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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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Sinking of the RMS Titanic


일시
1912년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
4월 15일 오전 2시 20분
(40890일, 111주기)
위치
북대서양
선종
여객선
사고 유형
운항 중 침몰
좌표
41° 43′ 55″ N, 49° 56′ 45″ W
탑승 인원
2,224명
사망
1,514명
생존
710명

1. 개요
2. 배경 (4월 10일~14일)
3. 사고 당일 (4월 14일)
3.1. 빙산과의 충돌
3.1.1. 충돌 당시 가설 및 반론
3.1.1.1. 충돌 당시 항해술 관련
3.1.1.2. 선체 재질 특성 관련
3.1.1.3. 충돌 당시 천문기상학 관련
3.2. 충돌 직후
4. 침몰 당일 (4월 15일)
4.1. 탈출 준비
4.1.1. 구조 요청
4.1.1.1. 무선 통신
4.1.1.2. 폭죽과 항해등
4.2. 구명정 진수
4.3. 혼란 가중
4.4. 최후의 순간
4.4.1. 선박이 어떻게 두 조각으로 나눠졌는가?
4.4.1.1. 현재의 다수설
4.4.1.2. 하향식 가설 (Top-down Breakup)
4.4.1.3. Mengot 가설 (Bottom-up Breakup)
4.4.1.5. V형 분리 가설(?)
4.4.2. 해저로의 낙하
4.5. 침몰 직후
5. 시신 수습과 장례
6. 생존자 및 피해자들
6.1. 승객
6.2. 선원
7. 종합
8. 사고의 영향
9. 영웅들과 저명인사들
10. 기타



1. 개요[편집]



재현 영상[1]
RMS 타이타닉이 1912년 북대서양에서 침몰한 사고이다.


2. 배경 (4월 10일~14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RMS 타이타닉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여객선 RMS 타이타닉은 1912년 4월 10일 영국사우샘프턴 44부두에서 출항프랑스의 쉘부르와 아일랜드의 퀸즈타운[2]에 기항한 후 4월 17일 아침 미국 뉴욕에 도착 할 예정이었다.

3. 사고 당일 (4월 14일)[편집]


출항 당시 쌍안경 보관함의 열쇠가 인계되지 않아서[3][4] 배 안에 있는 쌍안경을 꺼낼 수 없었다. 견시들이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고 육안으로 위험요소를 확인해야 했는데 사고 초기에는 이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었으나 나중에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실제로 동일한 환경 속에서 당시 쌍안경을 사용하여 실험한 결과 이것조차도 무용지물이었다. 실험 결과 그냥 검은 원만 보였다고 한다.[5] 애당초 당시의 차가운 공기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달이 없는 칠흑같은 밤에 파도도 없어서 빙산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여러 악조건이 겹쳤기에 쌍안경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은 그 많은 악조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 탐조등을 설치하지 않아서 빙산을 발견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출항 오전부터 빙산이 돌아다닌다는 위험한 소식이 선박 사이의 무선통신으로 공유되고 있었으며 적어도 타이타닉 호는 4월 14일 6통의 경고를 통신으로 받았다. 그러나 화이트 스타 직원이 아니라 마르코니 사 파견 직원들인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 2명은 승객들의 통신 발신 업무에 쫓기고 있었고 이 계절의 북대서양의 항해에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여겨서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할 당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배가 SS 캘리포니안 호였는데, 1명뿐인 통신사가 취침 중이라 무전 수신을 못해 구조하러 오지 못했다.

3.1. 빙산과의 충돌[편집]


파일:Titanic_iceberg.jpg
만악의 근원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것으로 추측되는 빙산[6]



영화 타이타닉에서 표현된 충돌 당시 상황

운명의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39분, 레지놀드 리와 함께 견시를 보던 갑판 선원 프레드릭 플리트가 전방 450m에 높이 20m 미만의 빙산을 육안으로 발견했다. 빙산의 10분의 9는 숨어 있기 때문에 빙산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7]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Titanic_porting_around_English.svg.png

플리트가 빙산을 발견하고 종을 몇번 울린 후 급히 선교에 전화로 보고했고 당직 항해사인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가 조타실에서 접수하고 선임 당직자인 1등 항해사 윌리엄 맥매스터 머독에게 보고했다. 보고와 비슷하게 종 소리에 전방을 바라보며 빙산을 확인한 그는 바로 좌현전타[8]를 명령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EOT)[9]전속 후진(Astern Full)[10]으로 돌려 기관실에 지시한 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보일러실의 방수격벽이 닫힐 것임을 알리는 알람을 울렸다.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지시에 따라 왼쪽으로 키를 최대한 돌렸으며 기관실에서도 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했으나 배의 회전반경이 너무 크고 빙산과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충분한 회전과 감속을 하지 못했다.[11] 결국 11시 40분 우현은 빙산이 있는 곳으로 서서히 접근하여 정통으로 부딪히지는 않았지만 우현측면이 빙산과 충돌하였다.


3.1.1. 충돌 당시 가설 및 반론[편집]




3.1.1.1. 충돌 당시 항해술 관련[편집]

빙산 충돌 직전 타력 유지 측면에서 후진보다 정지가 선회에 유리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후진을 걸지 않았으면 충격력이 높아져 더 큰 파손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정황상 빙산과의 거리를 육안으로 확인한 1항사 머독이 회피가 어렵다고 보고 가볍게 스치는 경충돌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어찌 됐든 다수의 전문가는 빙산을 너무 늦게 발견했으므로, 어떠한 대응을 했어도 침몰은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침몰에 이를 정도의 손상을 받은 원인으로 "정면이 아닌 측면에 빙산이 충돌해 피해가 가중되었다"는 설도 있다. 만약 타이타닉호가 빙산을 정면으로 충돌했다면 침수된 방수 구획은 선수 일부의 좁은 범위(타이타닉호의 방수 한계범위 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끝나 침몰을 면할 가능성도 있었으며, 결과적으로는 충돌을 회피하려고 키를 돌려 어중간하게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 피해를 가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면 충돌시 침몰하지 않았을 것이란 가설은 결과론적인 얘기다. 현대에 시뮬레이터로 결과를 보고 판단하는 것과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당대 최대 선박인 4만 6천톤의 타이타닉이 23노트 전속력으로 항해 중 빙산과 정면 충돌해도 침몰은 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목재로 된 범선이 혼용되던 당시 항해술은 회피만을 전제했으며, 현대에도 고의 충돌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고려되고 회피를 우선한다. 충돌 당시 1등 항해사 머독의 지시(좌현전타/전속후진)는 회피를 시도하되 여의치 않으면 최대한 스치듯이 가볍게 부딪혀 파손을 최소화하려던 의도[12]로 보이며 당시 상황에선 최선이었다.


3.1.1.2. 선체 재질 특성 관련[편집]

타이타닉호 선체에 사용된 강철판이 문제였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타이타닉에 사용된 강철은 그 때 기준으로는 가장 최고급이었지만,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당대의 제강 기술 수준은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낮았고 이 근본적 한계로 인해 강철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있었다. 많은 인 성분은 균열을 만들고 황은 이러한 균열을 더 확산시키며 낮은 망간 비율은 강철의 탄력성을 낮추어 메진 성질을 더 크게 한다. 참고로 현대의 질 좋은 강철은 망간과 황의 비율이 200:1이지만 타이타닉호의 선체에 사용된 1910년대 기준 '최고급' 강철은 겨우 6.8:1 수준으로, 현대의 시선에서 보면 저질로 취급받을 재료였다.

금속 자체의 특성과도 연관이 있는데 금속은 온도가 낮을수록 용접 부분이나 금속 그 자체가 충격이 가해졌을 때 파괴되기 쉬운 특징이 있다. 이를 '취성' 이라고 하는데 연성[13]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타이타닉호는 침몰 당시 북대서양[14]의 차가운 해수를 가로지르며 항해하고 있던지라 취성 파괴가 일어나기 쉬운 조건이었다. 당시의 야금술의 한계로 건조시 사용된 강철보다 영하의 기온 속의 빙산이 더 단단했으며 외부적 조건(낮은 온도)에 의해 금속의 특성이라는 악조건이 겹쳐 배가 파손당하기 쉬운 상태가 된 것이다.[15]

파일:빙산과 타이타닉호.svg

게다가 선체를 접합하는 데 사용했던 이음못(리벳)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약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타이타닉호의 잔해에서 채취한 이음못 48개를 분석한 결과 이음못에 유리 성분의 슬러그[16]가 높은 비율로 섞여있었고 이로 인해 이음못이 메진 성질을 가져 쉽게 금이 간 것이다.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는 이쪽을 밀고 있는데 여기서의 내용에 따르면 선수 부분은 곡선이다 보니 리벳 머신으로 박을 수 없어서 강철 리벳 대신에 인력으로 박을 수 있는 연철 리벳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헌데 테스트용으로 만든 연철 리벳은 10,000psi(68,947kPa)의 압력을 견딜 수 없었고(타이타닉이 충돌할 당시의 충격에 의한 압력은 계산결과 14,000psi(96,526kPa)로 추정하였음) 실제 타이타닉의 선수 부분의 리벳은 테스트용보다도 훨씬 약한 수준이었고 그 때문에 충격으로 리벳이 박살나면서 생겨난 틈으로 침수가 되었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현재 기준으로 타이타닉 선체는 지중해에서 관광용으로 쓰는 크루즈선으로 쓰기에나 적당하지 대서양을 건너는 여객선으로 쓰기엔 하자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기술의 한계를 고려했을 때 타이타닉이 선체의 결함에도 무리하게 대서양을 횡단하다 침몰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타이타닉은 앞서 말했듯 당시 조달 가능한 최고급 강철을 써서 건조했기에 상당시간 버틴 것이고, 보다 저질 강철을 쓴 다른 배였다면 파손이 훨씬 심해 더 빨리 가라앉았을 것이다. 당시 기술 수준을 감안하면 그나마 이 정도로 된 배가 빙산과 박았을 시 가장 안전했다. 타이타닉이 충돌 후 가라앉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타이타닉을 설계한 토머스 앤드루스의 예측[17]보다도 더 오래 걸렸으며, 구명정만 충분했다면 탑승자 대부분 어쩌면 전원이 생존했을 수도 있을만큼 버텨주었다. 당시에 훨씬 못한 수준의 선박들도 상시 노선으로 대서양을 횡단했고 그만큼 사고도 많았지만 타이타닉 같은 대참사로 이어지진 않았다. 결국 이 사고가 대참사가 된 이유는 구명정 부족, 인근 선박 통신두절 등 다른 요인이 크지 배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3.1.1.3. 충돌 당시 천문기상학 관련[편집]

한편 미국의 민간 기상학자인 밀라 진코바는 사고 당시 태양 표면의 폭발 활동 때문에 발생한 지자기폭풍이 침몰에 일조했다며 연구결과를 공개했다.[18] 타이타닉 침몰 당시 구명정과 인근 구조선박에서 오로라를 관측했는데 이런 오로라를 만들어낸 강력한 지자기폭풍이 타이타닉호의 항해 시스템에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나침반과 무선통신에 장애를 일으켜 항로이탈과 구조지연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다만, 나침반 오류로 정상항로를 다소 이탈했다고 해도 침몰위치와 항적을 볼 땐 경로를 크게 이탈해 유빙 지역인 북극해로 갔다고 보긴 어렵고 오히려 당시 기상상황으로 유빙이 남하한 것이 더 유의미한 원인이었다. 무선통신 또한 일부 장애를 일으킨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당시 가장 가까운 위치이던 캘리포니안호는 1인 근무하던 무선사가 수신기를 끄고 취침해있었고, 그 외 그나마 가까운 카르파티아호는 최고출력으로 왔음에도 4시간 가까이 걸렸으므로 의미가 없다.[19]


3.2. 충돌 직후[편집]


충돌 직후 머독은 우현전타[20]를 지시하여 빙산으로부터 벗어나는 한편[21] 방수격벽 폐쇄 버튼을 작동시켰다. 보일러실 2호, 6호의 화부장 프레드릭 배럿을 비롯해 화부 등 선원들은 쏟아져오는 물을 피하며 허겁지겁 대피했다.[22]

빙산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아 타이타닉은 멈춰섰다. 아래쪽 승객들은 큰 충격을 느끼고 잠에서 깨어났고, 위쪽 승객들은 약간의 흔들림을 느꼈으나 잠에서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은 흔들림을 느끼고 깨어났다. 선장실에서 쉬고 있던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 역시 흔들림을 느끼고 곧바로 조타실로 향했다.

스미스 선장은 머독으로부터 빙산 발견 및 회피 시도, 그리고 방수격벽 차단여부를 간단하게 보고받았다. 그리고 좌현 윙브릿지에서 육안으로 빙산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에게 피해상황을 점검할 것을 지시했다. 11시 47분경, 다시 조타실로 돌아온 스미스 선장 일행은 충돌에 따른 선체 피로를 고려해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EOT)를 미속 전진(Ahead Dead Slow)[23]으로 설정했다. 타이타닉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피해상황 조사에서 박스홀은 별다른 이상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대로 선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대부분의 승객들과 선원들은 빙산 충돌에 대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갑판에 흩어진 얼음조각을 가지고 3등실 승객들은 축구를 하고, 1등실 승객들은 위스키에 쓸 기념품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하지만 잠시 간의 예상을 깨고 타이타닉의 보수를 담당하는 존 홀 허친슨이 배의 누수현상이 심각하다고 조타실로 긴급하게 보고했다. 11시 52분경, 박스홀 역시 배가 빙산과 충돌하고 화부들이 대피한 뒤 10분만에 충돌 구역인 보일러실 2호, 6호와 최하 갑판의 수하물 취급소가 침수되는 것을 확인했다. 잠시 뒤 타이타닉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와 브루스 이즈메이 화이트스타 라인 사장이 조타실로 도착했다. 이즈메이는 배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물었고, 갑자기 불안감을 느낀 스미스 선장은 그저 걱정된다고만 답한 후 선원들에게 만일을 대비하여 승객들을 깨우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엔진도 정지시켰다. 스미스 선장은 즉시 토머스 앤드루스 등과 함께 직접 피해상황을 점검했는데, 11시 55분에는 최하 갑판이 완전히 잠기고 수선 바로 위 층인 G 갑판의 우편원들이 우편실에서 필사적으로 우편물을 구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G 갑판의 승객들과 승무원들 또한 물이 복도로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고 빠져나왔다.

영화 타이타닉의 연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빙하와 부딪히며 선저에 길고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고 믿지만, 만일 그 정도의 파공이 생긴다면 수만톤 규모의 배는 순식간에 해수가 유입되어 즉시 기울어버린다. 후일 초음파 탐사로 밝혀진 실제 파공의 면적은 모두 합해 1.1~1.2제곱미터정도로, 그 거대한 배를 침몰시킨 손상치고는 경미했다. 그러나 문제는 파공의 위치와 형태. 6개의 파공들이 총 5구획에 걸쳐 길게 나는 바람에 배의 침몰은 확실해져버렸다. 타이타닉은 2구획(선수부터는 4구획)까지 물이 들어오면 침몰하지 않고 버틸 수 있으나 선수부터 5구획 이상에 물이 차면 그 한계를 넘는 것이었다. 타이타닉의 격벽은 위의 E갑판과 연결되어 있는 구조라 침수구획이 5구획이 넘어버리면 선체가 부력을 잃고 앞으로 기울어지며 잠기는 와중에 해수는 격벽을 넘어 차례차례로 다른 구획까지 흘러 들어가 침몰해버리게 된다.#

다시 조타실로 돌아온 앤드루스는 장시간의 계산 끝에 이미 5구획에 걸쳐 누수가 진행되고 있음을 파악했고 이대로라면 타이타닉의 침몰까지 길어야 최대 2시간밖에 남지 않았다고 결론을 낸다. 빌지펌프[24]를 동원해 물을 빼낼 수는 있었지만 누수 속도에 비하면 침몰을 고작 몇 분 더 연기할 뿐이었다. 스미스 선장은 다시 조타실로 돌아가 박스홀에게 긴급타전이 적힌 쪽지를 건내주고는 즉시 구조요청을 보낼 것을 지시하고 엔진 오더 텔레그래프를 전현 추진체 정지(All Engine Stop)[25]로 맞췄다. 오후 11시 59분, 결국 타이타닉은 완전히 멈춰섰다.

4. 침몰 당일 (4월 15일)[편집]



4.1. 탈출 준비[편집]


파일:external/i266.photobucket.com/titanic-distress-rockets-april-15.png

스미스 선장은 12시 5분에 탈출 명령을 내리되, 혼란 방지를 위해 대놓고 승객들에게 침몰이 임박하다고는 알리지 않았다. 우선 승무원들을 시켜 잠들어 있던 모든 승객들과 선원들을 갑판에 집결시키기 위해 깨우고 구명조끼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이 시각 충돌부위의 F 갑판이 침수되기 시작했다.

12시 15분 경부터 통신사들에 의해 첫번째로 구조 신호가 보내지고 좌현에서는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가, 우현에서는 1등 항해사 머독이 구명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보일러 폭발을 막기 위해 연돌에 달린 안전밸브를 모두 열어, 연돌 4개 중 실제 연돌 기능을 하던 3개의 연돌이[26] 동시에 증기를 뿜기 시작했는데, 이때 발생한 큰 소음으로 인해 이후 갑판에서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진다. 같은 시각에 충돌부위의 F갑판이 잠기고 방수격벽이 있는 가장 높은 층이며 기나긴 복도가 있는 E갑판까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제빵장 찰스 조그힌을 비롯한 조리사들은 비상식량으로 들을 준비해 구명정마다 약간씩 실었으며 악단은 승객들이 공황에 빠지지 않도록 음악을 연주했다.

처음에는 승객과 선원 대부분은 배가 침몰한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형식적인 절차로만 여겨 구명정에 탈 생각조차 안 했는데, 배는 아직 몸으로 느끼기는 힘들 정도로 느린 속도로 가라앉고 있었고 어두컴컴한 북대서양 한복판에서 나무로 만든 조그마한 보트보다는 길이 270m의 강철로 만들어진 최신형 여객선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27]. 게다가 한밤중인데다가 추운 날씨 때문에 귀찮아 했던 사람들도 매우 많았다. 배에서 가장 부자였던 존 제이컵 아스터도 아내에게 "여기가 저 조그만 보트보다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선장에게 여성어린이를 먼저 태울 것을 건의했고 선장은 이를 승인했다. 이건 당시 사회통념상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일이기도 했고, 실제 통계상으로도 혼란스러운 재난상황에서 여성과 어린이들의 생존가능성이 더 낮은 점을 고려해 구조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조치이기도 했다.


4.1.1. 구조 요청[편집]



4.1.1.1. 무선 통신[편집]



타이타닉호가 주변 선박, 통신소들과 주고받은 무전을 정리 기록한 영상

CQD DE MGY[28]

CQD DE MGY

CQD DE MGY

(중략)

HERE MY POSITION 41.46N 50.24W COME AT ONCE.

HAVE STRUCK A BERG.

구조요청 여기는 MGY

구조요청 여기는 MGY

구조요청 여기는 MGY

(중략)

현 위치 북위 41.46 서경 50.24 즉시 와주기 바람.

