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하시 히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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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年(ひゃくねん一人(ひとり逸材(いつざい / Ace of the Universe>
棚橋 弘至(たなはし ひろ し / Hiroshi Tanahashi



NJPW
본명
타나하시 히로시
棚橋 弘至(たなはし ひろ し
생년월일
1976년 11월 13일 (47세)
신장
181cm
체중
101kg
혈액형
O형
출생지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기후현 오오가키시
학력
리츠메이칸대학 (법학부/학사)
경기 스타일
올라운더
시그니쳐 무브
드래곤 하리테((()[1]
플라잉 포어암[2]
저공 드롭킥[3]
드래곤 스크류[4]
청천정(青天井(あおてんじょう) 엘보[5]
다이빙 섬머솔트 드롭[6]
트위스트 & 샤우트[7]
드래곤 수플렉스 홀드
폴 인 러브[8]
슬링 블레이드[9]
에어 기타[10]
피니쉬 무브
드래곤 수플렉스 홀드[11]
텍사스 클로버리프 홀드[12]
하이 플라이 플로우[13]
별명
태양의 천재아(太陽(たいよう天才児(てんさいじ)[14]
에이스(エース)[15]
Ace of the Universe[16]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일재[17]
(100年(ひゃくねん一人(ひとり逸材(いつざい)
타나쎄[18]
테마곡
STRANGE
DO IT MYSELF[19] - SUPER STUPID[20]
( - 2004.12)
HIGH ENERGY (2005.1 - 2016.12)[21]
LOVE & ENERGY (2017.1 - 2019)[22]
LOVE & ENERGY (2020 Ver.) (2020 - 2023)[23]
LOVE & ENERGY ~2023 ver.~ (2023 - )
데뷔
1999년 10월 10일 (23세)[24]
도쿄도 분쿄구 코라쿠엔 홀
신일본 FIANL DOME1999 전야제
vs 마카베 신야
SNS
파일:Ameba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주요 커리어
CMLL 월드 태그팀 챔피언 1회
CMLL 월드 트리오스 챔피언 1회
CMLL 유니버설 챔피언 1회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 8회
IWGP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2회
IWGP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헤비웨이트 챔피언 3회
IWGP 헤비웨이트 태그팀 챔피언 3회
IWGP U-30 오픈웨이트 챔피언 2회[25]
NEVER 오픈웨이트 챔피언 1회
NEVER 오픈웨이트 6인 태그팀 챔피언 4회
GHC 태그팀 챔피언 1회
브리티시 헤비웨이트 챔피언 1회

1. 개요
3.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구세주
4. 경기력
5. 여담
5.1. 각종 매체에서의 출연과 콜라보레이션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 (みなさん、(あいしてま~す! "
(여러분, 사랑합니다~!)


" (まれてから一回(いっかい(つかれたこと(いから。"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지친 적이 없으니까요.)


신일본 프로레슬링 소속의 프로레슬러.

2000년대 초반 이노키즘으로 인해[26] 수직으로 곤두박질치며 몰락해가던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2000년대 후반 들어 다시 부활할 때, 그 주축에 서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다시 일으킨 주역. 한 마디로 WWE에서 존 시나와 같은 입지라고 생각하면 된다.[27]

또한 투혼삼총사의 주축이었던 무토 케이지이노키즘에 질려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완전 이적한 후, 신일본에서 밀어준 신(新)투혼삼총사 중 한 명이다. 나머지 두 명은 나카무라 신스케시바타 카츠요리. 암흑기 동안 신일본을 등지고 이종격투기로 전향했던 시바타, 최연소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왕좌에 오르는 등 엄청난 푸쉬를 받았던 나카무라에 비하여 처음엔 주목을 덜 받았지만, 끊임없는 노력과 쇄신을 통하여 셋 중 가장 먼저 인정받고 신일본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경기력 면에서도 2000년대 전반에는 존 시나와 마찬가지로 혹평을 들었으나, 꾸준한 노력을 통하여 2010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 프로레슬링 최고급 경기력의 소유자가 되었다. 데이브 멜처는 2014년 G1 클라이맥스의 리뷰를 하면서 "타나하시야말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BEST IN THE WORLD다"라는 극찬을 한 바가 있다.


2.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타나하시 히로시/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구세주[편집]





레슬킹덤 14 입장신

기필코 저희 세대에서 다시 한 번 프로레슬링을 폭발시키겠습니다!!((かならず、(おれたちの世代(せ だいでもう一度(いち どプロレスを爆発(ばくはつさせます!!)

2006년 7월 17일 제45대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결정 토너먼트 우승 이후


커리어 초기에는 특출난 거 하나 없는 능력과 대학교 프로레슬링 동아리 출신이라는 불리한 배경[28]으로 인해, 신 투혼삼촌사로 선전되며 푸쉬를 받긴 했으나 같은 신 투혼삼총사이자 차세대 에이스 취급을 받고 있던 나카무라 신스케, 이노키즘의 계승자로 총애를 받고 있던 시바타 카츠요리 등에 비해선 훨씬 뒤떨어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셋 중 에이스와 가장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당시 신일본은 이종격투기종합격투기 등의 인기에 밀린 상황에서 무리하게 격투기 노선을 걸으려 했던 이노키즘의 폐해로 단체 자체가 존속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고, 이 와중에 이노키즘에 힘입어 일찌감치 차세대 에이스로 낙점받아 회사로부터 어마어마한 푸쉬를 몰아받던 나카무라 신스케에게 '이노키의 망령'이라며 어마어마한 역반응이 터져나오고 시바타 카츠요리는 아예 단체를 나가버리는 우환이 터지자, 타나하시는 제대로 에이스 대접을 받은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단체 에이스로서의 책임을 요구받으며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는' 망해가는 단체의 에이스라는 멍에를 쓰게 된다.

단체는 망해가고, 팬들은 나날히 냉소적이고 냉담하게 변해가고 있었으며, 타나하시 본인에게 에이스로써 팬들을 매료시킬 경기력은 없었고 당장 모든 것을 때려치고 나가도 모자라지 않을 상황이었으나, 양다리를 걸쳤다 칼에 찔린 중대한 사생활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자신을 다시 받아주며 자신을 살려준 신일본에게 은혜를 갚고 싶었던 타나하시는 암흑기로 빠져든 신일본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자신이 믿는 진정한 프로레슬링에 대한 가치관과 팬들에 대한 깊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역경에 부딪혔다.

2008년 쯤이었던 것 같은데, 옛날부터 같이 프로레슬링을 보던 친구가 근처에서 신일본 선수의 악수회를 하고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해서 가보니, 젊은 선수가 긴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을 뿐이었어. 에스컬레이터 옆에 앉아서 아무도 그 선수가 있는지 몰랐어. 그럼에도 그 선수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지. 둘이서 '응? 누구야?'하고 생각했지만, 뭔가 가여워서 쭈뼛쭈뼛하며 다가가니 엄청나게 기뻐해 줬고 "프로레슬링을 좋아해줘서 고마워!"라며 은근히 굵은 손으로 힘차게 악수해 준 것이 기억나.

