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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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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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토머스 모어 경
Sir Thomas More

파일:토머스 모어.jpg

이름
토머스 모어 Thomas More [1]
출생
1478년 2월 7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사망
1535년 7월 6일 (향년 57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타워 힐
국적
[[잉글랜드|

잉글랜드
display: none; display: 잉글랜드"
행정구
]]

직업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
학력
링컨스 인
옥스퍼드 대학교
시복
1886년, 교황 레오 13세
시성
1935년, 교황 비오 11세
축일
6월 22일
상징
도끼, 족쇄
종교
가톨릭
경력
변호사 개업
대법관

서명
1. 개요
2. 생애
2.1. 성인 시성
3.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
4. 대중매체 속 등장
4.1. 튜더스에서의 토머스 모어
4.2. 울프 홀에서의 토마스 모어
5. 논란
5.1. 개신교 탄압 논란
6. 여담



1. 개요[편집]


잉글랜드 헨리 8세 시대의 법률가이자 정치가.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 철학에서는 가톨릭 인문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현대인들에게는 유토피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2. 생애[편집]


토머스 모어는 1478년 런던 법조계 집안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모어는 자신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법률가가 되기 위해 링컨스 인(Lincoln's Inn)에서 법률 교육을 받았다. 모어의 인생에 매우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준 에라스뮈스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 였다. 모어는 법률을 공부하면서 당시 잉글랜드에서 떠오르던 학문인 인문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에라스뮈스와의 만남은 모어의 이러한 관심을 더욱 고무시켰던 사건이었고 그 둘은 평생 우정을 유지하였다. 졸업후 변호사로 개업을 한다.

모어는 계획대로 법조계에서 일을 하였고 하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어의 공직생활은 시련을 맞는다. 헨리 7세가 실시한 폭정 중 하나였던 과도한 특별세에 모어가 반대했던 것이다. 결국 모어의 반대로 국왕이 가져갈 세금이 의회에서 삭감되자, 헨리 7세는 격노하여 모어를 공직에서 박탈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모어는 잉글랜드를 떠나야 할 상황에 처할만큼 상황이 어려워졌고, 권력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한동안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살 연하의 17세 소녀 제인 콜트와 결혼하기 위해 다시 탈속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2] 하지만 이로부터 배운 것도 있었다.그는 수도원에서 나온 이후에도 수도자 시절에 입었던 거친 속옷을 계속해서 입고 다니는 등, 수도원에서 배웠던 절제된 생활태도를 평생 잊지 않으려 했고, 이때부터 청빈한 생활은 그의 신조가 되었다.

