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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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에 탄 미숫가루 또한 미숫가루로 칭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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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타락죽/tarak.jpg

1. 개요
2. 역사
3. 제법
4. 여담



1. 개요[편집]


타락죽()은 불린 을 붓고 블렌더맷돌에 간 뒤, 고운 채에 밭쳐 찌꺼기는 버리고 쌀 간 물을 끓여서 흰죽이 어우러지게 쑨 후 우유를 넣고 더 끓인 이다.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이 먹던 건강 보양식의 일종이다.

고려원 간섭기원나라에서 들어온 요리로 우유와 찹쌀을 함께 끓여서 만든 죽이다. ‘말린 우유’라는 뜻의 몽골어 '타륵(тараг)'를 음차하여 타락(駝酪)으로 불렀다고 한다. 말그대로 음차기 때문에 낙타 타(駝)가 들어갔다고 해서 낙타 젖으로 끓인 것도 아니다.[1]

타락죽은 원나라에서는 제호(醍醐)라고 해서 우유에 갈분을 섞어서 끓인 죽 요리였다. 원래는 불교 용어로, 인도의 고급 요구르트(혹은 버터치즈)를 말한다. 명나라에서는 수락(酥酪)이라 했는데 역시 우유에 곡물 가루를 섞어서 끓인 죽의 일종. 타락죽은 이들과 같은 계통의 유제품이다.

만드는 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유와 쌀가루의 비율을 5:4로 하여 넣고, 덩어리지지 않게 잘 풀면서 끓여내면 끝이다. 취향에 따라 설탕소금으로 간을 하기도 하나 우유와 쌀만 넣고 끓여도 상관없다. 다만 다른 의견도 있다. 우유가 아니라 버터로 쌀가루를 볶은 뒤, 우유를 넣어서 끓여내는 죽인데, 밀가루를 볶은 를 써서 스프를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

송아지가 먹을 것을 뺏어 먹는다고 조선시대의 왕이 우유의 사용을 우려했던 만큼 유제품의 비중이 매우 적은 한국 요리 중 우유를 재료로 사용하는 몇 안되는 음식이다.


2. 역사[편집]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우유가 매우 귀했다. 조선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에서도 근대까지 우유가 무척 귀해서 우유는 이나 힘 있는 귀족, 부자나 먹을 수 있었거니와 값도 비싼 음식이었다. 게다가 냉장 기술을 비롯한 보관 기술이 매우 미약하던 시대라 차게 보관하지 않으면 쉽게 상하는 우유는 더더욱 귀한 음식일 수밖에 없었다.[2]

그나마 몽골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고려와 북방 민족들과 오랜 시간 동안 교류해 온 중국에서는 왕족이나 귀족들이라도 먹었지, 북방 민족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했던 일본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우유를 먹는다는 것 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대신 유목민들이 많던 몽골이나 아랍 지역에선 염소 젖과 더불어 우유도 물과 같아서 많이 마셨고 종교적으로 를 많이 키우던 인도 같은 서남아시아는 오래전부터 우유를 즐겨 마셨다.

대한민국에서 우유가 대중화된 것은 아무리 빨라도 1960년대의 일이다. 조선시대 국왕에게도 타락죽은 일상식이 아니라 보양식이었고, 요리사가 아니라 의원이 처방의 일종으로 만드는 음식이었다. 임금이 기분 좋을 때면 신하들에게 한 숟갈 먹어 보라고 하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타락죽은 국왕이 먹는 귀한 음식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국왕이 궁녀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부부의 연을 맺는 사이를 "분락지간(分駱之間)"이라고 불렀는데, 국왕만 먹을 수 있었던 귀한 타락죽을 같이 나눠 먹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국왕 이외에는 대비, 세자, 중전 정도가 타락죽을 먹을 수 있었으며 이외에도 기로소에 입소한 퇴직 관료들도 타락죽을 맛볼 수 있었지만, 기로소에 입소하려면 최소한 종2품 벼슬직을 지내야했기 때문에 그 외의 관료들은 유우소나 타락색처럼 우유를 관리하는 관청에서 일하는 관원들 정도를 빼면 해당 사항이 없었다.


