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무라 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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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교생 드래프트
(2) 대학생, 사회인 드래프트
(3) 역지명, 희망 입단 범위
(4) 하즈레 1라운더
(5) 지명 후 미입단




파일:키무라유타.jpg

키무라 유타
木村雄太[1]/木村優太[2]/Yuta Kimura

생년월일
1985년 5월 21일 (38세)
출신지
아키타현 카즈노시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학력
아키타경제법과대학부속고교
프로입단
2006년 NPB 대학생ㆍ사회인 드래프트 3라운드[3]
2008년 NPB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소속팀
도쿄가스(2004~2008)[4]
치바 롯데 마린즈 (2009~2016)
등장곡
Linked Horizon - 紅蓮の弓矢

1. 소개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플레이 스타일
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영양관리비 사건
6. 여담



1. 소개[편집]


일본의 전직 야구선수.

히로시마, 세이부, 라쿠텐, 요코하마 4구단의 오퍼를 모두 뿌리치고 "롯데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끝끝내 원하던 롯데의 1라운더 지명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1라운드감은 커녕 1군에서 아예 통하지 않았던 선수. 롯데의 1라운더 잔혹사 계보의 당당한 한 축이 되었다.


2. 선수 경력[편집]


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 하계 현 대회부터 벤치에 들어가 1경기 13이닝 23K[5]를 기록하면서 슬슬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때 추계시즌에서는 완전히 에이스를 맡아 현 대회 우승, 토호쿠 대회 8강까지 팀을 올린다. 그러나 3학년 때는 현 대회 8강에서 탈락하면서 코시엔을 밟아보지는 못했다.

이때 고교 좌완선발이 145km/h를 뿌린다는 점에서 '일제 랜디 존슨'으로 불렸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1라운더로 키무라를 원했으나 선수 본인이 입단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지명 예정을 철회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사회인야구 도쿄 가스에 입단한다.

도쿄 가스 입단 후 첫 2년은 이렇다 할 실적이 없었고 드래프트에 다시 나갈 수 있게 된 3년차인 2006년, 메이지야스다생명의 보강선수로 뽑혀서 도시대항전에서 5이닝 6K 무실점의 쾌투를 보인다. 이후 라쿠텐, 요코하마, 롯데가 관심을 보이는 상황에서 선수 본인은 롯데 입단을 희망하던 상황이었다.

일단 당시에는 희망 입단 프레임이라는, 한국의 1차지명과 비슷하지만 대학생, 사회인 선수를 대상으로 지역 연고가 아닌 전국단위로 선수를 뽑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제도가 사실상 현재의 1라운더와 동일한 지명권이었다. 이때 라쿠텐이 키무라에게 먼저 접근하여 희망 입단 프레임으로 우리 팀에 들어와달라고 하였으나[6], 선수 본인은 "롯데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면서 거절하였다.

이후 드래프트 당일, 3라운드에서[7] 요코하마 베이스타즈가 그를 지명했는데, 요코하마에서는 감독 포함 무려 10명이나 키무라에게 인사를 가서 입단 권유를 했지만 키무라는 "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라면서 "롯데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는 말만 반복, 결국 입단 거부 처리가 되었다.

결국 드래프트 입단을 거부하고 도쿄 가스에 남았으나, 후술할 영양관리비 사건으로 1년 정지를 먹었다(...) 이때 영양관리비를 준 팀이 세이부였으니 무려 4팀의 입단 제의를 거부한 셈(...).

2008년 자격정지가 풀린 후 도시대항전에 JR히가시니혼의 보강 선수로 출전하였고, 전일본사회인야구 선수권 예선에서는 2경기 연속 완봉승 포함 3경기 22이닝 1실점 ERA 0.41로 호투했지만 팀이 예선에서 탈락해서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다. 도시대항전 통산성적은 3경기 8.1이닝 ERA 0.00. 이 해에 다시 드래프트 신청을 했고 그토록 원하던 롯데의 1라운드 지명을 받고 당당히 입단하게 되었다. 스카우터들은 "1년을 징계로 쉬었는데도 140대 중반이 나온다는 점에서 구속도 맘에 들고, 제구는 구속 이상으로 좋기 때문에 대형 유망주라 평가할 수 있다."고 호평하였다.


2.1. 치바 롯데 마린즈 시절[편집]


데뷔 1년차인 2009년과 2010년은 2군에서 올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2년 간 2군에서 꾸준히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ERA 3점대 중후반으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이후 데뷔 3년차인 2011년 8월 21일 드디어 1군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상대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이때 우치카와 세이이치, 알렉스 카브레라를 삼진으로 처리하면서 1이닝 무실점을 기록. 이 해에는 2군에서는 주로 선발로 나오면서 43.2이닝 ERA 1.44를 기록하였고 1군에서는 불펜으로만 13경기 출전하여 16이닝 0승 1패 1홀드 ERA 3.38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불펜으로 전업한 2012년에는 1군 4경기 등판에 그쳤고, 2013년에는 선발로 돌아왔으나 1군에 아예 올라오지 못하며 서서히 망한 1라운더가 되어갔다. 2014년에는 2군에서 선발로 13경기 72이닝 ERA 2.25를 찍는 활약 덕분에 1군에 다시 돌아왔으나 선발, 불펜을 모두 오가며 19경기(2선발) 37이닝 0승 1패 ERA 5.35로 부진했다. 2015년에도 2군에서는 선발로 2점대 초반을 기록했으나 1군에서는 5경기(4선발) 1승 3패 17.1이닝 ERA 7.79로 부진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얻은 것이라고는 데뷔승(...). 한국나이 31살, 만 나이 30살에 데뷔승을 건졌다. 2016년에는 2군에서 3점대 초반으로 여전히 좋았지만 1군에서는 불펜으로 6경기에 나와 ERA 4.22로 부진. 결국 이 해를 끝으로 방출당하면서 1라운드 잔혹사에만 추가되고 말았다.

