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 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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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인생 초기
2.2. 여희의 모략
2.3. 최후
2.4. 사후



1. 개요[편집]


太子 申生
?~기원전 656년

진(晉)나라 군주인 진헌공(晉獻公)의 태자. 제강의 소생. 제강이 죽은 뒤 여희(驪姬)가 자신의 아들은 해제를 태자로 올리기 위해 신생을 모함해 끝내 곡옥(曲沃)에서 자결해 생을 마감했다.


2. 생애[편집]



2.1. 인생 초기[편집]


신생은 곡옥과 진[1] 진무공(晉武公)의 손자이며, 진 헌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진 헌공은 가나라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 자식을 두었다. 진 무공이 죽고 그 아들 태자 궤제(詭諸)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 헌공이다. 그는 아버지의 첩인 제강과 사통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과 딸을 얻었다. 그 아들이 바로 태자 신생이고, 딸은 진목공(秦穆公)의 아내인 목희(穆姬)다. 그 뒤 제강이 죽고 진 헌공은 융족의 여자를 맞이했는데, 그녀가 바로 호희로 나중에 진문공(晉文公)이 될 공자 중이(重耳)와 둘째인 공자 이오(夷吾)를 낳았는데, 그는 훗날의 진혜공(晉惠公)이다. 그런데 진헌공은 여융족을 쳐서 여희와 그 여동생을 맞이해 여희에게 희해제를 얻고, 여희의 여동생에게서는 희탁자를 낳았다. 그리하여 여희가 진헌공에게 대단히 총애를 받아 태자 신생, 공자 중이, 공자 이오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되었다.[2]


2.2. 여희의 모략[편집]


진 헌공 11년(기원전 666년) 여희의 권유대로 태자 신생을 곡옥, 공자 중이를 포원, 공자 이오를 굴원에 머무르게 하고, 진 헌공과 여희는 도읍인 강에 머물렀다.[3] 그 명분은 진(秦)나라와 적(翟)나라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진 헌공 16년(기원전 661년) 진 헌공은 군대를 2군으로 나누어, 상군은 진 헌공이 친히 지휘하고, 하군은 태자 신생이 거느리게 했다. 조숙, 필만과 함께 곽(霍)나라, 위(魏)나라, 경(耿)나라 3개 나라를 멸했다. 조숙은 경 땅에 봉하고, 필만은 위땅에 봉해 대부로 삼았다.[4] 그리고 곡옥에 성을 쌓았다. 이에 사위가 신생에게 가서 달아나서 외국에서 좋은 명성을 유지하라고 했으나 신생은 듣지 않았고, 그것이 화가 된다.

진 헌공 17년(기원전 660년) 진 헌공은 태자 신생에게 동산의 고락씨족을 치게 했는데, 대신 이극(里克)이 그러지 말라고 간했으나 진 헌공이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이극은 신생에게 그것을 알리니 태자 신생이 걱정했다. 이에 이극은 태자 신생을 안심시키면서 효를 다하라고 했다. 그리고 신생은 동산의 고락씨를 토벌하자 이극은 병이 들었다하면서 태자를 수행하지 않았다.

진 헌공 19년(기원전 658년) 진 헌공이 여희와 있을 때 신생을 폐하겠다고 대놓고 말하자 여희는 태자를 높이는 말을 하면서 실상은 태자 신생을 까는 말을 했다. 그리하여 진 헌공은 공자 해제를 태자로 세울 뜻을 굳히게 했다.


2.3. 최후[편집]


진헌공 21년(기원전 656년) 여희는 아들 해제를 태자로 삼기 위해 뭐든 했다. 진 헌공이 꿈에서 제강을 보았다고 하니 그 제사를 지내라고 권했다. 이에 진 헌공은 태자 신생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리고 태자 신생은 제사 고기를 진헌공에게 바쳤다. 그런데 여희는 그것을 6일간 묵혀 둔 뒤 거기에 독을 풀었다.[5] 이때 진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오자 여후가 그 고기를 바치며 외부의 음식은 함부로 먹을 수 없다면서 개와 어린 환관에게 먹이니[6] 그들이 모두 죽었다. 진 헌공은 태자를 죽일 수 없어서 그 스승 두원관을 처형했다. 이때 곡옥에 있던 태자 신생에게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알리면서 말했다.

"태자께서는 어찌 여희의 소행임을 밝히지 않습니까?"

태자 신생이 대답했다.

"아바마마께서 여희가 아니면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식사를 하셔도 입맛이 없으시오. 그런데 그것을 해명한다면 아바마마께서 여희를 추궁할 것이오."

그 사람이 말했다.

"그러면 망명을 하심이 어떠합니까?"

태자 신생이 대답했다.

"오명을 쓰고 나가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자결함만 못하오."

그리하여 태자 신생은 곡옥에서 자결하였다. 이것이 12월 27일의 일이었다.


2.4. 사후[편집]


진 혜공 원년(기원전 650년) 진혜공은 태자 신생을 신인 땅에서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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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진나라가 익 땅에 있어 익나라라고 하기도 한다.[2] 물론 이는 여희가 진헌공과 세 왕자 사이를 이간질해서 자기 아들인 해제를 왕위에 올리기 위함이었다.[3] 여희와 진 헌공이 그린 큰그림은 태자 신생과 공자 중이 등을 외방에 내쫓은 이유는 바로 후계자에서 이들을 배제하고 해제를 적자로 세우기 위해서였다.[4] 이것은 바로 조(趙)나라위(魏)나라의 원조가 된다.[5] 공원국 교수의 교양 서적인 춘추전국이야기 2권에서 당시 보관 기술로 고기를 상온에 방치하면 썩을 것이니 애초부터 태자 신생을 보내 버릴 의도가 노골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6] 요코야마 미츠테루사기(史記)에서는 궁녀가 죽은 걸로 바뀌었다. 이유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