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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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고대
3. 건국 신화
5. 분열시대 및 몽골, 원의 통치
6. 원 쇠퇴기 및 잠깐의 독립, 그리고 통일
7. 청의 통치
8. 티베트 독립시기
9. 중국의 병탄과 통치


1. 개요[편집]


티베트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고대[편집]


티베트 고원인도 아대륙유라시아 대륙이 충돌하며 만들어진 히말라야 산맥과 함께 만들어졌으며, 최초로 발견된 인간의 흔적이 50만년전이지만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본격적으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1만년 전이라고 추정되는데 이때 이들이 원시적인 국가를 형성했다고 추측되지만 기록에서 확인할 방법은 전무하다.

티베트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1] 옛 샹슝 왕국의 게사르 왕[2]이 얄륭 고원, 파미르 고원, 인도 북부까지 영향력을 미쳤다는 링 왕국을 건국했다고 하나[3] 교차 검증이 되지 않으며, 이 인물이 구전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11세기이다.

티베트에 존재했던 첫번째 국가는 기원전 6~7세기에서 서기 전후에 존재했던 12 소방이라고 하는 국가 연맹체였다. 이들은 상호간의 전쟁을 거치면서 40개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어떤 문헌에서는 13개의 국가가 기록되어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처음부터 40개였다고도 한다. 이들 중에 샹슝 왕국이 가장 강했다. 내부적으로는 기원전 1450년경부터 존재한 걸로 전해지나 진위는 알 수 없다.


3. 건국 신화[편집]


티베트가 세워질 때쯤 초기의 티베트 6개 부족은 12개 부족으로 늘어난 지 오래였다. 그때는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도 없이 원시적인 연맹만을 이루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을 하나로 통합해줄 왕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의 수호산신이 사는 얄라삼뽀의 무당인 라씬과 무씬을 필두로 하여 제사장들이 정성스럽게 마련한 황금, 황료, 보석, 참파, 유락, 꽃, 보리술과 13말의 양, 소, 백마의 피와 고기를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대제사장 라씬이 고천문을 읽었다.

아! 열세겹 하늘의 주인이시여, 일곱겹의 하늘의 주인이시여

지고한 다주신이시여, 지고한 얄라삼뽀 산신이시여, 지고한 조상신이시여!

부디 오셔서 제물을 드십시오.

부디 오셔서 바다같이 풍성한 제물을 드십시오.

부디 오셔서 감미로운 피와 신선한 고기를 드십시오.

아! 열세겹 하늘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억만 태양의 찬란한 빛남이여

당신의 비할데 없는 고결한 몸이시여

당신의 바람과 구름 같은 준마같이 빠름이여

지상의 무리들이 당신께 머리를 조아립니다.

광명신의 아들이시여 부디 인간세계로 내려와주십시오.

부디 머리 검은 인간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당신의 지혜와 힘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당신의 비할바 없는 영광을 내려주십시오.

- 《돈황토번역사고문서》


그러나 이런 기도에도 하늘에서는 응답이 없었고 이에 사람들은 낙심해 마을로 내려왔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그곳으로 가니 눈과 피부가 녹색에, 물갈퀴가 달린 이상한 아이가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누구냐고 물었지만 말이 없었고 어디서 왔냐고 하니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사람들은 드디어 왕이 오셨다는 것을 깨닫고 어깨무등에 태워서 내려왔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을 '네치'(어깨무등)라고 지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티베트의 초대 첸포인 네치첸포였다. 티베트의 고문 경전들은 그를 색계의 13개 천신의 7형제 중 가운데 아들인 광명신으로 신격화시켜 하늘의 후예로 족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하강한 이 천신의 후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있다가 3년이 지나자 비로소 궁궐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궁궐이 지어지니 이곳이 바로 티베트에서 가장 오래되던 건축물인 융부라캉이었다.[4]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 물갈퀴가 떨어질 때쯤, 13세가 된 네치첸포는 때와 장소를 정해 수석 원로를 보내 신붓감을 맞이하도록 하였고, 그곳에 가자 푸르고 넓은 호수가 나타나니 그곳이 티베트에서 가장 성스러운 4대 성호인 얌독 호수였다. 이곳에 남루한 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있었는데, 정신이 이상했다. 그러나 융부라캉으로 데리고 와 목욕을 시키고 단장을 시키자 사실 매우 총명한, 남무무에 살던 용왕의 딸이었다(!) 거의 이쯤되면 허황옥이다 그리하여 티베트 사람들은 찬가를 부르며 결혼을 축하하였다.이때가 기원전 127년이라고 전해진다.

