 마지막 스페인전도 0:3으로 모두 3실점 패배를 했다.



특히 네덜란드전에서는 선제골 허용 이후 1분도 안되어서 동점골을 터뜨렸다. 공격 진영 오른쪽에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으로 맥고완이 롱패스한 것을 팀 케이힐이 그대로 왼발 발리슛으로 연결한 것. 강력한 케이힐의 발리슛은 그대로 크로스바를 맞고 골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3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시아 선수로는 월드컵 개인 통산 5골을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12]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경고 누적으로 인해 최종전인 스페인과의 경기에 뛸 수 없었다는 것이다. 케이힐 없는 호주는 팥없는 찐빵과 같으므로 매우 아쉬운 상황. 전망에 비해 꽤 선전했지만 아쉽게도 승리가 없었던 호주는 스페인을 상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려했지만 케이힐의 결장으로 매튜 레키나 브레시아노, 타가트 등 후배들에게 맡길 수 밖에 없게되었다.

한편 본인의 반응은 '후회없다.'는 반응. 네덜란드 전 후 호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해 뛰었다. 내가 한 경기를 더 뛰고자 느슨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다면 여기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순간 순간 최선을 다했고, 결국 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을 다섯 번째 골을 만들었다. 경고를 받은 것에도 후회는 없다."라는 폭풍간지의 대사를 날리며 장렬히 월드컵 무대에서 퇴장했다.

여담으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케이힐은 조별리그 첫 게임이였던 독일전에서 레드카드를 받아서 두번째 게임이였던 가나전에서 뛰지 못했다. 2006 월드컵을 합쳐서 월드컵 통산 총 8게임을 뛰었는데 무려 5골이나 넣었다.


3.6. 2015 아시안컵[편집]


이란, 일본, 우즈베키스탄과 함께 1포트를 받았다.
한국, 오만, 쿠웨이트와 A조가 되었다. 한국과 대회 2연속 같은 조가 되었다. 쿠웨이트전에서 1골을 넣고 4:1 승, 오만전 4:0 승, 한국전 0:1로 조 2위로 8강 진출을 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 쿠웨이트전에서 뜻밖의 선제골 허용으로 끌려가던 호주를 구원하는 동점골을 작렬하고 전매특허인 시원한 섀도 복싱 세리머니를 보여주었다. 이후 조별리그에서 추가 득점은 없었으나 특유의 존재감으로 수비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여 조별리그에서 호주가 무려 8골을 득점하고 각각의 골 자체도 모두 다른 선수로부터 나오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2015 AFC 아시안컵 호주/조별리그 A조, B조 참조.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한국전에서는 이미 서로 2승으로 8강 진출을 확정한 상태였으므로 체력안배를 위해 1:0으로 뒤지던 후반 71분에 교체 출장했다. 여전히 문전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부족한 시간탓인지 동점골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실패. 그래도 틈틈이 후배들을 다독이며, 침체된 분위기를 바꿔보기 위해 평범한 심판 판정에도 강하게 항의하는 등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8강 중국전에서 2골, 2:0 승.
8강 중국전에서는 선발 출장으로 두 골을 몰아쳐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경기 내내 호주가 중국을 몰아붙였지만 좀처럼 골이 터지지 않아 초조하던 후반,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올라오던 짧고 높은 크로스 상황에서 골대를 등지다가 벼락같은 바이시클 킥을 작렬하여, 그 때까지 과도하게 수비에 치중하던 중국에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 골을 기록하기 직전 페널티 에어리어 내 위치 선정 과정에서 그의 뒤에 있던 중국 수비가 갑자기 드러누웠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슛. 경기가 살짝 초조해지던 상황에 나온 천금같은 골이라 동료들의 환호가 엄청나 깃발복싱 세리머니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후 수비 조직력이 와르르 무너지며 사실상 전의를 상실한 중국 수비진을 유린하다가 헤더 골로 쐐기를 박았다. 헤더를 시도하기에는 골문에서 살짝 거리가 있었지만 용수철처럼 솟아올라 빨랫줄처럼 구석에 정확히 꽂히는 명품슛을 만들어냈고 중국 골키퍼는 제대로 반응하지도 못했다. 이후 체력안배를 위해 80분에 교체 아웃되었다. 이 때 브리즈번 렉탱귤러 경기장을 찾은 4만5천명의 관중 대다수가 기립박수를 보냈다. 두 골 모두 아시안컵 골 베스트에 꼽힐 만한 명장면들이었다.

4강 아랍에미리트전에서는 득점은 못했지만 2:0 승리로 결승에 진출했다.

한국과의 결승전에서는 득점을 기록하진 못했지만 무난한 활약이었고 결국 연장을 가서 한국을 2-1로 꺾고 2015 AFC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한다.

대회 이후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단짝 마크 브레시아노는 국대 은퇴를 선언하고 떠났지만, 케이힐은 여전히 대표팀에서 활약 중이다.


