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문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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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기타


1. 개요[편집]


1457년 명나라에서 권좌에서 물러났던 정통제가 이복동생이자 현 황제인 경태제를 폐위하고 복위한 사건.


2. 배경[편집]


토목의 변 이후 정통제가 유폐되자 조정은 전 황제인 정통제 파와 현 황제인 경태제 파로 나뉘었다. 경태제는 본래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 주견심을 폐하고, 자신의 아들인 주견제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1] 얼마 못가 병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후에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았다.[2] 그러던 경태 8년(1457년) 1월 경태제가 병을 앓아 누워 있는 중에 대장 석형(石亨), 태감 조길상(曹吉祥), 서유정(徐有貞)이 정변을 일으켜 자금성을 장악한 다음, 정통제가 유폐되어 있던 남궁으로 가 문을 부수고 정통제를 자금성으로 데려갔다.

정통제를 비롯한 정변 세력이 동화문을 통해 자금성에 들어가려 하자 동화문을 지키던 수비병이 이를 제지하였으나, 정통제가 "짐은 그대들의 태상황이니라!"라고 외쳤고 그 한 마디에 수비병은 문을 열었다. 다음날 평소처럼 출근한 조정 대신들은 상황이 황제로 복위한 얼척없는 상황을 보고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아 만세를 외친다. 경태제는 폐위되었고 폐위된 지 한 달 후에 병사했다.

이렇게 영종은 다시 복위했고 그는 두번째 연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역사상 탈문의 변 혹은 남궁복벽 이라 부른다. 사실 영종 입장에서는 이런 쿠데타를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태자가 없고 경태제의 다른 아들도 없으며 영종 자신의 아들은 모두 성년에 이르지 않은 상황에서[3] 경태제가 죽으면 황제가 될 사람은 자신말고는 없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정통제는 다시 황제 자리에 오르니, 이전의 '정통' 연호를 그대로 쓰지 않고 '천순'이라는 새로운 연호를 내걸었다.[4] 복위한 다음에는 괜찮은 정치를 하긴 했지만 편치만은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조길상에게 휘둘렸으나, 조길상은 천순제를 폐위하고 황태자를 옹립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책형에 처해졌고 7년 후 천순제는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한다.

황제로 지낸 두번째 시기 -시즌2-동안에는 상당히 개념찬 황제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자기를 다시 황제로 만들어 주었지만 간신으로 평가받는 조길상, 석형 등을 제거하고 이현(李賢)과 같은 훌륭한 신하를 기용한다든지. 이 때 천순제는 자기의 하루 일과를 설명하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조상에게 절을 올리고 그 다음에는 조회를 보고 그 다음에는 밥 먹고 상주문 읽는 것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다. 다만 조길상, 서유정의 모함에 속아서 토목의 변 때 북경을 지킨 공신인 우겸을 죽이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비록 우겸이 경태제를 옹립한, 천순제 본인에겐 반역자와 같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상황이 매우 불가피한 경우인데다 우겸 본인은 매우 청렴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도 있는 인물이라서 대국적으로 용서해 주었다면 우겸 또한 천순제에게 충성했을 것이므로 이는 큰 실책이라는게 후대의 평가. 천순제도 이후 우겸이 훌륭한 신하라는 것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다고.

그리고 건문제의 유일한 후손이자 그의 차남 윤회왕 주문규를 56년 만에 유폐에서 해방시켰으며[5] 자신이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힌 기억을 참고해서 그때까지 남았던 자신이 죽고난 뒤 비빈들의 순장을 금지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당시 명나라 내부에 남았던 몽골의 풍속은 뒤틀린 폐습인 경우가 많아서 매우 개념찬 행동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3. 기타[편집]


영종의 복위 조서를 비롯하여 명나라가 탈문의 변 이후 조선에 전달한 각종 조칙의 내용이 세조실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복위 당시 경태 연호를 즉시 천순 연호로 고친 사실과, 폐태자 견심을 다시 황태자에 책봉하면서 태상황 시기에 태어난 영종의 세 황자들을 포함한[6] 4명의 황자를 동시에 친왕으로 책봉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이한 점으로는 영종의 5남 견주(見澍)의 이름이 견전(見湔)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7] 이는 실록 편찬이나 인쇄를 할 때 필사식자 작업이 잘못되어 발생한 오류로 생각된다. 그 외의 황자들은 모두 본명을 정확히 기록했다.

한편, 탈문의 변으로 영종의 복위가 선포된 6월 3일 이후 조선은 단종복위운동의 마지막 불씨를 꺼버린다. 태상황이 제위를 먹튀한 동생을 내쫓고 황제위를 되찾았다는 소식에 세조의 친위세력 사이에는 점차 불안감이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때맞춰 그 달 하순경에 금성대군의 역모에 대한 고변이 들려오고, 몇달 지나지 않아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의 종실 어른들이 나서서 단종과 금성대군, 한남군, 화의군, 영양위 정종 등의 단종 지지세력에 대한 처벌 상소를 시작한다. 결국 그 해, 금성대군과 단종은 모두 사사당한다.

[1] 즉 조선의 2대 임금인 정종처럼 잠깐동안만 맡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2] 라기보다는 태자로 삼을 만한 아들이 없었다.[3] 탈문의 변 당시 영종의 장남 주견심(뒷날의 성화제)은 아직 10세의 소년이었다.[4] 원래 황제가 바뀌면 그 다음 해부터 새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 천순 연호의 경우는 예외적으로 이듬해인 1458년부터 사용하지 않고 정통제의 복위 후 곧바로 개원하여 1457년부터 바로 천순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경태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나, 1450년부터 1456년까지 경태 연호를 사용한 사실은 무효화되지 않아 이 시기의 연도를 계속 경태 연호로 표기하였다.[5] 정난의 변을 일으킨 영락제가 유폐시켰다.[6] 영종의 차남 견린은 토목의 변 이전에 태어났고, 5남 견주부터 7남 견준까지는 태상황 시기에 태어났다.(3, 4남은 요절) 영종의 8, 9남은 복위 후에 태어났다. 한편 성화제의 휘는 견심(見深)이나 초명은 견유(見濡)였기에 태자 책봉 조서에는 이름이 이 초명으로 나온다.[7] 오류가 분명하다. 명실록에 실린 같은 조서에는 이름이 위키백과바이두백과에 제시된 이름인 見澍로 제대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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