헨리 7세의 전제정치는 헨리 8세의 즉위로 막을 내렸다. 헨리 8세가 왕이 된 후 모어는 헨리 8세의 개인 비서[3]로 등용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유머러스한 토머스 모어의 성격을 매우 좋아했고, 국정의 여러 부문을 모어와 상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헨리 8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모어의 종교적 성향을 좋아했다. 1509년에는 런던의 상사와 안트웨르펜 상인 대표들 간의 협상과정을 통하여 통상문제 전반에 관한 역량을 인정받았고, 1510년 9월부터 1518년 7월까지는 법률 무역 관계 업무를 청산하고 런던의 민선행정관 대리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모어는 공평무사한 판관이자 빈민의 보호자로서 런던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이후 모어는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면서도 종교적으로도 헨리 8세와 갈등없이 신앙심 깊은 공직인으로 살아갔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마르틴 루터를 비판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도, 카톨릭적 체계가 무너지지 않았으면 했던 헨리 8세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어의 행동에 헨리 8세가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1529년에 그는 마침내 왕국 재상(Lord High Chancellor, 대법관)[4]에 임명되었다. 헨리 8세가 첫번째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하기 위해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탄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추기경이었던 토머스 울지를 재상에서 파면시키고 그 자리에 측근인 토머스 모어를 앉혔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혼사건에서 모어는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지만, 토머스 크롬웰이 등장하면서 사태가 급변했고 더 이상 모어는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모어는 종교적 문제로 교황권을 부정하는 것에 반대하며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립각을 세웠으며 결국 1532년 재상 자리에서 내려왔다. 1533년 헨리 8세는 첫째 부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감행하였는데[5] 로마 교황청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고 분노한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교황청의 관계 단절을 시도한다. 헨리는 항소법을 제정하여 로마 교황청으로 이송되던 이단 고소 문제를 자신의 소관 아래 두었고 카탈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공주 대신 앤 불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에게 왕위를 계승한다는 왕위계승법을 통과시켰다. 헨리 8세는 신하들에게 왕위계승법을 따르라는 서약을 강요하면서, 1534년에는 영국 교회의 최고 결정권자는 로마 교황청이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 자신임을 공표하는 수장령을 발표했고, 이를 법률적으로 보호하는 반역법까지 제정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끝끝내 모어는 왕위계승법에 대한 서약을 거부하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에 크롬웰에 의해 잡혀서 런던탑 감옥에 수감되어, 이곳에서 처형당할 때까지 15개월을 보내게 된다. 그 사이에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공소이유는 "의회가 인정한 왕의 권능에 대해 그는 악의적이고 반역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모어는 "반역은 말이나 행동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침묵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면서 반박했다.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모어는 침묵을 깨고 적극적인 항변을 행사한다. 항변과 재항변이 이어지고 공격과 수비의 논리 싸움은 큰 이슈가 되었다. 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조문 하나, 문구 하나에 매달리는 위대한 법률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생명을 버리기 아까워서가 아니라 법률가로서 법적 논리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크롬웰 편에 서서 위증을 하자, 상황은 크게 불리해졌다. 그 위증으로 인해 반역죄로 사형판결을 받던 순간, 그는 재판관들에게 "여러분들이 지금은 이 땅에서 재판관으로서 나를 정죄하지만, 나중에 우리가 하늘에서 다시 만나 영원한 구원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라는 말로 통렬히 법정을 풍자해버렸다.

이윽고 처형대 앞에선 모어는 군중을 향해 "나는 왕의 충실한 종 이전에 하느님의 종으로 죽는다"라고 선언했다. 죽을 때까지도 유머감각을 잃지 않아서, 사형 집행인에게 자기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도끼를 받을 이유가 없다면서 수염을 잡아 빼고는[6]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7]라고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에라스뮈스는 토머스 모어의 죽음에 대해 "눈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잉글랜드는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가 지닌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라며 그를 애도했다. 그의 죽음에는 초인적 영웅의 무용담도, 전투적인 투쟁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유머와 해학, 그리고 인간적인 매력 덕분에 후대에도 영국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 끊임없이 회자되고 사랑받는 위인이 되었다.

2.1. 성인 시성[편집]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캐릭터는 각종 연극으로 재생산되었고 이로인해 '유머넘치는 원칙주의자'로 각인되면서 영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학자들의 재평가를 감안하여 1886년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시복(복자가 됨)되었고, 그가 죽은 지 4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1935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법률가의 수호성인으로 인식되었다. 축일은 6월 22일. 또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가톨릭에서는 성 토마스 모어(Saint Thomas More)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1980년에는 성공회(개신교)의 성인록에까지 올라갔다. 성공회를 목숨걸고 반대한 사람이 성공회 성인이 된 것이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가 법률가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점과 공과를 따지면 개신교 탄압을 명령한 헨리8세의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다. 물론 시행한 건 모어였지만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되었고, 이에 개신교의 성인이 될 수 있었다. 정작 성공회 손에 순교한 모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또한 영어권 내에서의 넓은 인지도를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8]과 그 동안의 가톨릭-개신교 분쟁에 대한 화해의 손짓을 뜻하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편집]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잉글랜드에서는 인간을 잡아먹는다.

