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렌스 세이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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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렌스 세이도르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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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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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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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클라렌스 세이도르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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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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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 2007
파일:ESM.png






클라렌스 세이도르프의 기타 정보







네덜란드의 축구 감독


파일:clarence-manager.jpg

이름
클라렌스 세이도르프
Clarence Seedorf
본명
클라렌스 클라이드 세이도르프[1]
Clarence Clyde Seedorf
출생
1976년 4월 1일 (48세)
수리남 파라마리보구 파라마리보시
국적
[[네덜란드|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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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 [[수리남|

수리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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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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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76cm / 체중 82kg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2],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AFC 아약스 (1992~1995)
UC 삼프도리아 (1995~1996)
레알 마드리드 CF (1996~1999)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9~2002)
AC 밀란 (2002~2012)
보타포구 FR (2012~2014)
감독
AC 밀란 (2014)
선전 FC (2016)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2018)
카메룬 대표팀 (2018~2019)
국가대표
78경기 11골 (네덜란드 / 1994~2008)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지도자 경력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6. 세이도르프에 대한 말말말
7. 여담



1. 개요[편집]


네덜란드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

아약스, 레알 마드리드, AC 밀란에서 활약했으며, 축구 역사상 최초로 3개의 클럽에서 UCL 우승을 차지한 선수이다.[3][4] 은퇴 후에는 AC 밀란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2.1.1. AFC 아약스[편집]


프랑크 데 부어, 로날드 데 부어,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에드가 다비즈 등 과 함께 AFC 아약스 유스에서 훈련을 받았고, 클럽 데뷔를 한 세이도르프는 데뷔 초 오른쪽 미드필더로 출장을 하였다. 1992년, 당시 그는 16세 242일의 나이로 아약스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웠다. 루이 판 할 감독 아래에서 그는 주목할 만 한 성장세를 보여왔고, 그의 우상인 프랑크 레이카르트와 함께 1994/95 시즌 무패 더블 달성이라는 기록 등을 앞세운 1990년대 아약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일원이 된다.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에드가 다비즈, 윈스턴 보하르더, 마이클 레이저허르와 함께 '데 카벨'이라고 불리는 아약스를 대표했던 흑인선수 5인방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2.1.2. UC 삼프도리아[편집]


다만 세이도르프는 아약스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무대를 찾아 나서게 되고 보스만 룰로 아약스와 재계약을 하지 않고 1995/96 시즌, UC 삼프도리아로 이적을 했다. 삼프도리아에서 아약스에서의 기량을 그대로 보여주며 삼프도리아를 리그 8위까지 안착시킨다.


2.1.3. 레알 마드리드 CF[편집]


그리고 삼프도리아로 이적한지 1년만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했고, 1996/97 시즌, 이적 첫 시즌만에 팀의 라리가 우승에 일조, 두 번째 시즌인 1997/98 시즌에는 유프 하인케스 체제 아래 팀의 코파 델 레이 우승과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더블에 일조한다. 세이도르프는 레알에서 페르난도 레돈도와 함께 호흡을 맞췄고, 이 조합은 레알 마드리드의 20년만의 빅이어를 되찾아오기에 충분했다. 다만 세이도르프와 레알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하고 레알을 떠나 인테르로 이적하게 되었다. 레알을 떠나게 된 이유에는 한 가지 소문이 있는데, 바로 레알이 유벤투스로부터 지네딘 지단을 영입하기 위해 세이도르프를 트레이드 매물로 제안하였고, 그 소식을 들은 세이도르프가 상처를 받아 이적을 결심했다는 소문이 있다. 다만 그 전부터 1999/00 시즌, 거스 히딩크 감독 아래에서는 그렇게 좋은 폼을 보여주지 못하였고, 때마침 인테르가 2,300만 유로라는 당시에는 엄청난 거액을 레알에게 제시했으니 안 팔래야 안 팔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2.1.4.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편집]


그렇게 2000/01 시즌에 세리에 무대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인테르에서는 리그에서 유벤투스와의 경기에서 중거리 멀티골을 제외하면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먹튀로 낙인이 찍히며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으나,[5] 2002년 여름 이적시장, AC 밀란에서 프란체스코 코코와 세이도르프를 트레이드하자는 오퍼가 들어왔고, 인테르는 이를 수락하여 세이도르프는 로쏘네리의 일원이 된다.