4. 토번 제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토번 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분열시대 및 몽골, 원의 통치[편집]


파일:Tibetischer_Kulturraum_Karte.png
분열기 동안 남아시아로 떨어져 나간 티벳 문명권 지역들은 라다크, 시킴, 부탄, 무스탕 등이 있다.

그 후 티베트는 다른 민족들에게 중앙아시아 지역을 빼앗겼으며, 토착종교 뵌교와 외래 종교 불교 간의 대립, 불교 내의 파벌 간 다툼과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조각조각 나뉜 군웅할거 시대를 맞이했다. 그리고 티베트는 분열하여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리며 주변 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장족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몽골과 티베트의 첫 조우는 1236년인데, 당시 소규모 부족의 족장이 몽골에게 투항하고 금나라에게 대항하는 것으로 기록이 시작된다. 1240년, 몽골 제국은 티베트를 제압하기 위해 항복한 탕구트 계열 장군에게 30,000명의 군사를 준 뒤 티베트를 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역사적인 까담빠 종파의 절 2개가 불에 타고 승려들이 학살당하는 등, 잔인한 결과가 많이 뒤를 따랐다. 하지만 세력 하나하나가 작아서 그런지 몽골의 다른 전쟁들보다는 훨씬 덜 피 튀기는 싸움이었다. 티베트를 완전히 흡수한 뒤 종교 지도자를 대리 통치인으로 선택해 티베트 불교 사캬파(홍모파)의 사캬틴진을 식민 정책의 동반자로 삼았다. 홍모파의 승려 파스파[5]는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샤머니즘, 경교, 이슬람 등 온갖 종교가 각축을 벌이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전파하였다. 쿠빌라이 칸전륜성왕의 칭호를 헌상받았다. 또한 고려와 같이 티베트는 원나라의 속국이긴 했지만 자치를 하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6. 원 쇠퇴기 및 잠깐의 독립, 그리고 통일[편집]


1346년부터 1354년 사이, 몽골에 의해 세워진 원 제국이 기울어져갈 무렵, 티베트에서도 새로운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티베트 불교의 또 다른 종파인 까귀파의 귀족 자제 창첩 걀첸은 원나라의 약화를 틈타 제국의 비호를 받던 기존 지배층이던 사캬파를 물리치고 새로운 독립 티베트 왕조인 팍모드루파 왕조를 열었다. 동시기에 세워진 명나라는, 이전의 원나라와는 달리 티베트와의 조공 관계를 유지하고 관등 국사라는 작위를 내리며 형식적인 위소제, 토사제 관부 관직을 설치하는데 그쳤다.[6]

다시 독립된 중앙정부를 얻게 된 티베트는 옛 제국의 과거를 되돌리는데 힘쓰기 시작했다. 토번 제국의 전 작위들을 다시 부활시키는가 하면 중국 학자들을 초청해 학문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또한 내치에 힘을 쓰기 시작하면서 아직까지 봉건제였던 티베트 각 지역의 유력자들을 회유해 제대로 통치하는 등, 티베트는 오랜만에 평화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현재의 티베트 하면 떠오르는 불교, 건축, 역사 등은 전부 이 독립의 시기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결국 1434년 내전이 일어났고, 정권은 린풍파라는 가문에게 돌아가면서 팍모드루파 가문은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이 린풍파 왕조는 또 한 번 짱파 가문에게 내전에서 지게 되었고 짱파 왕조가 티베트의 마지막 독립 왕조로서 티베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알탄 칸 시절 할하 몽골인들이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하고, 뒤이어 텡그리 신앙이나 이슬람, 네스토리우스파 등 여러 종교로 나뉘어져 있던 오이라트인들이 티베트 불교로 집단개종하였다. 할하 몽골인들이나 오이라트인들에게 있어서 티베트 불교의 권위는 그동안 유목 제국을 약화시켰던 왕위 계승권 문제로 인한 분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몽골의 수장들에게 칸의 환생이라는 집권 구실을 제공했였던 것이다.

