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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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건국
3. 시리아를 얻다
4. 정통성 대결
5. 아바스 왕조와의 타협
6. 내분과 카르마트의 침공
7. 멸망
8. 역대 군주
9. 사회적 번영



1. 개요[편집]


튀르크 계통의 맘루크들에 의해 건국되어 868년부터 905년까지 존속한 수니파 이슬람 왕조.

클레오파트라 7세의 자결 이후, 약 900년만에 세워진 이집트 기반의 왕조이며, 이집트의 이슬람화 이후 첫 독립 왕조이다. 아바스 왕조의 중앙 권력에서 독립하면서 시작되었고, 최전성기에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자지라)까지 지배했으며, 아바스 왕조로부터 이집트와 시리아의 합법 통치자이자 봉신으로 인정받았다. 수도는 카타이(현 카이로의 푸스타트 지구)였다.


2. 건국[편집]


툴룬 왕조는 중세 이집트 최초의 지방 왕조였다. 이집트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페르가나 출신의 튀르크계 맘루크였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868년, 아바스 왕조의 이집트 부총독이 되었다. 그는 이집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868~872) 독자적인 이집트 군대를 편성하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고를 관리함으로써 군사적, 재정적 기반을 닦았다. 871년에는 아바스 중앙정부의 재정 관리도 축출하고, 독립을 굳혔다. 이븐 툴룬은 바그다드로 보내는 세수를 줄여 많은 부를 축적했고, 카타이(훗날의 카이로)에 성채로 둘러싸인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으며 튀르크, 그리스, 수단의 노예들로 구성된 잘 훈련되고 좋은 장비로 무장한 군대를 조직했다.


3. 시리아를 얻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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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870년 아바스 왕조의 제15대 칼리파였던 알 무타미드는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서쪽(서부 이란, 아르메니아, 자지라, 시리아, 이집트, 이프리키야)은 자신의 어린 아들인 자파르 알 무파와드 일랄라에게, 동쪽(이라크 남부, 파르스, 아제르바이잔, 호라산)은 사실상 섭정으로서 그의 형이었던 알 무와파크에게 맡김으로써 제국의 중앙 권력을 대표하게 된 서부는 이미 툴룬 세력이 장악 무와파크와 이집트를 장악한 툴룬 간의 충돌은 예고된 것이었다.

양자 간의 충돌은 아바스 왕조의 섭정 알 무와파크가 잔즈 반란(이라크 남부의 흑인 노예 반란, 868~883) 진압과 이란계 수니파 사파르 왕조(867~913)의 시조인 야쿠브 이븐 라이스 알 사파르와의 전쟁(876. 4) 중에 양대 전선에 드는 재정의 충당을 위하여 툴룬에게 막대한 돈과 인원을 보내주도록 요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타협한 툴룬이 많은 돈을 보냈지만 무와파크는 계속해서 불만을 토로하고, 조공이 적다는 이유로 툴룬을 공직에서 제거하려 했다. 또한 아마주르를 시리아와 이집트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결정을 강행하기 위해 아바스 군대를 파견했다.[1]

그러나 오랜 준비를 마친 툴룬의 군대는 이집트를 굳게 방어했고, 아바스 군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되돌아갔다. 얼마 안 있어 아마주르가 죽자 툴룬은 878년에 어려움없이 시리아를 점령했다. 시리아는 그후로 이집트의 곡창 지대인 나일 강 델타 방어의 핵심적인 관문 역할을 수행하며 이집트가 서부 이슬람 세계의 중심 역할을 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2]


4. 정통성 대결[편집]


이븐 툴룬은 허수아비 칼리파 알 무타미드의 편에 서서 그의 형인 섭정 알 무와파크에게 저항함으로써 아바스 조의 중앙 권력간 알력 다툼에도 개입했다. 툴룬 자신은 섭정의 지위를 얻고, 이집트 - 시리아를 아바스 제국의 중심이 되도록 만들려는 의도에서 그와 함께 하도록 칼리파 알 무타미드를 이집트에 초청했다. 섭정 무와파크의 전횡에 불만이었던 칼리파가 툴룬의 제의를 받아들여 이집트로 가기로 했지만 형 무와파크의 수하들에게 차단되어 불명예스럽게 사마라로 되돌아 가게 되었다. 툴룬과 알 무와파크 사이에 서로 자신이 칼리파 알 무타미드의 보호자이며, 상대는 반역자라는 선전전이 이어졌다.