이후 12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나갔으나 피안타 2개만 기록하며 불합격. 이후 연식야구 팀에 들어갔으나 1년을 뛰고 그만두었다.


3. 은퇴 이후[편집]


치바의 부동산 회사에 입사하였으나 조금 일하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최고구속은 146km/h에 평균구속은 136km/h였던 좌완 피네스 피쳐. 고교야구 때 145km/h를 던졌고, 1년 징계를 먹은 후에도 140km/h를 던져서 구속이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고교 때랑 별 차이가 없었다(...). 1군에서는 통산 47경기에 등판하여 1승 6패 1홀드 ERA 5.24였으나 2군에서는 통산 138경기에 등판하여 36승 26패 ERA 2.94였던 걸 보면 전형적인 2군 페드로+좌완 똥볼러.


5. 논란 및 사건 사고[편집]



5.1. 영양관리비 사건[편집]


2007년 3월, NPB에서 금지하고 있던 영양관리비[8]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등학교 때부터 받아왔고 총 액수는 270만엔. 결국 이 사건으로 세이부 구단은 그 해 고졸 드래프트 상위 지명권을 박탈당했고, 키무라는 1년간의 자격정지에 2008년 도시대항전까지 출전 금지를 당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무라가 반성을 잘 한다는 이유로 2008년 도시대항전 출전 금지는 풀어주었다.

여담으로 키무라는 영양관리비를 준 세이부가 아닌 롯데로 입단했는데, 이런 사례는 과거에도 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나가시마 시게오. 영양관리비는 호크스에서 받아먹고 쿄진으로 입단했다.


6. 여담[편집]


  • 매우 특이하게도 "롯데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는 마인드를 들고 나온 선수였다. 보통 특정 팀을 선호하는 선수는 차라리 "롯데가 지명한다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의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매우 희귀한 케이스.희귀를 넘어 연구대상이다 롯데사랑에 대한 이유로는 두 가지가 추정된다. 첫째로 키무라는 센트럴리그 팀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는 것과[9], 두번째로 키무라는 도쿄에서 살겠다는 열망이 매우 강했다는 것이다. 이 둘을 조합해 보면 해당하는 팀이 롯데밖에 없다(...).[10]

  • 2013년의 등록명 변경은 점을 보러 가서 점쟁이가 추천한대로 한 것이라고 한다. 성적은 거기서 거기였지만 그래도 등록명 변경 이후 데뷔승이라도 올렸으니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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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명, 데뷔 초 등록명.[2] 2013~2016년 등록명. 한국에서 야구선수들이 잘 안 풀리면 개명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야구선수들이 잘 안 풀리면 이름을 바꾼다. 다만 일본은 법적인 이름을 바꾸는 한국과 달리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로 선수 등록명만 바꾸는 것을 선호한다.[3]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의 지명으로 입단을 거부했다. 사유는 후술[4] 사회인야구 기업팀.[5] 연장 13회까지 갔다고 한다.[6] 참고로 라쿠텐은 키무라가 플랜 A는 아니였고, 플랜 A는 끝내 FA로 팀에 데려와버린키시 타카유키였다. 그러나 키시는 세이부와 희망 입단 계약을 맺으면서 빼앗긴 상태. 결국 라쿠텐은 플랜 C로 모리후쿠 마사히코에게 접근하지만 그 모리후쿠도 계약을 거절하면서 희망 입단 프레임 지명권을 사용하고도 목표로 한 선수들을 데려오지 못했다. 결국 라쿠텐 혼자서만 대학/사회인 1라운드 지명에 참가해 나가이 사토시를 지명했다.(참고로 모리후쿠는 당해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로 소프트뱅크에 입단. 아마 팀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7] 말이 3라운드지 그때는 1~2라운드는 지명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서 1~2라운드에서 선수를 지명하는 구단은 매년 0~1팀이었다. 희망 입단 프레임이 KBO의 1차지명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라운드 지명은 KBO의 2차 1라운드 지명과 같은 셈. 유일하게 1라운드 지명에 참가한 라쿠텐 바로 다음이 센트럴 리그 최하위인 요코하마였기에 12구단 중 전체 2순위로 키무라를 지명했었다.[8] 명목상으로는 고교, 대학 유망주들이 돈이 없어서 밥을 못 먹을 수 있으니까 그 식대를 지원해 주겠다고(...) 주는 돈이지만 이건 금지 규정이 갓 생긴 50년대에나 해당하던 일이고(당시에는 전쟁 직후라 가난하고 식량부족도 심해서 구단이 주는 영양관리비로 밥 사먹고 생계를 꾸리던 유망주들도 있었다고는 한다.) 실제로는 그냥 뇌물 같은 것.[9] 이는 키무라가 선발자원이었기 때문에 센트럴리그에 가면 타격을 해야 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로 센트럴리그 팀을 원하지 않던 선수는 더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시카와 아유무.[10] 퍼시픽리그 팀의 경우 도쿄 도내 팀은 아예 없다. 또한 도쿄에서 가까운 파리그 팀으로는 사실 세이부도 있긴 한데 도쿄에서 롯데가 조금 더 가깝다. 도쿄역 기준으로 조조 마린 스타디움케이요선으로 한 번에 갈 수 있지만 세이부 돔은 환승 한 번 이상이 필요한 데다, 직선거리마저 치바 쪽이 세이부보다 더 가깝다. 당시 세이부 2군이 롯데보다 조금 더 열악했던 것도 한몫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