그 시절엔 어려서 신일본이 위험하다는 건 전혀 몰랐지. 그때 그 선수였던 타나하시 히로시는 태양의 에이스로 불리게 되었지만, 그 시절에 좀 어색한 미소의 타나하시와 찍은 사진은 지금도 내 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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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ch 게시판 토론글 '암흑 시절 이야기는 듣기만 한다면 진짜 재밌군' (공국진 역)


타나하시는 이윽고 그 당시까지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좀 먹고 있던 이노키즘, 나아가 신일본의 정신이라고 여겨지던 스트롱 스타일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자 가장 큰 역경이라고 파악하고 그와 맞서기로 결정했다.[29] 그 일환으로 타나하시가 행한 일이 바로 세타가야구 노게에 위치한 신일본 연습장에 걸려 있던 안토니오 이노키의 사진을 떼어버린 것이다.[30]

그때까지는 횡령과[31] 이노키즘에 따른 대삽질에 의해 이미 이노키와 거의 의절했음에도 단체의 창립자이자 역대 최고의 스타였기 때문에 아무도 나서는 이 없이 쉬쉬했으나, 사진을 떼어 버리고 과거에서 탈출하자는 타나하시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몇몇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노키와 같은 신일본 창립 멤버인 범접할 수 없는 최고참 '호랑이 헌터' 코바야시 쿠니아키[32]가 적극 찬성하며 마침내 코바야시가 이노키의 사진을 떼어버렸다. 별거 아닌 것으로 유난을 떨었다 할 수도 있지만, 현지에서는 이 사건을 과거의 이노키즘에 찌들은 신일본과의 작별의 상징이자 방향성의 확실한 변경의 증거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도산 선생이 남기고 이노키 씨가 계승한 '투혼'이라는 유전자를 계승하고 있냐는 질문에, 저는 '계승하지 않는다'라고 답합니다. 이노키 씨의 탈단 후에도 노게 (도쿄도 세타가야구)에 있는 신일본 프로레슬링 도장엔 이노키 씨의 사진이 계속 걸려있었지만 슬슬 떼어내도 좋지 않을까라고 말해서 떼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전 투혼을 버린 남자입니다.

인터뷰 " '타나하시 히로시는 역도산과 이노키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中 공국진 역


또한 스트롱 스타일에 치중하던 전통적인 팬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타나하시는 여성, 어린이 등으로 보다 관객층을 넓히기 위해 불철주야로 노력했으며, 몇몇 보도에 의하면 하루에 2시간 씩만 자면서 일본 지방 곳곳으로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홍보하기 위해 뛰었다고 알려져 있다. 2006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유크스에 인수된 이후로도 판매량은 눈에 띄게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타나하시의 노력은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조금씩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매 흥행이 끝날 때마다 벌어지는 에어 기타 퍼포먼스와 팬서비스, 그리고 "사랑합니다!" 프로모는 타나하시와 2000년대 후반 신일본의 상징이 되었다.[33]


뉴 재팬 컵 2018 나고야 대회에서의 프로모

이윽고 2012년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부시로드에 인수되고, TNA에 무사수행을 갔던 오카다 카즈치카가 레인메이커로 돌아와 타나하시와의 전설적인 대립을 시작함으로써 신일본 프로레슬링은 'V자 반등'을 맞이하였고, 타나하시의 노력은 결국 빛을 발하여 2010년대 후반 일본 프로레슬링이 부흥하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타나하시가 정말로 신일본을 구원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 조금 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게 해주세요. 프로레슬링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로레슬링을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회장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로써 G1은 끝납니다만 프로레슬링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테니 앞으로도 응원해주십시오!

2015년 8월 16일 G1 클라이맥스 25 우승 소감



4. 경기력[편집]


타나하시와 경기를 하면서 배웠다고 느낀게 있습니다. 제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도 모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 말이죠. 간혹 제가 기술을 걸던가 걸리던가 해서 관중을 접하지 못하고 그 반응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데 한번은 제가 카프 킬러를 건 상태에서 "음, 이거 좀 너무 오래 끄는데?"라고 생각해서 봤더니

세상에, 앞 줄에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더군요.

타나하시는 그걸 본거죠.[34]

AJ 스타일스 인터뷰


"태양의 천재아(太陽の天才児)"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입단 시험도 두 번이나 낙방했을 정도로 커리어 초기에는 보디빌딩으로 다져진 역삼각형의 예쁜 몸과 외모를 제외하고는 좋게 봐 줄 요소가 없다시피했던 선수. 특별할 것 없는 신체 능력, 야유를 받는 경기력, 심지어 달변조차 아니었던지라 프로모 능력도 부족했다.

하지만 십년여의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과, 자신만의 경기 스타일과 링 싸이콜로지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 끝에 자타가 공인하는 경기력을 갖추는 데 성공하여 한 단체의 에이스이자 무적 선역 기믹으로서의 카리스마를 성공적으로 갖추는 데 이르렀다. 바꿔 말하자면 '태양의 천재아, 100년에 한 명 나오는 일재'라 불리며 '불세출의 천재' 무토 케이지의 천재 이미지의 계승자였던 타나하시는 오히려 남들에 비해 나은 게 단 하나도 없을 정도로 상당히 모자랐던 타고난 재능을 커버하기 위해 그야말로 미친듯이 노력한 '노력의 천재'였던 것이다.

상세한 경기 운영 스타일은 신인 시절 후지나미 타츠미무토 케이지를 직접 사사한 경험을 바탕으로, 무적 선역 기믹임에도 불구하고 '드래곤 살법'을 필두로 상대의 다리를 집요하게 공략하는 이른바 '다리 지옥' 스타일을 구사하는 그 둘의 경기 스타일 계보를 아주 착실히 계승한 후 거기에 상대와의 경기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서 먼저 반칙을 하는 것 외에는[35] 물불을 안 가리는 약간의 언더독적 면모를 추가한 스타일이다.[36]

