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페의 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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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헨리 8세의 왕비
클레페의 앤
Anna von Kleve


파일:1280px-Anne_of_Cleves,_by_Hans_Holbein_the_Younger.jpg

이름
안나 폰 클레페
(Anna von Kleve)
출생
1515년 9월 22일
신성 로마 제국 베르크 공국 뒤셀도르프
사망
1557년 7월 16일 (향년 41세)
잉글랜드 왕국 첼시 저택
장례식
1557년 8월 3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배우자
헨리 8세 (1540년 결혼 / 1540년 무효화)
아버지
클레페 공작 요한 3세
어머니
율리히베르크의 마리아
형제
지빌레, 빌헬름, 아말리아
서명
파일:클레페의 앤 서명.svg

1. 개요
2. 생애
2.1. 헨리 8세와의 혼담
2.2. 불행한 결혼
2.3. 알고보니 실패한 정략결혼
2.4. 불행한 결혼생활
2.5. 이혼과 무효화
2.6. 잉글랜드의 귀부인으로 거듭나다
3. 매체에서



1. 개요[편집]


클레페 공국의 요한 3세와 윌리히-베르크의 마리아의 딸. 독일어 이름은 안나 폰 클레페.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


2. 생애[편집]



2.1. 헨리 8세와의 혼담[편집]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에드워드 6세를 낳고 사망한 뒤 슬슬 재혼을 생각하던 헨리 8세는 신하들의 권유로 클레페의 안나에게 혼담을 건넸다.

당시 왕가의 혼인은 대개 국제결혼이라 혼인이 결정되면 결혼식이 있기 전까지 매년 양쪽에서 초상화를 교환해서 예비 신부와 예비 신랑의 성장과정을 알리곤 했다. 이 때 안나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당대의 대화가 한스 홀바인[1]이었는데, 이 양반이 안나의 초상화를 너무 예쁘게 그려서 아주 큰 오해가 생겼다.

그렇잖아도 안나와의 결혼을 권하던 신하들이 안나가 얼마나 사랑스럽고 얌전하며 순종적인 여인인지 열변을 늘어놓았는데, 한스 홀바인 이 양반까지 안나의 외모를 너무 미화한 그림을 내놓자 헨리 8세는 초상화 속의 여인을 새 왕비로 맞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결정은 역사에 포샵질(?)의 원조라는 기록을 남긴다.


2.2. 불행한 결혼[편집]


하지만 헨리 8세는 초상화와 다른 안나의 실물을 보고 경악을 하였다. 안나도 마찬가지고.[2]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헨리 8세는 자신을 전설이나 동화에 나오는 이상적인 왕자/군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상당히 유아틱 로맨틱하면서도 자기도취적인 성격이었다. 아직 첫째 왕비 아라곤의 카탈리나와 금슬 좋게 지내던 젊은 시절에는 종종 변장하고 왕비를 찾아가 놀래켜주는 이벤트를 벌이곤 했다. 사실 그 때마다 캐서린은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보고도 일단 속아 넘어갔다가, 뒤늦게 남편을 알아보는 척을 하며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3] 그리고 이 때는 헨리 8세 본인도 운동을 즐기는 젊은 미남이었다.

이런 성격이었기 때문에 헨리 8세는 안나와 처음 만나면 서로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리라 기대하면서(…) 특별 이벤트까지 준비했다. 안나가 런던에 도착하자, 헨리 8세는 신하와 함께 변장을 하고서 갑작스레 찾아가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웬 뚱뚱하고 늙은 남자[4] 갑자기 나타나 친밀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자 전혀 언어가 통하지 않은 안나는 미래의 남편을 알아보기는 했지만 별로 기뻐하지 않고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무시를 당했다고 느낀 헨리 8세는 엄청나게 화가 났고, 옆방으로 가서 왕의 복장으로 갈아 입고 안나에게 다시 찾아갔다. 그러자 안나는 그에게 예법대로 공손하게 대했지만 헨리 8세는 이미 대단히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그날 밤, 헨리 8세는 노발대발하며 결혼을 주선한 신하에게 화를 내고 "저런 여자와 잘 수 없다!!!!"며 방방 뛰었다.[5] 그리고 정말로 같이 자지 않았다. 어떤 소설에서 번역하기를 "난 저 암말은 안 타겠다!!"