빙산과 충돌했음.

0시 15분, 타이타닉의 긴급구조요청


4월 15일 0시 15분, 직전까지 뉴욕 기지국으로 1등실 승객들의 전보를 보내고 있었던 타이타닉은 빙산 충돌 이후 긴급히 구조요청을 보내기 시작한다. 처음에 보낸 것은 조난신호 CQD였다.[29] 타이타닉호와 불과 16km 정도의 거리에, 빙산이 너무 많아 야간 항해는 무리라 판단하여 아침까지 투묘하고 있었던 화물선 SS 캘리포니안(SS Californian)호가 있었지만 1명밖에 없는 통신사 '시릴 에반스(Cyril Furmstone Evans, 1892~1959)'가 오랜 1인 근무로 인한 피로누적으로 취침 중이라 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 배와 통신이 닿았다면 대부분의 승객이 구조 가능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지점이다.[30] 사실 캘리포니안호는 앞서 통신사 에반스가 선장의 지시에 따라 수시로 빙산 경보를 주변 선박에 전파했다. 타이타닉호 역시 이를 수신했으나 동일한 경보 무선이 수차례 반복되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하루 12시간씩 1등실 승객들을 위한 전보를 보내느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던 통신사 잭 필립스(Jack Phillips, 1887~1912)는 일 방해하지 말고 닥치라는 무선을 캘리포니안호에 날리기도 했다.[31]

CQD 신호를 6회 보내고 현재 위치를 말한 타이타닉호의 조난 신호를 최초로 수신한 것은 근처를 지나고 있던 약 250 km 떨어져 있었던 독일 선박 SS 프랑크푸르트(SS Frankfurt)호였다. 이후 SS 마운트템플(SS Mount Temple)호가 응답하여 상황을 물었고,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했다'는 사고 상황을 직접적으로 보고했다. 그리고 마운트템플호의 통신사 '존 듀란트(John Durrant)'는 "타이타닉호가 CQD를 보내고 있으니 주변 선박들은 무선을 자제해줄 것"을 알렸다. 마운트템플호의 알림 이후 7분간 비슷한 내용의 무선 호출이 각 통신국으로부터 오갔다.

0시 25분, 드디어 사고현장으로부터 대략 93km 떨어져 있던 여객선 RMS 카르파티아(RMS Carpathia)호가 응답했다. 카르파티아호의 통신사 '해롤드 코탐(Harold Thomas Cottam)'은 구조가 필요하냐고 물었고 타이타닉호는 즉시 현장으로 와달라고 무선을 보냈다. 이후에도 타이타닉호는 지속적으로 CQD를 송신했는데 현재위치와 즉각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그리고 빙산에 충돌하였고 가라앉고 있다는 말을 보냈다. 해롤드는 당장 브릿지(선교)에 알리겠다고 응답했다.[32]

0시 34분, 프랑크푸르트호는 그동안의 무선통신을 듣지 못하고 있었는지 타이타닉호에게 재차 상황을 물었다.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충돌했으며 프랑크푸르트호의 선장에게 이 사실을 알려 이쪽으로 와줄 것을 요청했고, 프랑크푸르트호는 선교에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이후 카르파티아호와의 통신이 이어졌으며 카르파티아호는 현재 전속력으로 가고 있고, 도착까지 4시간이 예상되니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다. 이때 자매선 RMS 올림픽호도 타이타닉호에게 상황을 묻는 메세지를 보냈으나 타이타닉호가 응답이 없자, 카르파티아호는 올림픽호의 메세지를 듣지 못했냐고 물었는데, 타이타닉호는 침몰하고 있었고 증기 소음이 워낙 시끄러웠기 때문에 듣지 못했다고 답한다.

0시 45분, 타이타닉호는 CQD에 SOS를 섞어서 보내기 시작한다.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빠르게 침몰하고 있으니 즉시 와달라는 말이 추가되었다. 이 신호는 케이프 레이스(Cape Race) 무선국[33]을 비롯한 당시 사고현장 근처 모든 선박들에게 송신되었으나 응답한 선박 중 가장 가까운 카르파티아호가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므로 다른 배들은 직접적으로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타이타닉호의 구조신호를 재차 내보내면서 최대한 많은 선박에게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한편 타이타닉에서 캘리포니안호를 지목해 호출하며 구조요청을 보내고 이어서 케이프 레이스도 캘리포니안호를 호출해보지만, 통신사가 1인 근무로 취침 중이던 캘리포니안호는 끝내 이를 수신하지 못한다.[34]

1시 3분, 대량의 무선신호들이 오가기 시작한다. 타이타닉호의 침몰 사고가 꽤나 중대하고 심각한 상황임을 다른 선박들이 파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 마운트템플호가 무선을 자제해달라 요청한 걸 생각해보면 다소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타이타닉의 구조요청은 다들 들을만큼 들은 상황이었고 해당 해역을 통과하는 배는 많았기 때문에 그 배들도 조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그 빙산이 다른 선박과도 충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박들 사이에서는 바짝 긴장하고 빙산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라는 경고가 필요했다. 그 와중에 카르파티아호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최고 속력인 15노트로 달려가고 있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1시 10분, 패닉에 빠진 주변 선박들이 미친듯이 무선을 날리다 못해 재밍이 오기에 이르자, 올림픽호의 통신사 '어니스트 무어(Ernest James Moore)'는 참다 못해 \'STOP TALKING\'이라는 메세지를 보냈다. 1시 15분에는 타이타닉호로부터 400 km 떨어진 RMS 발틱(RMS Baltic)호가 구조요청에 응해 현장으로 향했고, 1시 20분에는 270km 떨어진 RMS 버지니안(RMS Virginian)호가 응답하여 현장으로 향했다.

1시 27분, 타이타닉호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구명정에 실어 탈출시키고 있다는 무선을 보내며, 더이상은 버티기 힘들고 기관 동력이 끊어졌다는 말도 보낸다. 1시 35분, 타이타닉호는 다시 CQD SOS 신호를 반복해서 보내면서 기관실이 침수되었다는 신호를 보냈다.

1시 35분경 타이타닉호의 무선 송신이 일시적으로 끊겼다.

1시 50분경 100해리(약 185km)까지 접근한 프랑크푸르트가 무슨 일이냐고 다시 물어오자 답답해진 타이타닉은 "Fool. You fool. Keep out and standby(멍청이, 이 멍청아. 접근하지 말고 대기하라)"라며 프랑크푸르트를 무시했다.[35] 구조에 응함을 알리던 발틱호는 "We are heading for Titanic but can't agree to signals(타이타닉을 향하고 있으나 신호에 응할 수 없음)"이라고 알렸다.[36]

2시 10분, 상황이 악화되어 신호가 미약해진 상황에서 타이타닉호는 계속해서 구조신호를 보냈다. 이에 주변 선박들은 신호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말을 보냈으나 타이타닉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들을 수 없었고, 타이타닉호는 2시 17분, 'CQD DE MGY CQD DE(도움이 필요하다 여기는 타이타닉, 도움이 필요하다 여기는...)' 메세지를 끝으로 무선 신호가 사라졌다. 통신실의 침수가 시작되어 필립스와 브라이트가 송신을 중단하고 탈출했기 때문이다.

4.1.1.2. 폭죽과 항해등[편집]

파일:타이타닉 폭죽1-1.png파일:타이타닉 폭죽1-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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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에서 묘사된 폭죽과 항해등[37]
한편 타이타닉호는 캘리포니안호 등 무선 통신이 되지 않지만 근접해있는 다른 선박이 있을 것으로 보고 꾸준히 폭죽을 쏘아 올리고 항해등을 점등하며 조난신호를 발산했다. 타이타닉의 경우 강렬하게 빛을 집중해 쏘는 탐조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통상 항해등으로 조명 신호를 보냈는데, 항해등은 탐조등에 비해 조도가 미약해 깜박임이 인근 선박에서 관측되지 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폭죽의 불꽃과 타이타닉 전체에서 나오는 조명 불빛은 9해리(약 16km) 떨어져 있던 캘리포니안호에서 희미하게나마 관측되고 있었다.[38]

영국 청문회 조사에 따르면 사고 당시 투묘중이던 캘리포니안호는 이미 사고 전날인 14일 오후 10시 10분에 남쪽 멀리에 희미한 불빛을 관찰했고 선장 스탠리 로드(Stanley Lord)와 당직이던 3등 항해사 그로브스(C.V. Groves)는 강한 밝기와 움직임을 봤을 때 여객선의 불빛으로 보인다고까지 판단한 상황이었다. 11시에 선장과 3등 항해사가 하번하고 이어 상번한 2등 항해사 허버트 스톤(Herbert Stone)은 11시 50분쯤 문제의 불빛이 번쩍이더니 움직임을 멈추는 듯한 것을 보았고[39], 이에 탐조등을 통해 모스 부호 신호를 시도해보도록 지시해 5일 오전 1시까지 몇차례 실시했지만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1시 10분에 번쩍이는 불빛[40]이 5차례쯤 일어나는 것을 보았고 이에 해도실에 있던 선장에게 보고했다. 선장은 불빛의 색상을 물었고 항해사는 흰색이라고 답했는데, 당시엔 불빛 색상의 의미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있지 않아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어 구조신호로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1] 결국 선장은 탐조등으로 신호를 계속 보내라고 지시하고 잠에 들었다. 2등 항해사는 1시 50분에 3번의 번쩍이는 불빛을 추가로 관측했고, 2시 15분을 넘어선 불빛이 더이상 보이지 않자 선장을 깨워 이를 보고했다. 선장은 불빛 색상을 재차 물었고 모두 흰색이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후 불빛이 사라진 것에 대한 해석이 분분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5시 30분에 이르러서야 자고 있던 통신사 에반스를 깨워 밤중에 알 수 없는 불빛을 관찰했다는 걸 알려주며 주변 선박과 교신해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마침내 타이타닉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를 위해 침몰지역으로 이동했으나, 이미 막대한 인명이 사망하고 남은 생존자는 카르파티아호가 모두 구조했음을 프랑크푸르트호가 알려왔다.

참고로 청문회에서는 스탠리 로드 선장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는데, 탐조등이 닿지 않아 소통이 안되는 상황에서 즉각 통신사를 깨워 연락을 시도하지 않은 것의 안일함과 그로 인해 유일하게 적시 도착이 가능했던 캘리포니안호가 구조에 나서지 않아 대참사로 이어진 점이 주된 이유였다. 이에 선장을 비롯한 캘리포니안호의 선원들은 상세미상의 배에서 보내는 알 수 없는 불빛이었고, 결국 의미를 알 수 없고 희미하게 반짝이는 이 불빛이 마스트에 설치된 점멸등(Masthead flickering)일 거라고 짐작했다며 항변했다. 또한, 불빛이 없어진 이후론 누군가는 그저 멀어져서 안 보이는 거라 하고, 누군가는 증기에 가려진 거라 하고, 누군가는 별이 넘어간 거라 하며 의견이 분분해 통신사를 바로 깨울 생각을 미처 못했다고 했다. 결국 정황상 고의성이 없었다는 점이 인정되어 따로 재판이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선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원은 선사에서 해고되었고 이후로도 사회적으로 천민 취급되며 멸시받는 등 사회적 불이익은 막대하였다.


4.2. 구명정 진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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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이타닉 구명정 진수1-2.png파일:타이타닉 구명정 진수1-4.png
구명정은 좌현과 우현 양쪽에서 하나둘씩 내려지기 시작했다. 1등 항해사 머독은 더 이상 여성과 아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남자를 태우는 것을 허용하는 등 비교적 남성에게도 관대한 대응을 했지만 라이톨러는 "여자와 어린이 먼저"를 "여자와 어린이"으로 받아들여 혼란을 막기 위해 여성과 어린이 우선의 관습을 철저히 실시했다.[42] 이게 현장에선 도리어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정원이 덜 찼음에도 성인 남자라는 이유로 탑승이 거부되거나 우현에 비해 구명정을 내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머독이 맡은 우현에서 구명정을 절반 가량 진수시킬 동안, 라이톨러는 겨우 한 척을 내릴 수 있었다. 다만 좌현에서 남성 승객의 구명정 승선이 100% 거부된 건 아니고, 구명정에 선원이 한 명뿐이라는 여성 승객의 이의로 인해 선원 대신 타게 된 요트 선수와 몇 명의 노인 등 약간의 예외도 있었다. 1등실 승객들 중 소년 한 명이 조숙한 탓에 성인인 줄 알고 탑승이 거부될 뻔하다 소년의 아버지가 "얘는 아직 13살이라고요!"라고 라이톨러에게 이야기해 탈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장면 역시 1958년판 영화에 나온다. 이에 대해서 옹호하자면 일부러 죽게 남겨둘 생각은 없었고 당시 구명정에 대한 인식은 탑승자들을 다른 배에 태운 뒤 돌아와서 또 태우는 식이었고 라이톨러 본인도 자리가 남는 구명정들이 다시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한다. 또 남자들을 승선시키는 건 질서 유지 측면에선 위험 부담이 있다. 일단 사회 분위기상 아이들과 여자를 먼저 태우는 것까지는 용납하던 남자들이지만, 같은 남자들이 자기 대신 타게 될 경우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그들이 "왜 저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되나?"라는 식으로 항의하고 자칫하면 폭동이 일어나 난장판이 될 수도 있다.[43]

이때 수많은 3등실 승객들이 여전히 배를 헤메고 있었다. 대피훈련도 하지 못했는데 여러 구역이 철창으로 막혀 제한되어 있었고 배가 미로처럼 복잡했기 때문에 탈출에 지장을 빚었으며 일부 승무원들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 못하거나 혼란을 막는다는 이유로 승객들의 통행을 제한하기까지 했다. 3등실의 상당수 가난한 승객들은 미국 이민을 위해 왔고 전재산과 함께 왔기 때문에 짐에 대해 미련을 가진 승객들도 많았다. 거기에다가 이 배는 영국인과 미국인만 탄 게 아니라 미국 이주 목적으로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많았고 3등실 승객들 중에는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승객들도 많았다. 영화에서는 영어 안내판을 본 어느 아랍계 승객들이 영어사전을 뒤져가며 Deck(갑판)의 의미를 찾는 장면도 있다. 이 상황에서 여러 3등실 승객들은 그냥 탈출 시도를 포기한 채 자신들의 숙실이나 식당, 복도 등에 남아 지시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일부 승무원들은 상부와의 소통 부재로 그냥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수백명의 승객들이 식당에 남아 묵묵하게 탈출 지시를 기다리거나 같이 모여 기도를 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존 에드워트 허트를 비롯한 승무원들과 바일스 신부같은 승객들은 배 밑으로 내려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3등실 승객들을 적극적으로 인도해 도와주기도 했다. 항해사들에 의하면 다시는 올라오지 못한 선원들도 있었다는데 이 중 허트는 다행히 살아남았다.

단 1등실 승객이 먼저 탈출하도록 3등실 승객을 가둬두었다는 통설은 사실과 다르다. 전술하였듯 3등실 승객은 대부분 미국에 이민올 목적의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출항 전에 전염병이 미국에 유입되는 걸 막기 위해 미리 의사가 간단한 검사를 한 뒤 태웠다. 갑판으로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3등실과 1-2등실을 직접 연결하는 통로였는데, 마찬가지로 미국 이민법상 전염병을 막기 위해 이 통로를 차단해 놓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충돌 직후의 혼란 속에서 이 통로를 개방하라는 명령이 상당히 늦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항해사들도 이 사실을 파악하자 즉각 선원들을 파견해서 밑에 갇혀있을 승객들을 구출하도록 했다. 또한 구명정에 바로 태울 수 있도록 현측에 출입문[44]을 열라는 지시도 내렸다.

배는 우현의 손상에 의해 우현쪽으로 기울어졌다가 E 갑판의 여러 구역과 이어지는 "스코틀랜드 로드"라는 방수격벽이 없는 긴 복도에 물이 흘러들어왔고 이후부터 좌현으로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중앙계단에서는 맨 밑에서 물이 차오르는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최하부의 기관부 선원들은 동력 유지 및 펌프로 물을 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려진 최초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5번 보일러실에서 펌프 작업 도중 6번 보일러실의 격벽이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 기관사 2명이 익사한 것이다. 화부장 배럿은 사다리에 매달려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12시 40분쯤 우현에서 정원 65명짜리 7호 구명정이 겨우 28명을 태우고 처음으로 내려졌다. 곧이어 43분에 41명을 태우고 5호정이 내려졌다.

1시경 3호정(우현)은 32명이, 8호정(좌현)은 39명이 탔고 1시 5분경 경 1호정(우현)은 겨우 12명밖에 타고 있지 않았다. 1시 10분에 6호(좌현) 구명정이 28명을 태우고 내려졌는데 여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에는 빙산에 부딪히고 있었을 때 조타 당직자였고 6호정의 지휘자로 탑승한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 빙산을 처음 목격했던 견시 프레더릭 플리트, 그리고 훗날 "가라앉지 않는 이(Unsinkable)"라는 별명을 갖게 된 마거릿 몰리 브라운도 있었다.


4.3. 혼란 가중[편집]


파일:타이타닉 혼란가중1-1.png파일:타이타닉 혼란가중1-2.png
1시 반쯤에는 해수면이 상갑판(B갑판 및 C갑판)의 선수에 도달해 잠기기 시작했다. 밑에서는 1등실 식당이 있는 D갑판이 침수되기 시작했으며, E갑판의 스코틀랜드 로드에 물이 꽉 차 좌현으로 기울어지고 다른 구역으로 흘러가 침몰 속도가 점점 빨라졌는데, 몇몇 생존자들은 좌현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앞으로 기울어지는것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구명정도 하나둘씩 떠나가고 배가 몸으로도 느끼고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기울어짐에 따라 승객들도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함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혼란이 점점 가중되었다. 구명정도 이제 정원에 어느 정도 맞추거나 초과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사고도 약간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제가 불능될 정도는 아니었다.

1시 25분경 1시 20분에 16호정(좌현)이 약 40명을 태우고 내려졌는데 여기 타고 있었던 사람들 중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은 후에 자매선 HMHS 브리타닉이 침몰했을 때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1시 25분경 14호정(좌현)이 내려지려 하자 공황에 빠진 승객들이 필사적으로 타기 위해 우르르 몰려왔다. 이에 라이톨러의 지시로 14호정에 탄 5등 항해사 로우는 혼란을 저지하기 위에 허공에 대고 리볼버를 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aving_the_sinking_liner.jpg
화가 찰스 딕슨의 그림

1시 35분경 11호정(우현)은 정원을 다섯 명 초과해서 내려졌고 배에서 펌프질로 빠져나오는 물이 들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피했다. 13호정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제를 가까스로 피했으나 밧줄에 문제가 생겨 1시 40분경 옆에서 함께 내려지던 15호정은 바로 위에 내려져 깔리기 일보직전까지 갔다. 다행히도 15호정에 타고 있던 화부장 바렛을 포함한 선원들이 아슬아슬하게 밧줄을 잘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명정이 하나둘씩 내려짐에 따라 이제 후미로 몰려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시 41분경에는 15호정(우현)이, 1시 45분에는 2호정(좌현)이 내려졌다. 이때 몇몇 외국인들이 타려 했지만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권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 존 제이컵 애스터는 어린 아내를 태우고 아직도 빈 공간[45]이 많은 것을 보고 타도 되냐고 물었으나 라이톨러에 의해 거절당했다. 1시 50분경에 내려진 구명정 10호정(좌현)에는 어떤 여성이 배 사이에 떨어져 끼었다가 구조되었다. 같은 시각 4호정(우현)이 내려졌다.

