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이라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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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적 관계
2.1. 지역적 관계
2.2. 민족적 관계
2.3. 오스만 제국 시대
2.4. 21세기
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튀르키예이라크의 관계. 이라크는 북부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고 영토문제로 인해 튀르키예와의 갈등이 심하다. 튀르키예와 이라크 사이의 대외관계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이라크 일대의 지역적 관계 외에도 아랍인튀르키예인 사이의 민족 감정까지 얽혀 있다.

2. 역사적 관계[편집]



2.1. 지역적 관계[편집]


아나톨리아 지역과 이라크 일대는 고대부터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시리아 외에도 튀르키예 동남부 지역까지 포괄하였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 차탈 휘위크(오늘날의 튀르키예 동남부 일대)에서 시작된 농경은 상고시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을 통해 메소포타미아 각지로 전파되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발흥으로 이어진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고대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기원하여 소아시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는 히타이트 제국과도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오늘날 튀르키예에서는 자국 역사에 히타이트를 포함시키는 반면 아랍인들 입장에서는 히타이트가 어째서 튀르키예 역사냐고 티격태격하는 경우도 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 시대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 각지에는 셀레우코스 제국, 폰토스 왕국 등등의 헬레니즘 제국들이 뿌리내리고 이후 아나톨리아의 헬레니즘 왕국들이 고대 로마에 병합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아나톨리아 지역 주민들은 토착 아나톨리아어를 버리고 그리스인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반면 이라크 일대의 주민들은 로마 문화권과 파르티아, 사산 왕조 등 페르시아 문화권 사이의 접경지에 위치하였고 이라크 일대의 주민들은 라틴어나 그리스어, 페르시아어 문화에 일방적으로 동화되는 대신에 고유의 아람어 문화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후대 아나톨리아 지역이 그리스 문화를 배경으로 튀르크화되는 반면, 이라크 일대는 아시리아인들의 아람어 문화가 아랍 문화로 대체되는 과정을 거치며 민족적인 차이로도 이어졌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동로마 제국 중심지 아나톨리아 지역과 이라크 일대를 중심으로 한 조로아스터교 사산 왕조 및 후대의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및 그 지방 정권 함단 왕조와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2.2. 민족적 관계[편집]


튀르키예 이라크 관계에는 이라크인과 튀르크인 사이의 관계에 포함된다. 이슬람 제국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튀르크계 용병을 중용하기 시작한 이래 이슬람 세계에는 튀르크인들의 유입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압바스 칼리파들은 오우즈 튀르크인들이 세운 셀주크 제국의 보호 하에 연명하는 처지가 된다. 셀주크 제국이 붕괴된 이후 셀주크 제국 서쪽 영토(새로 정복한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내륙 영토 및 레반트 지역)에는 이른바 룸 술탄국들이라 불리는 튀르크계 군벌 정권들이 난립하고, 동쪽에는 호라즘 제국이 들어섰다가 몽골 제국의 침략에 붕괴당한다.

룸 술탄국 중 하나로 시작했던 오스만 제국은 세력을 키워 아나톨리아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 것을 시작하여 근세 들어서 유럽 외에도 중동 각지로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근세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왕조를 격파한 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 술탄은 바그다드의 칼리파를 폐위시키고 직접 칼리파를 겸임하게 되면서 몽골 제국의 침략의 여파로 경제적, 사회적 중요성이 감소했던 이라크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축소되었다.

2.3. 오스만 제국 시대[편집]


이라크 북부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아랍인들을 사실상 2등 신민 수준으로 차별하였으며[1], 이는 아랍 내셔널리즘이 부흥하는 계기가 된다. 18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아라비아 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은 군대를 파견해 반란을 진압하긴 했으나 이집트에서 케디브 왕조가 독립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여기에 고무된 아랍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타락한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고 아랍인들이 중심이 된 이슬람 제국을 복원"하자는 살라프파 신학 혹은 "기독교인 아랍인 무슬림 아랍인 할 것 없이 힘을 합쳐서 서구와 튀르크를 아우른 외세를 몰아내자는" 현대적인 아랍 내셔널리즘이 부흥하였다.

이라크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오스만 제국이 패전한 것을 계기로 영국의 보호국이 되는 방식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이후 이라크 왕국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이라크 북부가 이라크의 영토로 편입됐다. 그리고 양국간의 국경이 그어졌다.

1955년 양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상호방위조약을 맺었으며, 이는 중앙조약기구의 시초가 된다. 1958년 이라크 왕정이 전복되고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1959년 이라크는 중앙조약기구에서 탈퇴했다.

2.4. 21세기[편집]


양국은 이슬람 협력기구의 정회원국이고 문화, 종교에선 공통점이 있지만, 2010년대 중반에 다에쉬가 이라크의 대부분 영토를 차지하면서 튀르키예는 기회를 노려 이라크 북부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이라크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이라크 북부에 석유가 풍부하다보니 튀르키예측에선 이라크 북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어서 이라크와 갈등을 빚고 있다.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이 튀르키예군을 다국적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가 이라크 현지의 여론이 "튀르키예놈들을 데리고 오면 저항세력이고 정부군이고 뭐고 간에 다같이 손잡고 튀르키예놈들과 맞서서 싸우겠다!"고 반발을 심하게 하자, 미국 정치계나 조지 워커 부시 당시 전 미국 대통령도 깜짝 놀라서 없던 일로 하고 입을 싹 씻은 적도 있다.

2003년 10월 튀르키예의회는 이라크파병안을 승인했다. #

2003년 11월 이후 튀르키예는 이라크파병안을 철회했으며, 쿠르드계 출신인 잘랄 탈라바니 이라크 과도정부의장은 튀르키예를 방문했다. #, #

13년 뒤 이라크 내전에서 IS가 점령한 모술 탈환전에 튀르키예가 개입하려 하자 되풀이되는데, 이라크 정부는 튀르키예군을 점령군이라고 맹비난하였고 바그다드에서는 대대적 규탄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2021년 6월 5일에 튀르키예 무인기가 이라크 북부의 난민센터를 공격해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이라크 정부는 튀르키예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튀르키예와 이라크를 잇는 송유관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2022년 7월에 튀르키예군이 PKK 토벌을 하는 과정에 이라크 북부에서 이라크 민간인 9명이 포격으로 사망하자 이라크에서 반 튀르키예 시위가 일어났다.# 이라크 정부도 이를 비난하며 튀르키예 대사를 불러 항의하며 이라크 내의 모든 튀르키예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주장했다.#

이스탄불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튀르키예군이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를 공습했다.#

2023년 2월 1일, 이라크 북부의 튀르키예군 기지가 로켓 공격을 받았다.#

3. 관련 문서[편집]



[1]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이 기독교(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 슬라브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2] 양국 모두 쿠르드족 문제와 관련해서 협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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