파일:external/www.mhj21.com/2009052020304777.jpg

우유를 짜는 내의원 의관들을 그린 그림. 왼쪽을 보면 송아지를 어미 소와 떼어내어 붙잡아두고 있는 것이 보인다.
우유가 귀한 이유는 당대에 자체가 매우 적었고, 우유 생산을 목적으로 개량된 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한우는 젖꼭지도 작고 우유를 많이 생산하지 않는다. 젖소는 나중에 기술이 발달하고 나서 개량된 품종으로, 주기적으로, 그것도 기계를 동원해서 젖을 무지막지하게 짜지 않으면 도리어 젖몸살이 심해져 염증 걸려서 죽는다. 조선말고도 몽골같은 유목을 주로하는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에서 우유를 먹는 게 왕이나 부유층 같은 극히 일부만 오랫동안 가능했던 것도 똑같은 이유다.

고려시대 이후 한국이나 중국은 그래도 우유를 자주 마시는 몽골을 비롯한 북방 민족들과 자주 교류해온 역사가 있지만, 일본은 그마저도 없었고 더욱이 살생을 금하는 풍조로 인해 고기를 먹는 문화도 미약했기 때문에 우유 마시는 것을 더더욱 괴상하게 여겼다. 예를 들면, 19세기 중순 일본인들이 유럽에 가서 우유를 보고 "뭔 쌀 죽을 먹나?" 했다가 동물 젖임을 알고 낯설어했을 정도이다. 재미있는 점은 일본의 귀족인 구게(公家) 가문 중에 다이고(醍醐, 제호)라는 성씨가 있었으나 이것은 실제로 유제품인 제호를 먹거나 생산하는 가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성씨이다.

게다가 조선시대까지 의 젖을 짜는 행위가 도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부적합 하다고 여겨졌다. 우유를 생산하려면 소가 출산한 직후 젖이 나올 때 짜야 했는데, 이러면 자연히 송아지가 먹을 양이 줄어들므로 '어린 송아지가 먹어야 할 젖을 사람이 훔쳐 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유교적인 이유로 유생들이 반대했다고 한다. 영조 역시 이를 옳게 여겨 손자 정조의 세손 책봉 전 일화 중 하나를 보면 두 돌 된 손자의 이유식으로 우유를 쓰게 된 나인에게 "어미 소에게도 키워야 할 송아지가 있는데 인간으로서 어찌 송아지가 먹어야 할 것을 먹겠는가."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유학자 신분에서 가격 대비 성능 비율에 대한 의문을 유교적으로 풀어 쓴 상소문일 수도 있다. 조선초기는 원나라 말기의 붕괴된 상업의 여파를 농업 진흥을 통해 경제력 복구를 행하던 시기였다. 조정의 입장에서 소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우경의 역사가 깊은 데다가 나이 들고 병 들어도 도축을 통해 농가에 기여하는 등, 이미 농업 기여도가 높은 동물이었다. 당시 기술력으로는 소의 품종 개량은 성패 여부가 불분명했다. 게다가 품종 개량에 성공한다고 해도 다량의 소 생산만을 위한 목초지를 만드는 것보다 그 자리에 그냥 농경지를 조성하는 게 더 나았다. 때문 비용 대비 효익에 심각한 의문을 느낄 여지는 충분하다. 이처럼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권에서는 우경의 역사는 긴 반면 우유를 이용한 제품들은 특권층들만의 사치품에 지나지 않았다.

또 유교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송아지는 한 마리, 한 마리가 후일 노동력의 근간인 소가 되는 중요한 자원이었는데 이로 인해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면 성장이 더뎌져서 일을 제대로 못 하게 되므로 경제적으로도 손해였다.

"조선의 소는 키가 크고 힘이 세다. 조선인들은 우유를 먹지 않고 송아지에게 모두 먹였는데, 그래서 덩치가 커진 게 아닌가 싶다."

V.P 카르네프, 조선시대 당시 조선으로 파견 온 러시아 장교가 한우를 보고 느낀 점을 이야기할 때.