게다가 헨리 8세는 여자를 볼 때 외모 뿐 아니라 자신과 대등하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수준과 위트를 갖추었는지가 중요했는데[6] 불행히도 안나는 독일어만 구사할 줄 알고 영어프랑스어를 잘 하지 못했다. 따라서 부부 간에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는 건 고사하고 의사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또한 앤이 여자에게는 가사 외의 교육은 거의 시키지 않은 보수적인 개신교 궁정에서 자란 탓에 예술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소양이 없었다. 때문에 로맨틱한 미녀 공주를 원했던 도둑놈 헨리 8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앤은 정숙하고 얌전하기만 할 뿐 무척 따분한 성격의 독일인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파혼할 수는 없어서 결국 결혼하게 되었고, 안나는 우리 아는 영어식인 '앤'이라고 불리게 된다.[7]


2.3. 알고보니 실패한 정략결혼[편집]


여기까지는 여러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잘 알려졌지만, 앤과 결혼하려 한 이유가 처음부터 정치적 이유였던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앤의 집안인 라 마르크 가문은 한미하긴 커녕 오히려 유럽 왕족과 혼인이 잦은 신성 로마 제국의 명문가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어머니인 클레페의 마리는 앤의 조상이 되며, 앤의 남동생이자 당시 클레페 공작이였던 빌헬름 5세의 첫 아내는 훗날 프랑스 왕국 앙리 4세의 어머니가 되는 나바라 여왕 호아나 3세(잔 달브레)였고, 카를 5세와 화해하며 잔 달브레와 이혼한(혼인무효) 이후 재혼한 상대는 후임 황제이자 독일왕페르디난트 1세의 딸 마리아였다. 또한 개신교 제후의 대표격인 작센 선제후요한 프리드리히 1세의 부인 지빌레는 앤의 언니다. 이러한 가문의 면모와 혼인을 맺었던 상대들을 살펴보면 앤은 흔히 대중매체에 알려진대로 독일 소국 출신이 아닌, 명실공히 유럽 왕실과 동등한 혼인이 가능한 통치 가문의 후손이었다.

따라서 이 혼사는 가톨릭 세력에게 포위당한 잉글랜드 왕국외교적으로 고립을 타파하고자, 독일 개신교 제후들과 연합하여 동맹을 얻으려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 또한 앤의 집안인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은 영토는 크진 않지만 부유하여 카를 5세가 호시탐탐 노렸기 때문에 강력한 사돈을 맞이하여 카를 5세의 위협에 맞서려고 노력했다. 즉, 잉글랜드와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 모두의 이익을 위해 성사된 정략결혼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적 혼인 시도 과정에서 이미 독일 개신교도 제후연합은 헨리 8세를 거부했다.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루터교회의 교리는 거의 받아들이지 않고 가톨릭에서 교황이 하는 역할만 잉글랜드 국왕이 대신하는, 한마디로 무늬만 개혁이었다. 정작 복음주의자들은 개혁과정에서 철저히 무시당하거나 배제되었고 더군다나 골수 가톨릭 교도인 토머스 모어를 중용하여 가톨릭의 교리인 화체설(성변화)[8]을 부인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신학자 교수 40여 명을 고문하고 6명을 화형시켰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보고 처음엔 희망을 품었던 대륙의 종교개혁가들은 당시 기준으로만 봐도 종교 '개혁'보단 그냥 이웃나라 프랑스의 갈리아교회주의나 스페인의 왕실 교회후원령 (patronato real)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가톨릭 교회 기관을 세속 국가 권력 아래 종속시키려는 정치적 및 제도적 변화에 불과했다. 이런 잉글랜드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독일과 스위스의 개혁가들은 단단히 실망한 상태였다. 따라서 앤은 당초 잉글랜드와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의 의도와는 달리, 이미 정치외교적인 가치가 매우 현격히 떨어진 상태에서 결혼하게 된 것이다.

헨리 8세가 여색을 무척 밝힌 것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왕비 자리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최우선 조건으로 보게 된다. 그것도 대륙과의 결혼 동맹을 위해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인데 당연히 외모는 중요한 순위가 아니었다. 이 시절 군왕의 여색처럼 욕망 충족 부분은 결혼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자기 아내나 딸을 왕에게 바쳐 한 자리 얻으려는 귀족들이 들이미는 여자 중 하나든 열이든 건드리고 끝내면 될 문제였다. 헨리 8세가 방탕한 성격이긴 해도 진짜 개인적 감정 하나로 외국 왕실과 결혼했다가 이혼할 만큼의 분별력도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앤이 추녀라고 한 사람은 오직 헨리 8세 하나뿐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사실 헨리 8세는 이 때 몸은 있는대로 불어있는 고도 비만에다 썩어들어가던 다리 상처에서 나는 엄청난 악취, 이전에 결혼한 왕비들을 쫓아내거나 죽여버린 것[9], 당대의 핫이슈인 종교개혁 문제만 해도 상술한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에 한 남자로서나 개인적인 면모로나 국왕으로서나 신랑감으로서 등등 전체적으로 전 유럽에서 평가가 최악이었다.