5. 아바스 왕조와의 타협[편집]


884년,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부강한 이집트를 남긴 채로 죽었고, 차남인 쿠마라와이가 계승했다. 장남 아바스는 882년 반란을 일으킨 후 계승권을 잃었는데, 쿠마라와이에게 충성 서약('바이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의 집권 이후 암살되었다. 쿠마라와이의 계승은 중세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아바스 칼리파조의 개국 이후, 지방 제후가 처음으로 칼리파의 승인없이 아들에게 정권을 세습한 것이었다. 20세에 불과한 젊은 쿠마라와이에 대해 휘하 장군 중 아흐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 와시티는 아바스 조와 내통했고, 그 섭정인 알 무와파크는 이븐 쿤다즈와 이븐 아빌 사즈 휘하의 이집트 원정군을 파견했다.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인 안티오크, 알레포, 홈스, 다마스쿠스의 총독들은 손쉽게 항복했다. 쿠마라와이가 파견한 툴룬 군대는 다마스쿠스를 회복했으나 샤이자르 전투에서 아바스군에게 대패하고, 팔레스타인의 라믈라로 패주했다. 이에 라믈라로 친히 북상한 쿠마라와이는 지도부가 분열된 아바스 군대와 라믈라 북쪽 타와힌 평원에서 맞서 싸웠다.(885년 4월 6일)

전투는 아바스군의 우세로 전개되었으나, 승리에 도취된 아바스군이 약탈에 전념하는 틈을 타, 툴룬군 측 장교였던 사드 알 아이사르가 반격에 나서 패배를 승리로 바꾸었다. 다만 이후 사드는 다마스쿠스에서 자립을 시도하다가 사로잡혔고, 쿠마라와이에 의해 친히 처형되었다. 한편 아바스 조와의 지속적인 대결에 자신이 없었던 쿠마라와이는 타와힌 전투의 아바스군 포로들에게 고용과 (몸값이 없는) 안전한 귀환의 선택지를 주었고, 이러한 호의와 함께 협상이 개시된 결과, 휴전이 성사되었다.(886. 12) 쿠마라와이는 쿠트바에서 섭정 알 무와파크의 이름을 언급하고, 정해지지 않은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30년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후 890년까지 쿠마라와이는 이븐 쿤다즈를 격파하고, 자지라 총독 이븐 아빌 사즈와 타르수스 총독 야자만 알 카딤의 복속을 받았다. 892년 제16대 칼리파에 오른 알 무타디드(섭정 알 무와파크의 아들)는 이듬해 봄 쿠마라와이의 지배권을 재차 인정했다.

그 대가로 쿠마라와이는 300,000 디나르의 연공을 바치고, 체납금으로써 200,000 디나르를 추가 납부했다. 또한 자지라의 3개 부분 중 디야르라비아와 디야르무다르를 아바스 조에게 양도하고, 디야르바크르의 지배권만을 유지했다.[3] 마지막으로 칼리파의 깃발과 예복을 제작하던 알렉산드리아와 푸스타트의 티라즈 공방 역시 아바스 조의 통제하에 놓였다. 평화협정은 정략결혼으로 매듭지어졌다. 쿠마라와이는 딸 카트르 앗 나다를 칼리파 알 무타디드의 아들과 결혼시키려 했는데, 알 무타디드는 그녀를 아들 대신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당대 역사가들은 이집트에서 이라크로 향하는 신부 행렬의 화려함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신부측 지참금은 무려 100만 디나르에 달했고, 이는 중세 아랍 역사상 최대 규모로 당시 이집트의 부강함을 나타냈다. 그러나 쿠마라와이는 자신의 애첩과 간통한 후 처벌을 두려워하던 하인에 의해 암살되었다.(896년 1월 18일) 나름 유능하던 군주가 어린 아들들을 두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툴룬 왕조의 운명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6. 내분과 카르마트의 침공[편집]


쿠마라와이의 후계자들은 무력한 통치자들로서 튀르크 출신, 혹은 흑인 군사 계급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재정적, 군사적 안정은 점차 약화되었다. 쿠마라와이가 896년에 다마스쿠스에서 자신의 노예에게 피살되면서 후계자 계승 문제로 내란이 일어났다. 내분 끝에 장군 무함마드 이븐 압바는 쿠마라와이의 어린 아들 하룬을 옹립하고, 섭정이 되어 이집트를 장악했고, 시리아의 장군들은 바드르 알 함마미 등과 대립했다. 한편 10세기에 들어 쉬아 계열 이스마일파(7이맘파) 카르마트 세력 중 하나인 자카르위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인 야흐야 (사힙 앗 나카)가 902년 라카에서 투그즈 이븐 주프를 격파하고, 다마스쿠스를 포위했다. 바드르는 다마스쿠스 수비에 나선 투그즈 이븐 주프의 구원에 나서 야흐야를 전사시켰지만 승리하지는 못했고, 카르마트 반란군은 야흐야의 동생 후세인 (사힙 앗 샴마)을 지도자로 삼아 재차 시리아를 유린했다. 그 과정에서 이스마일파의 거점이었던 살라미야도 파괴되어 향후 파티마 왕조를 세우게 되는 압둘라 알 마흐디가 시리아를 떠나 마그레브 방면으로 떠나게 되었다.

