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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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북마리아나 제도 휘장.svg 북마리아나 제도부속 도서
사이판[수도]
Saipan
티니안
Tinian
로타
Rota
기타 무인도: 파라론 드 파자로스 | 마우그 | 아순시온 | 아그리한 | 파간 | 구관 | 사리간 | 아나타 | 파라론 드 메디닐라


파일:tinian.jpg
티니안 섬(Tinian Island)[1]

1. 소개
2. 역사
2.1. 선사시대~스페인 통치
2.4. 태평양 전쟁
2.5. 전후
3. 관광
3.1. 주요 관광지
4. 여담


1. 소개[편집]






미국 자치령인 북마리아나 제도에 포함된 면적 100 km^2^의 작은 섬이다. 섬 북쪽 160 km, 사이판에서는 육안으로 보이는 8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미 육군 항공대 소속 B-29 폭격기들이 발진한 곳으로 유명하다.

특이하게도, 섬 전체를 통틀어서 메인로드가 단 하나밖에 없다. 위의 지도에 보이는 노란 길이 메인로드로, 메인로드를 쭉 따라가면 섬을 한바퀴 돌 수 있는 구조다. 단, 이 메인로드는 서쪽의 8번거리와 동쪽의 브로드웨이로 나뉘는데, 8번 도로는 수풀이 우거진 비포장도로와 포장도로가 섞여 있고 그마저도 포장이 반쯤 벗겨져 있어서 실질적인 도로는 브로드웨이의 남쪽뿐이다.

위 브로드웨이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섬의 형상이 미국 맨해튼을 닮아서 이곳의 지명도 맨해튼에서 따온 것이 많다. 미국인들이 이 섬에 도착한 뒤 맨해튼을 닮았다며 그렇게 지었다고.


2. 역사[편집]



2.1. 선사시대~스페인 통치[편집]


이 섬은 한때 원주민인 차모로인들이 자급 자족을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마리아나 제도가 서양인들에게 발견된 것은 1521년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 때였다. 이때 마젤란은 괌에 상륙하여 로타 섬을 측량했지만 티니안에는 방문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40년 후인 1668년 6월 16일, 예수회 선교사 디에고 루이스 데 산비토레스(Diego Luis de Sanvitores) 등 5명이 괌에 상륙해 포교를 시작했다. 산비토레스는 마젤란에 의해 라드로네스 제도(스페인어로 ‘도둑’이라는 뜻)라고 이름 붙여진 섬들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왕비 마리아 아나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나라고 명명했다. 처음 선교 활동은 순조로웠지만, 외래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선교사가 원주민의 구습에 간섭하게 되면서 주민들 사이에서 불만이 높아져 1670년에 루이스 데 메디나(Luis de Medina)가 살해되고, 산비토레스도 괌에서 살해되었다.

스페인의 지배가 확립된 후 1695년에 스페인은 섬 전체 인구를 괌에 강제 이주시켜 티니안은 무인도가 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에 의해 이 섬에는 소나 돼지가 방목되었다가 나중에 버려진 티니안은 야생화된 동물만 사는 무인도로 변해 버렸다.

2.2. 독일 통치[편집]


미서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한 후, 1899년에 스페인은 티니안을 포함한 북마리아나 제도의 지배권을 450만 달러에 독일 제국에 팔아넘겼다. 독일의 사이판청은 티니안에서 야생화된 동물을 활용하기 위해 공장을 세웠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 다음은 주1회, 사이판에서 고용한 사냥꾼만 파견했다. 티니안에서 얻은 소나 돼지는 사이판산 소나 돼지의 3분의 1 가격에 거래되고 섬 사람들의 육식원이 되었다.


2.3. 일제 통치[편집]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통치권은 일본에 넘어갔다. 1920년에는 국제연맹에서 정식으로 일본의 위임통치남양 군도가 된다. 일본 통치 하에서 티니언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졌고, 1916년 11월에 처음으로 일본인 4명과 사이판 섬 주민 20여 명이 이주하여 삼림 벌채와 개간을 했다. 티니언의 개발을 맡은 말기 상회는 마리아나 제도 북부의 파간 섬과 아그리한 섬에서 야자수 10만 그루를 심어, 야자 재배 사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후 1918년 2월 22일 야마가타현 출신의 일본인 100여명과 사이판, 로타의 두 섬 사람 300여명이 티니안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먼저 해안 지역에서 내륙의 마루포 지역 사이의 숲을 벌채하고 도로를 뚫은 후 숲을 개간하고 야자 재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회사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이민자들은 그해 말에 파업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파업은 성공했지만 이때까지 30여명의 일본인이 섬을 떠나게 되었다.