그래서인지 당시 조선의 한우는 체격이 크고 힘이 셌다고 한다. 이 시기면 애초에 조선뿐 아니라 어느 나라든 동물의 품종 개량 기술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품종 간의 차이는 있더라도 한우에 비해 우유랑이 그렇게 큰 차이가 있진 않았을 거고, 성장기에 젖을 적게 먹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래서 당시에는 관청에서 따로 우유를 관리할 정도였다. 고려시대부터 '유우소'라는 관청이 있었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는데, 한때 거기 종사하는 관원이 200명이었다. 조선시대에도 '타락색'이라고 해서 우유만 관리하는 관청이 따로 있었다. 서울 낙산(현재의 한성대학교 근처)에는 왕실 전용 목장도 있었다.


3. 제법[편집]


유방이 좋은 암소의 젖을 송아지에게 빨린다. 젖이 나오기 시작하면 유방을 씻고 젖을 받는다. 많을 때에는 1사발, 적을 때에는 반 사발 정도 받을 수 있다. 체로 3번 걸러서 끓인다. 끓여서 익힌 숙타락(熟駝駱)을 오지항아리에 담는다. 여기에 작은 잔 1잔 분량의 본타락(本駝駱)을 섞어 따뜻한 곳에 놓아두는데, 그 위를 두껍게 덮는다. 밤중에 나무꽂이로 찔러 보아 누런 물이 솟아나면 오지항아리를 시원한 곳으로 옮겨 둔다. 만약 본타락이 없으면 좋은 탁주(濁酒)를 중간 정도 크기의 종지[鍾子]로 한 종지 넣어도 좋다. 본타락을 넣을 때 좋은 초 약간을 함께 넣으면 더욱 좋다.

수운잡방의 타락 만드는 법

이를 보면 초기 타락죽은 몽골의 영향 때문인지 요구르트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 타락죽이 요구르트에서 우유죽으로 변한다.

쌀을 담가다가 무리(물에 불린 쌀을 매에 갈아 체를 밭치어 가라앉힌 앙금)를 정갈하게 갈아 밭이고, 생우유가 한 사발이면, 무리는 조금 적게 하되, 묽고 되기는 잣죽 무리 심만큼 하여, 먼저 쑤다가 만약 익으려 하거든 우유를 부어 화합하여 쑤나니, 이것이 내국의 타락법(駝酪法)이니라.

규합총서의 타락 만드는 법


규합총서에 따르면, 우유와 무리의 비율을 1:0.8로 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비율은 유동적으로 바뀔 수 있으나 무리의 양이 우유의 양을 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만 1936년에 편찬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1과 비슷하게 써놓은 것으로 보면[3] 왕실과 민간의 제법이 달랐거나 했던 모양이다. 왕실에서는 민간과 달리 요구르트를 계속 먹었나고 민간에서 전분을 넣어 따라하다보니 제법이 바뀐것일 수도 있다는 것.

4. 여담[편집]


  • 현대 사회에서는 접하기 굉장히 쉬워졌다. 조선시대에 비하면 우유 구하기는 너무 쉽고, 찹쌀가루도 마트 곡물 코너 가면 미리 빻아 놓은 걸 판다. 6.25 전쟁 당시 피난민들을 위한 구호 식품으로 안남미분유를 넣은 우유 죽이 배급되었다고도 한다. 즉, 조선시대에만 해도 왕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보양식이 20세기에 들어서니 피난민들을 위한 배급품으로 전락했다. 타락죽은 조리법도 간단하다 보니 쉽게 요리해 먹을 수 있다. 한때 통조림 즉석식품으로도 나왔지만 단종되었다.
물론 질적으론 왕이 먹던 타락죽과 비교할 수 없다. 우유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과잉 생산되다가 수요를 잃어 남아도는 것을 미국 정부가 싸게 구매해 구호 물품으로 사용했고, 안남미는 주로 동남아시아 현지 시장에서 외면받은 하급품을 수입한 것이었다. 질적으론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

  • 정사 삼국지의 기록에는 중국 후한승상으로 당시 최고 실권자였던 조조가 자신의 참모들과 장수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타락죽을 대접하며 한 그릇씩 나눠주는 모습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타락죽이 어찌나 맛있었던지 조조는 황궁으로 가서 헌제를 알현하며 황제에게 직접 타락죽을 바치기도 했다. 물론 조선시대의 타락죽과는 재료도 다르고 맛도 다르겠지만 어쩌면 이것이 타락죽의 원조일 수도 있고, 요구르트치즈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코에이에서 발매한 삼국지 13 PK에서는 보물 중에 '낙유'라는 것도 등장한다. 이걸로 술을 마실 수 없는 20세 이하 무장을 연회에 부를 수 있고, 호감도를 높여 의형제나 배우자로 꼬실 수 있다! 그런데 몽골에서는 요구르트를 타륵(Tarak)이라고 부른다.

