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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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체코의 국영방송 체코 텔레비전 방송공사가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발표한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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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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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1]


파일:마사리크.png

본명
토마시 얀 마사리크
(Tomáš Jan Masaryk)
국적
체코슬로바키아
출생
1850년 3월 7일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관령 괴딩[2]
사망
1937년 9월 14일 (향년 87세)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라니[3]
재임
기간

1918년 11월 14일 ~ 1935년 12월 14일 (대통령)
학력
빈 대학교 (졸업)
배우자
샤를로타 가리크마사리코바
(Charlotta Garrigue-Masaryková)[4]

1. 개요
2. 일생
3. 평가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


2. 일생[편집]


1850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오늘날 체코에 속하는) 모라비아와 슬로바키아의 접경 지역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슬로바키아인, 어머니는 독일화된 모라비아인이었다. 이후 모라비아 중심부로 이사했다. 그의 이러한 배경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모두를 고향으로 인식하게 했고 훗날 그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통합을 지지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슬로바키아어의 방언을 모어로 구사했으나 어머니에게 독일어체코어를 배웠고, 고전 언어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했다. 또한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도 배워 문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89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9살 체코인 소녀를 죽인 혐의로 사형에 처하게 생긴 한 유대인을 변호한다. 당시 체코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기에 피고가 소녀를 죽였다는 이유가 턱없이 허무맹랑함에도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모두가 그의 사형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마사리크는 이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홀로 유대인 편에 선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혐의를 못 벗었고 형벌은 겨우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춰지는 데에 그쳤지만, 이 일로 마사리크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1897년 그는 자신과 정치적 관점을 같이 하던 지식인들과 더불어 ‘현실주의 모임’을 발족시켰다. 마사리크는 민족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는 경제 및 사회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연방화 시키기에 앞서 민주화부터 선행시키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부터 마사리크는 체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현실주의적 원칙들을 적용시키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체코 민족의 정치적 과제를 휴머니즘적 이상을 지향하던 체코정신과도 접목시키려고 했다. 특히 1895년에 출간된 ‘체코문제’에서 마사리크는 보헤미아 지방의 체코인들과 독일인들이 협력하여 보헤미아 지방이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독립적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마사리크가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를 추종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마사리크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현실정치와 접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자신이 교수로 봉직하던 프라하 체코 대학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1900년 ‘현실주의당(realisticka strana)’을 창당했는데 이 당은 자신이 발족시킨 ‘현실주의 모임’을 확대·개편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사리크가 주도한 이 당은 1907년 일반선거제의 도입을 요구했는데 그러한 것은 슬라브 민족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0% 이상이라는 현실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 당은 도나우 제국 내에서 자치권 획득을 지향하는 민족들 모두를 지원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같은 해 실시된 제국의회선거에서 마사리크는 사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빈 제국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사리크 개인이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미쳤던 영향력과는 달리 현실주의당의 영향력은 미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현실주의당의 의원으로 활동한 마사리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치적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여기서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즉 그는 개혁을 위한 모든 제안들이 위정자에 의해 거부되었고 특히 슬라브 민족에 대한 자치권 부여 등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실제적으로 이 당시 빈 정부는 민족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무능한 정부였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에 대한 저격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시작된 세계대전은 체코 민족과 그들의 정치가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체코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민족이 기존의 독일화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이들은 권력의 집중화와 관료주의적 행정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가까운 장래에 체코 민족 역시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역량에 적합한 자치 및 평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적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발발로 체코 민족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선택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기존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이후부터 마사리크는 국내외 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주력했고 거기서 그는 전쟁이 발발한 이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체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반합스부르크 항쟁을 통해 체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것을 실천시키기 위해 필요한 방법도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사리크는 영국의 수도인 런던으로 망명하여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외교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마사리크는 체코인들에게 당시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슬로바키아와 통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사리크는 독일군과 싸우는데 투입하겠다는 명목으로 러시아, 프랑스와 협상하여 당시 러시아에 투항하여 잡혀있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병사들을 모아 1917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라는 별도의 부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1918년 미국으로 가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호소했다. 당시 언론들은 그의 뉴욕 입성을 대서특필했으며 약 150,000명에 달하는 체코계 미국인, 슬로바키아계 미국인들이 그를 환영하는 인파를 이뤘다.

1918년 10월 18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했고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카를 1세도 이를 수락했다. 이후 귀국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하고 1918년 11월 14일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이후 무려 17년간 대통령 자리에 있다가 1935년 12월 14일에 물러나고 2년 뒤인 1937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얀 마사리크는 1940년 체코 망명정부 시절부터 체코의 외교를 주도하였고 1945년 체코로 돌아와 외무장관직에 있었으나, 공산화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1948년 3월 10일 의문의 추락사를 당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고사, 공산당에 의한 타살, 자살설이 대립하고 있다.


3. 평가[편집]


오랜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마사리크에 의해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는 후에 나치에게 점령당하고 나치가 망하고 난 후엔 나라 자체는 되찾았으나 공산화되고 말았다. 공산정권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90년까지 지속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 참조). 이 공산정권 시절 동안 마사리크는 '서방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라 격하되었다. 민주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2년정도 지속되다가 1993년 1월 1일 0시에 해체되고 만다. 그가 건국한 체코슬로바키아는 해체되었지만, 그 국체는 체코로 계승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민주화된 이후 재조명받기 시작하여 지금은 체코를 건국하고 체코 민족의 방향을 제시한 국부로 존경받고 있으며, 체코의 지폐 중 최고액면인 5000코루나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4. 기타[편집]


1919년, 마사리크가 워싱턴에서 활동할 때, 그 당시 구미위원부로 활동하던 이승만과 자주 회합하고 만나서 의견을 교환했으며, 이때 그는 이승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승만은 그의 투쟁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외교를 통한 독립과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전략의 얼개 및 골격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5]


5. 관련 문서[편집]



[1]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ˈtomaːʒ ˈɡarɪk ˈmasarɪk\].[2] 현 체코 남모라바주 호도닌구 호도닌(Hodonín).[3] 현 체코 중앙보헤미아주 클라드노구 라니(Lány).[4] 본명은 샬럿 개리그(Charlotte Garrigue)로 미국인이다.[5] “맥아더情報의 壽命 : 48時間”, 《月刊中央》, (중앙일보사): p. 247-255. 196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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