참고로 제인의 사후 새 신붓감 중 하나로 고려됐던 프랑스의 귀공녀 마리 드 기즈에게 헨리 8세가 청혼을 했는데, 주잉글랜드 프랑스 대사에게 "나는 매우 큰 남자라서 큰 왕비[10]가 필요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데 마리 드 기즈는 이 말을 듣자마자 앤 불린의 유언을 인용하여[11] "제가 큰 여자인 건 맞지만 아쉽게도 제 목은 너무나도 가늘답니다."라며 거절했고 냉큼 헨리 8세의 조카인 스코틀랜드제임스 5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해 버렸다.[12] 또 다른 유력한 신붓감이었던 밀라노 공작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13] 또한 청혼하러 온 잉글랜드 대사에게 "나에게 목이 2개 있다면 기꺼이 귀국의 국왕께 하나를 드리겠지만,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목이 하나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하며 거절하기도 했다. 이렇듯 괜찮은 신붓감 후보들은 죄다 헨리 8세와의 결혼이라는 말만 나오면 도망가는 판이었으니 더 이상 이것저것 따지며 고를 수 없는 처지였다.

앤이 이후 헨리의 왕비들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아름다운 외모라는 기록도 있다.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상단의 초상화를 봐도 추녀는 커녕 오히려 차분하고 선량한 인상의 미녀다. 젊은 시절과 말년의 초상화의 인상만 봐면 비슷해서 오늘날에는 미화된게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초상화란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애초에 그림을 그린 한스 홀바인은 실물과 그렇게 동떨어지게 그리는 화가도 아니었다.[14] 헨리 8세는 앤과 이혼 후에도 문제의 초상화를 그린 홀바인을 꽤나 총애했는데, 앤의 초상화를 실물과 딴판으로 포샵질했다면 헨리 8세의 성질머리로 왕에게 사기친 화가를 그냥 뒀을 리가(…) 없다.[15]

게다가 헨리 8세가 미녀만 좋아했냐 하면 그것도 절대 아니다. 되려 그 난리를 친 앤 불린이나 가장 사랑한 제인 시모어 둘 다 그닥 미인은 아니었다.[16] 그리고 바르델 브루인(Barthel Bruynthe the Elder)이 그린 말년의 초상화를 보아도, 절대 추녀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 수수하고 무난한 외모이다.# 오히려 미인상에 가깝고 헨리 8세의 부인들 중 미인으로 알려진 아라곤의 카탈리나캐서린 하워드의 초상화와 비교해 봐도 떨어져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슴이 크단 이유로 헨리는 앤이 숫처녀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는데(…) 대체 이 인간의 숫처녀 확신 기준은? 여러 초상화나 주변 증언을 보면 글래머에 차분한 인상의 미인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본인이 강하게 끌리는 여자를 무리해서라도 심지어 국가적 이득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왕비 자리에 앉혔던 헨리 8세의 행적을 보아 이유가 어찌 됐든 간에 앤에게 여자로서 끌리지 않았던 건 확실하다. 밑에서 후술하겠지만 오히려 이 덕에 평탄한 삶을 살 수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전화위복?


2.4. 불행한 결혼생활[편집]


헨리 8세는 결혼 기간 내내 앤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그리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정략적 가치도 떨어졌기 때문에 동침은 커녕 전혀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부부간의 스킨십이라 해봤자 침대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매일 밤과 아침마다 앤의 이마에 키스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가 하면 자기 신하들에게는 "앤의 가슴이 커서 축 쳐져 있으며 배에 살집이 있으니, 숫처녀가 아닐 거다. 그러니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다."라는 인격의 바닥이 보이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17]

