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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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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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015년

2016년
존 오키프
마이브리트 모세르
에드바르 모세르[1]
윌리엄 C. 캠벨
오무라 사토시[2]
투유유
오스미 요시노리[3]


파일:external/img.epochtimes.com/1510061040182584.jpg


1. 개요
2. 대표표기 논란
2.1. 전통의학(중의학) 연구가 맞지 않다는 입장
2.2. 전통의학(중의학)연구가 맞다는 입장
3. 경력
4. 주요 업적
4.1. 항말라리아제 개발



1. 개요[편집]


1930년 12월 30생(93세). 중화민국 저장성 닝보[4] 출신으로 중국 국적의 베이징대학 출신 중의학연구자.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로 2015년에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중국 최초의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

수상당시 나이는 85세[5]. 중국 여성 중 과학분야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다.

많은 언론에서 투유유가 중국 국적자 중 최초로 과학 분야 노벨상을 수상하였다고 보도하였지만, 엄밀히 말하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 중 최초가 맞는 말이다. 중화민국 국적으로는 사실 195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양전닝리정다오가 최초다. 양전닝과 리정다오의 수상 이후에도 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중국계 학자들이 여러명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중국이 아닌 외국 국적을 가진 화교들이었다. 한편 투유유 이전의 중국계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물리학상 또는 화학상 수상자들이었으므로, 투유유에게 붙은 "과학분야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중국 여성"이라는 수식어나,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중국인"이라는 수식어는 옳다. 또한 수상 당시 기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으로 유일한 노벨 과학상 수상자라고 해도 옳다(양전닝은 수상 당시 중화민국 국적이며, 이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가 2017년에 중화인민공화국 국적 취득).


2. 대표표기 논란[편집]


대표표기와 관련하여 논쟁이 있었다. 투유유와 직접 관계 없는 한국에서 투유유의 대표표기 논쟁이 벌어진 까닭은,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사용 허용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던 와중에, 한의학계에서 투유유의 노벨상 수상은 중의학에 대한 중국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며, 한의학에 대한 정부차원의 지원을 요구(현대의료기기 사용 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의학계는 반박을 했는데, 구체적인 양측 의견은 본문 내용을 참조.

2.1. 전통의학(중의학) 연구가 맞지 않다는 입장[편집]



  • 투유유는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자신의 연구에 대해 'In my work as a phytochemist'라고 소개한 바 있다.
  • 과학분야에서 최고권위를 가지고 있는 과학전문저널 Science지에 '약학자'로 소개되어 있다.
  • 정규 학위과정에서 약학으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 약(물)에 대한 연구를 했다.
  • 투유유가 개발한 항말라리아제는 임상시험까지 거친 의약품이다.
  • 투유유가 각종 약물 연구를 하면서 사용한 연구방법론은 현대의 화학약학에 기반한 것이다. 만약 투유유에게 화학 및 약학 지식이 없었다면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2.2. 전통의학(중의학)연구가 맞다는 입장[편집]



  • 투유유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하여 노벨위원회는 "전통 중의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항말라리아 의약품 개발연구에 대한 상"이라고 하였다.
  • 투유유가 연구를 한 장소 및 소속은 중의학연구원이다.
  • 중의약(물)에 대한 연구를 했다.
  • 중국에서는 의사/중의사, 약사/중약사의 구분이 없다.[6]
  • 투유유는 중의학 교육기관의 2.5년 기간 교육과정을 수료한 적이 있다. 서의학습중의반은 출근하지 않고 오로지 학습에 전념하는 과정으로 중의이론과 임상을 공부하는 과정이다. 투유유는 3기 서의학습중의반에서 공부하였다. 그리고 투유유는 네이처 논문에 자신의 이력을 소개하면서, 중의학교육기관에서의 교육수료 이력을 빠뜨리지 않고 써놓은 바 있다.

국내에서만 유독 투유유의 대표표기 논란이 있는 것은 현재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료시스템의 영향이 크다.[7] 이 연구의 업적이 중의학 연구인지는 간단하게 노벨위원회 사이트에 접속해 확인해 보면 투유유의 업적에 대해 명확히 중의학 연구자로 명시 되어있다.[8] 그녀가 다양한 분야의 연구도 병행하여서 그녀에 대해 다양한 표기를 달 수는 있으나, 적어도 노벨상을 받은 연구에 대해서는 중의학 연구임은 분명하다. 투유유 본인도 노벨상 수상소감에서 본인은 전통 중의(약)학을 연구한 연구자이며, 중의학으로부터 연구 모티브와 문제해결에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고 여러 차례 밝히고 있다.