카르마트의 침공에 툴룬 조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시리아 주민들은 아바스 조에 개입을 요청했다. 903년 7월 30일 제17대 칼리파 알 무크타피는 원정에 나서 8월 9일 친히 라카에 이르렀다. 카르마트군 지휘관 알 무타왁크는 알레포 주변에서 10,000명의 아바스군을 격파하고, 도시를 포위했는데, 살아남은 1,000명의 병력이 아불 아가르의 지휘하에 항전하여 함락되지 않았다. 아바스 조와 연대한 바드르 알 함마미는 다마스쿠스 주변에서 카르마트군을 격파했고, 아바스군의 장수 알 후세인 이븐 함단이 추격에 나섰다. 기세를 탄 아바스군은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의 지휘하에 11월 29일 하마 남쪽 24km 지점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카르마트군에 맞섰다.[4] 알 수에니 이븐 함단의 활약으로 전투는 아바스군의 승리로 귀결되었고, 다이 앗 누만 등 카르마트군 장수들이 전사했다. 지도자 후세인 이븐 자카르위는 쿠파로 도주하던 중 라흐바 인근에서 사로잡혀 라카로 압송되었다.

7. 멸망[편집]


아바스 칼리파 알 무크타피는 포로들과 함께 바그다드로 개선했고,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도 904년 2월 2일에 합류했다. 11일 후 후세인 등 카르마트군 포로들이 공개 처형되었다. 비록 906년에도 아부 가님 나스르가 시리아, 자카르위 본인이 이라크에서 거병하는 등 반란은 907년까지 이어졌지만 하마 전투의 승리로 그 기세는 크게 꺽인 터였다. 한편 시리아 지역에서 위엄을 보인 아바스 조정은 더 나아가 904년 5월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을 시리아로 파견했다. 바드르 알 함마미가 전향했고, 12월 이집트에서 정변이 일어나 하룬이 시해되고 숙부 샤이반이 옹립되자 투그즈 이븐 주프 역시 전향했다. 기세를 얻은 아바스군이 푸스타트로 진군하자 샤이반 역시 항복했다.(905년 1월 10일) 이렇게 해서 튀르크계 툴룬 왕조는 5대 38년만에 멸망했다.

아바스군은 이븐 툴룬 모스크를 제외한 기존 수도 알 카타이를 파괴했고, 툴룬 왕가와 추종자들은 바그다드로 압송되어 재산을 압류당했다.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은 이사 앗 누샤리를 총독으로 봉하고 시리아로 돌아갔는데, 전리품의 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해임되었다. 다만 아바스 칼리파조의 직접 지배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서쪽의 이스마일파 파티마 왕조의 침공에 시달린 끝에 932년, 역시 중앙아시아 페르가나 출신의 튀르크 계 수니파 이흐시드 왕조가 건립되면서 아바스 왕조의 짧은 제2차 이집트 지배는 27년만에 끝이 났다. 그 후 이집트는 고대~중세 초기와 달리 이라크/이란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8. 역대 군주[편집]


  • 아흐마드 이븐 툴룬(868~884)
  • 쿠마라와이(884~896)
  • 자이시(896)
  • 하룬(896~905)
  • 샤이반(905)


9. 사회적 번영[편집]


파일:Mosque_of_Ibn_Tulun,_Cairo,_Egypt4.jpg
이븐 툴룬 모스크

시조 아흐마드 이븐 툴룬의 재위기간인 868~884년 동안에는 농업이 발달하고 상공업이 장려되었으며, 아바스 왕조의 전통이 툴룬 왕조를 통해 서부 이슬람 세계로 전달되었다. 툴룬 왕조의 수도인 알 카타이에서는 공공건축 사업이 실시되었고, 아흐마드 이븐 툴룬 사원이 건설되었다. 비록 905년에 멸망할 때, 파괴되었지만 중심 사원이었던 이븐 툴룬 모스크는 오늘날까지 그 위용을 뽐내며 남아있다.

툴룬 왕조의 수도 역할을 했던 카타이(카이로)에는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는 아흐마드 이븐 툴룬 모스크가 있다. 사마라의 알 무타와킬 대사원을 본떠서 만든 이 사원은, 당시 이라크에서는 유행했으나 이집트 건축물에는 그때까지 별로 사용되지 않았던 벽돌과 석고로 만들어졌다.

툴룬 왕조가 몰락한 뒤 퇴보했던 이집트의 예술은 반세기 후,이스마일파 파티마 왕조가 세력을 잡은 뒤에야 회복되었다. 파티마 왕조의 예술은 툴룬 왕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11세기경에는 이집트를 서부 이슬람의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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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란 사파르 왕조의 군대는 격퇴당했고, 이라크의 잔즈 반란도 소강 상태에 접어들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2] 툴룬 왕조 - 이흐시드 왕조 - 파티마 왕조 - 아이유브 왕조 - 맘루크 왕조. 오늘날에도 아랍 연맹의 본부는 이집트의 카이로에 위치해 있다.[3] 쉽게 말해서 자지라의 이라크 부분만 내어준 것이었다.[4] 하마 전투의 배치 : 카르마트측) 좌익 - 마스루르 알 울라이미 휘하 1,500명의 기병과 예비 기병 400명, 중앙 - 다이 앗 누만 휘하 1,400명의 기병, 3,000명의 보병, 우익 - 쿨라입 알 울라이시 휘하 1,400명의 기병과 예비 기병 200명 / 아바스측) 좌익 - 알 카심 이븐 시마와 유믄 알 카딤 및 바누 샤이반과 바누 타밈 보조군, 중앙 - 무함마드 이븐 술레이만 알 카팁, 우익 - 알 후세인 이븐 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