짱파 왕조는 초반에는 다시 내전에 휩싸인 티베트 각 지역을 정복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는 행보를 보였으나 짱파 가문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겔룩파의 제5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Lobsang Gyatso, 1617~1682)가 오이라트의 호슈트부에게 군대를 빌려 짱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결국 짱파는 달라이 라마 5세의 계략에 넘어가 수도인 라싸에서 괴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판첸 라마의 중재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티베트는 이렇게 다시 통일되었고[7] 겔룩파는 이를 통해 정교일치체제를 구축하며, 티베트의 주 종파를 겔룩파로 만들었다. 티베트는 호슈트 칸국이 지배하다가 이후 오이라트계 준가르 홍타이지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7. 청의 통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청나라 치하 티베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명 제국은 광대한 티베트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을 주장하지도 추구하지도 않았다. 단순히 티베트의 다양한 종파와 부족 공동체에 대한 전통적인 중국식의 분리 통치 정책을 선호했을 뿐이었다. 중국 정복 이전의 청 또한 처음에는 티베트에 대해 관심이 거의 없었지만, 몽골과의 동맹 및 맞수 관계가 티베트의 종교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홍타이지는 1639년 달라이 라마에게 황궁 방문을 요청했다. 달라이 라마는 거절했지만 홍타이지를 보살과 문수보살로 동일시하고 있다는 답장을 보냈다. 달라이 라마는 결국 청의 중국 정복 이후인 1652년에 북경을 방문해 순치제에게 여러 높은 작위를 받았다. 청의 역사 기록들은 이러한 의례상의 교환들을 티베트가 청의 종주권을 수용한 것이라고 인식했지만, 이것이 티베트의 견해는 아니었다.

《하버드 중국사 청》 / 윌리엄 T. 로


청나라몽골계와 일부 튀르크계 종족들을 억제하기 위한 정치적 이유[8]로 처음 티베트를 스승의 땅으로 인정하였다. 이후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청나라의 황제는 달라이 라마황제의 스승으로 대우하였으며, 달라이 라마가 황궁을 방문할 때는 스승으로서 황제의 아래가 아닌 옆에 앉혔다. 당시 대청 질서에 속해있던 세력의 지도자 중에서는 유일하게 황제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이후 티베트와 청은 '스승과 시주자'의 관계로 유지[9]되었으며 청은 '서럼셔머 터허 암반'(Seremšeme Tehe Amban)이라는 내정 간섭 기관을 설치, 상당히 장기간 내정간섭을 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최근들어 이 암반 역시 사실상 티베트 내정에 관여한 일이 없었던 것을 증명하는 사료 등이 발굴되어 내정 간섭 기관이라기보다는 '주 티베트 청 대사관' 정도가 아니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연갱요가 캄 지역은 쓰촨성이나 윈난성의 일부로 재편하고 달라이 라마의 조세권을 제한하였으나, 티베트 본토에서 달라이 라마의 조세권, 징병권, 행정권, 외교권 등등은 그대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건륭제는 구르카의 티베트 침략을 격퇴했을 무렵 반청 의식이 잠재되어 있는 몽골계 귀족들이 자신의 자식을 환생으로 내세울 것을 우려하여 티베트 호법의 약화와 ‘금병추첨제'를 시행했다. 이에 따라 금병추첨제는 환생 수색에 상당히 활용되었고, 제11대 달라이 라마인 케둡걈초가 이 제도를 통해 임명되었다.