어떤 승객들, 특히 탑승이 거부된 성인 남성들 중 몇몇은 구명정에 타기 위해 구명정을 내리고 방치된 줄을 타거나 물에 뛰어들어 구명정까지 헤엄쳐 가거나 아예 선원들의 제지를 뚫고 뛰어들기도 하였다. 어떻게든 구명정에 오르기만 하면 내려가는 중이거나 다 내려진 경우 쫓아낼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고, 익수자는 일단 구조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니 별 말 않고 건져줬다. 대부분의 구명정이 정원 미달이어서 여유 공간이 있었고 다 내려진 뒤라면 공중에서 내릴 때보단 좀 더 태울 수 있으므로 구조에 거부감을 표하는 이들이 거의 없기도 했다. 물론 이 와중에 부상자들도 생겨났다.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2.png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3.png
접이식 구명정 C호정(우현)이 2시 정각에 내려지기 직전 두 사람이 뛰어내려 탔는데 한 명은 가족을 버리고 도망간[46] 성인 남성 승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화이트 스타 해운의 회장이자 배의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였다. 그는 이 때문에 돌아와서 욕을 꽤 먹었으며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도 사퇴했다. 이 구명정은 숨어 탄 네 명의 중국인을 비롯해 외국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상적으로 내려진 구명정[47]은 접이식 구명정 D호정(좌현)으로 2시 5분에 내려졌다. 이때 해수면이 A갑판까지 도달해 산책로에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상용[48]으로 선교 위에 올려진 접이식 구명정 두 대를 제외한 모든 구명정이 떠나자 선장은 총원 퇴선 선언을 하고 남은 선원들에게 모두 제 살 길을 찾으라고 했다. 남은 사람들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살기 위해 발악하는 수밖에 없었다. 배에 남은 사람들은 남은 항해사 네 명과 함께 진수되지 못한 접이식 구명정 2척을 기다리거나 후미 쪽으로 달아나거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배가 기울며 프로펠러가 그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배에 남기로 한 사람들도 있었다. 뉴욕에서 유명한 메이시 백화점을 소유한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 좋은 노부부였는데, 남편 이시도라 스트라우스가 노인의 경우 남성이라도 선원들이 대체로 태워주니 타라는 말에 다른 남자들이 구조되기 전까지는 타지 않겠다며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자 아내도 선원의 구명정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에게 자신의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정에 태운 뒤 배에 남아 남편과 운명을 같이했다.[49]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 있는 장면으로 등장하는데 이 두 사람의 내용은 2016년 3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도 소개된다.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50]은 현지처와 하인을 구명정에 태운 뒤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했다. 턱시도로 갈아입은 그는 자신을 따르는 하인과 함께 "우리는 가장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라고 하며 마지막까지 시가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배의 설계자 토머스 앤드루스도 비슷한 길을 택했는데, 목격된 그의 마지막 모습은 흡연실에서 구명조끼를 벗은 채 그림을 응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4.4. 최후의 순간[편집]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1.png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4.png
2시 10분에는 바닷물이 최상층인 보트 갑판까지 다다랐다. 그때쯤 체육관 바깥쪽 휴식터에서 월리스 하틀리가 지휘를 맡은 악단이 마지막 음악을 연주했다. 어떤 곡이 연주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유력한 곡은 'Nearer, My God, to Thee'[51]와 영국민요 'Autumn'(가을)이다. 전자는 침몰현장에는 없었던 그의 가족이나 동료들이 그가 죽을 때 마땅히 연주했을 것이라 주장한 내용이고, 후자는 현장에 있었던 타이타닉의 무선사가 증언한 내용이다. 선장은 확성기를 쥔 채로 선교에 들어가 그대로 그곳에 남았다.

2시 12분경 마지막으로 남은 구명정인 접이식 구명정 A와 B를 선원과 승객들이 힘을 합쳐 선교 옥상에서 내렸으나, A(우현)의 경우 캔버스가 제대로 덮이지 않아 누수가 일어났고,[52] B(좌현)의 경우는 내려지던 중 받치던 노가 부러져 뒤집혀 버렸다.

2시 15분에서 17분 사이에는 바닷물이 마치 파도가 흽쓸듯이 보트 갑판을 본격적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해수가 이제 배 위에서도 들어오면서 배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통신실도 침수되기 시작했고, 한계까지 버티며 구조신호를 보내던 통신사 잭 필립스와 조수 해럴드 브라이트도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구조 신호를 보낸 후 빠져나왔다.

남은 접이식 구명정 두 척은 제대로 진수되지 못한 채 물에 흽쓸려 갑판 위를 떠다녔는데 접이식 구명정 B호정은 뒤집힌 상태에서 여러 명이 매달려 있었고 A호정은 물이 반쯤 찼다. 이때 몇몇 사람들(아치볼드 그레이시, 찰스 라이톨러, 잭 테일러 등)이 환기구 때문에 빨려들어갔지만 다시 보일러실에서 발생한 뜨거운 공기가 올라오면서 물 속으로 빠져나와 뒤집어진 B호정에 도달할 수 있었다. 2등 항해사 라이톨러는 B호정에 매달려 살아남았지만 수석 항해사 와일드, 1등 항해사 머독, 6등 항해사 무디는 A호정을 풀려다가 물살에 떠내려갔고 살아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연돌 1호기가 수압과 기울어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선교루 쪽으로 쓰러지면서 물에 빠져있던 사람들 여럿이 깔려 죽고 말았다. 근처 접이식 구명정들은 아슬아슬하게 피했으나 그 여파로 생긴 파도가 접이식 구명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쓸어내리는 동시에 구명정을 배로부터 밀어냈다. 잠시 후 중앙계단의 유리 돔과 창문이 파도에 의해 깨져 물이 쏟아져 내렸다. 잠깐 후 2번 굴뚝이 미상의 폭발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배가 기울어지면서 선내의 온갖 가구, 기관, 잡기 등등이 쏟아지며 굉음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5.png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6.png
2시 18분, 깊은곳에 있는 선실로부터 굉음이 네 번 발생한 뒤 침몰속도가 가속되었다. 배가 더 기울어지자 잡을 것을 찾지 못한 많은 사람들 또한 혼란 속에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졌다.[53] 그리고 정전이 발생해 사방이 어두워지는데,[54] 곧바로 유입 해수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선체는 2호기와 3호기 연돌 사이의 신축 이음을 중심으로 금이 가면서[55] 폭음과 함께 두 동강으로 쪼개졌다. 선체가 쪼개짐과의 동시에 3호기 연돌이 붕괴되어 바닷속으로 낙하 하였다.[56] 다만 정전으로 인한 어둠 때문에 이는 소수만 목격했고 구명정에 탄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목격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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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선수 부분은 잠기고 후미 부분은 분리되어 잠깐 떠있는 듯 했다. 하지만 후미도 좌측으로 돌면서 다시 빠른 속도로 거의 수직으로 기울었고, 잡을것을 찾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을 떨어트렸다. 이와 동시에 꿋꿋이 버티던 4호기 연돌이 부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2시 20분 경, 타이타닉호는 수면 아래로 완전히 수장 되었다.

이 때 구명정들은 빨려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선체 후미는 엘리베이터처럼 비교적 느리게 침몰했고 빨아들이는 것 같은 건 없었다고 한다. 후술하듯이 당시 후미에 매달려있던 배 조리장 찰스 조그힌은 머리도 젖지 않았다고 한다.

4.4.1. 선박이 어떻게 두 조각으로 나눠졌는가?[편집]


타이타닉 잔해 발견시기인 1985년 전까지는 두 동강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침몰 직후 타이타닉이 두 동강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생존자들에 의해 논쟁이 시작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증언 역시 많았고 청문회에서 배가 두 동강으로 파손되지 않았다는 화이트스타 라인의 주장이 인정되어 두 동강설은 74년간 부정되었다. 그래서 타이타닉의 최후(The Titanic, 1953), 타이타닉호의 비극(A Night To Remember, 1958) 등 1980년대 이전의 타이타닉 소재 영화에서는 배가 두동강나지 않고 온전한 모습으로 가라앉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1985년 9월 1일 미국 우즈홀 해양연구소 소속 로버트 밸러드 연구팀의 탐사로 각각 600m 떨어져있는 두 구역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끝내 두 동강설이 정설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뒤집어진 구명정에 매달려 살아남은 1등실의 젊은 생존자 잭 테이어(Jack Thayer, 1894~1945)의 증언을 다시 보면 상당히 정확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양손을 모은 채로 손가락을 V자로 만든 뒤 두 손을 떨어뜨리는 묘사가 있다. 즉 2번 굴뚝과 3번 굴뚝 사이가 갈라졌다는 말로, 1997년 영화판에서조차 오류를 범했던 파손 위치까지 정확하게 증언했던 것이다.[57]

생존자가 7백 명이 넘는데도 사고현장을 목격한 사람이 극소수라는 것에 대해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해상근무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원래 불빛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시야는 보름달이 뜬 날이 아닌 이상 한치 앞도 전혀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천지이다. 게다가 두 동강 나기 직전에 정전이 되는데, 밝다가 갑자기 어두워지면 더 안 보인다. 그러나 모든 생존자들이 이를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여서 몇몇 생존자들은 선미의 거대한 실루엣이 다시 수면 위로 낙하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잭 테이어의 경우에는 확실히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단, 어둠 속이기는 했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었기에, 이때 두 동강이 나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생존자들도 정전 이후 발생한 "끔찍한 굉음"을 들었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했는데, 마치 천둥소리 같았다고 했으며 보지 못했던 사람들 중에서도 당시 상황과 소음, 그리고 날이 밝아올 때 침몰 현장에 떠 있는 잔해들을 통해 배가 두 동강 났으리라는 짐작을 했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두 동강이 날 당시 많은 생존자들이 정전 이후 보일러의 폭발이나 끊어진 전선으로 인해 발생한 스파크로 보이는 작은 폭발이나 화재는 보았다고 한다. 당시 제빵장 조그힌을 포함해 배 위에 남아있었던 소수의 생존자들은 갑자기 배의 각도가 급격하게 바뀐 것을 느꼈다고 한다.

배가 어떻게 두 조각으로 나뉘어졌는가에 대한 추측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해외 포럼인 타이타닉 위키에서는 무려 9개의 가설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대중적인 가설은 하향식(Top-down) 가설이며 타이타닉(영화)에 적용된 가설은 '카메론 영화판 가설'으로 별도로 구분되어있다.

다음 상황들은 이미 정설로 여겨지고 있다.
1. 3번 굴뚝과 그것을 지지하는 갑판은 선체 분리 직후 정면으로 무너져내렸다.
2. 최후에는 선미가 거의 수직으로 기울었다.
3. 완전히 가라앉기 전 선체가 수직축을 중심으로 반시계방향으로 천천히 회전하였다.
4. 굉장히 느리게 침몰하여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일은 없었다.

파일:Titanic Breakup Forces.jpg
나뉘어지기 직전까지 타이타닉 선수와 선미에 가해진 힘.

파일:Titanic Breakup 유형.jpg
하지만 세부적으로 기울어진 선박에 가해진 힘중 위에서 잡아당기는 힘과 밑에서 뭉치려는 힘 둘중에 어떤 힘이 어떤 식으로 작용해 두동강 났는지에 따라 대표적으로 Top-down, 그리고 Bottom-up 가설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뉘게 된다. 현재 다수설과 제임스 카메론의 하향식 가설, 그리고 영화에 적용된 가설은 Top-down식, 그리고 Roy Mengot의 가설은 Bottom-up 가설을 따르게 된다.

Top-down 가설은 위에서부터 파괴되며 아래로 쭉 내려가는 가설이며, 바나나를 두 동강낼 때[58] 바나나가 위에서 반대편 껍질까지 갈라지는 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Bottom-up 가설은 밑에서부터 수축력으로 파괴되며 위로 쭉 올라가는 가설이며, 보통 원통 튜브를 구부릴 때 밑에서부터 위로 굽어버리는것을 보면 이해하기 쉽다.

4.4.1.1. 현재의 다수설[편집]


선체가 크게 4개 부분으로 분리되는 현재의 다수설

밝기 보정효과 없이 실제 생존자들이 목격했을 시야를 연출한 영상

2015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On A Sea Of Glass'에 소개된, 현재까지 가장 신빙성 높은 가설이다.

선체가 기울어 최대 23도까지 도달할 동안 선미에서부터 가해지는 강한 하중때문에 3번 연돌 부분 용골과 구조물 전체에 응력이 누적되었고 완전 침몰 3분 전인 2시 17분까지, 선체는 이 누적된 피로 때문에 3번 연돌 하단의 구조물들이 파괴되며 끊임없이 우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결국 신축이음이 버티지 못하고 상부갑판으로부터 천천히 갈라지자, 하방 압축력에 의해 위쪽으로 힘이 작용하는 용골이 엔진을 들어올리면서 선체는 크게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졌다.(선수부, 선미부, 전방 구조물, 후방 구조물) 분리와 동시에 선미 절단부로부터 강한 스파크가 발생하였고 일부 생존자들은 이를 목격하였다.

분리 직후 선미 부분에 매달려 하부 구조물의 지지 없이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전방 구조물과 그 위의 3번 굴뚝은 결국 정면을 향해 무너져내려 수면 아래로 잠겼다.

이후 선미부분은 다시 천천히 잠기기 시작해 거의 수직으로 기울었고, 마침내 수직축을 중심으로 천천히 회전하며 가라앉았다.


4.4.1.2. 하향식 가설 (Top-down Breakup)[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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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itanic e.jpg


2012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포함 여러 다큐멘터리와 유튜브 7천만 뷰를 달성한 'Titanic:Honor And Glory'등 수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되었던 이론이다. 2012년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 100주기가 되던 해로, 여러 특집 방송과 다큐멘터리 방영, 타이타닉(영화) 3D 재개봉 등의 인기에 힘입어 다시금 타이타닉 신드롬을 불러온 해였다. 이 시기의 주류 의견이었기에 현재까지도 타이타닉(영화) 가설과 함께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인 가설이다. 이중저(Double Bottom)가 완전히 부러지지 않고 버틴 원리를 바나나 껍질로 예로 든 제임스 카메론의 영향으로 바나나 이론(Banana Theory)이라고도 부른다.

이 가설의 골자는 선체의 분리가 상부 갑판에서부터 하향식으로 시작하여 용골 끝까지 그대로 전달되어 마치 칼로 절단하듯이 나뉘어졌다는 것이다. 선체 기울기가 20도에 다다랐을 때 이 분리는 대략 용골 부분에서 멈췄고 그때문에 이중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아 먼저 가라앉은 선수 부분이 선미 부분을 잡아당기게 만들었다. 이중저는 선미 쪽 선체의 절단면이 완전히 잠길 즈음에서야 겨우 분리되었고, 결국 선미 역시 빠르게 침몰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이중저란 선저 파손사고시 해수의 유입을 막도록 이중으로 만든 바닥인데 이 부분은 내구성이 높다 보니 두 동강이 난 뒤에도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이중저까지 같이 부러졌다면, 선미가 선수와 완전히 분리돼 조금 더 오래 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4.4.1.3. Mengot 가설 (Bottom-up Breakup)[편집]


위키피디아 타이타닉 문서에서 하향식 가설과 함께 비중있게 소개하는 가설이지만 하향식 가설과 카메론판 영화 가설만큼 대중적이지는 않다. Mengot 가설에 따르면 선미부분으로부터 가해지는 하단 압축력으로 인해 바닥부터 파괴가 시작되었다.

Roy Mengot은 이중저가 하향식이나 다수설처럼 선수와 선미를 연결시킬 힘이 없다고 판단하며, 오히려 뭉쳐지는 힘 때문에 부서지기 쉽다고 판단하였다. 때문에 이 가설에서는 이중저가 먼저 파괴되며 이중저의 두 조각이 위로 솟게된다. 타이타닉은 상부 B갑판[59]에 의해 연결된 채 다시금 아래로 기울었으며, 솟은 이중저로 인해 선체 하부가 모두 파괴되어 해저 방향으로 쏟아진 이후에야 마침내 선수와 선미가 분리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선체의 파괴가 수면 아래에서만 이루어지므로 배가 분리된 것을 보지 못했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처럼 멀리서 보면 배가 두 동강 나는 지 확인하기 어려워진다. 이 가설을 적용한 실시간 사고 재현 영상도 존재한다.

비슷한 이론으로 Top-Cant 가설이 있는 데, 이 가설은 바닥 구조물이 분리된 이후에도 상부 구조물로 버티다 한계 응력에 다다른 순간 한순간에 부러진다는 차이점이 있다.


4.4.1.4. 타이타닉(영화) 가설[편집]


타이타닉(영화)에서 묘사된 방식과 같다. 선체가 대략 45도에 이를 정도로 가파르게 기운 상태에서 3번과 4번 연돌 사이에서 두 조각으로 나뉘었는 데 그 손상이 용골까지 부러뜨리지는 못하며, 그 손상된 틈으로 해수가 급격히 밀려와 선수부와 선미부가 동시에 수면아래로 잠기기 시작했다. 그 후 선미 부분이 선수 부분의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다시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완전히 수직으로 선 후에 선수부가 분리되었으며, 후미 부분은 에어포켓 효과로 한동안 수직으로 떠있다가 침몰하였다. 현재 이 가설은 영화 개봉 후 여러 연구와 시뮬레이션을 거쳐 정설과는 다소 거리가 생겼다.


4.4.1.5. V형 분리 가설(?)[편집]

2006년, 이중저 잔해를 처음 발견한 해저 탐사 결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설으로 선체가 수면 아래에서 V자로 꺾여 분리되었다는 가설이다. 당시 신선한 충격을 준 가설이었기에 다큐멘터리로까지 만들어졌지만 현재는 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2번째 가설은 선체가 수직으로 가라앉으면서, 완전히 선체가 V자로 분리되면서 가라앉는(?) 가설인데, 이 가설은 완전히 불가능해서 레딧 등 인터넷에서는 쓰레기 가설로 취급 받고 있다(가설 영상 애초에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한 위치 상 저런 식으로 가라앉는 건 불가능하다. 어뢰를 맞았으면 또 몰라도. 근데 그걸 7년 넘게 밀고 간 유튜버가 그의 이름은 Aaron1912이다. 많은 논란과 그의 가설의 반박에 유튜브를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복귀해서 Aaron1912 Records&Research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이 극한 V자 가설을 처음부터 만들고 7년 동안 밀고 간 사람이 Aaron1912 장본인이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가설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고 있지 않다.