어찌 보면 무적 선역 에이스의 운영이 전혀 아니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181cm이라는 타나하시의 타고난 신장이 무토[37]나 당대 최강의 체격과는 거리가 조금 있었던 스승 후지나미보다조차도 확실히 부족한 것이 보일 정도로 신일본이나 일본 내 타 단체의 역대 에이스들에 비해 웬만한 헤비급 상대를 압도할 수준이 못 되는 데다가, 비록 본인의 꾸준한 단련으로 힘이 문제가 되었던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WWE존 시나같이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의 사이즈 대비 극최상급의 근력을 지닌 것도 아닌지라 자신보다 더 신장이 크거나 확연히 체격차가 나는 난적을 상대로 이런 수단까지 쓸 만큼 에이스라는 명예를 걸고 정말로 처절하리만치 절실하게 승리를 갈구하는 모습에 오히려 설득력이 더해져 이러한 경기 운영 방식이 팬들과 평론가들에게 받아들여졌으며, 이 절실함을 베이스로 한 링 싸이콜로지는 오카다 카즈치카와의 '에이스를 둔 투쟁', 나카무라 신스케와의 '영원한 라이벌 대결' 등에서 무르익으면서 타나하시 자신과 상대가 갈고닦은 훌륭한 실력과 시너지를 이뤄 희대의 명경기들을 양산해냈고,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진정한 에이스'로 받아들여지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절실함을 베이스로 한 링 싸이콜로지와 선역임에도 악역스러운 경기 운영을 가져가는 특성은 그의 캐릭터에 있어 입체감을 부여해주기도 한다. 저 서쪽의 어느 최강자와는 다르게 상대방에 따라 자신의 롤을 유도리 있게 악역으로 가져갈 수 있단 것인데, 실제로 이것이 십분 발휘된 예로 14년도 INVASION ATTACK에서 가진 나카무라와의 IC 타이틀 경기와, 15년 G1 3일째 흥행에서 가진 텐잔 히로요시와의 경기가 있다. 전자는 같은 라이벌이자 회사의 간판, 그리고 사실상 선역이었던 나카무라의 챔피언 재탈환을 더 띄워주기 위해 역시 간판이고 선역인 타나하시가 실로 악독하게 다리를 공격해서 관중의 야유와 나카무라에 대한 감정 이입을 이끌어냈으며, 텐잔의 고향 교토에서 열린 후자 흥행 역시 선역이자 고참인 텐잔을 띄워주기 위해 악독하게 다리를 공격해서 관중의 야유와 반사적인 텐잔으로의 환호를 끌어냈다.[38][39][40]

이렇게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경기력과 해가 가면 갈수록 극상으로 무르익고 있는 경기 운영, 입체감 있는 캐릭터를 바탕으로 한 링 싸이콜로지가 합쳐진 결과 2010년대 후반대에는 십수년간 무릎을 혹사시켜온 결과 경기가 끝난 후에는 걷는 것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무릎 상태가 심각해지며 프로레슬러로서 치명적인 운동 능력의 급감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 서술한 요소들을 바탕으로 여전히 명경기를 선보이고 있다.


4.1. 주요 기술[편집]


해당 항목 참조.

GIF 파일이 많으므로 모바일 사용시 데이터 주의.


5. 여담[편집]


  • 타나하시가 태어났을 때 타나하시의 아버지는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히데요시"를 거꾸로 해서 "요시히데(吉秀)"라고 이름붙이려고 했으나, 부인의 격렬한 반대로 "히로시"라는 이름을 붙였다. 본래 '弘' 한 글자 만으로도 히로시라 읽을 수 있지만, 아버지가 안토니오 이노키의 팬이었던지라 이노키의 본명인 "이노키 칸지(猪木 寛)"의 마지막 글자를 이름에 붙여 지금의 이름(弘至)이 되었다.[41]

파일:고교생타나하시.jpg

  • 고향인 기후현 바로 아래에 있는 아이치현나고야시가 연고지인 주니치 드래곤즈의 골수 팬. 사실 골수 팬인 수준을 넘어서서 고3 여름에 재능 부족[42]으로 야구선수를 그만둘 때 까지 아예 꿈 자체가 주니치 드래곤즈에 선수로 입단하는 것이였다.

  • 야구를 그만둔 이후 하루에 20시간을 공부하는 미친 짓을 벌인 끝에 반년만에 관서 최상급의 명문 대학인 리츠메이칸 대학법학부에 심지어 특기 전형도 없이 성적으로 입학하는 믿을 수 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는데, 입학 후 동아리들의 신입생 권유 때 링을 펼쳐놓고 퍼포먼스를 하고 있던 프로레슬링 동아리 선배들에게 반해서 당시 65kg의 말라깽이였음에도 자기 소개때 "졸업을 하면 프로레슬러로 데뷔를 할것"이라 말하는 패기를 보였다(...)

  • 리츠메이칸대학 프로레슬링 동아리(RWF) 출신으로, 입문 당시 신일본 현장 감독이었던 초슈 리키가 학생 프로레슬링(프로레슬링 동아리)을 싫어한다라고 공언했기 때문에 학생 프로레슬링 경험자임을 밝히지 않고 있다가 입문 7년 후인 2006년 4월에 도쿄 스포츠 전문지 취재에서 학생 프로레슬링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레이저라몬 HG와 대담했을 때[43] 처음으로 자신이 학생 프로레슬링 경험자였음을 밝혔다.[44]

  • 최고의 자리에서 십여년을 있었음에도 한결같이 팬 퍼스트를 지향하는 일본 프로레슬링계 전체를 대표하는 팬 친화적 선수인지라 팬서비스가 매우 투철하며 퍼포먼스도 다양하다. 입장할 때는 항상 될 수 있는 한 많은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들어오며, 메인 이벤트 경기에서 승리하면 몇 분이고 에어 기타를 선보인다. 퇴장할 때도 예외는 아니라 타나하시의 굿즈인 수건을 들고 있으면 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돌려주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팬인 어린 아이가 있다면 들어올려주기도 한다.[45] 이러한 타나하시의 투철한 팬 서비스가 하나하나 쌓인 결과 그들이 모두 신일본의 확실한 팬으로 자리잡아 신일본이 일본 내 탑 단체를 탈환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자타가 공인하는 가면라이더 시리즈 덕후. 가면라이더 카부토부터 보기 시작했으며, 가장 좋아하는 가면라이더는 가면라이더 W이라고 한다. 아메토크의 가면라이더 게닌 특집에서는 패널들이 전부 게닌인 가운데 유일하게 레슬러로써 참가해 뜨거운 덕후토크를 펼치기도 했다.

  • 상술된 가면라이더 게닌에서 타나하시가 "가면라이더 쿠우가 주역의 오퍼가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거절한 적이 있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는데, 가면라이더 쿠우가의 프로듀서인 타카데라 시게노리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서 해명한 바로는 사실과는 살짝 달랐다. 본래 토에이 측에서는 수신 선더 라이거, 타이거 마스크와 같이 '작품과 연동해서 실제 링에서 활약하는 레슬러 쿠우가'라는 기획이 진행중이었고, 그 후보 중 한명이 타나하시였던 것. 하지만 이 기획은 신일본 측의 판단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 그의 가면라이더 사랑은 그의 캐릭터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무토 케이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서 만든 그의 첫 별명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일재'는 가면라이더 키바의 주역의 대사에서 따온 것이며, 상술된 에어기타 퍼포먼스도 가면라이더 히비키에서 토도로키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 즉흥으로 연주한 퍼포먼스를 본따 만든 것. 심지어 그의 상징인 특유의 손 포즈, 즉 '일재 포즈'도 가면라이더 카부토에 대한 오마주라고 공언한 바 있다.[46]

  • 타나하시 히로시/경력 문서에 서술되어있듯 배우 하라 히토미와 교제 도중 양다리를 걸친 후 이별 문제로 칼에 찔리는 중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그 때 새로 생긴 여친의 용서와 극진한 간호 끝에 결혼까지 골인하여 현재도 문제 없이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다. 슬하에 딸 타나하시 코하루(棚橋呼春, 2003년생)와 아들 타나하시 시류(2006년생으로 추정)의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딸 코하루는 주니어 모델로 활동하다 극장판 가면라이더 빌드 Be The One에 출연하며 부녀가 모두 가면라이더 극장판에 출연하였다.