『유토피아』에서[9]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토피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대중매체 속 등장[편집]



4.1. 튜더스에서의 토머스 모어[편집]


파일:The Tudors.Thomas More.jpg

튜더스 시즌 1, 2에 걸쳐 등장. 헨리의 좋은 친구로 가끔씩 헨리를 '해리'라고 부른다. 신실한 종교인이자 유능한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또한 가족을 사랑하는 남편이자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작중전개 내내 헨리의 진실된 조언자이자 성실한 신하로서의 최선을 다하며 헨리의 뜻을 존중하고 자신과 뜻이 다른 부분에서도 격한 비판을 가하지않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개신교도를 이단자로 규정하여 탄압, 박해하는 모습도 숨기지 않았다.[10]

그러나 신앙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결국 모어는 시즌2 중반에 참수된다. 모어의 죽음은 역대 명장면 중 손꼽히는 연출을 보여주었다. 사료에 기록된 내용에 매우 충실한 연출. 이때 고뇌하는 헨리 8세의 모습이 교차되며 나온다. 튜더스 시즌 내내 헨리 8세는 자기 아내들과 토머스 크롬웰을 비롯한 수많은 신하들을 처형대로 보내지만, 그때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준건 토머스 모어의 처형 때가 유일하다.

4.2. 울프 홀에서의 토마스 모어[편집]


파일:Wolf Hall.Thomas More.jpg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콰이번 역을 맡았던 안톤 레서가 연기했다.

튜더스를 비롯한 그동안의 대중매체와《사계절의 사나이》[11]같은 많은 창작물에서는 토마스 모어를 덕망과 지성을 두루 갖춘 성인으로 묘사하는데 울프 홀에서는 악역이 되었다. 뛰어난 학자이자 행정가지만 한편으로 인간미가 없는 오만한 위선자다. 말 하나 하나가 번드르르하게 들리지만 가시가 돋혀 있고 기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경멸이 깔려 있다. 자신의 신념은 소중하나 다른 이들의 신념은 틀렸다고 본다. 영특한 딸은 (역사대로) 사랑하지만 자기 생각에 무식한 아내는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공공연히 모욕한다.

토머스 크롬웰의 낮은 신분과 현실적인 행보를 경멸하는 인물로, 비천한 신분에서 출세한 현실주의자/기회주의자 주인공 토머스 크롬웰의 대척점에 서 있다. 촉망받는 학생이었던 소년 시절 역시 허드렛일을 하던 소년 토머스 크롬웰을 무시하면서 기나긴 악연이 시작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종교개혁 지지자들을 잡아들여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데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다. 이후 토마스 모어가 자신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선량하게 살아왔다고 항변하자 토머스 크롬웰은 이 위선을 지적하며 폭발하고 만다.

밉살스러우면서도 지적이고, 지적이면서도 위선적인 인물을 그리는 배우 안톤 레서의 연기가 일품이다.

5. 논란[편집]



5.1. 개신교 탄압 논란[편집]


토머스 모어의 전기 작가로 유명한 인물은 윌리엄 로퍼(1496–1578)이다. 그가 남겼던 『토마스 모어의 생애 (The Life of Sir Thomas More)』에서 모어는 연극을 좋아하고 즉석연기에 능한 인물,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던 가족적인 가부장, 그러면서도 늘 몸 안에 털 속옷을 입고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통제하려던 금욕적인 신앙인, 강력한 원칙주의자이면서 공평무사한 정치가이며 늘 유머로 가득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따뜻한 인간적인 모어 이미지는 대부분 로퍼의 전기에 기술된 내용에서 비롯한다.

반면 개신교가 확실하게 정국을 장악하고 있었던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에 지어진 존 폭스(John Foxe)의 개신교 프로파간다 서적[12] 『순교자 열전 (The Book of Martyrs, 1563)』에서 발견되는 모어의 모습은 정반대이다. 폭스에게 있어서 모어는 개신교 순교자를 고문하고 박해를 불사하는 냉혹한 이단심판관이다. 가톨릭 순교자이자 『유토피아』 저자로서의 인문주의자 모어는 여기선 더이상 없고, 피도 눈물도 없이 개신교도를 때려잡는 박해자이면서, 영국을 교황의 속박 아래 묶어두려던 반영국적인 반역자로 표현된다.

