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르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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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르나바(슬로바키아)




1. 개요
2. 언어별 표기
3. 역사
4. 기타



1. 개요[편집]


슬로바키아 트르나바 주(Trnavský kraj)의 주도이다. 인구는 2017년 기준으로 65,382명이지만, 광역인구까지 포함하면 55만명 정도된다. 수도 브라티슬라바에서 북동쪽으로 4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로마 가톨릭 대주교좌(1541년 ~ 1820년, 1977년에 재설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종종 파르바 로마(parva Roma)[1]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슬로바키아의 로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언어별 표기[편집]


슬로바키아어
Trnava(트르나바)
헝가리어
Nagyszombat(너지솜버트)
독일어
Tyrnau(튀르나우)

3. 역사[편집]


1211년 처음 언급되며, 1238년 헝가리 국왕 벨러 4세로부터 도시 헌장을 받았다. 1541년 에스테르곰 대주교의 관구장이 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 산하 왕령 헝가리의 주요 도시로 급부상했으며, 1541~1699년 오스만 제국의 수탈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이 이주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 16~17세기까지는 합스부르크 왕령 헝가리 반종교개혁의 중심지였다.

17세기에는 보치커이 이슈트반, 베틀렌 가보르, 라코치 지외르지 1세, 퇴쾨이 임레 등 나중에 에르데이 공작이 되는 헝가리 귀족들을 중심으로 한 반합스부르크 운동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합스부르크 투쟁은 트르나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1704년 라코치 페렌츠 2세는 트르나바 근교에서 합스부르크 제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공고해졌다.

1635년에 예수회에서 설립한 트르나바 대학교는 반종교개혁을 목적으로 설립된 대학이었으나 슬로바키아 교육과 문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학교를 설립한 파즈마니 페테르 대주교는 슬로바키아어의 사용을 장려하였고, 자신의 설교 일부를 슬로바키아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18세기 이후, 트르나바는 슬로바키아 민족부흥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초 대학교가 부다페스트로 이전하고, 대주교 관청도 에스테르곰으로 복귀하면서 이전에 비해 중요성은 떨어졌다. 1844년 브라티슬라바와 연결되는 철도가 연결되었고, 철도의 연결과 동시에 설탕 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이 주권 상당부분을 회복하면서 슬로바키아에 헝가리화를 시행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슬로바키아 문화를 지킨 도시였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성립되었을 무렵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산업화된 도시들 중 하나가 되었다. 1977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트르나바를 슬로바키아 대교구 교구장으로 지정했으며, 이로써 교회 행정 측면에서도 헝가리로부터 독립했다.

슬로바키아가 독립한 이후 1996년 설립된 트르나바 주의 주도가 되었다.

4. 기타[편집]


축구 구단인 FC 스파르타크 트르나바의 연고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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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은 로마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