4.4.2. 해저로의 낙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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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타이타닉의 잔해는 불과 5~6분 만에 대서양 3,800미터 아래 해저에 가라앉았다. 동강난 선체 중 선수부분은 전면으로 낙하하여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였지만, 후미부분은 부서진 면을 아래로 수직으로 침몰하였기 때문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나서 선내의 에어포켓으로 엄청난 양의 해수가 밀려들어갔고, 그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선체 외벽 일부가 뜯겨져 나갔다.[60] 그 후로 선미부분은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돌며 극심하게 훼손되었고, 해저에 다다랐을 때는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61] 이 때문에 정확하게 선체가 파괴된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고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그 파괴 위치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해버리게 된다.

4.5. 침몰 직후[편집]


파일:타이타닉 최후의 순간1-8.png파일:타이타닉 침몰이후1-1.png
오전 2시 20분, 배가 완전 침몰하자 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차가운 북대서양 한복판에 버려졌다. 익사한 사람들도 꽤 있었지만 천여명의 생존자들은 넉넉히 지급된 구명조끼와 많은 부유물 덕에 침몰 직후엔 대부분 살아 있었다. 진짜 문제는 당시 바닷물의 온도는 영하 2℃였다는 것이다.[62] 바닷물에 빠졌다가 나온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의 회상에 따르면 '천 자루의 칼로 몸을 찌르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침몰 원인 자체가 빙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만약 침몰 사고가 일어난 지역이 더운 바다였다면 적지 않은 사람이 바다 위에서 구조될 수도 있었다.[63] 당장 타이타닉호의 자매함인 브리타닉호만 봐도 침몰 자체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침몰한 위치가 수온이 따뜻한 지중해라 저체온증으로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64]

깜깜한 밤, 배가 침몰한 곳에서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통과 공포 속에서 한꺼번에 지르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비명과 아우성이 울려퍼졌고 이는 구명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PTSD를 남겨주게 된다. 당시 어린아이였던 어떤 생존자는 살아남은 후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서도 야구 경기를 보러 가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유는 관중들의 함성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였다고. 그리고 배가 두동강나면서 배에서 떨어져나온 수많은 쇳조각 잔해들도 바닷물에 버려진 조난자들에게 부상 내지는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명정에 탄 생존자들은 물에 빠진 수많은 사람들이 구명정을 끌어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현장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했다. 물론 5등 항해사 헤럴드 로우 같이 앞장서서 구조 작업을 한 경우도 있긴 했지만, 가장 적은 탑승수인 12명을 태운 1호정에 탑승한 화부 헨더릭슨은 현장에 돌아가서 떠 있는 사람을 건져내자고 요구했으나 더프-고든 부부와 배를 맡은 선원 시먼스가 반대했고 나머지는 말이 없었고 결국 무산되었다. 또 5호정의 3등 항해사 허버트 피트만 역시 현장에 돌아가려 했으나 몇몇 사람들이 이에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6호정에서는 마거릿 몰리 브라운이 현장에 돌아가서 사람들을 구하자고 요구했고 구명정에 탄 다른 사람들도 이에 동의했으나 배를 맡은 조타수 로버트 히친스는 사람들이 배를 끌어당길 것이라며 거절했다.

한편 현장에서 비교적 가까운 약 50m 거리에 있었던 4호정에서는 완전히 침몰 전 헤엄쳐온 3명이, 침몰 후에는 5명이 헤엄쳐와 구조되었는데, 이 중 1명은 이후 구명정 위에서 사망했다. 접이식 구명정 D호정에서는 마지막 순간에 헤엄쳐온 한 명을 구조했다. 현장에 바로 있었던 뒤집어진 접이식 구명정 B호정에서는 30명이 넘는 사람들(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 아치발드 그레이시, 잭 테일러 등)이 매달리고 있었는데 주위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장에서 노를 저으며 느리게 벗어나야 했다. 이 중 구출되지 않은 한 남성은 "알겠소. 행운을 빌고 하느님의 축복이 있길 빌지요"라고 했다고 한다.[65] 이 남자의 정체는 모르지만, 당시 구명정에 타고 있던 생존자들에게는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선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물론 선장은 선장실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66]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침몰로부터 20분이 지나면서 점차 동사하고 익사해가면서 점점 줄어들고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14호정의 5등 항해사 해롤드 로우가 구명정들을 재편성한 뒤 지원자는 남기고(선원 7명, 승객 1명) 다른 사람들을 다른 구명정으로 옮겨 구조에 나섰으나 영하 2도의 차가운 바다에 있던 사람들은 저체온증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명만을 건졌고 이 중 3명이 생존했는데, 처음으로 구조된 사람은 중국인이었다.

한편 배가 침몰할 때 제대로 내려지지 못하고 파도 위를 떠다니던 접이식 구명정 A호정과 B호정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물에 빠져있던 사람들보다는 덜하지만 거의 지옥 같은 경험을 겪고 있었다. 뒤집어진 B호정은 안에 있는 공기가 불안정해지고 파도까지 일어서 모두가 구명정의 균형을 맞춰야 했고 몇명은 그 전에 동사하거나 도중에 힘이 빠지면서 익사했으며, 물이 찬 A호정에서는 반이 동사했다. 이 두 접이식 구명정에 남은 생존자들도 다른 구명정에게 구조된다. 그나마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B호정의 생존자들을 적절히 지휘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는 데 성공했다. 라이톨러가 구조된 직후 한 말에 따르면, 카르파티아호가 30분만 늦게 구하러 왔어도 B호정은 침몰했을 거라고 한다.[67]

이 때 바닷물에 있었던 사람 중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제빵장인 찰스 조그힌이었는데, 뒤집어진 B호정에 매달렸다가 자리가 다 찼다며 거절당했지만 타고 있던 누군가가 사망해서 자리가 남자 끌어올려져 살아남았다. 침몰 후 무려 3시간이나 버티며 살아남은 이유를 술을 잔뜩 마셨기 때문이라고 본인은 주장했지만, 사실은 머리가 젖지 않는 등 여러 이유로 운이 좋았을 뿐이다. 도리어 술을 마시면 저체온증이 오기 쉬우므로[68] 좋을 게 하나도 없다. 1958년작은 아무래도 주인공이 라이톨러이므로 침몰 직후의 B호정이 비중있게 다루어지는데, 조그힌이 침몰하는 도중에 자기 방으로 돌아와 숨겨두었던 술을 꺼내 마시며, 이후 술에 취해서 구명정 위치를 묻는 주연 일행들에게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대사를 날린다. 침몰 이후 위에 적힌대로 구명정에 건져지자 딸꾹질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4.6. RMS 카르파티아의 구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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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카르파티아호는 타이타닉의 선박사 화이트 라인 사와 경쟁 관계였던 큐나드 라인사의 여객선으로, 뉴욕에서 출발해 상당수 미국에서 여행을 가거나 유럽으로 돌아가려는 승객들을 싣고 타이타닉의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4월 15일 오전 0시 11분경 카르파티아호의 아서 로스트론(Arthur Rostron) 선장은 자고 있던 중 무전사 헨리 커텀으로부터 타이타닉이 침몰하고 있고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는데, 처음에는 뭔 일이길래 이렇게 깨우냐고 짜증을 내다가 구조 신호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을 차렸다. 선장은 27년 항해 경력에서 구조는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철저한 준비를 하고 사고 현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갈 것을 지시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 모든 기관사들과 기관부 선원들을 각자 근무장소로 배치하라고 지시하였다. 또한 증기기관으로 돌아가는 동력을 최대한 속도에 집중하기 위해 식당을 제외한 모든 곳의 난방과 온수 시스템을 끄라고 지시했다. 증기 동력을 최대한 아낀 결과 선체의 최대속력을 14.5 노트에서 17.5 노트로 올릴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선원과 승객들이 불편함을 감내한 정도를 넘어서, 본인들도 빙하에 부딪히거나 선체의 구조에 무리가 가서[69] 침몰할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한 큰 도박이자 희생이었다.
  • 전속력으로 향하면서 빙산 충돌에 대비해 위해 견시들을 추가로 배치하였다.
  • 1등실, 2등실, 3등실 식당을 임시 구호소로 개조한 후 각각 생존자들을 진찰할 의사들을 배치하였다. 또한 생존자들을 위해 식당에만 유일하게 온수와 난방이 공급되었다.
  • 복도 곳곳에 생존자들을 돕고 안내할 승무원을 배치하였다.
  • 생존자들의 잠자리를 위해 승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승객들을 최대한 한 격실을 다 채우도록 이동시켜 빈 객실들을 확보하였다.
  • 추위에 떨고 있을 생존자들에게 나눠줄 담요를 배 곳곳에서 수거했다.
  • 사무장에게 저체온증에 걸려 있을 생존자들을 위해 요리사들에게 커피 등 따뜻한 마실 것과 수프를 준비하도록 지시하였다.
  • 나무판과 밧줄로 만들어진 사다리가 선체 외부와 내부를 잇는 문, 해치로 내려졌다.[70]
  • 생존자들을 구조할 때 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바다에 기름을 쏟을 준비를 하였다.
  • 승객들을 구출한 뒤 타이타닉 호의 구명정들을 올리기 위해 카르파티아 호의 구명정들이 안쪽으로 내려졌다.

즉 타이타닉호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취했다.

표류한 타이타닉호의 구명정들은 바다의 파도가 점점 거칠어지고, 특히 접이식 구명정들은 이미 물이 들어오는 등 상황이 좋지 않았다.

카르파티아호는 전속력으로 항해했지만 이 배는 최대 속도가 17.5노트(약 시속 31.48km)에 그쳐[71] 카르파티아호가 현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4시였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른 타이타닉의 완전 침몰 시각은 2시 20분경이므로 침몰 1시간 40분 뒤에야 도착했다. 그나마 이조차도 카르파티아호가 선박의 동력을 한계까지 밀어붙여 필사적으로 쥐어짜고 자신들도 빙하에 부딪히거나 선체가 붕괴할 위험을 감수한 끝에 예정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침수된 접이식 단정 A, B호정의 생존자 등은 카르파티아가 빠르게 도착한 덕에 그 추위에도 많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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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묘사된 카르파티아호의 구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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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호 선상에서 촬영한 D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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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호 선상에서 촬영한 번호 불명의 구명정 2척

카르파티아호의 불빛은 이미 오전 3시 30분부터 볼 수 있어서 생존자들이 매우 환호했지만, 모든 생존자를 인양하는 데는 몇 시간이 더 걸렸다. 오전 4시쯤 구명정 4호정을 최초로 발견하여 구조했고 약 4시간 30분 동안 20척의 구명정에 타고 있는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12호를 마지막으로 구조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조가 진행되는 동안 5명이 구명정 위에서 추가로 사망했다. 선원들은 분주하게 생존자들을 위해 따뜻한 음료와 스프, 담요, 의료 서비스를 곳곳에 제공했으며 승객들 또한 생존자들에게 옷, 음식, 세면도구 등을 빌려주며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고 한다. 이 무렵 카르파티아호의 선원들과 승객들은 바다에 20개가 넘는 거대한 빙산들과 타이타닉호의 잔해들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오전 8시 30분에 마지막 생존자를 구조하고 나서 SS 프랑크푸르트를 선두로 45분 후 다른 배들도 구조를 위해 근접한 위치까지 달려왔지만 이미 다른 생존자들은 발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프랑크푸르트호에서는 추가 수색 및 구조를 위해 본인들도 침몰 위치까지 가겠다고 전했으나 카르파티아호는 이미 더 남은 생존자가 없다며 만류했고[72],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이던 화이트 스타의 RMS 올림픽호가 회사 차원에서 책임을 지기 위해 생존자들을 인계받을 것을 제안했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이제 겨우 다 태웠는데 생존자들을 또 옮기면 불편함만 줄 테고 무엇보다도 올림픽호는 타이타닉호의 자매선이라 거의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갑자기 나타나면 타이타닉의 유령선으로 오해하거나 심리적인 불안감을 줄 것이라고 판단[73], 이스메이 회장도 이에 동의하여 거절했다. 대신 카르파티아호에는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을 구호할 충분한 의약품과 물자가 없었기 때문에 출발지였던 뉴욕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원래 목적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피우메(현 크로아티아 리예카)였는데, 생존자들을 위해 이 정도까지나 불편을 감수한 것이고, 승객들 역시 이해해줬다. 카르파티아호는 속도를 줄이고 침몰 현장으로 돌아가 혹시나 있을 다른 생존자들을 찾았지만 단지 1구의 시신만 인양할 수 있었다. 대신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도식을 열었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온 화물선 캘리포니안호에게 잔해를 더 뒤져보라고 부탁하고 오전 8시 50분에 미합중국 해군의 정찰 순양함 USS 체스터#의 호위를 받으며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으로 돌아가는 항로도, 애초 배 자체가 썩 빠른 속도를 내지 못했던 데다 빙산, 안개, 폭풍, 거친 파도 등 악천후의 영향, 그리고 침몰 사고를 겪은 직후라 보다 조심해서 항해하는 등의 이유로 타이타닉이 침몰 지점에서 하루만 더 항해하면 도착했을 곳을 나흘이나 소모한 끝에 4월 18일, 뉴욕 항에 입항했다.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과 그들이 탔던 구명정들을 항구에 내려놓으며 구조 작업을 완수하였다. 뉴욕 항은 사고 소식을 들으려는 수만 명의 사람들로 북적였고 취재하려는 기자들도 많았지만, 로스트론 선장은 생존자들의 휴식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 기자들에게 취재를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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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호가 입항 후 뉴욕항에 내려놓은 타이타닉호의 구명정들과, 조사를 위해 올라탄 조사관들.

아서 로스트론 선장은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1912년 미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을 수여받았다. 생존자들은 고마운 마음에 돈을 모아 사례금을 전달했지만, 그는 그 돈을 하나도 받지 않고 대신 생존자들의 구조를 도와준 자신의 선원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이후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활약했고, 1926년 그동안의 군공을 인정받아 2등급 대영제국 훈장(KBE)도 받았다. 훈장 등급이 기사 서임 대상에 해당하는 2등급이었으므로, 이 때 경(Sir) 칭호도 함께 받았다. 이후 로스트론 선장은 1940년 11월 4일 폐렴이 악화되어 사망했으며, 웨스트앤드 교회의 묘지에 장례를 지냈다.

안타깝게도 RMS 카르파티아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1918년 7월 17일에 독일 제국 해군 잠수함 U-55의 어뢰에 맞고 침몰하며 그 영웅적인 함생을 끝마쳤다. 침몰한 위치는 에이레 패스트넷 에서 약 190km 떨어진 지점이다.

5. 시신 수습과 장례[편집]


4월 14일로부터 며칠 후, 시신 수습을 위해 해저 전선 부설선인 CS 맥키-베넷(Mackay-Bennett) 호를 포함한 몇몇 배들이 출항했다. 베넷 호에만 70명의 수습 작업원과 100개의 , 시신 냉장용 100t얼음 등을 탑재했다. 베넷 호는 바이올리니스트 윌리스 하틀리, 미국의 갑부 존 제이콥 애스터, 이시도르 스트라우스 등 1등실 승객, 116구의 3등실 승객 등의 유해를 수습했다.

총 328구의 시신이 인양됐고, 이 중에서 119구의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거나 연고자가 없는 시신, 연고자도 있고 신원도 확인된 일부 3등실 승객들, 선원들의 시신은 영국 근해에서 수장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선원들은 본래 바다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의미로 바다에서 죽은 선원은 자신의 고향 바다에 돌려보내는 수장이 일반적이었지만, 본래 육지로 옮겨 장례해야 할 연고자도 있고 신원도 확인된 일부 3등실 승객들까지 수장한 것은, 배의 협소한 공간으로 시신을 전부 싣고 갈 수도 없다는 점도 있었고, 수배된 배들이 대부분 1등실 생존자나 유가족들이 낸 비용으로 출항했던 것이기에 이들에게 우선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물론 법적, 도덕적 문제로 3등실 사망자의 유가족들에게 설명하고 사전 동의를 얻었다.

수습된 시신 중 205구의 시신은 캐나다핼리팩스에 매장 형식으로 안장되었다. 윌리스 하틀리는 태어난 고향인 잉글랜드 콜른에 안장되었고, 하틀리의 장례식에는 4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그리고 런던의 침례교회 담임목사로서 2등칸에 탑승한 존 하퍼 목사는 영국 런던의 덴마크 힐에 매장 형식으로 안장되었고, 뉴욕 메이시스 백화점의 소유주 이시도르 스트라우스는 카네기홀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브루클린에 있는 베델 묘지의 Straus - Kohns 가족묘에 화장 후 납골 안치되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스트라우스의 가족묘의 부인을 위한 유골함 자리는 비워져 있다. 또한 최고의 갑부 존 제이콥 애스터 4세는 뉴욕 맨해튼의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묻혔다.

시신이 수습되지 않았지만 시신 없이 장례를 치른 경우도 있다. 철강업자 벤자민 구겐하임과 그의 충직한 시종 빅터 가글리오 비서가 대표적이다. 구겐하임은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으나, 철강업자답게 소속된 철강업의 회사장으로 가글리오와 함께 시신 없이 장사를 지냈다.

당시 몇몇 신문 등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잠수부 등을 동원해 침몰 잔해에서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도 진지하게 검토됐지만, 당연히 불가하다는 결론만 내렸다고 한다.[75]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그 정도 심해에 가라앉은 시신의 수습은 매우 어렵거니와, 애초에 타이타닉이 가라앉은 수심 3,700m에 이르면 수압으로 인해 시체 자체가 인간의 형체를 유지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분해되어 버린다.