투유유의 업적인 말라리아 치료제의 개발은 마오쩌둥의 523프로젝트의 일환이었고 그 목적은 "중국전통의학의 연구를 통해 말라리아치료제를 개발하는 것"[9] 이었다. 연구책임자가 된 투유유는 실험 대상이 되는 약물을 스크리닝 할 때 전국각지에 있는 임상 중의사(전통의학자)들에게 2천개의 처방을 받아 200여개의 약물을 추려냈고 380종의 화합물을 추출했다. 개똥쑥의 추출물은 동물실험 효과가 들쑥날쑥 했는데, 이것의 해결방법을 찾던 중 금나라 때 출판된 의학서인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서 개똥쑥의 추출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였다. 이 방법을 이용하여 현재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으로 알려진 청호소[10]를 새로이 추출해내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말라리아 임상실험에 성공한다.

중의학, 한의학에서 나오는 논문의 대부분이 위와 같은 약리 연구와 임상효과에 대한 통계분석이고 훈고학적인 문헌 연구의 비중은 낮다. 투유유는 고문헌에 제시된 청호의 '절학' 효능을 현대 약리학적으로 해석한 것인데, 중의학자가 중약의 효능을 어떤 방법론으로 연구하든지 중의학으로 부르는 데는 문제가 없다. 중의학(및 한의학) 역시 연계학문과 더불어 발전하기 때문이다. 통계적 방법으로 철학 연구를 하면 더 이상 철학이 아닌가? 기호학적 접근을 통해서 사료 연구를 하면 더 이상 사학이 아닌가? 투유유의 연구는 중의학 연구, 또는 중의학, 화학, 약학의 학제간 연구인 것이다.

다만, 노벨위원회에서 "전통의학이 아닌 의약품 개발연구에 대한 상"이라고 언급 했는데 이것은 “투유유의 전통의학을 이용한 연구결과”를 인정한 것이지 “전통의학(중의학) 전체의 이론과 치료방법”에 대한 상은 아니다."는 의미이다.

즉, 고대 중의학의 경험과 방식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를 현대 의과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과를 낸 것이므로, 노벨 위원회에서 "전통의학이 아닌 의약품 개발연구에 대한 상"이라고 한 것도, 투유유가 본인의 업적을 "중의학이 준 선물"이라고 한 것도 모두 맞는 이야기다.


3.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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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베이징의학원에서 찍은 사진. [11]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베이징의학원 의학부 약학과[12]를 졸업했다. 이후 중의연구원 중약연구소에 배정되어 약물 연구를 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2.5년 동안 직장생활을 중단하고 교육과정에 참가했다.

From 1959 to 1962, I was released from work to participate in a training course in Chinese medicine that was especially designed for professionals with backgrounds in Western medicine. The 2.5-year training guided me to the wonderful treasure to be found in Chinese medicine and toward understanding the beauty in the philosophical thinking that underlies a holistic view of human beings and the universe.

네이처 (2011)


투유유는 원사(院士) 학위[13], 박사 학위[14], 외국 유학 경험이 없어 ‘3무(無) 과학자’로 불린다.

https://m.ajunews.com/amp/20151007114748968


4. 주요 업적[편집]


투유유의 가장 큰 업적은 그녀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말라리아 치료약 개발이다.

노벨상도 타버리는 1700년전 진나라 의학 클라스
한의학으로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해보자

4.1. 항말라리아제 개발[편집]


마오쩌둥은 1967년 5월 23일 베이징에서 인민해방군총후근부와 국가과학위원회 연석으로 ‘말라리아 예방과 치료 전국 협력 회의’를 개최하고 치료제 개발 등을 지시했다. 회의 날짜에서 이름을 붙여 '523 프로젝트'[15]라고 한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원인은 베트남 전쟁 도중 발생한 엄청난 말라리아 사상자 때문이다. 호치민은 베이징까지 마오쩌둥을 찾아와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을 부탁하기도 했으며, 1960년대 말에는 중국 내에서도 말라리아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1971년 중국의 말라리아 감염자는 약 4천만 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에는 문화대혁명(1966~76년)으로 인해 대부분의 기초과학 연구가 중단 상태였다. 하지만 말라리아 치료제 연구는 '군사 임무'로 간주되어 인력을 상당수 동원할 수 있었다.[16] 그 결과 군사의학과학원이 처음 개발한 ‘1호약’은 그 효과가 1회 복용에 7일 가량 감염을 막아주었고, 이어 개발한 2호 약물과 3호 약물은 1개월 가량 효과를 나타내었다. 중국은 약효가 제한적이지만 현지 상황이 급박한 관계로, 개발된 치료약 100여 톤 가량을 베트남 전쟁 중 월맹(북베트남) 측에 공급했다.

