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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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칼라일
Thomas Carlyle


파일:xpaHB91.jpg

출생
1795년 12월 4일
영국 스코틀랜드 에클페찬[1]
사망
1881년 2월 5일 (향년 85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영국
display: none; display: 영국"
행정구
]]

직업
역사학자, 작가
서명
1. 개요
2. 일화



1. 개요[편집]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 사학자 및 비평가로 이름을 남겼다.

대자연은 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 형식, 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경험론 철학과 공리주의에 도전했다. 에든버러 대학교 명예총장이었으며, 유명한 저서로는 《영웅숭배론》, 《프랑스 혁명》 등이 있다. 전기 작가로는 프리드리히 대왕올리버 크롬웰을 다룬 책도 알려져 있다.

역사학자로써 역사가 몇명의 영웅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들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영웅사관을 19세기 동안 널리 퍼트린 장본인이다. 이런 영웅사관은 20세기에 허버트 스펜서에게 비판받을 때까지 주요 역사학 조류로 받아들여졌다.

당대의 세습귀족을 비판했다. 그는 귀족을 "하는 일이라고는 잉글랜드가 낸 세를 마음껏 소비하고 잉글랜드의 자고사냥이나 한다"고 비아냥거리고 혈통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귀족을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일반인들에겐 그의 이름이나 작품보다도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혹은 인도는 포기할 수 있으나 셰익스피어는 포기할 수 없다.)" 란 말로 유명하며, 이 유명한 구절은 바로 《영웅숭배론》에 나온다.

하지만 이 문장은 약간의 의역이 가미된 형태이다. 원 문장은 다음과 같다.

'Indian Empire will go, at any rate, some day; but this Shakspeare does not go, he lasts forever with us.'

(직역)-'인도 제국은 어쨌든 사라지겠지만, 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2. 일화[편집]


  • 《프랑스 혁명》[3]이란 작품을 쓸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그리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도 수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프랑스 혁명》이란 책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친구이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보내 이 방대한 양의 원고의 감수를 맡겼는데, 밀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하녀가 그 원고를 쓰레기인 줄 알고 몽땅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친구 밀에게 이 사건을 전해 들은 칼라일은, 물론 심정이야 증오의 말로 책 한권을 가득 채워도 분이 풀리지 않았겠지만,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편지를 보내고, 새로이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다.

3년이 지난 후 1837년, 마침내 완성된 프랑스 혁명을 선보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져 성공하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 악필인 것으로 유명해 관련 일화가 있다.

토마스 칼라일의 책을 맡은 런던의 인쇄소에서 악필로 유명한 그의 원고를 작업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에서 베테랑 문선공을 스카웃하였다. 그 문선공은 자기가 작업할 원고를 받아들고는 소리쳤다.

"젠장! 팔자 한번 사납군! 이 인간 원고 피하려고 런던까지 도망쳤는데!"||

위의 <프랑스 혁명> 일화와 연결하면, 밀의 하녀는 칼라일의 악필을 보고 도저히 원고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쓰레기로 여긴 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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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Alain de Botton,'불안',정영목 역,은행나무,2011,p105[3] Charles Dickens는 1859년 11월에 쓴 프랑스대혁명을 다룬 작품 《두 도시 이야기》의 저자 서문에서 "칼라일의 훌륭한 책이 보여준 철학에 뭔가를 더 보태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 무시무시한 시절을 이해하는 데 쓰이는 대중적이고 생생한 매체들에는 뭔가를 보태고 싶었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