한편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한 개신교 국가의 궁정에서 자란 앤은 성에 대해 순진하다 못해 완전히 무지했는데, 성관계를 해야만 아이가 생긴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실제로 결혼하고 반년쯤 지났을 무렵 헨리 8세가 이혼을 고려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앤을 모시던 시녀들이 그녀에게 "국왕과 육체 관계를 가졌느냐?"고 물었다. 이에 앤은 "폐하께서 밤과 아침마다 이마에 키스를 해주신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이 말에 당연히 시녀들은 놀랐고 질문한 시녀들 중 한 사람이 대담하게 "왕비님께서는 아직 숫처녀이신 것 같다. 모두가 원하는 왕자님을 낳으시려면 그것보다 더 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앤은 "더 알고 싶지 않다."며 정색하고 대화를 끝냈다. 사실 헨리 8세의 신체 사정을 생각해 보면 앤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겠지만, 자기가 원하는 여자는 어떻게든 취해서 애인으로 삼거나 왕비로 올리려고 그 난리를 쳤던 헨리 8세의 성질머리를 보면 일단 헨리 쪽에서도 앤과 무슨 거사를 도모해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모양.[18]

신혼 때부터 앤에게 만족하지 못한 헨리 8세는 누가 시녀성애자 소리 듣는 왕 아니랄까봐(...) 이번에는 앤의 시녀인 캐서린 하워드에게 푹 빠져들게 되었다. 또 시작이다. 이제 그는 사랑할 수 없는 앤과는 이혼하고 캐서린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2.5. 이혼과 무효화[편집]


결국 헨리 8세와 앤은 합의하에 결혼을 무효화했다. 그 시절 유럽에서는 부부가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결혼이 성립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으므로, 결혼 무효화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처음에 앤은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울음을 터뜨렸다. 그 무렵 앤은 영어도 막 익혀가고 있었고 서서히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는 등 나름대로 잉글랜드의 왕비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율리히-클레베-베르크 공국의 대사와 변호사를 동원하여 결혼 무효화에 맞서려고 했지만 곧 마음을 바꾸었다. 이미 첫 번째 부인은 내쫓고 두 번째 부인의 목을 벤 전력이 있는 남편과 대치해봤자 별 소용이 없었고 "님도 캐서린 왕비 꼴 나보고 싶으시다면야..."라는 은근한 충고에다 친정인 클레페 공국의 상황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앤의 남동생 클레페 공작 빌헬름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에게 맞서다가, 자신의 영지가 쑥대밭이 되고 제국추방령이 내려진 상태였던지라 돌아갈 곳도 없었다. 클레베 공작령은 영토는 좁지만 매우 부유한 영지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저지대 영지와 연결된 터라 눈독 들이다가 뺏은 격. 결국 클레베 공작 빌헬름은 카를 5세에게 독일지역의 일부 영토를 돌려 받고 네덜란드 지역은 완전히 뺏겼다. 대신 그 보상으로 빌헬름은 카를 5세의 조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19]와 결혼했다.

한편 토머스 크롬웰은 이 결혼을 주선한 죄로 결정적으로 몰락하고 처형당했다.


2.6. 잉글랜드의 귀부인으로 거듭나다[편집]


한편 헨리 8세도 앤이 조용히 이혼에 동의해줘야 복잡한 국제 문제를 피할 수 있었기에 이혼 조건으로 막대한 보상을 제시했다. 이혼은 죽어도 못한다고 버팅기다 폭망한 첫째 부인 카탈리나와는 달리, 앤이 헨리 8세의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별다른 잡음없이 이혼할 수 있었다. 사실 카탈리나는 자기가 폐위되면 당장 하나뿐인 딸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판이었으므로[20] 쉽게 항복할 수도 없는 처지였으나, 왕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는 앤은 그 정도로 절박한 처지는 아니어서 순순히 이혼에 동의할 수 있었다.

비위만 맞춰주면 그 때부터 팍팍 퍼주는 헨리 8세의 성격 덕분에 앤은 이혼 후에도 계속 잉글랜드에 남을 수 있게 되었고, 리치몬드 궁을 포함한 화려한 궁전 5곳과 막대한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풍족하게 보냈다. 앤은 이혼을 통해 막대한 재산과 함께 전 남편 헨리의, 왕의 여동생이라는 칭호와 대우를 보장받고 한 때 의붓딸이었던 두 들의 친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헨리 8세를 거쳐간 모든 여인들 중 가장 성공한 케이스. 법정다툼으로 맘고생하다 유폐되거나 목이 잘리지도, 사흘 간의 산고 끝에 힘들게 낳은 자식이 일찍 죽거나 본인이 출산하다가 산욕열로 죽지도 않았으니까.