6. 생존자 및 피해자들[편집]


  • 타이타닉호의 생존자와 사망자 비율.[76] 출처
분류
탑승자
생존률
사망률
생존자
사망자
1등실, 어린이
6
83%
17%
5
1
2등실, 어린이
24
100%
0%
24
0
3등실, 어린이
79
34%
66%
27
52
1등실, 여성
144
97%
3%
140
4
2등실, 여성
93
86%
14%
80
13
3등실, 여성
165
46%
54%
76
89
1등실, 남성
175
33%
67%
57
118
2등실, 남성
168
8%
92%
14
154
3등실, 남성
462
16%
84%
75
387
승무원, 여성
23
87%
13%
20
3
승무원, 남성
885
22%
78%
192
693
어린이 총합
109
51%
49%
56
53
여성 총합
425
74%
26%
316
109
남성 총합
1690
20%
80%
338
1352
전체 총합
2224
32%
68%
710
1514

타이타닉호의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지만 영국 상무성의 조사에 따르면 1,514명에 달해 현재까지도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77]이다. 생존자는 711명에 불과하다. 물론 710명도 많지만 절반도 안되는 수준이니 약 30%~40%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배가 침몰했을 때 선원들의 통제가 안 먹히는 경우 여성과 특히 어린이들의 생존률이 매우 낮아진다. 급박한 상황에서 아무래도 구명정으로 달려들 때 힘센 남성이 구명정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타닉호 사건 때는 승객들에 대한 통제도와 선원들의 상선사관들의 명령 복종 정도가 매우 높았다. 이는 승객들이 타이타닉 같은 큰 배가 설마 3시간도 안되어 침몰하리란 생각을 못한 덕에 비교적 여유롭게 행동했고 구명정이 부족할 거란 생각을 못했으며 무엇보다 60년 전인 1852년에 발생한, 영국 육군 병력을 수송하다 가라앉은 영국 해군HMS 버큰헤드(Birkenhead) 함이 침몰한 사건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병력 수송용 프리깃 HMS 버큰헤드 함에는 영국 해군 승조원과 해병대원, 10개 연대에서 차출되어 승선한 육군 병력 및 민간인 21명(남성 1명, 여성 7명, 어린이 13명) 등 총 643명이 타고 있었다. HMS 버큰헤드 함은 암초에 걸려 반시간도 안돼서 침몰하면서, 탑승하고 있던 21명의 민간인을 우선 구명정에 태웠고, 혼란을 막기 위해 함장 로버트 샐먼드(Robert Salmond) 해군 대령 이하 육해군 장병들은 갑판에 부동 자세로 도열한 채로 가라앉았으며, 배가 완전히 가라앉은 뒤에야 에드워드 WC 라이트(Edward WC Wright) 육군 대위 등 잔해를 붙잡고 살아남은 소수의 운 좋은 군인 173명(육군 113명, 해군 54명, 해병 6명)만이 구조되었다. 이후 영국에서는 "버큰헤드호를 기억하자"는 분위기가 일었다. 사건 당시 장병들의 희생정신이 알려져 영국 사회의 정신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성의 생존율이 높았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여성 1912년 당시에는 여성 참정권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주체로 인식하지도 않았던 탓도 있다. 따라서 남성들이 본질적으로 약한 존재인 여성과 어린이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유사한, 지금 기준에서 차별적일 수 있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많은 남성들이 여성, 어린이에게 자리를 구명정 자리를 양보하거나, 승무원을 도와 구명정 주변에 스크럼을 짜고 사람들을 통제했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는 승객들은 승무원들이 권총으로 위협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1854년에 침몰한 아틱호에는 지휘가 마비되어 선원들이 먼저 도망가버리고 힘센 남자들이 먼저 타는 바람에 여자와 아이들이 전부 죽었다.

구명조끼가 넉넉하게 지급되었기에 익사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고, 사망 원인의 대다수는 -2℃의 수온으로 인한 저체온증이었다. 물 속에서는 공기 중보다 체온 저하 속도가 훨씬 더 빠르며 20℃의 해수에서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78] 사고가 발생한 북대서양 바다는 여객선이 통행하는 바다 가운데 가장 수온이 낮은 바다[79]로 영하 온도의 물속에 빠지게 되면 건강한 성인 남자도 10분 내외로 목숨을 잃는다. 2등실, 3등실 남성 승객의 사망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는데 2등실 남성 승객 중 92%가 사망했다.

6.1. 승객[편집]


객실별로는 3등실의 사망률이 월등하게 높다. 3등실 선실이 구명정에서 가장 떨어져 있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구조인 데다가 출입이 제한된 곳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거기다가 외국인이 많아 영어가 통하지 않아 언어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일부 승무원들이 3등실 승객들의 출입을 제한하거나 가만히 있으라고 한 것도 있었는데, 몇몇 매체에 나온 것처럼 1등실 승객을 먼저 탈출시키려고 막았던 것은 아니고 주로 상부와의 소통 부재 때문이었다. 밑에 나온 일본인 승객의 경우 외국인이라서 3등실 승객인줄 알고 승무원에게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오히려 상선사관들은 3등실 승객들의 대피가 지연되는 것을 알게 되자 배 밑에 승무원들을 파견했다.

2등실 어린이들은 전원 생존했지만 1등실에서는 어린이 사망자 1명이 발생했다. 1등실에서 헬렌 알리슨이라는 당시 2살짜리 여자아기가 구조되지 못했는데 구조되지 못한 이유가 엄마를 찾아서라고 한다. 이는 1등실과 2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유일한 어린이였다. 그녀의 남동생인 당시 생후 11개월의 트레버 허드슨 알리슨은 알리슨 가에 고용된 간호사 앨리스 클레버에 의해 구조되었다. 반면 3등실에서 구조되지 못한 어린이는 구조된 수의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1, 2등실 어린이까지 합친 총 어린이 수와 비교 시 절반에 가깝다.

생존자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장수한 이는 영국의 지도학자이자 교수인 밀비나 딘(Millvina Dean, 1912~2009) 여사로 타이타닉의 최연소 승객이기도 했다. 침몰 당시 생후 9주밖에 안 된 아기였다. 그녀는 2009년 5월 31일 세상을 떠났으며 사우샘프턴에 거주했다고 한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오빠는 아버지의 침착한 대처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끝내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노년에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며 타이타닉 침몰 당시 갖고 있었던 가족의 유품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1997년판 영화의 제작진들과 타이타닉 탐사협회가 생활비를 지원해준 적도 있다.

타이타닉 탑승자 중에는 신대륙으로 이민가던 북유럽인, 레반트(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등) 출신 오스만 제국인도 있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시리아 출신자만 154명이 탑승하고 있었고 그 중 23명이 생존했다고 한다. 이런 이민자들은 대부분 3등실에 탑승했다.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피해 이주하려는 아르메니아인들도 있었다.

탑승자 중에는 동양인도 있었다. 3등실에 탑승한 중국인 8명[80]과 2등실에 탑승한 일본인 철도공무원 호소노 마사부미(細野正文, 1870~1939)[81]가 있었는데, 이들 중 중국인 6명과 일본인 1명이 구조되어 생존률은 꽤 높았던 편이었다.

생존한 중국인들 6명 중 4명은 마지막 구명정에 뛰어내려 탑승했고, 한 명은 수영해서, 다른 한 명은 5등 항해사 로우가 침몰 현장으로 돌아왔을 때 구출됐는데, 2017년이 되어서야 다큐멘터리로 이 중 몇 명의 행방이 밝혀졌다. 모두 홍콩 출신으로, 그들은 이전에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하는 화물선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타이타닉 3등선 티켓을 끊어 미국으로 이주하던 중이었다. 이 중국인 생존자들은 한동한 잊혀 있다가 2017년이 되어서야 다큐멘터리로 몇 명의 행방이 밝혀졌다. 잊힌 이유는 당시 미국의 중국인 노동자 배제법으로 미국 땅을 밟자마자 금방 쫓겨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필 중국 노동자 배제법이 시행될 때 미국에 도착했다. 1882년부터 1943년까지 이 법은 중국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이민하는 것을 금지했다. 다른 생존자들은 뉴욕에서 환영을 받고 언론에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중국인 생존자 6명은 24시간 내에 뉴욕에서 추방되어 역사에서 거의 사라졌던 것이다. 이들은 쫓겨난 뒤에도 계속 북미에서 살았고, 평생 이 문제로 추방당할까봐 숨어살았다고 한다. 여성과 아이만 탈 수 있었던 구명정에 숨어타서 수치스럽게 살아남았다는 인식 때문에 나서지 않은 것도 있다. 다른 남성 승객들도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욕을 먹었는데 중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더 욕을 먹었다. 또 중국에서도 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일본인은 일본 철도계의 관료였던 호소노 마사부미였다. 일본에서 선정한 제1회 철도원 재외 연구원으로 발탁되어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뉴욕으로 향하던 귀로에서 사건과 조우했는데, 같은 타이타닉 생존자인 영국인1912년 출판한 'THE LOSS OF THE SS.TITANIC'이라는 수기에서 "다른 이들을 제치고 구명정에 억지로 타려는 일본인이 있었다"는 증언이 일본에도 퍼지게 되어 '여자와 아이를 우선으로 구한다'는 원칙을 무시했다는 둥, 사무라이들은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고 돌아왔다는 둥 귀국하고도 언론에게 갖은 욕을 먹었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불운하게 생애를 마감했다. (여장을 했다는 낭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1997년에서야 '다른 사람을 밀치고 억지로 탑승한' 동양인은 일본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사실 이것 또한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면 대부분 몰래 숨어탔다고만 했지 여장을 했다거나 남들을 밀치고 들어왔다거나 하는 증언은 없다. 당시 미국 내 동양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뉴욕 타임즈 등에서 과장되어서 보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탑승한 구명정 근처에 더 이상 여자와 어린이가 없어 항해사가 2명분의 자리가 아직 남아 있다고 소리쳐 그걸 듣고 탑승했다는 것이 드러나 수십년만에 명예를 회복했다. 호소노 본인도 구명정에 탄 후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한 기분이었다고 수기에 기록하였고, 일본에 돌아오자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된 그는 죽는 날까지 타이타닉에 대한 얘기를 더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여러 신문사에서 승객 전원 구조 오보가 나오기도 했다.예시

6.2. 선원[편집]


가장 생존율이 높은 부서는 갑판부였다. 배 제일 위에서 일하는 것도 있고 직무 중 구명정 관리도 있기 때문. 특히 조타수들과 견시들은 전원 살아남았는데, 조타 항목에 나와 있듯 조타수는 키를 잡고 운전하는 게 직무인 입장에서 돌발상황 발생 시 항해사의 지시 없이도 배를 올바른 방향으로 몰 수 있는 감각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능력있고 어느 정도 근무 이력이 쌓인 이들에게 주어지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항해사 없이 작은 구명정을 바다에서 지휘하기엔 조타수들이 적합했던 것이며, 훈련되지 않은 승객들끼리만 탄 구명정이 엉뚱한 곳으로 멀리 흘러가 표류하게 되지 않으려면 선원이 꼭 필요했다.[82]

반면 사망자가 제일 많은 부서는 기관부로, 이들은 배가 침몰하는 와중에도 배의 동력을 유지하고 물을 펌프로 빼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고 이들 덕에 배가 조금이나마 더 버틸 수 있었다. 특히 상선사관 중 항해사들과 달리 기관사들은 전원 순직했으며, 최초 희생자들도 물 빼다가 익사한 기관사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 그나마 보일러실이 침수된 후 할 일이 없어진 화부들을 항해사 한 명이 단체로 한 구명정에 몰아 태우고, 화부장 바렛 같이 노잡이 및 구명정 지휘 등을 위해 한두 명 태워져 살아남은 경우가 없진 않다. 일단 화부들은 기본적으로 직업 자체가 힘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노잡이 역할에 최적화된 것도 있었고.

특기할 만한 점은 유독 파견직 선원들의 생존률이 제일 낮았다는 것이다. 프랑스 레스토랑/카페 점원 중 69명 중 단 3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는데 일부러 갇혔다는 소문도 있었다. 악단은 끝까지 연주하다가 전부 죽었고 우편원들 또한 우편물들을 구하려 노력하다가 결국 마찬가지로 전원 사망했다. 조선사에서 보증으로 파견한 관계자들도 타이타닉호를 설계한 조선기사 토마스 앤드류스를 포함해 전부 죽었다.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에는 자매함인 RMS 올림픽 호에 승무원으로 탑승했었고 이후에 1차대전 때 병원선으로 징발된 HMHS 브리타닉 호에도 탑승하게 되는 간호사 바이올렛 제솝(Violet Jessop, 1887~1971)도 있었는데, 타이타닉 침몰 전 올림픽에 타고 있다가 영국 해군 순양함 HMS 호크(Hawke)와 충돌하는 사고[83]를 겪었고, 브리타닉이 침몰할 때도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조되었다. 이런 불운에도 불구하고 건강히 살다가 1971년 5월 5일, 심부전증으로 향년 83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참고로 HMS 호크는 1914년 1차 대전 개전 얼마 후 U보트에 격침된다.

타이타닉에 승선한 8명의 항해사들의 생존률은 정확히 절반이었다.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와 수석 항해사 헨리 와일드, 1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84], 그리고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는 사망했고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 3등 항해사 하버트 피트만,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 그리고 5등 항해사 헤럴드 로우는 생존했다.[85] 8명 중 살아남은 4명의 상선사관들 가운데는 4등 항해사 조지프 박스홀이 1961년에 사망해 제일 오래 살았다.

타이타닉에서 살아남은 선원들은 다른 배에서 일하면서 묘한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의 잘못은 없지만 뱃사람들은 미신에 민감한 경우가 많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7. 종합[편집]


참사의 원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빙산 경고 메시지가 선장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항로를 바꾸지 못했다.
  • 쌍안경함 열쇠를 항구에 두고 왔고, 탐조등도 없었던 데다가 하필 그날 또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어서 달빛도 없었다.[86] 때문에 견시들이 맨눈으로 식별하기 매우 어려웠고, 야밤인데 불로 앞길을 밝히지를 못하니 쌍안경도 소용없었을 가능성이 컸다.
  • 게다가 배는 당시 전속력 항행중이었으며, 파도까지 잔잔해서 빙산이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 사실 어찌저찌 위의 조건들이 없어서 일찍 빙산이 발견됐다고 가정하더라도, 빙산은 대부분이 바다 밑에 있기 때문에 알아냈을 때는 늦었다.
  • 선체를 당대 최고 품질의 강철로 만들었지만 생산 당시 상정하지 않은 낮은 수온에 노출되어 내구성이 악화되었다. 리벳 또한 불량이었다.
  • 그나마 가장 가까웠던 배인 캘리포니안호의 유일한 통신사는 타이타닉호의 통신사에게 일침을 들은 후 초과 근무로 피곤해서 침몰 당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87]
  • 선원들과 승객들 사이에 대피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선장과 상선사관들도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혼란을 겪었다. 1958년 타이타닉호의 비극에서 간략하게 묘사된다.[88]
  • 마찬가지로 대피 훈련이 없었던 탓에 배 밑에 위치한 3등실 승객들과 선원들이 복잡했던 선내 구조와 혼란한 상황 속에 탈출하는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나중에는 대부분 어떻게든 나오긴 했지만 이미 상당수의 구명정이 떠난 상태였다.
  • 구명정의 정원이 탑승객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합법적이었는데, 당시 영국법이 구명정을 사람 수가 아니라 톤 수에 맞추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당 법은 사고 이후에야 개정되었다.
  • 그럼에도 많은 구명정이 꽉 차지 않은 상태로 출발해 버렸다. 20척 모두 알맞게 채웠으면 절반인 1100명이 넘게, 또한 정원은 이보다 더 타면 바로 배가 가라앉아 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안전을 고려해 여유를 두고 정하는 수이므로 가능한 한 조밀하게 탑승시켰다면 1,500명쯤은 살릴 수도 있었다. 즉 가장 이상적인 구조활동이 진행됐다면 생존자 수와 사망자 수가 서로 반대로 나와야 했다.

그야말로 악조건의 연속이자 총체적 난국이었다.


8. 사고의 영향[편집]



  • 해상 경험이 풍부한 인사들이 주도했던 영국 청문회와 달리, 미국 청문회는 바다나 배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문외한 정치인들이 수준 미달의 질문이나 던져대는 상황이 빈발하여 당시에도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미시건 주 상원의원 윌리엄 스미스는 해럴드 로우에게 "빙산이 무엇으로 되어있었는지 압니까?"[89]라는 멍청한 질문을 던져서 "바보 스미스 씨"와 같은 조롱을 받으며 웃음거리가 되었다(로우는 "얼음이었겠죠, 의원님."[90]라고 답했다). 이스메이에 대한 비난도 이 와중에 나왔는데, 배의 운항 체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선장 위에 선주가 있으니까 선주가 지시를 내렸겠지"라고 짐작해버린 것이다. 상원의원 이시도어 레이너는 "이스메이는 회사 대표로서 선장의 상급자였으니, 당연히 그 위험한 항로도 그의 지시였을 것이다"라고 별 증거도 없이 맹비난을 했다. 그러나 이런 인식과 달리, 오랜 역사의 해운국이었던 영국에서는 "배의 왕은 선장", "선장 자리에는 영국 여왕도 앉지 않는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선장의 권위에 대한 인식이 확실했다. 결국 이스메이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그렇다고 용감하게 사망한 스미스 선장과 설계사 앤드류스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결국 살아남은 이들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이스메이가 사회적인 책임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애초에 타이타닉에서 많은 사상자가 난 이유를 따지고 보면 앤드류스의 설계 초기안을 회사 측에서 묵살했다는 점이 가장 컸기에 설령 앤드류스가 살아남았더라도 설계자를 탓할 수가 없었다. 앤드류스가 제출한 설계 초기안은 구명보트를 48척 적재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걸 회사에서 20척으로 줄여버렸기 때문. 이렇게 됐다면 구명정이 부족해 못 타고 죽은 사람이 많았던 현실과 달리 전원이 타고도 남으니 사망자가 훨씬 덜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앤드류스는 방수격벽을 B갑판까지 올리자고 주장했는데, 이를 그대로 따랐다면 5구획이 침수됐어도 배는 기울기만 하고 침몰하지 않은 채 버틸 수도 있었다.
스미스 선장은 빙하가 많은 바다를 빠른 속도로 항해한 측면에서 책임이 없진 않지만, 석탄 저장고가 자연발화로 불이 난 상황이라 수습하려면 석탄을 보일러에 던져넣어야 한다는 사정이 있었고 당시 관행으로는 스케쥴에 맞춰야 하는 정기 여객선의 최고속 항해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마냥 비난하기도 힘들다.

  • 이 사고를 계기로 선박의 안전성 확보를 국제 조약의 형태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914년 13개 주요 해운국 회의에서 '해상에서 인명의 안전을 위한 국제 조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 통칭 SOLAS)'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91] 선박의 재질과 구명정 숫자 등 설계에 있어 안전기준을 설정하고, 무전을 상시 켜놓으며 교대근무를 통해 통신사가 항상 대기하도록 하고, 바다에서 로켓 신호는 조난 신호로 간주한다는 등의 내용이 반영되었다. 이 조약 이전 당시 선박에 적용되는 안전규정이 얼마나 엉터리였냐면 당시까지도 해상법에 있어 가장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영국법에서도 구명정의 설치 기준은 선박의 정원이 아닌 배수톤수에 맞춰져 있었을 정도다. 화물선이면 몰라도 여객선에서는 구명정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여객선들이 충분한 구명정을 싣고 다니도록 개정이 되었다. 또 미국에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에 무선 통신 장비가 의무화, 전파법이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선 통신이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국제 빙산 탐색대(International Ice Patrol)가 창설되었고 아직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 긴급 상황을 의미하는 통신용어 메이데이(mayday)가 이 때 등장한 표현. "구해달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인 'venez m'aider'의 뒷부분에서 몬더그린 현상이 일어나면서 생긴 단어이다. 또 하나의 같은 의미인 통신부호 SOS도 타이타닉에서 유래됐다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타이타닉호가 초기에 SOS를 쓴 선박 중 하나인 건 맞다. 항목 참조.