한편, 심어진 야자수 10만 그루 중 6만 7~8천그루가 생착하는데 성공했지만, 1919년 초반에 해충(이세리어 패각충)이 들끓었고, 6월에 큰 가뭄이 잇따라 티니언 농산물은 야자뿐만 아니라 섬 사람들과 이민자들의 음식이 되는 바나나빵나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멸했다. 그 결과, 티니안의 개발을 하청 받은 키타 합명회사(말기 상회)는 1918년에 파산하고 일본에서 온 이민자들은 수십 명만이 남고 거의 모두 사이판이나 본토로 옮겨갔다.

1926년에 새로 티니안의 개발을 맡은 남양흥발 주식회사(南洋興発株式会社)는 오키나와후쿠시마, 야마가타 등에서 이민자들을 모아 티니안으로 데려와 야자 대신 설탕이나 커피, 면화의 생산을 시작했다. 그 결과 쇼와 초기에 티니안의 설탕 생산량은 타이완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많은 생산량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섬에서는 가다랭이 잡이가 성업을 이루어, 가다랭이 공장도 세워졌다.

1944년 6월 당시 인구는 약 15,700명으로 대부분은 일본군이었지만 이 중에는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2,700명 이상의 조선인과 원주민이었던 차모로인 26명도 있었다. 이후 일본군이 섬에서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백명이 포화로 목숨을 잃거나 자살하거나, 미군에게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학살당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산호세 마을 북부(northern part of San Jose Village)에 한국인 위령비가 있으며, 일부 유해들은 대한민국충남 천안 망향의동산에 묻혔다고 한다.


2.4. 태평양 전쟁[편집]


태평양 전쟁 동안 섬 북부에 당시 남양 군도에서 가장 큰 공항이었던 하고이 비행장(ハゴイ飛行場)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중요한 기지가 되었고 이때 주둔한 군인은 육해군을 합해 약 8,500명에 달했다. 미군은 티니안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하였고, 1944년 7월 24일 북부 츄로 해안으로 상륙하여 8월 2일에 이 섬을 점령했다. 그 후 하고이 비행장을 확장시키고 재정비하여 섬의 동부에는 웨스트 필드 비행장(현 티니안 국제공항)을 건설하여 본격적으로 일본 열도를 공습할 기지로 삼았다. 점령 당시 조선인 노동자들은 미국에 의한 해방에 기뻐하였고 기부금을 내었다고 한다. 그 기부금은 대략 1945년 미국 달러로 $666.35였다. #

1944년 11월 이후, 연일 일본으로 출격하는 B-29 수백대가 이 섬에서 이륙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하는 B-29도 이곳에서 출격하게 된다.


2.5. 전후[편집]


1947년에 괌을 제외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미국의 신탁통치령 태평양 제도가 되었다. 1948년에는 사이판과 로타 섬, 얍 섬으로 차모로인과 카로리니안 400명이 다시 이주를 하였고, 1950년대에 현재 티니안의 중심지인 산호세를 건설했다. 1986년에 연방인 북마리아나 제도의 일원이 되었다.

현재 인구는 약 3,500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수치는 마지막으로 인구 조사를 실시했을 때의 것이며 최근에는 고유가의 영향으로 섬을 떠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실제 인구는 2,500명 정도이다. 한국계 후손들이 있고 현재도 가끔 한국과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이들이 강제징용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미국은 전후 한국 출신 노동자들에게 본국으로 귀국할지, 티니안에 정착할지 선택권을 주었으며 이 때 강제징용자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귀국을 선택했고, 니시무라사 등에 자원해서 이미 정착한 조선인은 원주민인 차모로인과 가정을 꾸린 경우가 있어 이들은 정착을 선택했다. 실제 티니안 한인 1세대인 전경운(남양상사의 직원으로 섬에 들어왔다)의 회고록인 "남양군도의 조선인"에 의하면 정착을 선택한 조선인 11명 중 3명은 니시무라사의 직원이고, 그 외 8명은 1939년 이전까지의 정착민이다. 티니안의 인구 30% 또는 45%가 한국인이라는 것은 과장된 이야기이고 현재도 인구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으며 대략 30명 정도가 한국계 성씨인 King(김), Shin(신)을 가지고 있으며 성씨가 없던 차모로족들이 한국인과 결혼하면서 한국 성씨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티니언 섬에 가도 한국인 후손들이 잘 안 보이고 찾는 것도 어렵다.