앤은 곧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와인에 맛을 들였으며, 남자와 여자가 동침한다는 의미조차 몰랐던 순진한 처녀에서 카드놀이와 연회를 즐기는 여유롭고 사교적인 성격의 귀부인으로 거듭났다. 이후 재혼하지 않고 어린 엘리자베스 공주에게 애정을 쏟았고, 엘리자베스도 앤을 잘 따라서 앤의 궁에 자주 방문했다.

앤은 이혼 전에는 자신의 시녀였으나 이혼 후에는 헨리 8세의 다음 왕비가 된 캐서린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대했다. 비록 왕비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다른 나라의 공주나 다름없는 귀한 신분의 앤이 이렇게 나오자 아무리 상식이 떨어지는 캐서린이라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앤이 자신에게 복종하며 자신의 새 배우자도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흡족해했다(…) 덕분에 헨리 8세, 캐서린, 앤은 화목하게 지냈다.

흥미롭게도 헨리 8세는 결혼 생활 동안에는 앤을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정작 이혼하고 나서는 아낌없는 지원과 호의를 베풀며 잉글랜드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했다. 헨리 8세의 유별나고 변덕스러운 성격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그녀도 명분과 명예에 집착하지 않고 사려 깊고 현실적으로 행동했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캐서린이 처형된 후 앤의 친정을 중심으로 앤을 왕비에 복위시키려는 움직임, 혹은 그에 대한 소문이 한동안 잉글랜드 정계에 나돌았다. 헨리 8세가 이를 일축하였기에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는데, 당사자인 앤에게 실제로 왕비 자리로 돌아가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헨리 8세가 죽은 후, 그동안 지급되던 연금이 끊기는 바람에 앤은 잠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때문에 새 국왕인 에드워드 6세와 친정에 금전적인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 때 앤이 "결국 우리는 외국인이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 남아 있다. 다행히도 몇 년 뒤 잉글랜드 왕실의 지원을 다시 받게 되어서 예전처럼 다시 넉넉한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에드워드 6세의 사후에도 앤은 왕실의 어른으로 국가행사에서 앞서서 대우 받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늘 한결같이 관대하고 상냥했던 성품 덕분에 한 때의 의붓자식들인 메리 1세엘리자베스 1세 모두 그녀를 진실된 친구로 여겼고 잉글랜드 백성들 역시 앤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그렇게 6인의 왕비들 중 가장 자유롭고 평화스러운 삶을 만끽했던 앤은 마지막까지 우아한 성품에 걸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557년에 42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사인이 명백하게 밝혀지진 않았으나, 역사가들은 이 원인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앤은 유언에 자신을 돌봐준 사람들과 자신을 오랜 기간 모셨던 시종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유산을 남겨주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왕비들 6명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살았던 사람[21]이다. 다른 왕비들의 삶이 너무나 파란만장했던 반면, 앤은 불행했던 잠깐의 결혼 생활과 잠깐동안 연금이 끊기던 시절을 제외하면 그 당시 귀부인들 중에서도 특출날 정도로 행복하고 따뜻한 삶을 살았다.

이런 앤의 삶이 조선의 숙종의 3번째 왕비인 인원왕후와 비슷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22][23] 인원왕후 역시 궁중의 법도와 예의범절을 철저히 지키는 삶을 살았으며, 남편의 사랑은 못 받았지만 의붓아들인 영조를 지지하고 나중에는 왕실의 큰 어른인 대비로서 대접받았다. 의붓자식인 엘리자베스 1세와 사이가 각별했던 앤과 닮은 부분.


3. 매체에서[편집]



3.1. 튜더스에서[편집]


파일:external/pds22.egloos.com/b0078460_4d88d338ec608.jpg
조스 스톤[24]이 연기했다. 원래는 제인 시모어 역의 오디션을 봤었다고 한다.

잉글랜드의 보통 여인들과 달리 카드나 유흥거리를 전혀 즐기지 않는 딱딱한 생활을 하고 자란 외국인인데다가 성공회를 믿는 잉글랜드와 달리 루터회 신자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잉글랜드로 출항하기 전 칼레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방문한 찰스 브랜던에게 잉글랜드식 예법이나 카드를 배우는 등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래도 영어를 유창하게 잘 구사하지 못해[25]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 서투른 듯 소심한 태도를 보인다. 헨리 8세가 자신을 보고 실망해서 무례하게도 냅다 가버렸음에도 "잉글랜드 예절에 익숙치 않았다."며 자신을 탓했고, 자신과 거의 동년배이며 미혼인 큰 의붓딸 메리 공주에게 신랑감으로 자기 사촌을 소개시켜주는 등 고운 심성을 보인다.