  • 타이타닉은 영국의 로이드 보험사에 손해보험을 들었는데, 배가 침몰하면서 로이드는 보험금으로 140만 파운드를 지급했다. 원화로 환산하면 25억원 정도인데 1912년 당시 화폐가치를 적용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지급된 것이다. 어마어마한 보험금 때문에 타이타닉 침몰 사고가 보험사기라는 음모론이 나오게 된다. 단순계산으로 1912년의 1파운드는 현대의 1파운드와 117배 정도 차이가 난다.[92]

  • 한편 타이타닉호의 회사인 화이트 스타 라인은 침몰 이후 먼저 취역한 자매선인 올림픽호를 다시 조선소로 보내서, 흘수선 아래 측면을 이중 선체로 보강하고, E 갑판까지만 올라와 있던 방수 격벽을 일부는 메인 갑판, 선실 구획은 B 갑판까지 보강했다. 당시 건조중이던 브리타닉호는 보강을 한 뒤 취역시켰다. 브리타닉호는 병원선으로 징발되었고 1916년에 에게 해에서 기뢰의 폭발로 인해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브리타닉은 구명정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어 탑승자 대부분이 살아남았지만, 선장이 배를 좌초시켜 보려다 기관을 제 때 정지시키지 못해 구명정 1척이 침몰할 때까지 계속 돌던 스크루로 빨려 들어가 3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후 화이트 스타 라인은 큐나드사에 인수합병되었으며, 현재는 크루즈 유람선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2023년 6월 18일 오전 해당 회사의 잠수정 '타이탄'이 잠수 1시간 40분만에 교신이 끊기면서 실종되어 미국과 캐나다 당국이 공중 및 수상 수색 작업을 진행했다. 6월 23일 잔해가 발견되면서 전원 사망한 것으로 결론냈다. 자세한 건 타이타닉호 관광 잠수정 사고 참조.

9. 영웅들과 저명인사들[편집]


승객들을 구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아 충분히 구명정에 타려고 하면 탈 수 있었지만 모범을 실천하며, 품위 있게 생을 마감한 영웅들도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영화 타이타닉에도 등장한다.

  • 선장 에드워드 스미스는 몇십 년 가량 바다에서 일하며 당시 해운 업계에서 압도적인 위상과 명예를 가진 베테랑 중의 베테랑 선장이었다. 스미스 선장은 타이타닉을 운항할 당시 나이 62세로 비교적 고령이었기에 은퇴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목격되기 전까지 앞장서서 승객들의 구조에 힘썼으며, 선장인데다가 나이도 지긋했기 때문에 충분히 구명정에 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배에 남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조타실 문을 잠그고 침수될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는 설과 다른 선원들과 함께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 물에 휩쓸려 가라앉았다는 설 등 여러 가지의 설이 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도 구조활동에 힘쓰고 끝까지 배에 남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선장은 배와 운명을 함께한다의 모범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선장 그리고 코스타 콩코르디아 호 좌초사고의 선장 프란시스코 스케티노와 여러모로 대비되는 사람이다.

  • 배의 설계자이자 사업가, 조선업자인 토머스 앤드루스(Thomas Andews, 1873~1912)는 승객들의 구명정 승선과 뜰 만한 물건들을 던지는 것을 돕다가 1등실 흡연실에 조용히 들어가서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이때 흡연실에 고귀하게 남기로 한 사람은 앤드루스뿐만이 아니라 다른 (1등실) 승객들도 있었다. 어떤 승객들은 카드 게임을 계속했으며 당대 저명한 언론인이었던 윌리엄 토마스 스티드(William Thomas Stead, 1849~1912)는 조용히 독서를 하고 있었다. 이들 또한 모두 가라앉는 배에서 품위있는 최후를 맞았다.

  • 흡연실에 있던 1등실 승객들 중 윌리엄 스티드는 세계 언론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인데, 바로 현재의 인터뷰 기법 기사를 사상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그리고 한국과의 인연도 특별한데,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의 헤이그 특사를 직접적으로 도와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대한제국의 처지에 개인적으로 동정을 보이는 각국 대표단들은 많았지만 러시아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대표단들은 자국의 계산된 국익을 따라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다. 오직 스티드만이 만국 평화회의장에 입장을 거절당한 헤이그 특사 인터뷰를 당시 특별 발행되던 '만국 평화 회의보'에 실어주었으며,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 스티드는 이후에 헤이그 특사와 국제 기자단간의 기자간담회도 성사시켰으며, 이들 덕에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헤이그 특사 관련 보도가 그나마 남아있는 편이다. 자신의 구명조끼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 기관장인 조지프 G. 벨을 포함한 많은 기관사/기관부들과 화부들이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2분 전, 그러니까 배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배의 전기를 작동시키는 작업을 하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상선사관들 중 항해사들과 달리 기관사들은 전원 순직했다.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군분투했는데, 전속항해 중이던 타이타닉의 기관이 달아오를대로 올라있어서 여기에 차가운 해수가 닿으면 폭발할 위험이 있었다. 또한 사고가 난 시각이 밤이었기에 전기가 없다면 구조를 위해 오는 다른 선박들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을 것이고, 승객들의 안전한 탈출 또한 불가능했다.

  • 월리스 헨리 하틀리(Wallace Henry Hartley, 1878~1912)가 지휘를 맡은 8명의 악단[93]은 배가 침몰하기 불과 10분 전까지 곡을 연주하고 서로에게 행운을 빈 후 헤어진다. 이 때의 연주는 이들의 생애 마지막 연주가 되고 말았다. 이후 악단원 중 유일하게 월리스 하틀리만이 그의 바이올린과 함께 시신이 발견되었으나, 시신을 인양한 이후와 타이타닉 잔해 및 기록의 최초 발견 이후에도 그 바이올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이타닉과 함께 심해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으나, 2006년 영국에서 하틀리의 마지막 바이올린이 나타나면서 추측이 깨지게 되었다. 이후 7년간 검증하면서 진품이라고 확인되었으며, 2013년 10월 19일 영국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90만 파운드(약 15억 5,000만 원)에 판매되었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졌다. 유일하게 시신이 수습된 윌리스 하틀리는 고향인 잉글랜드 콜른에 묻혔다.

  • 1등실 승객이었던 미국의 소설가 아치볼드 그레이시 4세(Archibald Gracie IV, 1858~1912)는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어린이들을 구조하다가 쓰러진 후 구명정에 강제로 탑승당해서 생존했는데 이후 자신이 타이타닉 호에서 겪었던 일을 토대로 소설을 집필해 이 사고의 실황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타이타닉 사고로 인해 당뇨 합병증이 악화되어 결국 같은 해 12월 타계했다.

  • 2등실 승객이었던 영국 가톨릭 사제 토마스 루셀 데이비즈 바일스(Thomas Roussel Davids Byles) 신부(1870~1912)는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고 배 밑까지 내려가 사람들의 구명정 승선을 도왔고, 다른 사제 두 명과 함께 구명정을 타지 못하고 죽을 운명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갑판 위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다가 선종했다. 이 때, 가톨릭, 개신교, 정교회, 심지어 유대교 신자까지 종파를 가리지 않고 같이 기도했다는 증언이 있다. 후일 교황 비오 10세는 바일스 신부의 사망을 기리며 그를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하였다.

  • 역시 2등실 승객인 개신교 목사 존 하퍼(John Harper, 1872~1912)는 침몰 전까지 전도를 하다가 파도에 휩쓸려 사망했다. 마지막으로 전도한 청년은 구출된 후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됐고, 그 청년의 간증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존 하퍼 목사는 39세의 일기로 영국 런던의 덴마크 힐에 묻혔다.

  • 탐정 밴 두젠 시리즈를 내며 인기를 끌던 추리소설가 잭 푸트렐(1875~1912)도 1등석 승객으로 이 배에 탔다가 같이 갖고 탄 6편의 미발표 원고와 함께 37살의 나이로 요절했다. 아내였던 릴리 메이 푸트렐(결혼 전 성은 필 Peel)을 구명정에 태우고 자신은 배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 백만장자 구겐하임 가문 사람인 철강업자 벤저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 1865~1912)은 자신이 살 수 없음을 직감하고, 현지처였던 프랑스 가수 레옹틴 폴린 오바르(Léontine Pauline Aubart, 1887~1946)와 하녀를 구명정에 태운 후 선원의 구명조끼를 거절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신사답게 가라앉겠다며 자신의 방에서 턱시도로 갈아입은 뒤 자신을 따르는 비서 빅터 기글리오와 함께 "우리는 우리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고 신사답게 갈 것이다."[94]라고 선언하고, 마지막까지 시가와 브랜디를 즐기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고, 아내와 딸에게 자신은 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전해달라고 전하면서 쪽지 하나를 남겼다.[95] 그의 딸 페기 구겐하임이 여기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콜렉션한 예술 작품들이 베네치아 구겐하임 미술관 설립의 초석이 되었다. 구겐하임과 비서 기글리오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으나, 철강업자 답게 본인이 소속된 철강업의 회사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고 한다. 카메론의 영화 타이타닉에서는 정장 차림으로 실크햇을 쓰고 중앙 계단의 의자에 앉아 와인을 즐기다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시가를 피우는 장면은 심의 때문인지 등장하지 않았다.[96]

  • 1등실 탑승객 중에서도 가장 부자였던 사람은 부동산 업자 존 제이콥 애스터 4세(John Jacob Astor IV, 1864~1912)였다. 그는 당시 불과 19살이었던 새 신부 매들린[97]과 함께 유럽여행을 떠났다 귀국하는 길에 참변을 당했다. 매들린을 구명정에 태운 후[98] 승객들을 대피시키던 선원 한 명이 애스터에게 구명정에 타라고 하자, 애스터는 일언지하에 "사람이 최소한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구명정 탑승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한 자리를 곁에 있던 한 아일랜드 여성에게 양보했다. 이후 생존자들과 함께 옥상 갑판에 있던 접이식 구명정을 띄우려고 노력하다가 익사로 사망했다. 배가 침몰하는 과정에서 쓰러지는 연통에 깔려 다른 일부 희생자들과 함께 사망했다는 잘못된 증언이 있었는데[99] 목격자들에 의하면 실제 사인은 익사였고 발견된 시신도 멀쩡한 편이었다. 옷의 이니셜과 회중시계로 신원 확인이 가능했으며 맨해튼의 트리니티 교회 묘지에 묻혔다.

  •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백화점이었던 메이시즈 백화점[100]을 소유하고 있는 스트라우스 부부는 금슬이 좋은 노부부였다. 이지도르 스트라우스(Isidor Strauss)가 구명정 승선을 거절하자 그의 아내인 아이다 스트라우스(Aida Strauss)도 선원의 구명정 승선 제안을 거절한 다음 하녀 엘렌 버드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주고 자기 대신 구명정에 태운 뒤 남편과 함께 운명을 맞았다. 이지도르 스트라우스가 승선을 거부한 건 노블레스 오블리주 때문이었다. 주변에 있던 지인이 노부부가 함께 승선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함께 승선하라고 권유했고, 실제로 여성과 아이들만의 원칙이 비교적 철저히 지켜진 좌현에서조차 노년의 남성은 적은 수나마 항해사의 허락 하에 태워졌지만, 이시도르는 "나는 다른 이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네."라고 말하며 승선을 거부했다. 참고로 이때는 아직 배의 운명을 깨닫지 못하고 구명정에 타기보다 배에 남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였지만 아이다 스트라우스가 엘렌에게 모피 코트를 건네며 "나에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라고 말했으므로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타이타닉 영화에서는 물이 들어오는 선실 침대에 둘이 함께 껴안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이 내용은 2016년 3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소개되었다. 이시도르는 유일하게 시신이 화장되어 브루클린의 가족 묘에 안치되었으나 가족 묘의 부인을 위한 유골함은 비워져 있다고 한다.
2023년 6월 이들 부부의 현손녀 '웬디 러시'의 남편이 잔해를 관광하는 잠수정을 탔다가 사망했다. 자세한 건 타이타닉호 관광 잠수정 사고 참조.

  • 타이타닉 호의 통신사들(둘 다 마르코니 사 직원들이었다.)도 선장이 이만 물러나가도 좋다고 한 후에도 퇴선하지 않고 가라앉아가는 통신실에서 끝까지 남아 전파를 보냈다. 이 중 해럴드 브리드는 살아남았지만 잭 필립스는 순직했다.

  • 남편이 금광을 발견해 하루아침에 떼부자가 된 1등실 승객 마가렛 토빈 브라운(몰리 브라운)은 구명정에서 가장 앞장서서 노를 저었으며 생존자를 구조하자고 요청했다. 하지만 조타수 히친스(충돌 당시 배를 맡고 있기도 했다.)는 거절했고, 히친스가 자꾸 구조를 반대하자 계속 그렇게 구시렁대면 바닷속에 쳐넣어 버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사교계에서 졸부 취급받던 몰리 브라운은 이 당시 영웅적인 구조 활동으로 이후 사교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고, "가라앉지 않는(unsinkable) 몰리"가 그녀의 별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삶도 대공황기를 겪으며 그렇게 순탄치는 못했으며, 몰리 브라운의 삶은 이후 1964년 사랑은 비를 타고의 데비 레이놀즈가 주연을 맡아 영화화되기도 했다. 타이타닉 영화에서는 어째서인지 저 바다에 처넣어 버리겠다는 대사를 거꾸로 몰리가 아닌 히친스가 말한다.[101]

  • 3등실 승무원 존 에드워드 허트는 배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길을 잃어 헤메는 3등실 승객들을 배 밖으로 안내했다. 허트는 다행히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5등 항해사 헤럴드 로우는 침몰 직후 유일하게 익수자들을 구조하러 간 항해사였다. 선내 항해사들 중 서열은 6등 항해사 무디(사망) 다음인 매우 낮은, 생존 항해사들 중 막내였으나, 괄괄한 성격답게 자신이 지휘하는 구명정 3척을 소집해 2척에 승객들을 전부 옮기고, 선원 3명과 구조작업을 지원한 남성 승객 1명과 함께 침몰 현장으로 구명정을 몰고 갔다. 총 5명을 현장에서 구조했고, 이 공로로 귀환 후 정부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2년 뒤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영국 해군 장교로 복무, 중령까지 진급했다.

  • 상선사관 중 가장 막내였던 6등 항해사 제임스 무디는 가장 후임이니까 구명정에 타라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선임 로우에게 양보했고, 배에 남아서 죽었으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 타이타닉은 당시 다른 여객선들과 마찬가지로 우편 운반선이기도 했으며, 등기우편물 200개를 포함해 3,364개의 우편행낭이 적재돼 있었다. 이 우편행낭의 처리를 위해 미국 우편원 3명, 영국 우편원 2명이 탑승했으며, 타이타닉의 우편원들은 모두 우편원 생활 15년 이상 된 베테랑이었다. 이들은 빙산 충돌 당시 미국 우편원 오스카 스콧 우디의 생일 파티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배가 침수되기 시작하자 곧장 우편행낭을 쌓아둔 방으로 내달려 그곳에서 우편행낭들을 꺼내 갑판 위로 옮기기 시작했고, 물이 발목 위로 점점 차올라 위험이 고조됐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다른 선원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만류해도 묵묵히 일을 계속한 뒤 가라앉는 배에서 최후를 맞았다. 생일이 사망일이 된 우디는 이들 중 유일하게 시신이 수습됐고, 시신에서 현장에서 목숨을 바쳤음을 보여주는 유품인 우편물의 행선지를 표시해 주는 전표가 발견됐었다. 타이타닉이 운송하던 7,800,000여 통의 편지들 또한 수장되었다.

  • 로테스 백작부인은 미모로 명성이 높은 젊은 귀부인이었다. 침몰 당시 여성이고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노를 열심히 저었고 이 동안 선원들과 3등실 승객들에게도 친절하게 대했으며 구조된 후에도 음식과 담요를 나눠주는 등 가난한 승객들을 보살펴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되었다.

  • 생존하지 못한 4명의 1등실 여성 승객들 중 한 명인 에디스 에반스는 1등실의 승객으로 마지막 구명정이 내려질 때 자신도 탈 수 있었지만 가족이 있는 여성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배에 남아 생을 마감했다.

  • 허쉬 초콜릿의 창립자인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가 부인과 함께 탈 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정이 앞당겨져 다른 배를 탔다. 그의 타이타닉 호 티켓은 현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후 밀튼 스네이블리 허쉬는 천수를 누리다가 1945년에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 R. 노리스 윌리엄스(R. Norris Williams)라는 젊은 미국인 테니스 선수가 1등실에 타고 있었는데, 침몰 당시 그의 아버지는 굴뚝이 쓰러질 때 깔려 죽었다.[102] 또 본인은 가까스로 탄 구명정이 물에 반쯤 잠기는 바람에 심한 동상을 입었다. 구출된 뒤 배의 의사들이 다리를 잘라야 하겠다고 하자 거절했는데 그해 전미 챔피언십을 땄다.

이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배에 끝까지 남아 운명을 함께하거나 구명정에 탑승해 열심히 생존자들을 도왔다.

각 생존자들의 디테일은 이 문서보다 본 항목 상단에 언급된 타이타닉(영화)/실존인물 항목에 훨씬 자세하게 나와 있다. 하지만 워낙 규모가 큰 사고였기에 생존/사망자 중 영화에서 다뤄지지 못한 이들도 워낙 많으며 이들 중 일부는 다른 타이타닉 관련 창작물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10. 기타[편집]


  • 이 사고가 일어나고 충분한 구명정을 싣고 다녀야 한다고 해상법이 개정이 되었는데, 불행히 이것이 원인이 된 참사도 존재한다. 타이타닉 침몰 이후 구명정이 모자라 승객들이 많이 살아남지 못했다는 얘기가 오갔고, 가능한한 많은 구명정을 설치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특히 미국에서는 최대 탑승 가능 승객의 75%가 구명정을 타고 탈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 법안으로 인해 미국 한 여객선 'SS 이스트랜드'는 소형 구명정 11개와 개당 거의 500kg에 육박하는 대형 구명정 37개가 설치됐고, 구명조끼도 승객 2,570명이 모두 입을 수 있는 양이 구비됐다. 이로 인해 이 배에는 53,199kg의 적재물이 더해졌다. 게다가, 이 구명정과 구명조끼들은 전부 탈출할 때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배의 상단 부분에 있었는데, 이게 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1915년에 추가된 구명정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전복되어 848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이스트랜드호 참사 문서 참조.

  • 1898년 나온 소설 Futility는 최고로 빠르고 큰 가상의 여객선 타이탄호가 북대서양에서 빙하에 충돌하여 침몰하고 13명만이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4년 뒤 타이타닉이 실제로 침몰했을 때 이름과 상황의 유사성으로 인해 상당한 화제가 되어 당시 재출간되기도 하였다.