  • 공중기를 많이 쓰는 선수들이 무릎이 안 좋은 경우가 많은데, 체형보다 과하게 벌크업한 몸으로 십수년간 전력으로 하이 플라이 플로우를 써온 타나하시도 예외는 아니여서 2019년 레슬킹덤 13에서 케니 오메가와의 경기가 끝나고 에이 기타 도중 제자리 점프를 하다 주저앉은 적조차 있을 정도로 무릎이 절망적으로 망가지고 말았다. 스승인 무토 케이지조차 타나하시보고 무릎 괜찮냐고 걱정을 해서 자기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가 고민하는 멘트를 한 적도 있다.[47]

  • 다이너마이트 키드숀 마이클스, 커트 앵글을 레슬러로서 롤 모델로 삼는다고 책에서 밝혔다. 신인 시절 자신의 포부를 '일본의 다이너마이트 키드가 되는 것' 이라고 말했는가 하면[48], 숀 마이클스의 몸을 사리지 않는 경기 방식과 명경기 제조기로서의 능력을 본받고 싶어했고, 커트 앵글과 경기를 가졌을 때를 커리어 사상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커트 앵글이 경기 전 인터뷰에서 '타나하시는 일본의 숀 마이클스다'라고 말했을 때는 죽을 만큼 기뻤다고 말했다.

  • 잊을 수 없는 일본인 레슬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항상 '미스터 센톤' 히로 사이토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프로레슬링 업계에 있어서 위험한 기술을 쓰지 않고 항상 해오던 무브로 관객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히로는 특기인 센톤만 선보여도 관중을 한번에 열광시키기 때문이라고.

  •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미국 진출 방식에 쓴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미국의 팬들은 신일본다운 것을 원하지 미국화된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다른 국가에 흥행을 할 때도 원판 그대로 제공하는게 더 좋다는 예시로 자신이 2002년에 WWE의 일본 흥행을 구경갔을 때를 얘기했는데, 일본인 통역가가 아나운서가 얘기하는 것을 일일이 통역하자 관객들이 야유를 했다는 것. 타나하시는 이를 관중들이 "우리는 진퉁 미국식 레슬링을 보고싶다!" 는 메세지를 보내는 것으로 여겼으며, 미국 팬들도 똑같이 미국화된 신일본이 아니라 진짜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보고 싶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 프로레슬링 평론가 데이브 멜처에게 사랑받는 대표적인 레슬러이다. 외국 커뮤니티도 인정하는 멜처의 타나하시 사랑 신일본이 10년대에 이르러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고 일본 프로레슬링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한 뒤, 타나하시가 신일본의 중심축으로써 꾸준히 좋은 모습과 절정의 경기력을 보여주는 데서 높은 평가를 받는 듯 한데, 문제는 빠가 까를 만든다고 멜처의 경기 평점이 신일본 경기들, 특히 타나하시의 경기에 약간 후한 경향이 있어서[49][50] 멜처 별점의 공신력이 흔들리는 수준까지 이르고 있다. 심지어 멜처의 아이스 버킷 챌린지 영상에서 멜쳐에게 지목당하며 그 설득력을 더했다(...) 프로레슬링 갤러리에서는 이런 평가에 이런 게시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본격 프로레슬링계의 척 노리스 이쯤되면 진짜 멜처가 타나하시 덕후인듯

  • 자칫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아닌 하시모토 신야의 제로원에서 활동할 뻔했다. 타나하시가 아직 생초짜이던 시절 신일본에서 버림받은 하시모토 신야가 제로원을 만들었는데, 하시모토가 타나하시에게 자신이 만든 단체 한 번 보러 오라고 말했지만 타나하시가 마침 바쁜 일이 있어서 이를 거절했다. 이후 선배들한테 들어보니 당시 신일본 내에서 아무 입지도 없던 타나하시에게 단체를 소개시켜주는 척 하면서 대뜸 계약서 들이밀어 서명하게 해 빼가려는 수작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본인이 거절했던 그 자리가 많은 취재진이 와서 제로원을 소개하는 자리였기에 자칫했으면 제로원파로 오해받을 수도 있었다.

  • 애견인으로, '하나'라는 이름의 토이 푸들을 키우고 있다. 타나하시의 인스타 아침 게시글은 50%의 확률로 자신 혹은 아들이 찍은 하나 사진으로 시작한다.

  • 소문난 규동 애호가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에는 '요시노야의 간판을 보면 무조건 안에 들어가 규동 나미모리(보통 사이즈)를 먹는다'라는 규칙을 스스로 정했는데, 집 가는 길에 요시노야가 세 점포 있어서 항상 규동 세그릇을 먹었다고 한다. 신일본 입단 이후에는 신일본의 오랜 스폰서가 마침 요시노야인지라 콜라보 메뉴 등으로 자주 얼굴을 비추게 되었다.

  • 좋아하는 말은 "치팅데이는 내일까지".

  • 2011년 9월에 나카무라 신스케와의 IWGP 헤비급 타이틀전 도중 앞니 하나를 날려먹었고, 2012년 일명 '레인메이커 쇼크' 경기 도중 하나를 더 날려먹었으며 약 10년 후인 2022년 사과를 먹다가 하나가 더 부러졌다. 임시 치아를 박고 치료 도중 2023년 2월 호텔에서 프로틴 바를 먹다가 임시 앞니 세개가 그대로 빠졌으며, 3월 말 이번에는 사과를 먹다가 한번 더 빠지는 이 수난시대를 겪었다. 본인도 타하(이빨)나시(없음)라며 자조하거나 진작에 동일부분 앞니 세 개를 날려먹고 심지어 이걸 자신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마크 브리스코와 사진을 찍는 등 유쾌한 모습을 보여줬다.


5.1. 각종 매체에서의 출연과 콜라보레이션[편집]







  • 2018년 9월 개봉한 영화 「パパはわるものチャンピオン」(아빠는 악당 챔피언)[51]의 주연으로 출연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동시에 악역 자버 가면 프로레슬러 '고키부리맨(바퀴벌레맨)' 으로 활동하며 아들에겐 정체를 숨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젠 진짜 일본의 존 시나가 되어가고 있다 이 영화는 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작으로 선정되었고[52], 미디어캐슬에서 수입하여 2021년에 '시네마캐슬' 기획전으로 상영되었다.


  • 철권 7 FR의 캐릭터 라스 알렉산더슨과 콜라보레이션해서 복장을 맞추면 2라운드 승리 or 패배시 입장곡인 LOVE & ENERGY가 나오게 바뀌었고 레이지 아츠도 일재 포즈 이후 슬링블레이드로 바뀐다.