하지만 앤이 저렇게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헨리 8세는 앤과의 결혼을 무척 후회하고 "앤은 고집이 세다."며 앤을 탓하고 있었다. 앤 역시 이 상황에 조바심을 느끼면서도 헨리 8세와의 생활을 괴롭게 여긴다. 게다가 가톨릭 신자인 메리 역시, 앤이 개신교 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내심 탐탁지 않아했다. 그나마 그녀를 챙기는 것은 혼인을 주선했던 토마스 크롬웰이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앤은 "폐하가 나와 잠자리도 하지 않을뿐더러, 폐하의 다리 상처에서 악취가 나는 것이 괴롭다."고 크롬웰에게 토로하지만 크롬웰은 앤에게 "폐하에게 나긋나긋하게 굴라."고 다그치기만 할 뿐이다.

끝내 헨리 8세와 이혼한 뒤로는 왕의 누이로써 지내며, 재혼하지 않고 의붓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를 자기 딸처럼 돌보면서 산다. 또한 이전과 같은 소심한 태도는 온데간데 없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대하고 웃음이 많아졌다.

앤이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로 탐탁찮게 여겼던 메리도 아버지가 앤과 기어이 이혼하고 철딱서니 없고 경박하고 문란한 캐서린 하워드에게 빠진 것을 보고 한탄하며 "앤이야말로 정말 좋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앤과 이혼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한다. 찰스 브랜던 또한 그녀를 존중하며 따뜻하게 대한다. 앤은 찰스를 다시 만났을 때 "당신에게 배웠던 카드놀이 덕분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농담을 할 정도로 사교 스킬 만렙이 되었다.

캐서린도 처음엔 헨리 8세의 전 왕비인 앤을 경계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왕비로 인정하며 예의를 갖추고 다정히 대하자, 갈수록 경계가 풀어지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받은 선물을 앤과 나누어 갖겠다고 할 정도로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이후 헨리 8세가 찾아오자 같이 식사를 하면서 결혼 반지를 돌려주고, 헨리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자신이 결혼 전 클레페에 있을 때의 답답했던 생활에 비해 음악을 듣거나 와인을 마시는 등 잉글랜드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는 것에 무척 행복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캐서린에게 슬슬 질려가던 헨리 8세는 자신이 모르던 앤의 면모에 낯설어하고 당혹해함과 동시에, 앤의 성숙함에 끌리게 되고 결국에는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한다. 정작 부부일 때에는 한 번도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극도의 아이러니. 자기가 버릴 때는 언제고.


3.2. 식스 더 뮤지컬[편집]


튜더 가의 여섯 왕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식스 더 뮤지컬에도 출연한다. 테마색은 빨간색, 음악적 영감은 리한나, 니키 미나즈에게서 받았다. 한국 초연 배우는 김지선, 최현선. 솔로 넘버는 Get Down이며, 역사 속 문제의 초상화를 그리는 Haus of Holbein도 클레페의 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른 왕비들은 우승을 위해 헨리에게 당한 수모를 노래하지만, 클레페는 헨리와 이혼한 뒤 리치먼드 성에서 자유롭고 호화롭게 사는 삶을 힙합 풍으로 노래한다. 이때 무대엔 클레페를 위해 왕좌가 나오고, 클레페는 넘버 중간에 겉옷을 벗는다.[26]

우승을 위해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호소하지만, 사실 들어보면 전혀 아닌 게 웃음 포인트.[27] 결국 Get Down을 다 부른 후 클레페 자신도 자신이 우승할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대결에서 빠진다.

이외에도 싸우는 왕비들 틈에서 자기 흑사병 걸렸다고 뻥을 치며 어그로를 끌거나, 하워드에게 '얼굴로 까여서 마음아프다'[28]라고 디스당하기도 한다.