투유유는 1969년부터 523 임무에 투입되었다. 처음에는 보조 연구원이었고, 곧 소조 조장이 되어 4명의 연구원을 이끄는 중간관리직이 되었다. 투유유는 1972년 3월 8일 난징(南京)에서 열린 ’523 임무‘ 연구 보고회인 ’전국 항말라리아 약물연구회‘에서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당시 보고 제목은 ’마오쩌둥 사상 지도가 발굴해 낸 항말라리아 중약 공작‘이었다. 당시 2000종이 넘는 천연식물을 조사했고, 이중 최종적으로 200종에 달하는 천연약물을 추출해 이를 실험쥐에 적용하는 백신 검사를 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190여 차례 실패 끝에 1971년 10월 개똥쑥[17]에서 추출한 아르테미시닌(artemisinin)이 말라리아 억제율이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1번째 실험에서 성공을 했기 때문에 '91호 약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개똥쑥은 전혀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개똥쑥으로 실험을 해보긴 했지만, 말라리아 억제 효과에 있어 후추가 84%를 보인 데 반해 개똥쑥은 68%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똥쑥을 여러 차례 실험하다가 340년경에 갈홍이 저술한 중국 고대 의학서적 '주후비급방(肘後備急方)'에 개똥쑥의 사용방법에 대해[18] 쓰여 있는 것을 보고 1971년 말 고온이 아닌 저온에서 추출해야 효능이 극대화한다는 쪽으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르테미시닌 성분은 항말라리아 효능이 있는데 개똥쑥 잎에서만 추출할 수 있고, 고온이 아닌 저온에서 추출해야 효능이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중에는 임상시험에도 성공했다.[19]

그러나 연구성과를 즉각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연구결과는 1977년 학술집에 실렸지만, 익명으로 실렸다. 비밀 군사 임무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아르테미시닌에 관한 연구가 발표된 것은 1981년의 일이다.

파일:external/www.3ders.org/chinese-nobel-prize-laureate-tu-you-you-honored-with-partially-3d-printed-tea-display-in-nobel-museum-10.jpg

투유유는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이후의 인터뷰에서 “이 영예는 나 개인에게 속할 뿐 아니라 중국 과학계 전체에 속한다”고 말했다. 2015년 12월 10일 시상식에서 정식으로 시상이 이루어졌다.

참고로 WHO는 아르테미시닌 단독 사용을 금지했는데, 워낙 효과가 좋다보니 해당 물질에 면역 가지고 있는 말라리아가 나올것 같아서 단독 사용을 금지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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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뇌의 공간 인지 시스템을 구성하는 세포의 발견.[2] 회충 감염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 발견.[3] 자가포식(Autophagy)의 메커니즘 연구.[4]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1일 성립되었으므로 1930년 당시에는 중화민국이 맞다.[5] 학계내에서는 오래 전부터 투유유의 업적이 노벨상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유유가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채 고령의 나이에 접어들자, 빨리 투유유에게 노벨상이 수여되어야 한다고 노벨상위원회에 재촉(?)하던 학자들도 꽤 있었다. 심지어 국내 모 학자는 수년 전 칼럼에서 투유유의 장수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 왜냐하면 노벨상은 생존자에게만 수여되기 때문이다.[6] 중국에서는 의대에서 중의학을 배우고 면허를 취득한 뒤 소속된 의료기관에 따라 의학, 중의학으로 치료할지 선택하거나 또는 구분없이 진료/처방을 낸다. 한마디로 양쪽 다 가능하고 면허가 따로 있지 않다.약사도 마찬가지.[7] 중국의 경우 전통의학(중의학)에 대한 우대를 헌법에 명시하였으며, 의사와 중의사를 구분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의사가 허가된 한약을 처방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의사한의사 모두 독립적인 의료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의료 이원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분쟁은 보듯 뻔한 일.[8] 노벨상 위원회에서 발표한 To Youyou의 소개에서 Affiliation at the time of the award 항목과 life 항목을 보자.[9]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냉전시대에 “중국식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중국 고유의 전통의학을 통해 홍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10] 한자로 青蒿素 즉,개똥쑥(=청호)의 구성요소라는 뜻.[11] 왼쪽 남자는 루지셴 교수로, 영국 런던 대학교 시스템 약학 박사를 받고 중국으로 돌아와 약학을 가르쳤다.[12]북경대 의학부 약학대학에 해당함[13] 원사란 1991년 만들어진 중국의 학위 제도인데, 투유유는 해당 심사에서 여러번 탈락했다. 이 때문인지 투유유의 노벨상 수상이 발표된 직후, 중국에서는 원사 학위의 가치에 관한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14] 능력 부족이나 인정을 못 받아서 그런 게 아니라, 1979년까지 중국에는 대학원 과정이라는 게 없었다[15] 중국어로 523项目(항목)[16] 구체적으로 해당 프로젝트에는 약 500여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4만 종의 약초에 대해 실험했다고 한다.[17] 중국명: 칭하오(靑蒿)[18] ’개똥쑥 한 움큼을 2승(升·L)의 물에 담근 후, 비틀어 짜서 낸 즙을 마시라(青蒿一握。以水二升漬,絞取汁。盡服之)‘[19] 투유유와 동료들은 자신들을 직접 임상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