3.7.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예선과 본선, 그리고 은퇴[편집]


2017년 10월 10일 현지시각 오후 8시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시리아와의 아시아 최종 예선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두 골을 넣고 맹활약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열린[13] 원정 1차전에서 1:1로 비겨 비교적 유리한 조건에서 경기를 시작하고도 5분만에 수비 실책으로 어이없게 골을 허용하면서 분위기가 가라앉을뻔 했지만 10여분이 지난 후 전매특허인 캥거루 헤더 슛으로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이후 1979년 생의 노장인데도[14] 연장전이 종료될때까지 활발하게 뛰며 기어이 역전 헤더 골을 만들어내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던 팀을 구해냈다. 팀의 멱살을 잡고 2018 러시아 월드컵 대륙간 플레이오프로 끌고간 것이나 다름없는, 한마디로 나이를 잊은 활약. 마지막 관문은 온두라스와의 플레이오프 혈전이다. 2차전에서 득점을 하고 비기거나 패배하지만 않으면 케이힐을 러시아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자국이 플레이오프 끝에 승리하면서 케이힐 역시 러시아에서 볼 수가 있게 되었다.

이듬해 월드컵 본선에서는 페루전에서 교체로 들어왔다. 팀은 2:0으로 패배하였기 때문에 16강 진출은 무산되었다.

2018년 11월 20일 그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가 될 레바논과의 평가전에서 후반 37분 투입되었다. 약 11분간의 경기를 소화하면서 은퇴 경기를 마쳤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기본적으로 매우 유니크한 유형의 선수였다. 본업은 중앙 미드필더이나 패스는 평범하고 창의성도 부족했지만, 득점력이 뛰어나다보니 나중에는 아예 점점 포지션이 올라간 경험이 있다. 단순히 득점력이 뛰어난 중앙 미드필더들은 많지만 그렇다고 아예 공격수로 올라가는 케이스는 드문데, 이런 유형의 케이스로는 스페인의 라울 가르시아 정도가 있다. 둘 다 사실상 포처 유형의 공격수가 중앙 미드필더로 뛰는 듯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졌다.

득점력 외에도 체력이나 슛, 활동량, 기동력이 좋았으며 특히 특출난 점은 에버튼 시절 리그 최고 수준이었던 서전트 점프와 헤더였다. 놀랍게도 이런 케이힐의 신장은 180cm가 채 되지 않았다. 당시 프리미어 리그에선 '헤더 떨궈주기' 하면 볼튼의 케빈 데이비스였고, '파워 헤더 슛' 하면 바로 에버튼의 케이힐이었다.

헤더 골을 무지막지하게 넣었으며, 그 외에 아크로바틱한 골들도 많이 넣었으며 운동 능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다만 노쇠화하면서 운동 능력과 체력이 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경기력이 떨어졌으며 자연스레 은퇴하였다. 특유의 코너 플래그를 샌드백 삼아 섀도 복싱을 하는 복싱 세레머니가 유명했다. 호주 출신이기에 캥거루 복서라고도 불렸다.


5. 은퇴 이후[편집]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호주 대표팀의 단장으로 부임했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 PFA 올해의 팀
  • 오세아니아 올해의 축구 선수: 2004
  • 에버튼 올해의 선수: 2004-05
  • 에버튼 선수단 선정 올해의 선수: 2004-05
  • 에버튼 올해의 최다 득점: 2004-05
  • 발롱도르 후보: 2006
  •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조별리그 1차전 (vs 일본)
  •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 조별리그 3차전 (vs 세르비아)
  • 호주프로축구협회 올해의 선수: 2008-09
  • 뉴욕 레드불스 최우수 선수: 2013
  • 뉴욕 레드불스 올해의 골: 2013
  • 뉴욕 레드불스 골든부트: 2013
  • MLS 베스트 XI: 2013
  • MLS 올스타: 2014
  • 베스트 MLS 플레이어 ESPY 어워드: 2014
  • AFC 아시안컵 토너먼트의 팀: 2015
  • AFC 아시안컵 토너먼트의 골: 2015
  • AFC 아시안컵 올타임 드림 XI: 2023[15]
  • AFC 아시아 월드컵 올타임 XI: 2020[16]
  • 서브웨이 사커루 세기의 팀: 2022 [17]


7. 팀 케이힐에 대한 언사[편집]


우리는 그가 얼마나 좋은 기량을 가졌고 중요한 선수인지 잘 알고 있다. 케이힐은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상당히 멋진 선수다. 그가 결장했던 중국전에서 케이힐의 빈자리를 느낄 수 있었고 6월까지 뛰지 못하는 것에 상당히 아쉽다.

핌 베어백[18]


나는 호주 대표팀 감독 시절부터 Tim을 알고 있었고 그를 내 스쿼드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름다웠지만 상대편으로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 에버튼은 매우 조직적이며 그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박스 주변에서 매우 날카롭고 위험하다

거스 히딩크[19]


그의 용감한 공중전이 골문을 위협한다. 훌륭한 도약력 뿐만 아니라 용맹하게 공을 따내 헤딩을 하며 발도 잘 쓰는데 한 시즌에 10골 이상을 득점하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는 좋은 선수들이 있었고 Tim은 확실히 최고였다.