  • 타이타닉호 침몰 순간 멈춘 세계 유일의 회중시계가 현재 강릉시에 위치한 정동진시간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 타이타닉의 승객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유리병 속 편지가 2017년 캐나다 펀디 만(Bay of Fundy / La baie de Fundy)에서 발견되었다. 편지는 승객인 마틸드 르페브르(Mathilde Lefebvre)라는 소녀가 썼으며, 편지의 날짜는 1912년 4월 13일로, 타이타닉이 침몰하기 전날이다. 마틸드 르페브르는 실제 타이타닉의 승객으로, 안타깝게도 사고 당시 다른 가족과 함께 모두 사망했다. 전문가들은 해당 편지의 상태와 발견 위치 등을 고려했을 때 실제 마틸드 르페브르의 편지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교하게 위조된 가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캐나다 현지 언론 기사

  • 침몰하기 3일 전 일등석 승객이 먹은 저녁 만찬 음식이 적힌 메뉴판이 경매에서 8만3천 파운드(약 1억3천만원)에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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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타이타닉 침몰 실시간 영상의 업로더인 Titanic: Honor and Glory가 만든 영상이며, 그에 따르면, 생존자 증언록 'On A Sea Of Glass'를 토대로 역사가들의 협력과 생존자 증언을 교차검증하여 만든 영상이라고 한다.[2] Queenstown이란 지명은 빅토리아 시대 대영제국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아일랜드의 경우 1921년 아일랜드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자치권)하면서 "코브(Cobh)"로 바뀌었다. 파일:아일랜드 코브.png[3]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에 의하면, 2등 항해사 데이비드 블레어(David Blair)가 출항 직전에 교체되어 본의 아니게 열쇠를 미처 반납하지 못하고 하선한 것으로 밝혀졌다. 블레어는 1955년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열쇠는 딸에게 유품으로 넘겨졌다.[4]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수석항해사 헨리 와일드의 막판 재배치 때문이었다. 원래 그는 올림픽 호에서 수석항해사로 있었고 그 밑에서 윌리엄 머독이 1등 항해사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머독은 이후 타이타닉 호의 수석항해사로 승진해 나갔고 와일드는 곧 선장으로 승진해 (올림픽급보다 더 작은) 화이트스타 라인의 배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항 얼마 전에 와일드가 갑자기 올림픽 호에서 타이타닉 호로 이동하면서 가장 선임인 와일드가 타이타닉의 수석항해사를 맡았으며 이로 인해 기존 타이타닉의 항해사들은 한 계급씩 내려간 것이다. 이로 인해 머독은 수석->1등 항해사로, 찰스 라이톨러는 1등->2등 항해사로 강등되었으며, 원래 2등 항해사인 블레어는 항해에서 제외되었다. 라이톨러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회사 측에서 타이타닉의 자매선을 담당했던 와일드의 경험을 활용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당연히 졸지에 강등당한 꼴인 머독과 라이틀러는 불만을 가졌다고.[5] 그니까 결국엔 이 충돌은 막을 수 없었다는거다.(물론 다른 배에 신호를 받았더라면..)[6] 1912년 4월 15일 아침 독일의 여객선 SS 프린츠 아달베르트호의 승무원이 찍은사진으로, 검붉은 페인트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7] 수면 아래의 빙하는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기 때문. 당연하게도 빙하가 수면에 보이는 것처럼 예쁜 모양으로 아래로 쭉 뻗어 있을 리가 없고, 실제로는 수면 아래에서 얼마나 넓고 울퉁불퉁하게, 또 얼마나 깊고 얕게 뻗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 이 때문에 빙산에 대해 잘 알려진 현재조차도 눈에 보이는 빙산만 보고 방심했다가, 꽤 떨어진 거리임에도 수면 아래 빙산에 닿아서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8] 명령은 우현전타(Hard Starboard)였는데 틸러 명령법에 따른 것이다. 당시 항해술의 원류던 범선에서 기인한 조타술은 진행방향과 조타지시가 반대였다. 즉 당시의 우현전타(Hard Starboard)는 좌현(Port side/Larboard)으로 배를 최대한 꺾으라는 말이 된다. 언뜻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이 조타술은 타륜이 없던 시절 노잡이가 키(Rudder)에 연결된 노(Tiller)를 직접 밀고 당기며 방향전환 하던 것에서 기원한 명령법으로 오늘날에도 소형 보트 등에서 사용되며 헷갈리지 않게 'Wheel to~'를 덧붙여 명령하도록 보완되었다(위키피디아 <Tiller> 항목참조). 타이타닉 시절은 이런 틸러 명령법이 자동차 핸들처럼 선체의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조향하는 러더 명령법으로 변하던 과도기이다. 타륜이 17~18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는 러더 명령법은 20세기가 돼서야 표준화되었는데 이는 제도와 관습이 기술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 지체 사례 중 하나이다. 영화 타이타닉(1997)에서도 이런 점들을 고증해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참조1, 참조2). 최근 들어 당시에 조타수가 이런 조타법의 과도기에 따른 혼란으로 타륜을 잘못 조작해서 빙산과 충돌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당시 청문회 결과와 대치되는 유족 한명의 증언이 근거의 전부이며, 영국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19세기 말부터 러더 명령법으로 바꾸기 시작할 때도 일관성과 전통유지를 위해 틸러 명령법을 계속 고수하다가 러더 명령법으로 국제 표준이 정립된 1933년에 이르러서야 조타법을 바꾸었으므로 영국 선적인 타이타닉의 숙련된 조타수가 명령을 오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9] 선박의 엔진은 자동차나 항공기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배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엔진 조작이 무척 까다롭다. 더구나 지금처럼 전자 제어장치,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는 함교에서 원하는 만큼 출력을 늘렸다 줄였다를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오직 기관실에서 시간을 들여서야 할 수 있었다.(당장 위의 영상에서 봐도 알 수 있듯이 타이타닉 호 기관실 인원들이 버튼 하나 누른다고 후진이 되는 게 아닌, 온갖 복잡한 조작을 하고 나서야 후진을 할 수 있었다. 만화 땡땡의 모험 <노예선> 편에서 이 모습이 잘 고증되어 있다. 아독 선장이 함교의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가 고장나자 직접 전화로 기관실에 연락해 속도를 바꾸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등장한 물건이 바로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이다. 함교와 기관실에 같은 장치를 하나씩 둔 후, 함교에서 원하는 속도를 지정하면 지정된 속도가 기관실에 전달된다.(때릉때릉하는 소리가 나는 이유는 혹시라도 당직 인원이 한눈을 판다던가 해서 기껏 속도 조절 명령 보내도 기관실에서 그걸 못 확인했을 수 있으니, 때릉때릉 소리를 내서 함교 또는 기관실에 '속도 조절 명령이 내려왔다'는 정보를 청각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그럼 기관실에서도 명령을 확인했다는 의미로 기관실의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를 조작해 함교로 신호를 보낸 후(머독이 선교 밖에 나와 있을 때 아무도 손 안 잡고 있던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가 소리를 낸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기관실에서 속도를 바꾼다. 컴퓨터 제어 장치가 발달해 함교에서 원하는 만큼 엔진의 출력을 조작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예비용으로 엔진 오더 텔레그레프가 사용되고 있다.[10] 일설에는 주 추진체 정지(Main Engine Stop)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다수설은 전속 후진이다. 본문의 재현 영상은 정지설을 따르고 있다. 한편 당시 기술의 한계를 고려했을 때 후진이든 정지든 충돌엔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기에, 항해사의 의도를 짐작하는데 참조될 뿐 무의미한 변수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당시에는 전진 방향으로 작동하던 프로펠러를 후진으로 바꾸려면 회전하던 프로펠러를 완전히 멈추게 만든 뒤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상당히 많이 소모되었고 반응이 빠르지 못했다. 그렇기에 빙산 발견 후 충돌까지 걸린 시간을 고려했을 때 타이타닉이 후진을 시도했더라도 충돌전까지 프로펠러를 완전히 정지시키지 못했거나 간신히 정지시킨 후 이제 막 역회전에 돌입하려던 찰나에 충돌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참고로 현대 선박은 프로펠러의 날개 각도 자체를 바꾸는 식으로 역추진을 하기 때문에 신속한 후진이 가능하다.[11] 타이타닉은 배의 크기에 비해 방향타가 다소 작았고 총 3기의 프로펠러 중 Main Engine 프로펠러는 기관 유형이 유일하게 터빈 증기기관방식이었기에 후진이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한 느린 기동에 플리트는 항해사가 본인의 경고를 무시해 늦게 대응한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97년 영화에서는 플리트가 "왜 배를 돌리질 않는거야!"라고 초조해하는 대사를 넣어 이를 묘사했다) 이렇듯 선박 자체가 둔함에도 통상 절차로 빙산 회피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전속항진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12] 전타(비상타)로 회피하는 상황에서 정지가 아닌 타력을 낮추는 전속후진을 택한 점, 방수격벽 폐쇄 예비 알람을 울린 점 등을 볼 때 정면충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충격은 각오하고 이를 최소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항해술에 비춰봤을 때 이 정도면 배의 특성(둔하지만 튼튼한 철선)을 고려해 노련한 임기응변을 보인 것이다.[13] 금속이 외부 힘에 대하여 어느 정도 유연하게 변형되는 성질.[14] 북극해 주변이라는 소리가 있으나, 사고 지점은 북위 41° 44′, 서경 49° 57′으로 북극해와는 거리가 멀다.[15] 여담으로 영화 앤트맨에서 주인공 스콧 랭이 금고를 털때 금고의 재질을 말하면서 타이타닉호의 강재와 침몰원인을 언급했고 액체질소로 금고 문을 동파시키는데 성공했다.[16] 연철항목의 첫째 사진의 검정색 줄무늬가 바로 슬러그이다.[17] 피해보고를 들은 앤드류스는 그냥 내버려둘 경우 침몰까지 대략 1시간, 펌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잘 버텨봐도 2시간 안에 침몰할 것으로 예측했으나, 실제로는 예측 최대치였던 2시간을 훨씬 넘어 2시간 40분 가량을 버텼다.[18] 영국왕립기상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기상>의 2020년 8월 4일 발간지에 등재[19] 타이타닉호가 구조요청을 발신한 것이 0시 15분이고 카르파티아호가 수신한 것이 0시 25분이다. 백번 양보해 즉각 수신했다고 하더라도 10분의 차이밖에 발생하지 않으며 10분 일찍온다고 참사를 막을 순 없었다.[20] 마찬가지로 명령은 좌현전타(Hard Port)[21] 빙산과 충돌한 우현으로 방향을 돌리라는 것이 얼핏보면 피해를 더 가중시키는 모순된 행동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배는 자동차 같이 핸들을 돌리면 '앞쪽'이 돌아가며 회전하는 게 아니라 선미의 키를 돌려 '뒤쪽'을 회전시키며 조향한다. 다시 말해 앞쪽 선수는 그대로 있고 선미 부분만 돌아가는 것. 따라서 만일 좌현전타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배의 뒤쪽이 더욱 더 오른쪽으로 향하게 되어 우현 전체가 긁히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미 빙산과 충돌해버린 이상, 머독은 빙산을 일종의 디딤판삼아 우현전타하여 배의 뒷부분을 왼쪽으로 돌려 빙산으로부터 벗어나서 충돌이 배 앞쪽 한정된 부분에 그치도록 한 것이다.[22] 실제 격벽은 닫히기 전에 경보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울리는 구조였고, 닫히는 속도도 느렸다. 설령 격벽이 닫혔다고 해도 수동으로 다시 열 수 있는데다 벽에 박혀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해치를 열고 위쪽으로 나가는 방법도 있어서 영화상의 묘사처럼 문 닫히면 죽는다는 식으로 무리해서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배럿이 5번 보일러실로 들어가 사다리를 오를 때 이미 6번 보일러실은 침수되고 있었다.[23] 또는 반속 전진(Ahead Half)[24] 선체 내 침수 발생 및 해수 유입 사고 등의 해수 관련 사고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선박의 배수 펌프[25] 즉, 주 추진체 정지(Main Engine Stop), 좌현 추진체 정치(Over Engine Stop), 우현 추진체 정지(Port Engine Stop)[26] 타이타닉호의 4번 연돌은 환풍구였다.[27] 아주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었던 게, 불과 몇 년 전인 1904년에 밴쿠버 근해에서 침수로 침몰한 클라람(SS Clallam)호의 경우 구명정 3정에 여자와 아이들을 태워 보냈지만 풍랑으로 인해 200미터도 가지 못하고 전복되어 전원이 사망했다. 오히려 배가 뒤집힐 때까지 남아있던 남성들은 대부분 구조되었다. 이는 구명정에 보트를 지휘할 사관들이 한명도 타지 않은 것이 컸으며, 배에 남은 남자들은 처자식들이 익사하는 참혹한 광경을 배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만 볼수밖에 없었다.[28] CQD는 현재 SOS로 대체되기 전 사용되던 조난신호이며, DE는 영어로 'This is'에 해당하는 무선 약어, MGY는 타이타닉호의 콜사인이다.[29] CQ= sécurité, 뜻은 보안, 안전. 용도는 모든 기지국 호출, D= Distress, 조난. 둘을 합쳐 구조요청이 된다. 프랑스어 sécurité의 줄임말인 sécu를 음이 비슷한 두개의 알파벳으로 짧게 정리하여 무선통신에 용이하게 한 CQ와 조난이라는 뜻의 영단어 Distress의 앞글자를 합한 신호이다. 프랑스어인 이유는 당대 외교 및 국제전보 등의 표준어는 프랑스어를 사용해서다. 이는 2차대전기까지 유럽의 주요 외교담화문은 프랑스어로 작성되었다.[30] 캘리포니안호는 화물선이라 속도가 약 12~13노트로 느린 편이었지만 워낙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응답 즉시 전속력으로 달렸다면 길게 잡아도 1시간 이내로 도착이 가능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타이타닉 사고 이후 무전을 상시 켜놓고 교대근무를 통해 통신사가 항상 대기하도록 하는 국제규약이 생겨났다.[31] 이것 때문에 침몰 후 조사과정에서 빡친 에반스가 의도적으로 구조신호를 무시한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애반스 본인이 "그렇게까지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고 증언하면서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SS 캘리포니안호에는 통신사가 애반스 한 명이었고 혼자 항해 내내 잠도 안 자고 근무할 수는 없으니, 한마디로 통신사가 퇴근해버린 것.[32] 여담으로 타이타닉의 통신사 해롤드 브라이드와 카르파티아의 해롤드 코탐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사이였다. 통신 기록을 잘보면 서로 old man 즉 영감이라고 지칭하고 있다. 물론 농담으로 브라이드는 당시 22세, 코탐은 21세로 새파랗게 젊은 청년들이었다. 코탐은 브라이드의 선임 통신사 필립스와도 친구였다.[33] 뉴펀들랜드 섬 남단에 위치한 통신소. 당시 대서양을 오가는 선박들의 통신 중계소 역할을 담당했었다.[34] 타이타닉호는 침몰 전까지 광범위하게 구조요청을 송신하고 이에 응답한 선박을 특정해 호출했는데, 예외적으로 캘리포니안호만 먼저 호출하며 통신을 시도했다. 이는 타이타닉호의 선장(또는 항해사)가 캘리포니안호에서 보낸 빙산 경보에 있던 위치와 투묘 중이라는 정보를 토대로 인근에 있을 것으로 보고 호출을 지시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타이타닉은 무선이 되지 않는 인근 선박에 구조 신호를 보내기 위해 폭죽을 끊임없이 쏘는 등 정황상 캘리포니안호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35] 프랑크푸르트호는 앞서 0시 34분에 타이타닉 침몰 상황을 접수해 선교에 전달하겠다고 교신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오니 당시 심각해진 침수 상황에 절박했던 타이타닉 통신사가 이에 발끈한 것이다. 저 '무슨 일이냐?(What is the matter with you?)'는 프랑크푸르트호의 번역 실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저 말에 앞서 '본선 100해리 떨어져 있음(We are 100 miles off)'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우린 이쯤 왔는데 거기 상황 어떠냐?'고 물으려던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호의 독일인 무선기사가 미숙한 영어로 소통하다보니 \'상황이 어떠냐?\'를 \'무슨 일이냐?\'로 번역해버려 오해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36] 침수로 인해 타이타닉에서 송신되는 신호 세기가 크게 떨어져 더이상 타이타닉의 신호를 수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37] 해당 장면 외에도 탈출이 시작된 이후 해당 위치의 항해등을 스쳐가는 장면들에서 항해등이 특정 모스부호로 깜박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증덕후 제임스 카메론[38] 등대의 경우 20~30km 거리에서도 관측이 가능하다. 타이타닉의 불빛이 등대만큼 강렬하지는 않았겠지만 16km 정도면 기상이 좋을 땐 관측가능할 거리다. 당시 사고 해역은 저수지마냥 고요했고 달까지 어두워 빙산을 발견하기엔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빛을 관측하기엔 최상의 조건이었다.[39] 빙산 충돌로 배가 회전하며 조명이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선수(또는 선미)를 거쳐 다시 현측을 보이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추정된다. 물론 희미하게 불빛만 보이는 상황에서 배가 도는 모습이 보일리는 만무하고 잠시 빛이 약해졌다가 다시 강해지는 변화였을 것이다.[40] 타이타닉호에서 발사된 폭죽에 의한 것이다.[41] 이때가 타이타닉 완전 침몰 전 도착할 마지막 기회였으나 안타깝게도 알아채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사후 1912년 미국에서 무선통신규제법을 개정하며 붉은색 불빛은 비상 신호로 해석한다고 정의한 것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바다에서 로켓 신호는 조난 신호로 간주하는 합의가 널리 퍼지며 정착되었다.[42] 타이타닉 영화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선장은 "Yes...Women and children first"라고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라이톨러는 승객들에게 "Women and children ONLY"라고 말한다.[43] 영화에서도 이런 혼란이 묘사되는데, 침몰이 가속화되면서 승객들이 패닉에 빠져 난장판이 되려고 하자 라이톨러가 총을 겨누며 "질서 지키지 않으면 전부 개처럼 쏴버리겠소! 질서 지켜요!"라고 협박한다. 문제는 이때 빈총이었기 때문에 이후 라이톨러가 뒤돌아서서 로우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살짝 떨리는 손으로 총을 몰래 장전한다. 실제로 1등석 승객인 아치볼드 그레이시를 포함한 다수의 승객들이 라이톨러, 머독, 로우 등 항해사들이 위협의 의미로 총을 허공에다 쐈다고 증언했다. 