1788년에 네팔 왕국에 의해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고생을 꽤나 했다. 당시 티베트와 네팔 사이에 크고 작은 외교마찰이 있었는데 그 중 은화의 순도문제를 두고 대립하다 이를 빌미로 티베트를 다방면으로 침공한다. 전투민족으로 알려진 구르카답게 엄청난 노략과 학살을 저질렀는데 결국 참다 못한 티베트가 청나라에게 SOS치며 도와달라 외치자 건륭제는 이에 응해 군대를 보낸다. 그러나 역시 전투민족 답게 청군을 보기좋게 박살내고 이에 놀란 청은 엘리트 군인 팔기군을 보내지만 [10] 이들도 상당히 고전한다. 여러 전투를 거듭하며 청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을 한다. 결국 악랄함에 지친 청과 물량공세에 지친 네팔은 평화협상을 하게 되고 네팔이 청에 입조함으로써 평화가 찾아온다.

청말의 청이 쇠퇴하자 영국은 티베트에 세력을 뻗쳐 티베트의 반청귀족층과 합세하여 티베트를 청에게서 분리 독립시키려 하였다. 19세기 청나라티벳외몽골, 위구르에 대해 직접 영유권을 주장하며 서방의 접근을 경계해왔다. 물론 내몽골은 이미 만주족과 일체화되어 있었다. 1904년경, 영국인도제국네팔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고 시킴을 식민지화한 뒤 직접 티베트를 침공한다. 티베트의 지도자 제13대 달라이라마는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이들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1904년 8월 수도 라싸가 함락당한다. 어디서 많이 본 건데?

만주몽골은 티베트와 밀접한 관계였으나 지금 중국이 주장하는 '속국관계'와는 달랐으며, 원과 청은 한족의 나라인 중국이 아니라는 것이 티베트 측의 주장이기도 하다. 반대로 중국측은 원과 청이 중화제국임을 강조하며 티베트를 중국의 고유 영토로 주장한다.

이 무렵 암도 지역의 이번원이 폐지되고 1912년부로 칭하이성이 설치되었다.

8. 티베트 독립시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티베트(1912~1951)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여하튼 1912년 신해혁명으로 인해 청이 멸망하면서 티베트의 상황은 변화를 맞이한다.

달라이 라마 13세 툽뗀걈초는 청이 멸망하자 1913년 수도 라싸에 잔존한 중국군을 몰아내고, 중국과 세계에 "만주족의 나라와 세속적, 영적인 관계가 끝난 것으로 보아 티베트는 명실상부 독립국임을 밝힌다."라고 선언하였다.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정부는 네팔, 영국, 부탄 등과 국가와 국가 간의 지위로서 몇몇 조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 사회에서 티베트의 독립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영국은 심라 협정으로 내외몽골처럼 티베트를 분할하여 외티벳(서티베트)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자치국으로, 내티벳(동티베트)은 중국령 티베트(사천 서부 서강, 청해, 운남, 감숙의 티베트지구)로 삼는 타협을 권했으며, 한편으로는 티베트를 인도 지역 이권 수호를 위한 방파제로 삼고자 무기를 지원해주고 영국 공관을 설치, 공사를 파견하였다. 1914년 티베트 정부는 영국령 인도제국과의 국경을 맥마흔 라인으로 확정하였다.[11]

중화민국 국민정부 역시 티베트를 중국 영토로 여기고 있었지만 당시 청말민초의 난세로 티베트에 세력을 뻗칠 여유가 없어 종주권 주장만 할뿐이었다. 중화민국은 쓰촨성 서부를 포함한 캄 지방에 시캉성(西康省;서강성)을 설치하였고 그 일대를 지배 중이던 류원후이를 시캉성장으로 임명한다. 류원후이를 이용해 티베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12] 만주사변이 발생하며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기 바쁜 중앙이 티베트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지자, 1932년 달라이라마 13세가 군대를 이끌고 류원후이의 시캉성과 마부팡의 칭하이성을 공격, 중국-티베트 전쟁이 발발한다. 티베트의 영역인 암도와 캄을 탈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티베트군은 잠시 우세하나 싶었으나 류원후이군, 마부팡군, 그리고 마부팡을 진압하러 온 후쭝난의 중앙군 제1사단의 합동공격에[13] 결국 다시 뒤로 밀려났고, 평화협상을 체결해 금사강을 티베트와 시캉의 경계로 하기로 했다.[14] 중일전쟁 와중인 1940년 중화민국 정부는 달라이 라마 14세 뗀진걈초의 즉위식에 사절단을 파견한 후 1948년 티베트 정부가 강제로 몰아내기 전까지 이들을 티베트에 머무르게 하여,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라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영국 역시 제2차 세계 대전 중 티베트 지역에 소수의 군대를 파견해 은근히 이들을 괴뢰국처럼 대하고 있었다.