데이비드 모예스 당시 에버튼 감독#


그가 가능한 역의 작은 카메오를 봤다. 그는 영리하다.

티에리 앙리#


이거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외국의 칼럼에서는 키웰과 비두카를 케이힐보다 위로 놓는 칼럼들도 꽤 많습니다. 축구 선수로서의 재능은 마크 비두카해리 큐얼이 위라고 볼지도 모르지만 전세계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알린 인물은 케이힐입니다. 호주의 역대 최다 월드컵 득점과 사상 본선 첫골과 멀티골 그리고 네덜란드에게 넣은 골은 월드컵 역대급 멋진골 이었어요. 고점의 재능은 키웰과 비두카가 위지만 꾸준함과 결정적 상황에서의 역량은 팀 케이힐이었어요.

한준희#



8. 여담[편집]



  •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의 아시아 2차예선의 조 추첨자로 나왔는데, G조에 5팀중 4팀을 아세안 소속 국가로 추첨하였다. 조국 호주에서는 종목을 불문하고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포츠인이다.

  • 2022년 1월부터 에버튼 FC의 경영진에 합류하게 되었다. 현재는 보직이 공식적으로 정해지지 않았지만 2022년 1월 새 감독 선임 당시 비토르 페레이라의 선임을 반대하고, 본인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던 프랭크 램파드를 적극 추천해서 새 감독으로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에버튼은 멸망했다-

  • 골 넣은 뒤에 코너 깃발로 달려가 복싱 세레머니를 한다.

  • 2022년 3월 28일, 29일에 열렸던 인플루언서 컵에 참가했다. 조원희 유튜브 영상에 나왔다. 해당 영상1, 해당 영상2.

  • 입방정 한 방에 인터넷에서 엄청나게 시달리고 있다.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에서 호주가 아르헨티나를 이긴다는 말을 했다가 온갖 종류의 욕설을 듣고 있다.# 가나가 대한민국을 완파하고 대한민국을 조꼴찌로 떨어뜨린 뒤 16강에 진출한다는 소리는 덤.

  • 사모아계 혈통을 지닌 선수로, 형제들 또한 축구선수였는데 팀 케이힐을 제외하고 모두 사모아 축구 국가대표팀으로 활약했다. 또한 아들인 카이아 케이힐도 축구선수의 길을 가고 있는데, 사모아 U-20 대표팀과 U-23 대표팀에 선발되어 경기를 뛰고 있다. 최근에는 2024 파리 올림픽 축구 오세아니아 예선대회에 사모아 대표로 참여해 조별리그에서 골을 넣는 등 주축으로 활약중이다.

[1] "카힐"이라는 표기를 사용하는 곳들도 있다. 영어식 발음 자체가 두 가지다. 본인은 "케이힐"이라는 발음을 선호하는 걸로 보인다.[2] 센터 포워드[3] 공격형 미드필더[4] 호주 대표팀 최다 출장 2위, 최다 득점 1위[5] 케이힐이 에버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시기에 박지성이 맨유에서 뛰고 있었는데 둘은 같은 물리치료사에게 치료를 받았던 사이라고 한다.[6] 그의 동생 크리스 케이힐도 축구선수 출신이며 그는 형과 달리 사모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선택해 A매치 15경기 7골의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7] 아쉽게도 3차예선에서 비야레알에게 패하며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8] 2004-05 시즌 9위, 2009-10시즌 4위 시절에[9] 이후 2015년 마이크 그렐라에 의해 깨졌다.[10] 실점 당시 선심은 이를 오프사이드로 판정했다. 그러나 주심이 선심의 판정을 뒤집고 득점을 인정했다.[11] 일명 8분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기인데 그 당시 일본에서의 시청률보다 한국에서의 시청률이 높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2] 이들 중 두 골은 호주가 오세아니아 소속이였던 시절인 2006년 월드컵에서 넣은 골이여서 아시아 선수의 월드컵 최다수 골 기록이라고 하기에는 좀 애매해다. 호주가 AFC소속으로 나온 월드컵들 중 케이힐이 넣은 골 수는 총 3골로 한국의 박지성, 안정환, 손흥민,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자베르와 동률이다. 게다가 엄연히 말하자면 케이힐은 현재 AFC 소속 선수이긴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 선수라 할수는 없기도 하다.[13] 시리아 현지 사정상 경기를 치를 여건이 되지 못했다.[14] 이동국과 동갑이다.[15] 팬 투표[16] 옵타 선정 베스트 XI에 포함되었다. #[17] 2022년은 사상 첫 호주의 A매치가 1922년 더니딘에서 시작된지 100년이 되는 해#[18]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시절 남아공 월드컵 지역예선에서#[19] 첼시 감독시절에 2008-09 FA컵 결승전을 앞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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