예를 들면, 그가 대법관(재상)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신약성서의 영어번역으로 잘 알려진 윌리엄 틴데일의 박해를 주도했다거나, 1531년에 순교했던 개신교도 토마스 빌니의 처형과 관련해 보여준 잔혹함 등이 폭스의 책에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폭스의 내러티브에서 발견되는 모어의 이미지는 확실히 개신교 박해의 선봉에 서 있는 전투적이고, 보수적이며, 심지어 폭압적인 정치인이다. 개신교를 가혹하게 탄압했던 경력을 서술하고, 이에 근거하여 '그가 참수형을 당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의 잘못된 신앙에 대한 인과응보적 결론이라는 것이 당시 개신교들의 일반적 견해였다'는 주장을 한다.[13]

브리언 모이나한과 미카엘 패리스와 같은 후기 작가들 역시 폭스의 책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반복한다.[14] 하지만 리처드 마리우스는 '모어가 직접 채찍질하고 고문했다'는 존 폭스의 주장이 거짓으로 의심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모어 생전에 비슷한 성격의 이야기가 소문으로 돈 적이 있었는데, 모어는 이 소문을 강력히(forcefully) 반박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단자를 집에 가둔 적은 있었고, 두명의 이단자에게 신체형을 시행했다고 자백한 적이 있었지만 고문하고 채찍질했다는 소문에는 완강하게 부인하였다.[15]

모어가 재상(대법관)에 재임하는 동안 총 6명이 이단으로 화형당했으며 모어가 열렬히 화형을 승인했다고 비판하는 전기 작가들이 있는 반면, 모어를 옹호하는 전기 작가들은 화형은 이단에 대한 당시 표준 형벌이었으며 모어가 재상으로 승격되기 전 100년 간 이미 30번의 화형이 있었고, 그 후 수십 년간의 종교격변기 동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가 계속해서 화형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헨리 8세가 다스리던 시기에 절도범만 7200명이 교수형에 당했는데, 모어는 이를 비판한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집행한 혹독한 처벌은 대법관의 의무를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대법관이 되던 해부터 이교도 재판이 급증했지만, 대부분 헨리 8세와 로마 교회와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비롯된 것이었다. 왕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종교적 선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교황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왕이 개신교와 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서로간의 고발이 잦았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16]

현대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정상참작이 된 바가 있고, 이런 긍정적인 평가에 힘입어 토머스 모어는 성공회 성인으로까지 시성되었다. 다만 이러한 평가와는 무관하게 현대 창작물에서는 갈등 구조와 선악 양면을 가진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해, 그에 대한 모든 평가를 동시에 버무려 잔혹한 면을 온화한 면과 대비시키는 방법으로 캐릭터를 만들기도 하는 편이다.

6. 여담[편집]


  • 《우신예찬》을 지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와 절친한 친구였다. 에라스뮈스는 모어를 "사계절의 사나이 (omnium horarum homo)"라고 불렀는데, 이는 "모어가 부드럽고, 겸손하며, 상냥하면서도 때로는 즐겁고 유쾌하고, 때로는 심각하고 진지한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17]

  • 인문주의자로 덕이 높고 평판이 높은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으며, 그가 기사작위[18]를 받고 국왕의 비서과 하원의장을 거쳐 왕국 재상(Lord High Chancellor)에 올랐던 것도 그가 평소에 능력이 있고 청렴하고 결백하다는 평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왕국 재상은 권력이 워낙 막강해서 비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가족이 없는 성직자만 왕국 재상에 임명했는데, 모어는 가족이 있는 일반 신도로서는 최초로 임명될 정도로 청렴했다는 평을 받았다.