일부 승객들은 조립식 보트 A가 내려지다가 사고가 나 제대로 내려지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항해사 한명이 승객 두명을 쏴죽이고 자살했다고 증언했으나, 당시는 이미 조명도 나가고 완전히 난장판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확한 증언은 아니다. 해당 증언을 한 승객들도 자신들이 봤다는 항해사가 누구인지 지목하지 못했기 때문에, 총을 쏜 사람이 항해사가 맞는지도 불명확하다.[44] 배가 항구에 정박했을 때 다리를 연결해 출입하는 문이다.[45] 정원 40명의 구명정에 25명이 타고 있었다.[46] 부인은 살아남았지만 이혼했다.[47] 선교 위에 비상용으로 탑재되어 있던 접이식 구명정 2척 제외[48] 구명정이 애초에 비상일때 쓰는데 무슨 비상용인가 싶겠지만, 당시 구명정은 오늘날과 같이 '바다 위에서 구조될 때까지 버티는 용도'가 아니라 '다른 배나 장소에 사람을 옮기는 이동용'의 의미가 강했다. 산업혁명 이전까진 멀리 원양으로 나가는 배는 대체로 화물선이라 승선원이 적어 구명정이 넉넉했고, 여객선은 지중해 같은 연안 위주로 돌았기에 조난을 당해도 구조 선박이 금방오거나 가까운 섬이나 육지에 내려놓고 돌아오면 되었기 때문이다. 타이타닉호 시절은 이제 막 대양여객선이 우후죽순 생기던 때로, 구명정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범선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비상용 구명정은 기존처럼 일반 구명정으로 사람을 옮기는 방식으론 대처가 어려운 비상상황(급속 침몰, 화재, 망망대해에서 침몰 등)을 염두에 두고 그럴 때 쓰라고 둔 오늘날로 치면 구명벌(life raft)에 해당하긴 한다. 문제는 이 구명정이 초기 설계상 일반 32대, 접이식 32대로 총 64대까지 실을 수 있었지만, 미관과 조망 그리고 규정상 문제가 없다는 이유로 일반 16대, 접이식 4대로 총 20대밖에 실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접이식 구명정이 대거 축소되었는데 이는 연안에서 좌초되어 승객을 옮기는 일은 생길지언정 완전히 침몰해서 바다에서 버티는 상황은 결코 생기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었겠지만, 결국 오만이 되어 대참사가 벌어지고 만다.[49] 공교롭게도, 이 노부부의 고손녀의 남편이 바로 타이타닉호 관광 잠수정 사고사망자가 되었다.[50]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을 개장한 솔로몬 구겐하임의 동생이다.[51] 한국에 번역된 곡으로는 개신교 찬송가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 가톨릭 성가 '주여 임하소서'가 된다.[52] 접이식 구명정은 적재를 위해 슬라이드 도어 마냥 보트가 반월 모양으로 접히는 형태였다. 당연히 짜맞춰 방수도료까지 바른 일반 보트와 달리 방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래서 보트 아래를 방수처리된 캔버스로 덮어야 했는데, 급한 상황에서 이게 제대로 덮이지 않아 누수가 생긴 것이다.[53] 영화에서 묘사된 선체의 기울기는 거의 45도에 육박할 정도로 가파르지만 2012년 해당 영화 감독인 제임스 카메론과 여럿의 선박 전문가들이 재조사한 결과 실제 최대 응력각도(두 동강 나기 직전의 각도)는 약 23도 수준으로 생각보다 완만했다. 그래도 사람이 20도 이상 기울어진 경사에 서면 굉장히 가파르다는 느낌은 받게 되며, 나무로 된 갑판은 꽤 미끄럽다. 참고로 23도면 국내 도로 경사도 규격인 % 경사도 기준으론 43%에 해당하며, 대다수 4륜구동 차량도 올라가기 힘든 기울기에 해당한다.[54] 이 당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정전이 발생했을 때 갑판 후미로부터 밑에 있는 선체 부분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음이 들렸다고 하였다. 소음의 원인은 2호기 연돌의 신축 이음으로 해수가 유입 되어 무너지는 소음이었다.[55] 작은 균열이 1시 55분에서 2시 사이에 생기고 있었다고도 한다.[56] 영화 타이타닉에선 3호기와 4호기 연돌 사이가 갈라지는데 이는 영화 제작 당시인 1990년대 중반에는 타이타닉 후미의 침몰 잔해의 절단 부분이 해저로 향하며 물살에 선체의 15미터 가까이나 유실되어 정확한 절단부위를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12년 영화 성공 이후에 타이타닉도 재조명되면서 많은 조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영화 제작 당시와 달라진 점이 생긴 부분이다.[57] 심지어, 배가 두 동강 나던 시점에는 이미 1,2번 굴뚝이 해수면 아래로 사라진 상태였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저게 몇 번째 굴뚝인지까지 봤다는 것은, 굉장한 관찰력과 침착함이 있어야 한다.[58]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직접 예시를 들어본 적이 있다.[59] 이중저에 대응되게 설계된 갑판이며, Mengot은 이 갑판이 이중저 대신 잠시동안 선수와 선미를 서로 연결시켰다고 본다.[60] 생존자들에 의하면 선체 후미가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은 후에도 10초간 폭발음과 같은 소음이 계속되었다고 한다.[61] 타이타닉 100주기 NGC 다큐멘터리에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마치 항공기 추락현장을 보는 듯 하다고 언급했다.[62] 액체에 다른 물질이 용해되어있을 경우 어는 점이 낮아진다. 바닷물에는 소금이나 다른 무기물이 녹아 있는데다 끊임없이 바람에 의해 파도가 치므로 어는 점이 더 낮아진다.[63] 다만 더운 바다에는 상어, 해파리 등 위해 생물들이 많이 서식하여 이들의 습격에 의한 피해를 입을 수 있으며, 열대 수역일 경우에는 한낮에 태양의 직사광선과 바다의 습한 열기로 인한 갈증과 탈수 증상으로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런다고 바닷물을 마셨다가는 탈수 증상을 더욱 악화키게 된다.) 뒤의 브리타닉호 사례는 사고 지점이 온난한 수역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육지에서 멀지 않고, 상어 등 위해 생물이 적으며, 선박 통행량이 많은 지중해였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64] 사망자가 30명 정도 있긴 했는데, 이들은 타고 있던 구명정이 멈추지 않고 회전하던 배의 프로펠러로 빨려 들어가 사망한 사람들이다. 지중해와 대서양의 수온 차이는 지형에 의한 것으로서, 타이타닉이 침몰한 대서양은 북극해와 전면 개방되어 있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 의해 막혀있는 동위도의 지중해보다 수온이 낮을 수밖에 없다. 타이타닉 호가 가라앉은 지점의 위도는 북위 41º 44'이고 브리타닉 호가 가라앉은 지점의 위도는 북위 37º 43'으로서 크게 차이가 없고, 기온보다도 수온변화가 느린 걸 감안해도 4월 중순의 수온과 11월 하순의 수온은 거의 차이가 없다. 이 당시 이상 저온이 발생한거일 가능성도 높다. 이해 4월의 경우 서울도 이상 저온이었다.[65] 1958년판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수록되었다. 한 남성이 B호정에 접근하자 이미 올라탄 사람들이 저지하였고, 이 말을 하고 나서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갔다. 아직 구명정 주위에 있던 라이톨러가 돌아오라고 소리쳐보지만 1997년판 영화에서는 이 사실을 따온 장면이 촬영되었다. 단, 본편에선 삭제되어 미방영 장면 모음으로만 볼 수 있다. 알려진 이야기와는 좀 다르게 전복된 구명정이 아닌 로즈와 잭이 매달린 판자로 헤엄쳐 오다 잭에게 제지당하자 위 대사를 남기고 순순히 다른 곳으로 헤엄쳐 간다. 고증을 목적으로 넣은 건 같은데 잭이 너무 나쁘게 보여서 삭제된 것으로 추정.[66] 게다가 여기 매달린 사람 중엔 2등 항해사 라이톨러가 있었는데 자신의 상관을 못 알아봤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또한 스미스 선장이 탈출해 살아보려고 했다면 훨씬 많은 목격담이 있었을 텐데, 그에 대한 확실한 목격담은 선장실에 들어갔다는 것, (침몰 전) 선원들을 지시했다는 것에서 끊긴다. 즉 마지막 순간까지 선원들을 지휘하고 이후 본인은 탈출을 포기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67] 카르파티아는 다른 곳의 전력과 난방까지 아끼며 미친듯이 달려 3시간 반만에 왔는데, 원래 추정했던대로 최고속인 15노트로 달렸을 경우 소요 예정시간은 네 시간으로 딱 30분 차이가 난다. 카르파티아가 무리해서 운항한 게 라이톨러와 B호정 생존자들을 살린 셈이다.[68] 알콜은 혈관을 확장시켜 열을 많이 빼앗기게 만든다.[69] 설계에서 상정된 최대 속도를 초과하면 선체에 큰 무리가 갈 뿐 아니라, 타이타닉과 마찬가지로 혹한에 선체의 구조 재료의 물성이 똑같이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빙하에 충돌하거나 선체에 저절로 손상이 갈 수 있었다.[70] 아동이나 노약자처럼 줄사다리를 타기 어려운 사람들은 밧줄을 꿴 크고 튼튼한 자루 속에 들어가게 해서 끌어올렸다.[71] 평소 운항시 최고 속도는 물론이고 공식 스펙(테스트 속도)인 15.5노트보다 오히려 빠른 속도였다. 순항 속도가 21노트에 달하고 최고속도는 23노트인 타이타닉이 당시 여객선 중 얼마나 빠른 배였는지 알 수 있다.[72] 전술했듯 타이타닉호를 침몰시킨 것을 비롯해 빙산 여러 개가 여전히 현장 인근을 떠다니고 있어서 카르파티아호도 자기가 침몰할 위험을 감수하고 구조하러 간 상황이었다.[73] 방금 타이타닉호의 침몰에서 겨우 살아났는데 타이타닉과 똑같이 생긴 배에 타라고 하면 사고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인 사람들이 옮겨 탈 리가 없다.[74] 죽다 살아나서 바닥난 체력과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인해 혼이 반쯤 빠진 생존자들에게 무턱대고 인터뷰를 시도하는 것은 매우 큰 실례다. 일례로 세월호 사고 당시 한국에서는 생존자들에게 무턱대고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고, 물어본 질문의 수준까지 떨어지는 기자들의 행태가 질타를 받았다.[75] 당대에는 심해를 제대로 탐사할 수 있는 기술은 당연히 없었지만, 추를 매단 밧줄을 바다에 내려 수심을 측정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했고 그 정도 수심은 수압이 매우 높아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76] 이는 승선객 명부에 따른 수치이며 돌발상황 등으로 인한 변화내용은 반영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77] 자연적 재해 분야 최대 선박 사고 사망자이다. 다른 사고로는 1945년 한국인 수천명이 죽은 우키시마호 침몰 사고 같은 일이라든지 4천 명 이상이 죽은 1987년 12월 필리핀 도냐 파즈호 침몰 사고 같은 비극이 있다. 사망자 수가 타이타닉 4배 가까이 된다. 사상 최악의 단일 선박 침몰 사망숫자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1945년에 발트해 연안에서 후퇴하던 독일 국방군과 피난민을 태우고 가다가 소련 잠수함에 침몰. 최대 1만 명이 넘게 타고 있었다고 하는데 2,000명 정도가 구조. 게다가 장교들이 사람들을 가둬두는 바람에 탈출도 늦어졌다.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별 의미는 없었겠지만.), 고야호(같은 지역에서 침몰. 이쪽은 6천~8천명은 넘게 타고 있었는데 그 중 180명 정도만 생존). 소련의 아르메니아호(소련의 흑해 정기 유람선이었다 징발된 병원선으로 루프트바페He 111 폭격기어뢰에 의해서 격침되어 최소 5천 명 가량의 사상자가 나 병원선 중에서는 가장 큰 인명피해를 기록했다.) 등이 있으며, 아르메니아호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병원선 격침사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해난사고’ 기록 또한 1950년에 깨질 뻔했다. 흥남 철수작전 당시 14,500명의 군인 및 한국인 피난민들을 수송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해당 선박으로, 탑승한 한국인 피난민들이 항공유 드럼통 위에서 모닥불을 피웠다.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는 300톤의 항공유가 적재되어 있었는데, 여기에 불이 붙었을 경우 14,500명 전원이 폭사해 1,514명이 사망한 타이타닉호는 물론 9,343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의 기록도 밀어냈을 것이다.[78] 한국사람들이 흔히 방문하는 대중목욕탕 냉탕의 수온이 15도 전후이다. 이 정도 수온만 되어도 전신을 담그고 있을 경우, 5분도 지나지 않아 나가고 싶은 매우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타이타닉 영화 메이킹 필름에 다르면 실제로 촬영 당시 사용된 물이 15도 정도였다고 한다. 너무 따뜻하면 김이 나와서 편집하기 어렵고, 너무 추우면 생명이 위험하므로 제작진이 닿은 타협점. 즉 배우들은 목욕탕 냉탕 정도에서 촬영을 한 셈이고, 실제로 디카프리오는 촬영할 때 컷 소리가 나오면 욕을 뱉거나 윈슬릿이 비명을 지르곤 했다. 윈슬릿의 경우 하차할 뻔하기도 했는데, 다른 세트 제작이 늦어져 가장 처음 촬영했던 바다 한복판에서 허우적대는 씬을 찍던 도중 폐렴에 걸렸기 때문.[79] 위도는 북위 41º 44'에 불과하지만 빙산이 떠다니는 -2℃의 수온이면 남극해, 북극해 한가운데 수준의 수온이다. 예시로, 배로우 앞바다의 수온이 1-4월 기준 최저 -3℃ 정도고, 맥머도 기지 앞바다의 7-10월 수온도 -2℃ 정도다. 참고로 배로우는 북위 71º 17', 맥머도 기지는 남위 77º 51'에 있다. 그 차가운 동해에서 같은 위도인 청진시, 하코다테 앞바다조차 4월 중순이면 수온이 10℃ 근방까지 오른다. 침몰 해역이 위도 대비 수온이 굉장히 낮은 이유는 강력한 한류인 래브라도 해류가 정통으로 뚫고 지나가는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북대서양 안에서 같은 위도를 가진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해안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난류북대서양 해류가 뚫고 지나가 같은 4월 중순 기준 수온은 15℃ 전후로 높은 편이다.[80] 10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타이타닉 탑승자에 관한 기록은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81] 이 사람의 손자가 일본 팝 역사계의 레전드라 불리는 핫피 엔도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멤버 호소노 하루오미다. 때문에 하루오미 본인도 타이타닉 사건 관련인으로 간간이 등장하는 편이다. 태어나기 전에 할아버지가 사망한 지라 실제로 만났던 기억은 없다고 하나, 어쨌든 유족이므로 2012년 사건 100주년 당시 피해자 위령비가 있는 핼리팩스에 가서 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82] 여담이지만 충돌 당시 타를 잡았던 로버트 히친스는 지휘를 맡은 6번 구명정에서 여러 병크를 저질러 악명이 높다. 배로 다시 오라는 선장 명령을 거부한다던지, 엉뚱한 소리로 사기를 쳐지게 한다던지...자세한 내용은 타이타닉(영화)/실존인물에 나온 실존인물의 행적 참고. (영화에선 이 모습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서 리더 역할을 하며 탑승자들을 격려해준건 Unsinkable 몰리 브라운이었다.[83] 공교롭게도 이 때 올림픽 호의 선장이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었는데, 조사 결과 올림픽 호의 과실로 결론났으나, 선원들의 힘으론 불가항력이었다고 결론나서 딱히 책임을 지거나 경력에 흠집이 나진 않았다.[84] 1997년작 영화에서는 구명정 탑승을 통제하던 와중 우발적으로 두 명을 쏴죽이게 되고,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자살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6등 항해사 무디와 함께 A구명정을 옮기려다가 물살에 휩쓸려 사망했다.[85] 저들 중 라이톨러 이상 선임 사관들은 모두 구명정 승선을 포기했으며 3등 항해사 피트만부터 명령에 따라 승선했다. 6등 항해사 무디의 경우 원래 승선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자신의 자리를 견시 레지널드 리에게 넘기고 결국 순직했다. 구명정 승선을 포기한 항해사들 중 라이톨러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86] 애초에 구름이 없었다 쳐도 달이 완전히 기울은 무렵이었다. 음력으로는 1912년 2월 27일이기 때문.[87] 다른 작품에서는 타이타닉호가 육안으로 인식될 정도여서 견시병들이나 갑판에서 구조신호를 목격했고 나중에는 통신까지 되었으나 타이타닉호처럼 큰 배가 침몰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위에 나온 RMS 카르피아호를 제외한 모든 배가 그런 반응이었다고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는 선박들이 패닉하여 무선이 너무 많아지고, 결국 재밍까지 일어날 정도로 모든 배들이 대충 저게 뭔 사태인지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고, 프랑크푸르트호, 발틱호, 버지니안 호 등 일부 구조에 나선 선박도 많이 있었으며, 이 중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생존자들이 저체온증에 걸려있을 것을 염려하여 담요를 준비하고 빵을 조리하도록 명령한 기록이 있다. 아마 다른 선박들도 비슷했을 것이다.[88] 비상시 대응방법 숙지를 강제하기 위해 일부 국가에서는 이런 큰 유람선이나 여객선은 출항 시각이 임박해 오면 의무실 같은 곳만 빼고 모든 시설의 문을 닫고, 훈련이 다 끝나고 나야 비로소 다시 이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89] 원문: Do you know what an iceberg is composed of?[90] 원문: Ice, I suppose, sir.[91] 이 조약은 수없는 개정과 보강을 거쳐 현재까지도 효력이 지속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 중 하나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해상 규약 역사에는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 SOLAS와 함께 가장 중요한 해상 규약인 MARPOL(선박에 의해 발생하는 해양 오염을 규제하는 규약) 역시 사상 최악의 유조선 침몰&원유 유출 사고가 일어나고 나서야 제정되었다.[92] 한화 약 2,400~2,600억원[93] 이들은 2등실 이용자와 동일한 서비스가 제공됐다.[94] 당시는 아직 여성참정권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가부장제 시대였는지라, 노골적으로 아내를 버리거나 하지 않는 한 정부를 두는 것 정도는 봐 주는게 일반적이었다. 이 시대보다 조금 앞선 벨 에포크 당시를 그린 모리 카오루의 엠마에도 킴벌 자작이 뮤지컬 가수를 정부로 두고 있는 묘사가 등장한다. 이 때문에 타이타닉 시대 여성참정권 운동은 달리는 마차에 뛰어들어 투신하는 등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이 포함된 보통선거는 1924년에 이루어졌다.[95] “이 배에는 나의 이기심으로 구조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은 없을 것이오. 나는 금수만도 못한 삶을 살 바에야 신사답게 죽을 것이오.”[96] 이때 비서 빅터 기글리오 역을 맡은 배우가 인상적인데,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97] 1911년 결혼했으며, 두 번째 아내였다.[98] 다른 항해사 머독이 남는 자리가 있을 경우 성인 남자도 태워보낸 데 반해 라이톨러는 철저히 여자와 어린이만 태우도록 조치했다. 라이톨러는 침몰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선내의 공기에 의해 튕겨져 나와 다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이후 영-미 의회 합동 조사단에서 사고 정황에 관해 많은 귀중한 증언을 했다.[99] 영화에서는 주인공 잭 도슨의 친구가 연통에 깔려 사망하는 묘사가 있다.[100] 2009년에 부산 신세계백화점이 더 크게 지어지면서 기네스북 기록을 내주었다.[101] 캐머론 영화에서는 '폭력적인 남성성'에 대한 비판과 이에 희생되는 여성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이 자주 드러나므로 이를 감안한 각색일 수 있다. 주인공 로즈만 하더라도 남성들의 세상에서 예쁜 장신구 취급을 받다가 잭에게 구조되는 구도이다. 물론 강인하며 영웅적이었던 실존 인물 몰리 브라운의 실제 멋진 행적을, "폭력적인 조타수에게 윽박질러지는 가련한 여성"으로 각색했다. 브라운은 당시 (대부분 금수저들이니까) 노를 젓는 것을 힘들어하던 승객들에게 "노를 저으면 우리 몸이 따뜻해지지 않겠어요?"라며 격려의 말을 건네며 히친스가 여러 어그로를 끄는 것에 일갈하던 구명정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히친스는 반대로 배로 돌아오라는 선장의 명령을 거부하거나 카르파티아가 왔을 때 "우리 구하러 온 배 아니다."라고 헛소리를 하거나 심지어 취해있었다는 증언까지 나와(확인된 사안은 아니다.) 생존 선원들 중 가장 욕을 먹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참고로 선장의 복귀 명령 거부는 영화에서 촬영은 되었으나 삭제되었다.[102] 영화에서 잭의 친구가 죽은 것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