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미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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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미올라의 기타 정보





미국의 前 축구선수


파일:Meola_Profile.jpg

이름
토니 미올라
Tony Meola
본명
안토니오 마이클 미올라
Antonio Michael Meola
출생
1969년 2월 21일 (55세) /
미국 뉴저지주 벨빌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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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축구선수(골키퍼 / 은퇴)
축구 감독
방송인
신체
185cm
소속
선수
버지니어 캐발리어 (1988~1989/ 대학)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1990)
왓포드 FC (1990)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 (1991)
버팔로 블리자드 (1994~1995 / 실내)
롱아일랜드 러프 라이더스 (1995)
메트로스타스[1] (1996~1998)
캔자스시티 위저즈 (1998~2004)
뉴욕 레드불스 (2005~2006)
뉴저지 아이언맨 (2007~2008 / 실내)
지도자
잭슨빌 아마다 FC (2015~2016)
국가대표
100경기(미국 / 1988~2006)

1. 개요
2. 클럽 경력
2.1. 대학 생활
2.2. 프로 생활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
4.1. 국가대표
4.2. 개인




1. 개요[편집]



파일:Meloa_National_1.jpg


미국의 前 축구선수.

케이시 켈러, 브래드 프리델 등이 대표팀 주전으로 발돋움하기 전까지 2차례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나섰던 미국의 명골키퍼였다.


2. 클럽 경력[편집]



2.1. 대학 생활[편집]


뉴저지주 벨빌에서 태어난 미올라는 이탈리아 2부리그에서 활약했던 아버지인 빈센조의 영향을 받아 축구에 흥미를 느끼며 시작했다. 자신이 재학한 케르니 고등학교에서 스트라이커와 골키퍼로 활약한 그는 41개의 클린시트와 42골(!!)을 기록하며 두 개의 포지션 모두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언론사 The Star-Ledger에 의해 1980년대 뉴저지주의 고등학교 축구 선수들 중 원탑으로 조명받게 됐다. 또한 미올라는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 농구에도 재능을 보여서 농구팀에서는 주장을 맡기도 했고 모두가 다 아는 야구 명문구단 뉴욕 양키스에서는 미올라를 드래프트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축구를 더 사랑했던 미올라는 훗날 대표팀 감독이 되는 브루스 어리나의 러브콜로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했고 대학 축구팀인 버지니어 캐빌리어에 입단한다. 그리고 그는 캐빌리어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헤르만 트로피[2]를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1987년 10월에는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에 미국 대표팀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1989년,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뛰기 위해 그는 캐빌리어를 나가기로 결심한다.


2.2. 프로 생활[편집]


이후 미국 축구협회와 계약을 맺은 그는 잉글랜드의 축구팀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으로 이적하며 해외로 진출한다. 그러나 공식 경기는 단 2경기에 그치며 혹독한 프로세계를 경험해야했고 이어 왓포드 FC로 팀을 옮겼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1991년, 아메리칸 프로페셔널 사커 리그[3]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에 입단한다. 이후 1994년에는 미국 실내축구리그의 버팔로 블리자드와 계약했으나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연극배우로 투잡을 뛰었던 그는 Tony n' Tina's Wedding의 공연을 위해 1995년 2월 팀을 나가야 했다. 그 해 중순 롱아일랜드 러프 라이더스에 입단하며 선수생활을 이어가다가 1년 뒤 메이저리그 사커가 출범하자 메트로스타스의 원년멤버로 입단하여 2시즌간 주전으로 활약한다.

1999년, 알렉시 랄라스 외 2명과 트레이드 형식으로 캔자스시티 위저즈로 팀을 옮긴 미올라는 첫 시즌에는 부상으로 대부분의 경기를 결정했으나 두번째 시즌부터는 경쟁에서 승리하여 팀의 넘버원으로 자리 잡았고 그 해에 16경기 클린시트로 최다 기록을 세우며 맹활약, 팀을 US 챔피언쉽으로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와 같은 활약으로 그는 리그 MVP와 MLS컵 최우수 선수 그리고 MLS 올해의 골키퍼상 등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보내게 된다.

만 35살이던 2004시즌, 미올라는 부상으로 서브 키퍼인 보 오쇼니에게 경쟁에서 밀리기도 했으나 US 오픈컵 결승전에서는 선발로 나서며 시카고 파이어를 이기고 우승을 도왔다. 그리고 이 시즌을 끝으로 미올라는 팀을 떠나게 된다. 다음 해인 2005년, 친정팀인 메트로스타스로 복귀한다. 2005시즌 MLS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등 많은 나이에도 여전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2006시즌부터 오스트리아의 회사 레드불이 구단을 인수하면서 팀 명칭이 뉴욕 레드불스로 새롭게 바뀌게 됐다. 뉴욕 레드불스라는 이름으로 맞은 첫 시즌에서 리그 20경기에 출전하며 여전히 팀의 주전으로 뛰었고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난다.

2007년 여름, 실내축구리그인 메이저 인도어 사커 리그의 뉴저지 아이언맨로 이적 후 주전으로서 팀의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다. 그리고 2008년, 미올라는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1988년 6월 10일, 미올라는 에콰도르와의 친선경기에서 처음으로 A매치 무대를 밟았다.

이후 대표팀의 퍼스트 키퍼로 거듭나며 40년만에 출전한 1990년 월드컵1994 FIFA 월드컵에 참가하여 모두 주전으로 활약했다. 그는 1990년 월드컵 본선에서 고군분투했지만 팀은 조별리그 3경기동안 전패를 당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해야만 했다. 그러나 4년 뒤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3경기동안 여러차례 선방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역사적인 첫 16강 토너먼트 진출을 이끄는 주역이 된다. 또한 당시 포니테일 머리 스타일로 많은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덤.

1995년부터는 케이시 켈러, 브래드 프리델 등이 유럽무대에서 경쟁력을 보이며 후보로 밀려났고 2002 FIFA 월드컵에서는 써드 키퍼로 참가하게 됐다.


4. 은퇴 이후[편집]


2015년 11월 24일, 노스 아메리칸 사커 리그(NASL) 소속팀인 잭슨빌 아마다 FC의 감독으로 부임하여 첫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으나 형편없는 성적을 거두며 2016년 8월 7일, 경질되었다.

이후에는 beIN Sports에서 코파 아메리카 현장 취재를 담당하기도 했고 2018년에는 FOX Sports에서 MLS와 2018 FIFA 월드컵 해설을 하며 방송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2020년에는 시카고 파이어의 해설자로 선임되었다.


4.1. 국가대표[편집]




4.2. 개인[편집]


  • 헤르만 트로피: 1988
  • MLS 올해의 선수: 2000
  • MLS 올해의 골키퍼: 2000
  • MLS 올타임 베스트 Xl
  • MLS컵 최우수 선수: 2000
  •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1] 2006년, 레드불이 인수하기 전까지 메르토스타스로 불렸다.[2] 북미 사커 리그를 설립한 밥 헤르만을 기리는 상으로 매년 미국 최고의 남녀 대학 축구선수에게 수여한다.[3] 메이저리그 사커가 출범하기전 미국과 캐나다의 프로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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