  • 용과 같이 6: 생명의 시의 서브 스토리인 클랜 크리에이터에서 육광회라는 주요 빌런으로 등장한다. 이어서 클랜 크리에이터를 재탕한 용과 같이 극2에 다수의 일본 프로레슬링 선수들이 출연하는데, 신 클랜 크리에이터에 등장하는 마지마 건설의 직원으로 등장하는데, 오로지 직원 공고 가챠로만 소환이 가능하며 SR급 공방일체형 캐릭터로 등장한다. 프로필 이미지는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일재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검은 양복 모습.



6. 둘러보기[편집]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2013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1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신일본 프로레슬링#s-12|{{{#f8d010 그랜드슬램 달성자}}}]]}}}
제이 화이트
(Jay White)
타나하시 히로시
(Tanahashi Hiroshi)
총 2명
같이 보기: 트리플 크라운 (하위 등급) / 후보 선수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역대 뉴 재팬 컵 우승자
창설

2005

2006
-

타나하시 히로시

자이언트 버나드
2007

2008

2009, 2010
나가타 유지

타나하시 히로시

고토 히로오키

파일:신일본 프로레슬링 로고.svg 역대 G1 클라이맥스 우승자
2006

2007

2008
텐잔 히로요시

타나하시 히로시

고토 히로오키
2014

2015

2016
오카다 카즈치카

타나하시 히로시

케니 오메가
2017

2018

2019
나이토 테츠야

타나하시 히로시

이부시 코타

파일:Wrestle_Kingdom_Logo.jpg
역대 레슬킹덤 메인 이벤트[★][53]
2008.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나카무라 신스케 vs 타나하시 히로시(C)
2009.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무토 케이지(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1.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코지마 사토시(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2.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스즈키 미노루 vs 타나하시 히로시(C)
2013.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오카다 카즈치카 vs 타나하시 히로시(C)
2014.1.4
IWGP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십
나카무라 신스케(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5.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오카다 카즈치카 vs 타나하시 히로시(C)
2016.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오카다 카즈치카(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9.1.4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케니 오메가(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22.1.8
태그팀 매치
무토 케이지 & 키요미야 카이토 vs 오카다 카즈치카(C) & 타나하시 히로시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의 레슬러
존 시나
(2010)


타나하시 히로시
(2011 ~ 2013)


나카무라 신스케
(2014)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 가장 탁월한 레슬러
데이비 리처드
(2011)


타나하시 히로시
(2012, 2013)


AJ 스타일스
(2014)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의 대립
존 시나 vs CM 펑크
(2011)


타나하시 히로시 vs 오카다 카즈치카
(2012, 2013)


존 존스 vs 다니엘 코미어
(2014)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가장 카리스마 있는 선수
더 락
(2012)


타나하시 히로시
(2013)


나카무라 신스케
(2014)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디케이드 어워드 선정 10년간의 최고의 레슬러
커트 앵글
(2010)


타나하시 히로시
(2020)


-
(2030)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디케이드 어워드 선정 10년간의 가장 카리스마 있는 선수
존 시나
(2010)


타나하시 히로시
(2020)


-
(2030)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올해의 경기 [★]
2012년
10월 8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킹 오브 프로레슬링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스즈키 미노루 vs _타나하시 히로시_(C)
*****
2013년
4월 7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인베이전 어택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_오카다 카즈치카_ vs 타나하시 히로시(C)
*****
2016년
1월 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킹덤 X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_오카다 카즈치카_(C) vs 타나하시 히로시
*****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5성 경기 [★]
2012년
10월 8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킹 오브 프로레슬링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스즈키 미노루 vs _타나하시 히로시_(C)
2013년
4월 7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인베이전 어택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_오카다 카즈치카_ vs 타나하시 히로시(C)
2013년
10월 1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킹 오브 프로레슬링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_오카다 카즈치카_(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4년
9월 21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디스트럭션 in 고베
싱글 매치
시바타 카츠요리 vs _타나하시 히로시_
2015년
8월 16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G1 클라이맥스 25
결승전
나카무라 신스케 vs _타나하시 히로시_
2016년
1월 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킹덤 X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_오카다 카즈치카_(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7년
8월 11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G1 클라이맥스 27
A조 매치
_나이토 테츠야_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8년
8월 10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G1 클라이맥스 28
A조 매치[54]
오카다 카즈치카 vs 타나하시 히로시
2018년
9월 23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디스트럭션 in 고베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도전 권리증 쟁탈전
오카다 카즈치카 vs _타나하시 히로시_
2018년
12월 15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로드 투 도쿄 돔
태그팀 매치
_Golden☆Lovers_ (_이부시 코타_ & _케니 오메가_(O)) vs 윌 오스프레이(X) & 타나하시 히로시
2021년
1월 30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더 뉴 비기닝 in 나고야
NEVER 오픈웨이트 챔피언십
타카기 신고(C) vs _타나하시 히로시_
2021년
7월 25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 그랜드 슬램 in 도쿄 돔
IWGP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_타카기 신고_(C) vs 타나하시 히로시
2023년
6월 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도미니언 6.4 in 오사카-조 홀
NEVER 오픈웨이트 6인 태그팀 챔피언십
블랙풀 컴뱃 클럽 (존 목슬리 & 클라우디오 카스타뇰리) & 우미노 쇼타(X)
vs
_CHAOS_(C) (_오카다 카즈치카_(O) & _이시이 토모히로_) & _타나하시 히로시_(C)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5.5성 경기 [★]
2018년
5월 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링 돈타쿠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_오카다 카즈치카_(C) vs 타나하시 히로시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5.75성 경기 [★]
2018년
8월 12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G1 클라이맥스 28
결승전
이부시 코타 vs _타나하시 히로시_
2019년
1월 4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레슬킹덤 13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케니 오메가(C) vs _타나하시 히로시_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MVP (최우수 선수상)
무토 케이지
(2008)

타나하시 히로시
(2009)


스기우라 타카시
(2010)
스기우라 타카시
(2010)

타나하시 히로시
(2011)


오카다 카즈치카
(2012, 2013)
오카다 카즈치카
(2012, 2013)

타나하시 히로시
(2014)


오카다 카즈치카
(2015)
나이토 테츠야
(2016, 2017)

타나하시 히로시
(2018)


오카다 카즈치카
(2019)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감투상
쵸노 마사히로
(2002)

타나하시 히로시
(2003)


텐잔 히로요시
(2004)
나카지마 카츠히코
(2005)

타나하시 히로시
(2006)


모리시마 타케시
(2007)

파일:프로레스대상 로고.svg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연간 최고 시합상 (베스트 바웃) [★]
2012년
6월 16일
신일본 프로레슬링
도미니언 6.16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오카다 카즈치카(C) vs _타나하시 히로시_