  • 서유기에는 손오공이 제호관정(醍醐灌頂)하여 힘이 솟았다는 말이 나온다. 원래 제호(醍醐)란 우유로 만든 고급 유제품을 가리키고, 불교에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비유한다. 그래서 '제호관정'이라고 하면 부처의 가르침을 정수리로 쏟아부은 듯 지혜를 얻는다는 뜻인데, 중국에서는 여기서 뭔가 '시원한 느낌'을 연상했는지 '제호관정'이란 말을 '심신이 시원해지고 힘이 솟는다.'라는 뜻으로도 사용했다. 사오정 역시 손오공이 도우러 온다는 말에 사오정이 제호탕을 뒤집어쓴 듯 힘이 솟았다는 구절이 나온다. 조선시대 타락죽하고는 좀 다른 음식이었겠지만 어쨋든 그 귀하고 힘이 나는 음식을 뒤집어쓴 것마냥 사기가 올랐다는 묘사다.

  • 허영만의 만화 식객에서 나오면서 더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단행본 12권 '완벽한 음식' 편에서 등장한 입맛이 상당히 까다로운 미국인 미식가 케빈에게 성찬이 직접 대접한 음식이다. 케빈은 여러 음식을 대접받으면서도 내내 만족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성찬에게 타락죽을 받고 나서야 '몽골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 한국 요리에 우유를 사용한 음식이 없을 리 없지'라며 이제야 완벽한 음식이 나왔다고 좋아한다. 그런데 식객 시리즈에서는 타락죽 에피소드와 별개로 제호탕 에피소드가 또 있는데, 여기서는 제호탕이 타락죽이 아니라 매실을 넣고 끓인 다른 보양식으로 나온다.

  • 불교석가모니와 관련된 음식이기도 하다. 석가모니는 다섯 수행자들과 함께 고행하며 단식하기를 6년간이나 하였다. 그러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느끼자 고행을 그만두고 지친 몸을 이끌어 물가에서 목욕한 뒤 근처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았다. 마침 '수자타'라는 여인이 이 모습을 보고 목신(木神)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여긴다. 불경에 따르면 수자타는 석가모니가 앉아 있던 나무를 신령한 나무로 여겨 우유를 바치며 기원했다. 그러다가 석가모니가 그 나무 밑에 앉은 모습을 보고 나무의 신령이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유로 쑨 죽을 공양 올리자 석가모니가 받아 먹고 힘을 차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는 꽤 과학적인 얘기이기도 하다. 기아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밥이나 빵, 고기같이 고탄수화물, 고단백질 음식을 먹으면 가 뒤집혀 죽을 수도 있다. 과거 대기근 때 굶어서 비쩍 마른 사람이 먹을 것을 달라고 해서 조금 나눠줬더니 허겁지겁 먹다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틀만 굶어봐도 뱃속에 무언가 들어가면 쓰라린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위가 적응할 때까지 이나 수프처럼 소화가 잘 되는 유동식을 소량 지급해야 한다. 보양식을 먹었다면 부처는 죽었다

  • 나카무라 히카루의 만화 세인트☆영멘에서는 이를 재밌게 비틀어서, 붓다가 말하기를 당시 우유 죽은 시장이 반찬이어서 맛있었을 뿐인데 너무 잘 먹는 걸 보고 감복한 수자타 씨가 천계에서 2천 년 넘게 꾸준히 보내주고 있어 이젠 질렸다고 한다.

  • 고대 인도에서 목욕이나 식사를 끊는 것은 인도 고행자들의 기본 사항이었기 때문에, 같이 수행하던 다섯 고행자들은 석가모니가 타락했다고 비난하며 같이 수행하기를 거부했다. 그 후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해탈하여 부처가 되었고, 함께 수행하던 고행자 동료들을 첫 제자로 삼았다.

