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아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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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Battle_of_Chiari,_1701.png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랑스-스페인-사보이아 공국 동맹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1년 9월 1일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스페인-사보이아 공국 동맹군이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의 키아리에서 맞붙은 전투.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이 대승을 거뒀다.

2. 배경[편집]


1701년 7월 9일 카르피 전투에서 승리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오스트리아군은 7월 28일 브레시아로 북상해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때 민치오 강 후편에서 군대를 소집하는 데 집중할 뿐 적과 교전하길 꺼리던 프랑스군 원수 니콜라 카티나는 외젠이 브레시아로 북상하자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올리오(Oglio) 강변으로 철수했다. 브레시아를 장악한 합스부르크군은 밀라노 공국을 당장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췄고, 루이 14세는 이와 같은 전개에 진노해 카티나 원수를 경질하고 자신의 최측근인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을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빌레루아 공작은 적과 회전을 벌이는 걸 회피하지 말라는 국왕의 명령을 듣고 왔고 적보다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회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8월 23일, 그는 전쟁 위원회를 소집한 뒤 올리오 강을 건너 적진을 공격하는 안건을 논의했다. 8월 24일, 빌레루아 공작은 루이 14세에게 편지를 보내 아군이 북쪽의 팔라졸로에서 남쪽의 우라고 달리오 일대에 포진했으며 폰톨리오(Pontoglio)를 점령했다고 알렸다. 이후 빌레루아 공작은 정찰병을 보내 적의 방어 상태를 확인한 뒤 적이 강을 따라 방어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8월 27일 밤에서 28일 새벽까지 군대를 4개 횡대로 편성한 뒤 올리오 강을 도하했다.

8월 29일 프랑스군을 이끌고 올리오 강을 건너 루디아노에 진영을 갖춘 빌레루아 공작은 국왕에게 적의 저항은 없으며 그들이 브레시아를 향해 후퇴할 것이 분명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다음날 적이 후퇴하지 않고 키아리 요새 전면에 주둔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프랑스 사령부는 잠시 주춤했지만, 빌레루아 공작은 적이 곧 보급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철수할 게 분명하다고 여기고 카스트레자토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빌레루아 공작은 자신이 외젠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외젠은 8월 28일 프랑스군이 보급 마차를 남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올히오 강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이후 외젠은 8월 29일에 트렌제나 강을 지나가면서 시야에 보이는 모든 다리를 파괴시켰다. 그는 올리오 강은 수위가 매우 낮아서 적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키아리 요새까지 물러간 뒤 거기서 적의 공세를 격퇴하기로 했다.

외젠은 니콜라 카티나 원수가 경질되었으며 빌레루아 공작이 자신과 싸우길 희망한다는 걸 첩보를 통해 파악해뒀고, 자신이 키아리 요새의 전면에서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더라도 수적 우위를 앞세워 정면 돌격을 감행하리라고 짐작했다. 과연 빌레루아 공작은 9월 1일 키아리 요새 인근에 도착하자마자 전투를 개시했다. 이리하여 북이탈리아의 패권을 둘러싼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오스트리아군[편집]



3.2. 프랑스-스페인-사보이아 공국 동맹군[편집]


  • 총사령관: 빌레루아 공작 프랑수아 드 뇌빌
  • 병력: 38,000명

4. 전투 경과[편집]


9월 1일 키아리 전장에 도착한 빌레루아 공작은 요새 좌측에 제국군의 초소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이 초소를 공격하기로 했다. 당시 그는 첩보원들로부터 적의 주력이 키아리에서 수 마일이나 후퇴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키아리에 주둔한 적군은 고립된 몇 개 대대에 불과하다고 확신했다. 당시 지휘권을 상실하고 빌레루아 공작의 부관 노릇을 하고 있던 니콜라 카티나 원수는 적이 수비에 유리한 위치에 있으니 섣불리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볼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빌레루아 공작은 이를 무시하고 오후 2시 30분에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먼저 공격을 개시한 부대는 프랑스군 우익의 노르망디 여단이었다. 그들은 세리올라 누오바의 전초 기지를 우회하여 적 4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제분소를 공격했다. 그러나 제국군은 고지를 선점한 뒤 밀려오는 적에게 효과적인 일제 사격을 가해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혔고, 노르망디 여단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퇴했다. 뒤이어 중앙의 노르망디, 부르고뉴 연대 5개 대대는 제국군 중앙으로 진군했다. 제국군 중앙을 맡은 니그렐리와 크리흐바움 연대는 적이 아주 짧은 거리까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제 사격을 가했고, 포병대도 산탄을 쏴 적 보병대를 흐트러뜨렸다. 결국 프랑스 중앙의 보병대 역시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했다.

유일하게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프랑스군 좌익이었다. 빅토르 아마데우스 연대를 비롯한 프랑스 좌익 부대는 카시린으로 진군해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을 밀어냈다. 그러나 곧 만스펠트 대대가 니그렐리, 허버슈타인, 그라프 다운 등 척탄병 대대와 함께 역공을 가해 적군을 카시린 외곽으로 밀어냈다. 이렇듯 4시간에 걸친 교전 끝에 막심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군은 서둘러 퇴각했고, 외젠은 그들을 굳이 추격하지 않고 제 위치를 사수했다. 이리하여 키아리 전투는 오스트리아군의 완승으로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프랑스군은 키아리 전투에서 2,000 ~ 3,800명 가량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그 중 200명의 장교가 부상당했고 장교 100명은 포로로 잡혔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손실은 전사자 36명과 부상자 81명에 그쳤다. 프랑스군은 키아리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여전히 오스트리아군보다는 월등한 전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지휘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고 사기가 바닥을 기었고, 빌레루아 공작은 이후 2달 동안 올리오 강둑에서 적과 대치하다가 11월 중순 밀라노 공국으로 철수했다.

루이 14세는 빌레루아 공작을 파견한 뒤 그가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9월 7일 빌레루아 공작에게 자신은 그를 지휘관으로 파견한 것에 매우 기쁘며 그가 전투를 영광스럽게 끝낼 거라고 믿는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군이 키아리 전투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루이 14세는 그제야 외젠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빌레루아 공작에게 다음 해에 지원군을 보내줄 테니 그때까지 적과 전투를 벌이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외젠은 적 지원군이 오기 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기로 작정하고 1702년 겨울 크레모나에 주둔한 프랑스군 본진을 급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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