9. 중국의 병탄과 통치[편집]


하지만 2차 대전 종전 후 영국인도를 상실하고,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자 상황은 달라졌다. 자세한 내용은 중국의 티베트 침공 문서 참조.

중국 정부와 달라이 라마 측은 몇 차례의 협상을 해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인정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선에서 타협하게 된다. 이것을 '티베트의 평화적 해방을 위한 17조 협의'라고 한다. 위키백과의 17조 협의 항목

이것으로 이 문제는 일단락되는 것 같았고, 1950년대에 달라이 라마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의 티베트 대표로 베이징을 방문하여 몇 차례 마오쩌둥과 만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달라이 라마는 마오쩌둥이 자신을 아들처럼 대했다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달라이 라마 면전에 대고 티베트 불교의 문제점을 이야기 했으나, 달라이 라마의 회고록에 의하면 달라이 라마는 마오쩌둥이 자신과 그만큼 친하기에 그런 말을 자신의 면전에서 한 거라 여기고 있는 듯하다.

파일:attachment/dalai.jpg
1954년 베이징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가운데가 마오쩌둥, 왼쪽이 판첸 라마 10세, 오른쪽이 달라이 라마 14세.

그러나 차근차근 반종교정책, 토지개혁,과 같은 공산화 정책이 시행되자 기득권인 승려와 귀족층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나서 이 지역은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1958년에서 중국 전역에서 대약진운동이 야기한 대기근이 발생하자 원래부터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티베트의 반중 감정은 폭발하게 되었다. 1959년 이곳에서는 반중봉기가 일어났고, 이 봉기를 중국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면서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많은 티베트족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 네팔 등지로 망명을 떠났다.

달라이 라마 14세와 티베트 내각은 티베트 내에서의 독립운동의 가능성과 달라이 라마 14세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에 1959년 인도로 망명하여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 주(州) 다람살라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 지금에 이르고 있다.

중국 정부가 처음부터 실시한 정책은 반종교 정책이었다. 특히 주요 대상이 된 것은 티베트인들을 이끄는 지도자인 승려들이었다. 티베트인 대다수가 신봉하는 티베트불교의 승려들은 승직을 박탈당하고 노동 부대로 강제 편입되었다. 처형된 승려도 많았다. 그래서 수많은 승려들이 강제로 환속당했다. 아예 민중들 앞에서 알몸으로 남녀 승려(비구/비구니) 및 민간인 남녀 간의 성행위를 강제로 시키고 출산을 확인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더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불교 자체를 탄압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승려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 이에 수많은 승려들이 탄압을 피하여 인도로 망명을 떠났다. <티베트에서의 7년>, <쿤둔>이라는 영화를 보면 이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티베트인들은 티베트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렵, 벌목, 채광 같은 일들을 금기시하여 티베트의 자연환경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중국은 이곳에서 , 석탄, 우라늄과 같은 천연 자원을 캐기 위해 자연환경을 파괴 개발했다. 또한 표범, 과 같은 짐승들을 남획했는데 이로 인해 개체수가 급감하여, 현재는 중국 정부에서 멸종 위기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는 3,700개에 달하던 사찰 중 라싸 주변과 정치적으로 중요했던 동티베트의 13개 사찰만 남고 모조리 파괴되거나 감옥, 창고와 같은 곳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티베트어로 된 경전이나 불상, 탱화 같은 종교적 성물은 물론 티베트 전통의상, 신발 같은 공예품들은 대부분 압수 또는 소각당했다. 그리고 대부분 외국의 박물관(주로 북아메리카유럽)으로 팔려나갔다.(…) 또한 뵌교도들도 사당이 부숴지는 등 문화대혁명의 파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근년부터 중국이 티베트에 은근슬쩍 방사능 폐기물을 몰래 버리는 탓에 티베트족들이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언급도 보인다. 실제로 중국은 1960~70년대 과거 티베트의 영토였던 칭하이 서부 초원에 원자성(原子城)이라는 커다란 핵 연구소를 지어 놓고 수 차례에 걸쳐 지하 핵실험을 벌인 적 있어[15] 아예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이 원주민 보호구역에서도 안했던 짓거리다