  • 한국의 유명 정치인이자 역대 대통령 중 한명인 김대중세례명도 '토마스 모어'였다. 본인이 정했다기보다 당시의 관례대로 세례 집전하는 신부님이 붙여준 듯한데, 본인은 '왜 하필 목잘린 사람의 세례명을 내게 주는가'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했다.[19] 이후 본인이 겪었던 여러 위험들(납치, 사형선고 등)을 생각하면, 공연한 걱정은 아니었던 듯.
[1] 가톨릭에서는 성 토마스 모어(Sanctus Thomas Morus)라고 부른다.[2] 모어는 제인과의 결혼 생활 동안 네 자녀를 얻었는데, 불과 6년만에 제인이 사망하자 앨리스 미들턴이라는 젊은 미망인과 재혼했다. 앨리스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3] 참고로 이 사람은 'secretary'라는 직업명으로 불린 최초의 사람이다.[4] 보통은 '대법관'이라고 쓰기도 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재상에 가깝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최고수장인 국왕을 사실상 대리하는 수석 대신의 직책이며 법조계에서도 최고재판소장보다 상급자다. 대충 국무총리 겸 국회의장 겸 대법원장 겸 검찰총장 겸 국정원장 겸 청와대 민정수석 정도의 절대권력자로서 국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사찰(국정원) 수사(경찰청) 기소(검찰청) 재판(법원) 형벌을 망라한 모든 절차를 혼자서 다 해먹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없는 죄도 만들어 씌울 수있는 명실상부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였다고 볼 수있다.[5] 모어는 헨리 8세앤 불린의 결혼식에도 끝내 불참한다.[6] "This(beard) hath not offended the king"[7] 이 유언은 1999년에 출판한 훗날 서울시장이 되는 박원순의 책 제목에도 쓰였다.[8] 최근까지도 인지도가 높다.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을 정도.[9] 중상주의 정책으로 상인들이 양모를 대량생산하기 위해 기존 농장을 없얘고 거기에 양을 키우자, 정작 먹을 곡식이 부족해진 현상을 풍자한 문구.[10] 자신은 폭력에 반대하지만 개신교도들은 화형해야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시즌1 마지막 10회에서 재상으로 임명된 후 개신교도의 화형을 직접 집전하는 모습이 등장한다.[11] '사계절의 사나이'라는 표현은 원래 에라스뮈스가 토마스 모어를 그렇게("omnium horarum homo")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12] "그가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고 가톨릭 가치를 지키려다 죽었다는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를 건설하려던 튜더시대 정치세력에게는 매우 불편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권좌에 오른 직후 프로테스탄티즘이 영국사회를 확고하게 장악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인문학자로서의 모습이나 탁월한 판관으로서의 모습보다는 개신교도를 잔혹하게 처형하고 고문을 서슴지 않던 정치적 종교적 탄압자로서의 모어 이미지가 전경화(foreground)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프로테스탄트가 확실하게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영국이 새로운 국제정치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16세기 말 이전에는, 이처럼 폭스 식의 개신교 프로파간다가 구축해 놓은 박해자라는 틀에서 모어의 이미지가 소비되었다." 논문 『토마스 모어의 사후명성과 16세기 후반 영국의 문화전쟁』[13] 앞의 3문단. 논문 『토마스 모어의 사후명성과 16세기 후반 영국의 문화전쟁』 p.31 요약[14] 과거 전기작가들과 별도로 영국 '역사학계 통설을 반영'하는 교과서에선 토머스 모어가 화형을 비롯한 개신교 탄압을 한것은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More is a controversial figure. To some he is a martyr who died for his Catholic beliefs. However, his record of persecuting Protestants for heresy, which led to several being burnt at the stake, has harmed his reputation." The History of Parliament[15] 즉 고문에 참여하여 그것을 즐겼다는 프로파간다 서적의 말은 지나치며, 모어는 단지 헨리 8세의 초기 반개신교 정책을 따라서 자신의 임무를 지킨 것에 불과했다는 것이다.[16] 현대의 평론가들의 평가 역시 극단으로 갈린다. 리처드 마리우스 등의 몇몇은 무어는 개신교 박해를 저질렀으며 이는 무어의 초기 인본주의적 신념에 대한 배신이라고 혹평하였고, 애크로이드 등의 몇몇은 모어가 당시 격동기 종교개혁 상황에서 독일의 농민 반란과 같은 치명적인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지나치지 않은 대응을 한 것이라고 비교적 관용적인 견해를 취한다.[17] 에라스뮈스 『격언집』 286에 나옴.[18] 기사작위를 받은 사람이 성인(聖人) 반열에 올라간 경우는 이례적이다.[19] 한국 정치계의 대표적 천주교도인 장면 총리가 대부를 서 주었다. 김대중은 정치 입문 후 국회의원 선거를 떨어지다가, 장면의 민주당 신파로 들어갔고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장면 내각이 들어서게 되었다. 장면은 김대중에게는 계파의 수장이라, 김대중은 장면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모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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