[1] 뺨 때리기. 후지나미 타츠미식으로 남들처럼 뺨을 때린다기보다 팔을 쭉 뻗어 턱을 때린다는 느낌으로 쓰는 게 특징이며 스즈키 미노루처럼 한 경기에도 수십번 씩 쓰지 않고 위기 순간에 일발역전기로 쓰는 경우가 많다. 워낙 팔이 두꺼운데다 2013년 G1에서 고토 히로오키의 턱을 후렸다가 실제로 고토가 턱 골절상을 당하며 남은 G1을 모두 포기하게 된 적도 있는만큼 설득력은 충분하다.[2] 상대를 향해 달려가다 점프하여 상대에게 부딫히는 순간 회전을 준다.[3] 2002년 향후 타나하시의 경기 스타일을 책임지게 된 무토 케이지식 다리 지옥 운영을 익히면서 사용하기 시작한 타나하시의 다리 공략기 그 첫 번째. 강적과의 대결에선 이 기술이 경기의 스타트를 끊곤 한다.[4] 2002년 '드래곤 살법'의 창시자 후지나미 타츠미에게 직접 사사한 드래곤 스크류로, 타나하시의 다리 공략기 그 두 번째이자 완성기. 주로 저공 드롭킥과 이 기술로 다리를 집요하게 공략하여 움직임이 확연히 부자연스러워진 상대를 보디 슬램 혹은 슬링 블레이드로 눕혀두고 하이 플라이 플로우를 먹이는 것이 타나하시의 승리 방정식이며, 이 방정식의 주축을 담당하는 타나하시 경기 운영의 정수라고 말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상대 한쪽 다리를 로프에 걸쳐놓고 시전하기도 하며, 심지어 쓰러져있는 상대에게도 무자비하게 사용하기도 한다.[5] 타나하시가 무토 케이지의 심부름꾼 시절 무토 케이지의 플래싱 엘보를 보고 생각해낸 기술. 제자리에서 몸이 지면이랑 수평이 되게 점프한 다음 팔을 휘적이며 떨어지는 기술로, 타나하시의 기술 중에 가장 꼴사나운 기술로 꼽히지만 타나하시의 뚝심으로 십수년을 써오고 있다.[6] 주로 경기 초중반에 상대를 눕혀두고 미들 로프에서 쓰는 기술로, 처음에 양 팔을 하늘 위로 뻗고 자신을 어필하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 낙법을 등으로 치기 때문에 타나하시의 공중기 중 가장 무릎의 부담이 적은 기술 중 하나라 무릎이 확연히 안 좋아진 후에는 어필 기술로 더욱 애용하게 되었다.[7] 스크류 넥브레이커 드롭. 브레인 버스터 시작 자세에서 상대 오른팔을 자신에게 얹은 후 잡고 그대로 몸을 왼쪽으로 뒤틀면서 등으로 떨어져 상대도 같이 비틀리면서 땅에 쳐박히게 하는 기술. 기술 사용 준비와 사용이 빠르고 무릎의 부담이 비교적 적은데다 자신보다 중량급인 상대에게도 제법 쉽게 시전할 수 있는 만능 기술이라 무릎이 안 좋아진 이후 트웰브 식스가 담당하던 스팟까지 거의 대신하게 되었다. 상대를 확실히 제압하기 위해 삼연발 식으로도 사용. 이름의 계기는, 이 기술을 사용하고선 반드시 벌떡 일어나 포효(샤우트)를 하는 것과, 비틀즈가 커버한 것으로 유명한 1960년대 인기곡 'Twist & Shout'.[8] 빅토리 롤 핀. 주로 상대와 체격차이가 상당한 절망적일 때 승리를 노리기 위해 개발한 롤업기. 이름을 붙이기 전에도 자신과 15cm 차이가 나는 전성기의 타카야마 요시히로에게 이걸로 승리를 거둔 적이 있으며, G1 클라이맥스 29에서도 2m에 달하는 랜스 아처를 상대로 내내 수세에 몰려 있다가 이 롤업기 한 번으로 승리를 거뒀다.[9] 선회식 플라잉 넥브레이커 드롭. 타나하시의 오리지널 무브로, 원래 상대 팔을 잡는 방식으로 드래곤 게이트의 '스피드 스타' 요시노 마사토가 먼저 사용했지만, 목을 감는 방식은 타나하시가 최초. 2005~ 2006년 까지는 피니셔로 밀어붙였으나 피니셔로 설득력이 있는 기술은 아니었던데다 당시 타나하시의 경기력 평가가 최악에 가까웠던 점까지 맞물려 어마어마한 악평에 시달리며 '암흑기의 피니셔'로 이미지가 굳혀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하이 플라이 플로우로 갈아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 자체를 버리지 않고 명실상부 본인을 대표하는 시그니쳐 무브로 정착시킨 타나하시의 고래심줄급 뚝심을 엿볼 수 있는 기술. 회전 자체는 타나하시 본인의 무릎 문제도 있어 이후 생겨난 핀 밸러 등 다른 사용자들에 비해 느리고 수수하지만, 비교적 경량급인 다른 사용자들과 달리 헤비급인데다 경이로운 근육덩이의 몸을 유지하고 있는 타나하시가 두꺼운 팔로 상대를 잡고 전력으로 체중을 실어 링에 쳐박기 때문에 위력만큼은 타 사용자들과 궤를 달리한다. 이름은 태그 파트너 시절의 나카무라 신스케가 동명의 미국 영화에서 따와서 붙였다.[10] 타나하시의 전매 특허. 경기 중간에 상대를 도발할 때도 쓰지만, 백미는 메인 이벤트에서 난적을 상대로 승리하고 나서이며, 링 위에서 몇 분이고 에어 기타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이 때 단순히 에어 기타 모션만 취하는 게 아니라 가끔 던져 버렸다가 관객에게 다시 받아서 치는 등 유독 투철한 팬 서비스로 이름높은 타나하시가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단편이자 타나하시와 관객 간의 끈끈한 유대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11] 역시나 후지나미 타츠미에게 전수받은 드래곤 살법 그 최종기. 슬링 블레이드를 피니셔로 쓰기 전인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피니셔 무브로 썼었다. 피니셔에서 내려온 이후로도 올드 스쿨에 가까운 경기운영을 보여주는 타나하시에게 슬링 블레이드와 함께 십수년간 빅 스팟을 제공해준 타나하시의 빅 스팟 쌍두마차.[12] 타나하시 다리지옥 운영의 최종기. 이 기술로 이미 망가진 상대의 다리와 허리를 동시에 공략하는 것이 타나하시의 필승 전법 중 하나지만, 중요도에 비해 정작 이걸로 탭아웃을 얻은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시전자에게는 거의 무리가 가지 않는 기술이기도 하고 다리 지옥의 최종기라는 명분도 있기 때문에 무릎 상황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타나하시에게 하이 플라이 플로우의 대안으로 팬들이 가장 쓰기를 원하는 피니셔이다. 실제로 2019년 2월 경부터 타나하시는 하이 플라이 플로우를 봉인하고 이 기술로 승리를 따 냈었다. 하이 플라이 플로우 봉인 해제 이후에는 전초전 등에서 피니셔로 사용한다.[13] 타나하시의 둘도 없는 상징. 원래 사용은 하고 있었으나 2006년 6월경부터 지금의 이름을 붙였다. 다른 프로그 스플래시와의 차이점은 양 팔을 위로 올리고 양 손을 교차한 채로 내리 찍는다는 것. 레슬킹덤에서 오카다 카즈치카, G1 클라이맥스 결승에서 평생의 라이벌 나카무라 신스케를 이 기술로 잡아내는 등 타나하시의 강적을 숱하게 쓰러트려온 타나하시 최강의 창. 아무리 강력한 상대도 이거 두 방만 먹이면 잡기 때문에 일본 현지에서나 한국에서나 (죽창플로우(...) 라는 이명을 붙여버렸다.) 