그리고 2006년 10월에 벌어졌던 난민 총격 사건이나 2010년 8월에 벌어진 시위자에 대한 총격, 그 외의 여러가지 사건들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과연 죽의 장막 밑에서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고는 하나 여러 '티베트 인권단체'들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군에 의한 약탈 비구승들에 대한 집단강간 등등 수많은 악행이 자행되었고 현재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기존 백서에 있던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조차 2019년 백서에 삭제되고 왜곡된 티베트 시선을 자화자찬 할 뿐이다.#

티베트 유일의 프로축구팀이 중국 정부에 의해 해산된 일이 발생되었다.#

티베트에서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재교육 캠프와 비슷한 강제 노동·교화 프로그램을 중국 정부가 확대하고 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16]

2023년에 쓰촨성 내 티베트 자치구에서 티베트어 말살 시도 중이다.#

[1] 판본에 따라 제각각이다. 기원후 11세기로도 전해진다.[2] 몽골과 남시베리아에도 '게세르'라는 발음으로 조금씩 다른 전설속에 등장한다. '카이사르'가 어원이란 주장이 있다. 《아바이 게세르 신화[3] 11세기에 건국된 링창이 모델로 추정된다.[4] 과거형인 이유는 샹슝 왕국의 유적이 발견되었기 때문.[5] 티베트어 원어로는 '팍빠'라고 읽는다.[6] 다만 명군에서 적군의 수급으로 포상을 내릴 때 급수를 차등화하면서 1급은 몽골족, 2급은 만주족과 티베트족, 3급은 일본인과 남방의 소수 민족으로 정한 것을 보면 오이라트 치하 티베트인과 명군 사이에 국경 분쟁이 많았던 듯 하다.[7] 이때 겔룩파의 티베트 통일 정복을 피해 탈출한 종파들이 유입된 지역이 부탄, 시킴, , 라다크 등의 티베트 외 티베트족 지역이다.[8] 중앙아시아와 외몽골 지역 유목민들이 티베트 불교를 많이 믿었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처럼 종교적 정통성을 얻기 위해서였다.[9] 이를 최왼관계라고 하는데, 동군연합 항목에서 청나라 부분을 보면 잘 설명되어 있다.[10] 이 고르카와의 전쟁이 십전무공의 일부인 네팔원정이다.[11] 이는 이후 중인전쟁의 원인이 된다.[12] 이후 시캉성은 중공 시대에 금사강 서안은 티베트 자치구로, 동안은 쓰촨성으로 편입되며 해체.[13] 왜 마부팡을 진압하러온 군대와 마부팡의 군대가 합작을 했나 의문이 들 것이다. 이는 마부팡의 생존 계략이었는데 마부팡은 후쭝난의 중앙군이 자신을 진압하러 오자 일부러 티베트 승려 폭행사건을 일으켜 티베트가 칭하이로 쳐들어오게 만들었다, 그 다음 티베트군에게 의도적으로 후퇴하여 중앙군이 남쪽에서 진군해오는 티베트군으로 신경을 돌리게끔 했다. 마부팡은 덕분에 중앙군의 침략을 모면할 수 있었다,[14] 시캉성 서부로 치던 금사강 서부를 티베트 영역으로 인정한다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의 경계만 금사강으로 정한 것.[15] 현재 그 원자성 폐허 일부는 관광 상품으로 개발되어 있다.(...)[16] 신장 재교육 캠프 문서를 읽으면 알겠지만 신장 자치구의 총책임자 중 한 명이 신장에 오기 전에 티베트에 있었던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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