  • 싯다르타(뮤지컬)에서 수자타의 이야기는 시즌 4에서 시종 찬나 및 아버지 슈도다나의 행위로 각색되었다. 싯다르타의 시종 찬나는, 단식 수행을 거듭하다 고통받는 싯다르타를 찾아 정반왕 슈도다나가 만든 우유 죽 및 야소다라가 지은 의복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극단적인 고행이 옳은 고행이 아니라는 것과 평범한 순간의 소중함을 깨닫고 단식 수행을 그만둔다. 시즌 5에서, 아역 배우가 마실 것이 담긴 사발을 싯다르타에게 건네준다. 이로써 수자타의 일화가 무대에 올랐다.

  • 이 우유 죽을 불교에서는 우유와 쌀로 쑨 죽이라고 유미죽(乳米粥)이라고 부르는데, 타락죽과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음식이다. 불교계에서는 쌀과 우유만이 아니라 연근이나 다른 곡식을 갈아 좀 더 영양이 풍부하게 만들어 먹곤 한다. 그리고 이 영향 때문인지 불교 중 채식주의를 엄격하게 지키는 종파에서도 우유, 치즈와 같은 유제품은 대부분 허용한다.

  •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했던 혜민 스님의 냉장고를 보면 유제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식은 멀리해도 반대로 유제품은 높이 치는 것은 당대 인도브라만교의 채식주의에서 이어진 특징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도 생명을 취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유제품의 경우 생명을 취하는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 현대나 서양에선 비슷한 음식을 아침식사용이나 환자식으로 많이 먹는데 오트밀. 오트밀을 우유로 끓이거나 불려 먹으면 우유로 만든 곡물죽이라는 데서 성질도 맛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3국 등을 비롯한 구 소련권을 비롯한 동유럽권에서도 까샤라고해서 귀리와 보리, 수수 등 잡곡을 우유와 버터, 돼지비계를 넣어 타락죽으로 먹기도 하는데 한국인 입맛에는 다소 느끼한 편이다.

  • 튀르키예 요리에 똑같이 쌀과 우유를 이용해 만든 튀르키예식 푸딩인 슈틀라치(Şütlaç)나 무할레비(Muhallebi)가 있는데 실제로 타락죽에 설탕을 듬뿍 넣어 먹으면 비슷한 맛이 난다는 말이 있다.

  • 무한도전 식객 특집에서 유재석, 정준하, 정형돈 팀 대 박명수, 노홍철, 길 팀이 한식 대결을 펼쳤을 때 박명수 팀이 단호박을 넣은 단호박 타락죽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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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팔진 문서에도 있지만, 원나라 시기에는 실제로 낙타 젖으로 만든 타유미(駝乳糜) 혹은 타내죽(駝奶粥)라는 음식이 있었다. 현재 몽골에서는 낙타젖으로 만든 술인 '잉게니 아이락(ингэний айраг)'이 있다.[2] 사실 우유도 우유지만 쌀 역시 풍족한 생산량은 아니었다.(이 시절의 풍년 생산량은 오늘날의 평년에 가깝다.) 쌀의 생산량이 증가한 건 프리츠 하버가 질소 비료를 개발하고,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한반도도 쌀 생산량이 풍족해졌다. 괜히 쌀을 이용한 가공품인 술이나 떡이 귀한 대우를 받은 게 아니다. 하술하는 것처럼 우유와 쌀을 모두 쓰는 타락죽이 왕이 즐기는 보양식이자 신하에게 귀한 하사품 취급을 받은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3] 이왕젓을 걸을에 몬저 달듸단타락(酪)을만드러 밋(酵)츨만드나니 밋이라하는것은 술밋과가티피야을으게하는것이니라 대범익은젓한되에 첨락만수가락을 국이에담고 숟가락으로 몹시휘저서 다 풀리거든익은젓에붓고 구긔로휘저어 고루풀리게하고 전氈이나솜(綿)으로병을싸서 하게하야 한참에 흣헌겁으로덥허두면 그잇튼날앗침에 타락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