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마운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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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 충성파 민병대
3.2. 독립 지지파 민병대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80년 10월 7일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킹스 마운틴에서 영국 충성파 민병대와 독립 지지파 민병대가 맞붙은 전투. 영국에게 호의적인 남부 일대의 영국 충성파 민병대의 활동이 위축되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편집]


1780년 9월, 헨리 콘월리스 소장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벌어진 캠던 전투에서 호레이쇼 게이츠가 지휘하는 대륙군을 격파한 뒤 노스 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를 침공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때 패트릭 퍼거슨 소령은 영국군 주력군의 서쪽에 있는 전초기지를 관할하고 있었고, 그의 휘하 병력은 소규모 영국 라이플 부대와 영국 충성파 민병대를 거느렸다. 퍼거슨은 반란군으로 규정된 독립 지지파 민병대를 상대로 공개 총살형에 처하거나 감옥에 가두는 등 강경 조치를 취해 주민들 사이에 악명을 떨쳤다.

이에 사우스 캐롤라이나, 노스 캐롤라이나, 그리고 버지니아 일대에서 퍼거슨에 대항하기 위해 상당한 숫자의 독립 지지파 민병대가 모였다. 그들 중 다수는 라이플을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사냥꾼으로, 사격 솜씨가 훌륭했다. 퍼거슨은 상당한 적이 자신을 압박하자 일단 후퇴하면서 콘월리스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독립 지지파 민병대는 숲을 가로질러 가다가 퍼거슨의 민병대를 따라잡은 뒤 공격을 개시했다. 이리하여 미국 남부 일대의 영국 충성파 민병대와 독립 지지파 민병대 간의 맞대결이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영국 충성파 민병대[편집]


  • 지휘관: 패트릭 퍼거슨 소령
  • 병력: 약 1,100명

3.2. 독립 지지파 민병대[편집]


  • 지휘관: 아이작 셀비 대령, 윌리엄 캠벨 대령, 요제프 막도웰 대령, 존 세비어 대령, 제임스 윌리엄스 대령, 제임스 존스턴 대령, 프레드릭 함브라이트 대령, 벤자민 클리블랜드 대령, 요제프 윈스턴 대령
  • 병력: 약 900명

4. 전투 경과[편집]


1780년 10월 7일 오후 3시 경, 각지에서 몰려든 독립 지지파 민병대 900명이 킹스 마운틴에 도착한 뒤 적 숙영지를 향해 접근했다. 그들은 각각 100명에서 200명씩 8개의 분견대를 편성했다. 퍼거슨은 적들이 자신을 따라잡았다는 걸 알지 못하고 있었고, 때문에 딱히 수비를 강화하지 않았다. 이윽고 적 숙영지를 완전히 둘러싼 독립 지지파 민병대는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언덕을 올라가 바위와 나무 뒤에 숨어서 적을 향해 사격했다.

그제야 이변이 발생했다는 걸 알게 된 퍼거슨은 군대를 집결시킨 뒤 윌리엄 캠벨 대령과 존 세비어 대령이 이끄는 민병대를 향해 사격했고, 탄약이 떨어진 민병대는 언덕을 내려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캠벨은 탄약을 충전한 뒤 곧 병력을 집결시켜 언덕으로 올라가서 사격을 재개했고, 뒤이어 다른 민병대들도 개별적으로 언덕 위의 적을 향해 돌격했다. 이리하여 킹스 마운틴 언덕을 둘러싼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그 와중에 제임스 윌리엄스 대령이 전사했고 요제프 막도웰 대령은 부상당했다. 하지만 독립 지지파 민병대가 나무와 바위 뒤에 숨어서 움직였기 때문에, 영국 충성파 민병대는 그들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적에게 노출된 채 하나둘씩 사살되었다.

이윽고 아이작 셸비 대령, 존 세비어 대령, 윌리엄 캠벨 대령은 적 후방의 언덕 꼭대기에 도착한 후 적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영국 충성파 민병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붕괴되었고, 퍼거슨은 어떻게든 맞서 싸우려 노력했으나 끝내 일곱 발의 총상을 입고 사살되었다. 퍼거슨이 죽자, 영국 충성파 민병대는 더이상의 전의를 상실하고 적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독립 지지파 민병대는 배내스터 탈턴 중령이 1780년 5월 29일 왁스호 전투 직후 포로로 잡은 대륙군 병사들을 학살했다는 소문[1]을 듣고 극도로 분노해 포로로 잡은 적군을 향해 "이것이 탈턴의 자비다!"라고 외치며 많은 이들을 죽였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진정된 그들은 살아남은 포로들을 데리고 전장을 빠져나갔다. 이리하여 킹스 마운틴 전투는 독립 지지파 민병대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편집]


영국 충성파 민병대는 300명의 사상자와 700명의 포로를 기록했다. 반면 독립 지지파 민병대는 9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후 독립 지지파 민병대는 10월 14일 킹스 마운틴을 떠나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포로 36명을 처형했고, 많은 포로들이 이송 도중 보급 부족과 강추위로 인해 사망했으며, 130명의 포로들은 가까스로 탈출해 영국군과 합류했다.

킹스 마운틴 전투의 패배 후 미국 남부 일대에서 활동하던 영국 충성파 민병대의 세력은 급격히 위축되었고 영국군의 보급로가 한층 더 위태로워졌다. 게다가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 전투에서 패배하고 그해 3월 15일 길퍼드 코트하우스 전투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자, 결국 콘월리스 장군은 북상 계획을 중단하고 사우스 캐롤라이나로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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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탈턴 본인의 보고에 따르면, 자신이 전투 도중에 말이 총에 맞아 죽는 바람에 낙마하여 의식을 잃은 사이, 부하들이 자기가 죽었다고 여기고 극도로 분노해 적군에게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지만 포로를 학살한 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신대륙 주민들은 그가 학살을 명령했다고 의심했고, 마침 영국군 총사령관 헨리 클린턴 소장이 투항한 대륙군 병사를 가석방하던 관례를 취소하자 자신들을 모욕했다고 여겨 분노했다. 어쨌든 이 양반의 악명은 대단해서, 영화 패트리어트에 등장하는 최종악역 태빙턴 대령의 모티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