설득력 논란도 간혹 있는 기술이기도 하다. 이와 별개로 타나하시의 무릎에 꾸준히 심각한 데미지를 쌓아 제자리 점프조차 힘들만큼 참담한 무릎 상태를 만든 장본인인데, 특히 타나하시는 크로스 바디식과 심지어 큰 경기에선 장외 크로스바디 식으로도 이 기술을 쓰기 때문에 남은 얼마 안 되는 선수 생명을 위해서라도 그만 쓰길 바라는 팬들의 걱정으로 2019년 2월 경 봉인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마지막 불꽃을 전부 태우려는지 G1시즌에 맞춰 봉인을 풀어버렸다.[14] 입단 후 즉시 기대주가 된 타나하시에게 신일본이 노골적으로 '천재' 무토 케이지를 벤치마킹 시킬 때의 별명. 무토가 이노키즘에 질려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한 후인 신 투혼삼총사 시절에도 계속 사용하다가 2009년 경 자신이 좋아하던 가면라이더를 캐릭터에 도입하며 '무토의 카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타나하시에게 있어선 자신과 신일본의 암흑기를 상징하던 별명.[15] 어찌 보면 타나하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별명. 메인 이벤터를 오카다 카즈치카 등에게 넘겨준 지금도 밑바닥 시궁창까지 갔던 신일본이라는 회사를 거의 혼자의 힘으로 세계 3위로 만든 그의 기적같은 공로가 사라질 일은 절대 없기 때문에 아직도 역대 신일본 최고의 에이스를 단 한 명만 꼽으라 하면 타나하시를 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 상대와 공방 중에 "Go ACE!!"라는 챈트를 듣는 건 아직도 타나하시밖에 없다.[16] 해외 영미권 팬들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상당히 난해한 '100년에 한 번 나오는 일재'라는 별명 대신 쓰이는 영미권 해외 전용 별명.[17] 가면라이더 덕후인 타나하시가 2008년 방영된 가면라이더 키바쿠레나이 오토야의 대사 '백 년에 한 명 나오는 천재(100年に一度の天才)'를 응용한 별명. 이 별명을 쓸 때만 해도 타나하시는 천재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이 별명을 쓰면서부터 타나하시는 서서히 스승 무토 케이지의 카피에서 벗어나 끝없는 노력과 연습 끝에 이 별명에 걸맞는 진정한 에이스로 거듭나게 되었다.[18] 기울어가던 회사를 지탱해온 인기,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피니셔 한방 내지 두방에 무조건 상대에게 쓰리 카운트를 따내는 모습 등 타나하시와 존 시나와의 공통점이 너무나도 많아 존 시나의 국내 별명 '존나쎄'에서 따와 타나쎄란 별명이 붙었다.[19] 대학생 시절 타나하시가 교토의 빈티지 샵에 들렸다 거기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듣고 홀딱 반해서 점원에게 제목과 가수를 물어봤고, 자신이 신일본에서 데뷔하면 반드시 테마곡으로 쓸 것이라 생각했던 곡. 거짓말같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져서 신인을 벗어난 이후 이 곡을 테마곡으로 사용했으며 팬들에게도 초창기 타나하시의 상징같은 곡으로 여겨지고 있다.[20] 일본의 베테랑 록 뮤지션이자 시바타 카츠요리의 테마곡 Takeover를 작곡해 준 것으로 유명한 LOW IQ 01(로우 아이큐 이치)가 커리어 초창기에 속해있었던 것으로 유명한 밴드. 1994년에 결성되어 1999년에 해체되었다. 여담으로 전술한 일 이후 LOW IQ 01의 팬이었던 타나하시는 2005년 신일본을 탈단한 시바타가 LOW IQ 01 본인에게 테마곡을 받자 진심으로 질투했다고 전해진다(...)[21] 타나하시가 커리어의 절반을 넘게 사용했던 타나하시의 대표 테마곡. 이름 그대로 에너지가 넘쳐 흐르는 기타 리프들로 이루어진 곡이며, 신일본을 대표하는 명 테마곡이었다. 레슬킹덤 8에서는 메가데스의 前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의 연주와 함께 등장하기도 했다.[22] 2017년 1월 4일 레슬킹덤 XI에서 나이토 테츠야IWGP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십 매치를 치루기 직전 테마곡 변경을 발표한 후 변경된 곡. 곡 중간중간의 "고 에이스!"라는 챈트 유도 파트가 특징. 곡 자체 평가는 HIGH ENERGY보다는 못 하다. 여담으로 테마곡마저 바꿔가며 도전한 그 경기에서는 패배하고 나이토에게 "테마 바꾼 걸로 이길 수 있으면 난 매 시리즈마다 테마 바꿨다"라는 소리마저 들어먹고 말았다(...)[23] LOVE & ENERGY로 테마곡을 바꾼 이후 매년 입장곡에 조금씩 변동 사항이 있다가 2020년에는 아예 전주 부분이 통째로 바뀌었다.[24] 같은 날에 이노우에 와타루와, 같은 신 투혼삼총사의 시바타 카츠요리도 데뷔전을 치뤘다.[25] 초대 챔피언[26] 쉽게 말해서 프로레슬링은 강하므로 프로레슬러도 이종격투기나 종합격투기에 내보내자는 것. 물론 현실은 시궁창으로 종합격투기에 나간 신일본 프로레슬러들은 대부분 참담한 성적을 받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또, 이런 이노키즘으로 인해 정통파 프로레슬러보다는 종합격투기 대회에서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었던 선수를 푸시했는데 대표적으로 프로레슬러로서 실력은 자버급이었지만 종합격투기에서 1승을 따내서 IWGP 챔피언까지 지낸 야스다 타다오가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2000년대 초중반 코바시 켄타를 앞세워 프로레슬링의 끝판을 보여줬던 NOAH에 밀려 콩라인이 되는 치욕까지 맛봤다.[27] 공교롭게도 두 선수는 나이도 비슷하고 전성기와 쇠퇴기가 제법 겹치는 편이다. 사실 쇠퇴기라고 해도 아직까지 단체에서의 존재감은 남달라 메인이벤터를 유지할 수도 있었던 선수들이지만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잡질을 해주며 탑에서 내려온 것도 유사하다.[28] 당시 신일본의 고참들은 대학 프로레슬링 동아리 출신 선수들을 싫어했다고 한다. 타나하시 외의 대학 프로레슬링 동아리 출신 선수로는 마카베 토우기가 있는데, 마카베는 그 영향 때문에 신인 시절에 타 단체에서 숙명적으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외적 역할로 굴려지며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29] 우연찮게도 타나하시가 스트롱 스타일에 맞섰다면, 나카무라는 스트롱 스타일을 절충해서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었고, 나중에 신일본으로 복귀한 시바타는 스트롱 스타일을 아주 충실하게 계승했다.