3. 관광[편집]


경비행기를 타고 티니안 국제공항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사이판 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경비행기가 티니안 섬으로 왕복 운항하며, 비행시간은 10분 남짓으로 매우 짧다.

섬 전체에 관광 명소가 산재해 있지만 남서부 산호세가 주요 관광지로 인기가 높고, 타가 추장의 집과 티니안 비치, 타가 비치, 출루 비치, 치겟 비치, 케머 비치, 석회석 숲의 오솔길 등이 있다 . 특히 이 지역의 해변에서는 바다 거북을 볼 수 있어 인기가 높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바다는 투명도가 80m로, 사이판의 마나가하 섬에 필적할 정도의 높은 수질로 인해 다이빙스노클링에 적합하다. 그러나 사이판에 있는 것 같은 산호초 뿐만 아니라 파도가 높은 곳이 많다. 해변에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조용하고 전용 해변처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바베큐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티니안 섬의 형상이 뉴욕맨해튼 섬을 닮아 있었던 탓에, 섬의 도로에는 '브로드웨이'나 '8번가'처럼, 티니안을 점령한 미군에 의해 뉴욕 거리명을 따서 붙은 이름이 많다. 섬의 산책 길에는 NKK 신사의 큰 도리이나 일본군 사령부 방공호가 남아 있는 등 일본 통치와 태평양 전쟁의 역사도 엿볼 수 있다.

티니안 중심에 목초가 풍부한 언덕은 북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큰 목장인 MDC 목장이 있다. 섬의 3분의 1의 면적을 차지하는 광대한 목장에는 수천 마리의 젖소와 육우가 방목되고 있다. 이전에는 일본의 오디오 메이커의 선구자가 경영하고 있었지만, 광우병 문제로 목장이 도산하여 그 규모는 축소되었다.


3.1. 주요 관광지[편집]


  • 자살 절벽: 태평양 전쟁 말기 1944년 미군에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일본군들이 뛰어내린 절벽이다. 사이판에도 같은 이름의 절벽이 있다.

  • 타가 유적: 마리아나 제도에서 가장 큰 고대 타가 왕조의 유적이다. 북마리아나 제도의 국기 디자인이 된 타가 스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 타가 비치: 고대 타가 왕조 시대 왕실 전용 물놀이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깎아지른 바위로 둘러싸인 하얀 모래 해안에는 전용 해변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 블로우 홀(물총 해안): 티니안 섬 북동쪽에 있는 산호초로 이루어진 바위 암벽에 복잡한 구멍이 뚫려있어 파도가 밀려 들 때마다 조수가 10m 가까이 솟아 오른다.

  • 티니안 그로토: 사이판 그로토와 마찬가지로 다이빙이 가능한 해저 동굴. 수심 10m에서 20m로 다양한 열대어가 서식하고 있다.

  • 산호세 교회 종탑: 산호세 교회의 정원에 자리 잡고있는 17세기 말 스페인 통치 시대의 종탑이다. 높이 20m 정도의 종루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입은 포탄의 흔적이 많이 보인다. 현재는 티니안의 상징으로 '벨 타워'라고 한다.

  • 스미요시 신사: 일제 시대에 창건된 신사로 태평양 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전후에 재건되었다.

  • NKK 신사: 일제 시대의 신사 터에 큰 도리이와 2개의 도리이가 남아 있다.

  • 일본 해군 사령부 흔적: 일본 해군의 첫 항공함대 사령부가 놓여 있던 건물이다. 육중한 콘크리트 2층 건물로 태평양 전쟁 중 미군의 포격으로 훼손되었지만, 미군이 상륙 후 개축해서 미군 시설로 사용되었다. 참고로 사령부 건물 앞에 물탱크 시설이 위치하고 있는데, 미군이 점령후 뚜껑을 열어보니 조선인 여성으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발견되고다고 한다.

  • 원자폭탄 적하장: 1945년 8월에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 보이팻 맨을 탑재한 지점이다. 하고이 비행장 활주로 북쪽에 터가 남아 있고, 삼각 지붕의 유리 시설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4. 여담[편집]


2016년 12월에 불타는 청춘 괌 여행 특집 방송에서 멤버들 일부가 티니안 섬으로 가 한인 후손들을 만나고 한국인 위령비를 찾아 참배하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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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에서는 天仁安島(텐이안시마)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