왕비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쓰는 마지막 넘버인 SIX에서 클레페는 고향의 홀바인의 하우스로 돌아가고, 고지식한 예술가들에게 놀고 즐기는 법을 알려준 뒤 프로이센으로 투어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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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년엔 헨리 8세의 궁정화가로 일했는데, 제인 시모어캐서린 하워드의 초상화 역시 그의 작품이다.[2] 이원복의 《세계사 산책》에선 앤의 실물을 보고 헨리 8세는 경악하다 못해 "초상화는 어떤 거지발싸개가 그렸어??" 라고 펄펄 날뛰었다. 토머스 크롬웰이 한스 홀바인이라면서 어떻게든 기분을 달래보려고 한건 덤. 물론 안 먹히고 헨리 8세는 "결혼 안해! 아니 못해!"라고 소리치고 크롬웰은 그래도 나라 체면이 있지 않냐고 말린다. 정작 헨리 8세 자신은 후술했듯이 고도 비만이었고 이를 반영한건지 다음 아내(4번째)는 무조건 미녀로 뽑아오라고 지시하는 그를 보며 신하가 "지는 허리둘레 52인치인 주제에..." 라고 속으로 디스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진짜 이딴 말 꺼냈다간 목을 내놔야 한다.[3] 여담으로 그녀와의 결혼조차도 그 성격이 많이 반영되었다.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첫 남편인 아서가 죽고 7년간 고독하게 생활했는데 이런 모습은 시련을 겪는 공주이 연상되게 만드는 것이었고 그런 공주님과 자신이 결혼하면 자신이 그 공주님을 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거기다 개인적으로도 이 때는 정말로 카탈리나를 사랑했다. 애초에 이혼하겠다고 난리친 7년을 제외해도 17년 간(7년을 더하면 24년) 부부로 지냈고 이는 헨리 8세의 모든 왕비들의 결혼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길고 24년은 합친 기간의 2배에 달한다.[4] 당시 헨리 8세는 49세였고 안나는 25세라 헨리가 안나보다 무려 두번 돌아 띠동갑이었다. 또 헨리 8세는 몇 해 전에 입은 다리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해졌는데도 엄청나게 먹어대서 허리 둘레가 40인치를 넘어 50인치에 육박할 정도로 몸이 엄청 비대해져 있었다. 폐하 양심이...[5] 이 때 그가 한 말도 가관이다. "바다 건너에서 암말이 왔구나!!!!" 이 대사는 드라마 《튜더스》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약간 바뀌어서 "생긴게 완전히 말과 같아! 털 없는 암말이라고!"(She looks like a horse! A furless mare!)[6] 이 때문에 과거 앤 불린에게 푹 빠진 것이었다. 이래놓고 정작 결혼한 뒤에는 앤 불린에게 현모양처가 되기를 기대한 것이 후일 둘의 사이가 벌어진 원인 중 하나였지만.[7] Anna라는 이름은 영미권 국가에서도 사용되지만(발음은 '애나'), 영국은 오랫동안 Anne만 사용해왔다. 그래서 안나가 영국에서는 앤이라고 불린 것. 오늘날에도 애나(Anna)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 공주가 아예 없고 여전히 앤(Anne)만 고집한다. 이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영연방 국가나 미국에서는 애나라는 이름의 여성을 흔하게 볼 수 있지만(물론 요즘 기준으로 낡은 이름이라 20대 사이에서는 엄마 세대 이름 취급받는다.), 영국에서는 평민들 특히 그중에서도 미들이나 워킹 클래스가 쓰는 이름으로 취급하는 듯(…)[8] 가톨릭이나 정교회와 달리 개신교에서는 성만찬에서 빵이 직접 예수의 육신으로 변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당시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은 존 위클리프의 전통을 되살려 화체설을 부인하고 가톨릭 교리는 빵을 우상으로 섬긴다고 비난했다.[9] 제인 시모어 제외[10] 헨리 8세는 장신에다 거구로 유명했고 마리 드 기즈도 180cm가 넘는 엄청난 장신이었다.[11] 앤 불린은 자신의 처형 전에 사형집행관에게 내 목이 가늘어서 조준하기 쉬울 것이라고 농담을 했다.[12] 이렇게 결혼한 제임스 5세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다. 하지만 마리 드 기즈는 본인의 목은 건사하여 천수를 누린 건 좋았지만, 정작 메리 여왕은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목이 잘리는 비운을 맞이했다. 심지어 남편마저도 헨리 8세와의 전투에서 패한 후 태어난 애가 딸이라는 말에 낙담하여 죽었다(...) 복수인가?[13] 폐위당한 전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2세와 카를 5세의 여동생 이사벨라의 딸. 헨리 8세의 첫 왕비였던 아라곤의 카탈리나는 그녀의 대고모였다. 