[30] 원래 타나하시 히로시는 무토 케이지의 제자이자 정신적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무토 케이지 역시 이노키즘과 스트롱 스타일에 질려서 신일본을 떠났을 정도였다. 즉, 무토 케이지와 타나하시 히로시는 이노키즘에 가려져 있던 정통 프로레슬링으로의 회귀를 주장했고 당시 상황에서 이 의견은 매우 지당했다.[31] 여기서 횡령한 돈은 안토니오 이노키의 정계 진출 자금으로 쓰였다.[32]영 라이온들의 관리자인 노게 도장 관리자이기도 하다. 호랑이 헌터라는 별명은 그가 신일본 역대 최강의 주니어였던 타이거 마스크 1세의 가장 유명한 라이벌 중 한 명이라서 붙은 것이다.[33] 이러한 팬 친화 노선으로 신일본 프로레슬링, 나아가 어쩌면 일본 프로레슬링계 전체가 침체기였던 2000년대를 견인해냈다는 점, 이것이 바로 타나하시가 신일본을 넘어 일본 프로레슬링계 전체의 에이스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34] 2015년 8월 14일 양국국기관에서 열린 G1 Climax 25 경기를 말한다. 신일본 월드 링크. 상대와의 링 싸이콜로지로 관중을 몰입 시키는 능력이 극에 달한 타나하시에 대한 AJ 스타일스의 증언.[35] 악역과의 대결에서 반칙이나 로우 블로같은 비겁한 수단을 먼저 당하면 선역임에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경우도 많다.[36] 이 방면에선 오히려 스승들보다 북미의 브렛 하트와 조금 더 공통점이 많다. 상대가 반칙을 계속하면 자신도 반칙으로 되갚아주기도 하고, 피지컬이 확실히 딸린지라 언더독적 운영을 선보이며 피니셔인 샤프슈터의 설득력을 높히기 위해 경기 상대에 따라 끈질기게 다리를 공격하는 다리 지옥을 보여주기도 했기 때문. 그래서 실제로도 포비든 도어를 앞둔 관계자들의 인터뷰에서 해설자 엑스칼리버는 그를 "일본의 브렛 하트" 라고 소개했다. # [37] 무토의 전성기 기준 체격인 188cm 110kg은 당대 일본인 헤비급 메인이벤터 중에서 그렇게 밀리는 편이 아니었다.[38] 만약 존 시나같은 선수가 그렇게 했다면 그동안 존 시나라는 선수가 상징처럼 지켜온 무적 패턴이 깨지기 때문에 위화감이 상당히 크겠지만 어찌보면 악역스럽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경기 방식으로 능청스레 싸워왔던 타나하시라서 가능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다.[39] 물론 이건 존 시나의 단점은 아니다. 애시당초 존 시나는 악역 소화 능력도 대단히 뛰어난 선수다. 다만 존 시나는 선역과 악역의 표현이 극과 극이라 선역일 때는 누구보다 선량한 청년이고 악역일 때는 누구보다도 싸가지없는 갱이 되지만 그 중간이 없고 타나하시는 악역 경험은 거의 없는 대신 선역이면서 경기 수행을 통해 악역에 가까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보여주는 것이다.[40] 사실 존 시나는 원래 연기력 하나는 매우 뛰어난 선수고 프로레슬링 전문가가 트위너로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니 타나하시가 보여준 중간의 모습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고 실제로 트위너 연기를 한 경험도 있다. 애시당초 2003~2005년 사이의 시나의 기믹은 말할 것도 없는 트위너로 원래 악역 갱이었던 그의 캐릭터에서 선역 전환만 한 상태였다.[41] 그렇게 안토니오 이노키로부터 이름의 한 글자를 받은 타나하시가 이노키즘을 타파하고 이노키의 사진을 떼어내는 등 단체에서 이노키의 망령을 지우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42] 최상위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진학 위주의 학교로 야구로는 평범한 학교였으며, 타나하시는 그 평범한 학교에서조차 에이스와는 거리가 한참 먼 좌익수 7번타자였다.[43] 학생 프로레슬링 시절 같은 대학 직속선배는 레이저라몬 HG의 콤비인 레이저라몬 RG였다. 레이저라몬 HG는 같은 교토시 내에 있는 도시샤대학 출신.[44] 학생 프로레슬링 시절 링네임은 메이 우시야마, 하메조를 거쳐서 타나·더・인서트로 뒤에 두 개는 확실한 섹드립 링네임(...)[45] 그외에도 비록 레슬킹덤 같은 큰 PPV 한정이긴 하지만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클리셰인 타다이마 오카에리를 하기도 한다.[46] 본인 왈, 카부토의 슈트 액터인 타카이와 세이지로부터 직접 전수받은 포즈로 절대로 무허가로 배낀 것이 아니라고.[47] 무토 케이지도 문설트를 수십년간 피니셔로 써온 결과 일상 생활 때는 휠체어를 타게 될 정도로 무릎이 안 좋아져서 상징과도 같던 문설트를 봉인한 상태다.[48] 다이너마이트 키드는 WWE에서 별로 활약하지 못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세계 최고의 테크니션 레슬러 중 한 명이며 다수의 프로레슬러가 그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키드의 전설적인 대립 상대가 바로 타이거 마스크 1세이다.[49] 대표적으로 시바타와의 경기가 있다. 분명 절대 나빴다고 할 수는 없는 경기이지만, 5성 경기라기엔 약간 과대평가된 게 아니냐는 매니아들의 평가가 적지 않다.[50] 재미있는건 멜처가 타나하시 빠돌이 소리듣기 전에는, 90년대 전일본과 2000년대 초반 NOAH, 2000년대 초중반 ROH의 왕도레슬링 경기들에 4.75 ~ 5성 별점을 몰아줘(당대 WWE를 비롯한 다른 단체들은 전일본과 NOAH에 비하면 멜처의 평점이 박했다. 특히 라이벌 단체인 신일본은 명확하게 비교될 정도다.) 왕도레슬링 덕후 소리를 들었다는 것. 뭐 타단체 평점에 상대적으로 인색했던 건 분명히 문제점이지만 이 시절 왕도레슬링은 그만큼 대박 경기들을 많이 뽑아냈던 시절이었긴 했다.[51] 실제 제목은 '아빠는 나쁜놈 챔피언' 정도의 의미로, 어린애가 쓴 거 같은 말투의 제목이다.[52] 여담으로 작중 챔피언인 '드래곤 조지' 역은 오카다 카즈치카가 맡았다. 그런데 더 재밌는건 원작의 드래곤 조지는 타나하시를 더 닮았다는 것. 그리고 바퀴벌레맨은 나카니시 마나부와 닮았다.[★] A B C D E F 밑줄이 승리자. 다자간 매치의 경우 이름 옆 (O)가 핀폴자, (X)가 피핀폴자.[53] 역대 최다 레슬 킹덤 메인 이벤터(10회)[54] 시간 초과 무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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