때문에 크리스티나는 헨리의 청혼을 더욱 부정적으로 여겼다. 이 일화는 드라마 《튜더스》 에도 나온다.[14] 한스 홀바인은 당대에 초상화의 모델들을 직접 본 사람들이나 모델이 된 의뢰인들로부터 그 묘사의 높은 사실성과 신뢰성에 대해, 많은 찬사를 받았고 또 그 특출한 묘사력 덕분에 30대가 되기 전부터 이미 독일과 영국 양쪽에서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던 사람이다.[15] 실제로 앤과 이혼한 이후에도 궁정화가 직을 유지했다. 다만 하필 크롬웰 라인이라 그가 참수당하고 나선 곤란한 처지에 놓이긴 했었다고.[16] 다만 앤 불린은 흑발흑안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져서 하얀 피부금발벽안을 제일로 치던 당시 미의 기준에는 전혀 부합하지 않았던 케이스였던지라 미의 기준이 다양해진 오늘날에는 앤도 미녀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정작 금발벽안에 하얀 피부를 지녔던 제인 시모어는 그닥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고 헨리 8세의 여섯 아내들 중에서 가장 평범한 외모였던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실 초상화만 봐도 제인이 가장 평범하게 생겼다. 헨리 8세의 아내들 중 당대에 미인이라고 평가받은 기록이 있는 건 헨리가 잔인하게 버린 첫번째 아내 아라곤의 카탈리나, 헨리가 가시 없는 장미라고까지 부를만큼 미모가 출중했지만 간통죄로 참수시킨 다섯번째 아내 캐서린 하워드 정도다.[17] 헨리 8세 가라사대 자신이 여자 경험이 매우 많아서 처녀와 처녀가 아닌 여자를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단다(…) 그렇게 앤과 이혼한 다음 맞아들인 새 아내 캐서린 하워드의 경우를 보면 헨리 8세의 이런 자부심이 터무니없다는 걸 알 수 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의 체구가 가냘프고 가슴이 작다는 이유만으로 숫처녀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캐서린은 숫처녀는 커녕 결혼 전인 14살 때부터 이미 몇 명의 남자와 성경험을 했고, 결혼 후에도 남편 이외의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는 등 요즘 기준으로도 꽤나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던 여자였다.[18]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서는 이를 두고 "앤이 독일인이라 영 꼬시는 재미가 없어서(...) 이혼했다."라고 서술했다. 크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앤의 이런 빈약한 성지식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니 반만 맞은 셈.[19] 카를 5세의 동생이자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였던 로마왕 페르디난트 1세의 3녀.[20] 가톨릭에는 이혼이라는 개념이 없고 혼인무효화가 있었는데 만약 카탈리나의 결혼이 무효화 당하면 그 사이에 난 딸 메리 공주는 하루아침에 사생아 취급을 받고 최악의 경우 왕위계승권도 상실할 수 밖에 없다.[21] 단 첫째 부인이었던 캐서린이 50세에 세상을 떠났기에 나이로 따지자면 가장 오래 살지는 못했다.[22] 사실 앤과 인원왕후 외에도 숙종의 다른 가족들과 헨리 8세의 가족들은 서로 비슷한 포지션이 많아서 한국사와 영국사 둘 다 웬만큼 아는 사람들은 두 왕실 가족을 서로 빗대어 보며 재미있어하기도 한다.[23] 숙종은 말할 것도 없이 헨리 8세, 캐서린은 인현왕후, 앤 불린은 희빈 장씨, 제인 시모어는 숙빈 최씨(영조의 어머니), 클레페의 앤은 상술되었다시피 인원왕후와 비슷하다.[24] 본업인 가수로서 더 유명하다. 배우는 부업에 가깝다.[25] 《튜더스》에서는 자막을 극혐하는 영미권 시청자를 위해서인지 독일어 억양이 매우 강한 서툰 영어를 구사하는데, 정작 실제 앤은 헨리 8세와 결혼할 때도 영어를 아예 몰랐다(…) 헨리 8세가 앤에게 전혀 끌리지 못했던 건 앤이 자기 취향의 외모가 아닌 것과 정략적인 가치가 떨어진 점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앤이 독일어만 할 줄 알아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던 것도 있었다.[26] 겉옷은 하워드의 넘버가 시작했을 때 잠시 퇴장해서 다시 입고 온다.[27] 클레페는 자신이 나이많고 못생긴 왕에게 차이고 어마어마한 돈을 받아 리치먼드 성으로 이사해야 했고, 성에 자기를 간섭할 남자조차 없다고 비극이라고 주장한다(...)[28] 하워드는 자신의 차례에서 다른 왕비들을 디스하는데, 클레페에게만 진심이라는 듯한 말투로 디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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