2.1.5. AC 밀란[편집]


AC 밀란에서의 커리어는 말 그대로 화려했다. 그는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 아래서 안드레아 피를로, 젠나로 가투소와 함께 중원을 구성하였고 이 중원 조합은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보여주며 2002/03 시즌, 이적 첫 시즌부터 후이 코스타안드리 셰브첸코, 필리포 인자기의 대활약을 앞세운 AC 밀란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하게 된다. 이로서 세이도르프는 3번째 빅이어를 들게 된다. 2003/04 시즌에서는 밀란에 카카가 합류하면서 밀란의 전력은 더욱 괴랄해졌고, 세리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세리에 우승을 차지하며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리그에서 전부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2004/05 시즌에는 리그에서는 유벤투스에게 밀려서 2위를 차지했지만[6]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말 그대로 승승장구, 16강에서는 맨유, 8강에서는 인테르, 4강에서는 PSV를 꺾으면서 결승에 안착했지만 결승에서 리버풀에게 쓰라린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바로 2006/07 시즌에서 셀틱, 바이에른 뮌헨, 맨유를 꺾으며 다시 리버풀과 결승에서 맞붙었고, 이번에는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하여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2:1로 승리하여 리버풀에게 보기좋게 설욕하였다. 이로서 개인 통산 4번째 빅이어를 들게 되었고 이 시즌 UEFA 올해의 미드필더로 선정된다.


2.1.6. 보타포구 FR[편집]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사임한 이후 자연스레 세이도르프도 기량이 저하되며 황혼기를 보냈고, 2012년 브라질의 보타포구 FR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저평가되는 가장 큰 원인은 국가대항전에서는 유달리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데 있다. 1998 월드컵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에 요주의 선수로 꼽힌건 데니스 베르캄프, 파트릭 클루이베르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였을 정도이다. 이후 UEFA 유로 2000에서도 네임밸류에 비해 큰 활약을 하지 못했으며, 2002 한일 월드컵네덜란드의 예선 탈락으로 참가하지도 못한다. 이후 유로 2004부터는 감독인 마르코 반 바스텐과 불화가 겹쳐 국대 동료인 마르크 판보멀과 국대를 은퇴하기에 이르게 된다.[7] 30대 이전에 국대 78경기의 기록을 보면 이 선수가 국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선수인지 알수 있겠지만 역시 클래스에 비해 대단한 활약을 해주진 못했다.[8]


3. 플레이 스타일[편집]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을 대표하는 육각형의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이다.[9][10]

패싱, 슈팅, 드리블, 체력 어느 하나 빠지는게 없이 특출났다. 특히 레이저같은 중거리 슛이 일품이다. 레이저 슛의 원천은 세이도르프의 엉덩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축구지능은 역대급인지라 미드필더 전 포지션을 어정쩡하게가 아닌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만능. 전성기 당시 우리나라에는 유럽 축구가 퍼지기 전이였고,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카카, 안드리 셰브첸코, 안드레아 피를로에게 쏠려있었기에 밀란 시절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아약스,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는 화려한 플레이와 정신나간 슈팅력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팀이 필요할 때마다 그 포지션에 맞게 보직 변경을 했었고 팀의 윤활유같은 존재였으며, 사실상 AC 밀란의 막장화도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안드레아 피를로의 노예화로 인한 부진 및 부상이 아닌 이 선수의 노쇠화가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11] 특히 알레그리 감독 시절에는 4-1-2-1-2 전술에서 다이아몬드 미들진 중 꼭짓점의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하며 투톱에 위치한 호비뉴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한테 창의적인 패스를 넣어주었다.

말년에는 축구 지능 및 센스가 여전했지만 체력이 심하게 떨어진 모습이 마티유 플라미니가 펄펄 뛰어다니지만 돌대가리인 것과 많이 대비됐었다. 노쇠화가 심해진 11-12 시즌에는 산책흑형이라 불리며 장수에 도움되시라는 팬들의 정성이 아주 지극했는데 그렇게 걸어다니는 와중에도 실력만큼은 여전해서 산책흑형을 축복하고 그의 장수를 기원하던 팬들은 이따금 슬퍼지곤 했다. 이러한 체력 저하를 상징하는 또다른 별명이 661형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2010-11 시즌 조별리그 레알 마드리드전에서 교체 투입으로 약 12분을 뛰었는데 활동량이 고작 661m에 불과했다는 경악할 만한 사실에서 비롯되었다.[12][13] 왠지 은유적이고 풍자적인 면에서도 비의적이고 암호적인 뉘앙스에 심지어 악마의 숫자 666까지 연상시키는, 그야말로 축구계에서 다시 나오기 힘든 불세출의 별명이라 할만하다.

이렇게 완벽해 보이는 선수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는데 기복이 매우 심하였다. 밀란 시절에는 그나마 나아졌지만, 레알 마드리드 입단 1년후, 인테르 시절 극심한 슬럼프를 겪어 레알 마드리드에서 핵심 선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쫓겨나듯이 인테르로 이적했고 인테르에서는 전혀 실력발휘를 못하고 프란체스코 코코[14]와의 맞트레이드로 AC 밀란에 이적하였고, 이는 밀란에게 있어서 신의 한수로 꼽히는 영입이였다. 밀란에는 당시 안드레아 피를로, 젠나로 가투소, 마시모 암브로시니, 페르난도 레돈도, 세르지뉴, 후이 코스타 등이 버티고 있었는데 이중 세르지뉴는 날개 포지션, 코스타는 공미, 레돈도는 부상으로 골골대고 있었고, 암브로시니는 주전으로 쓰기엔 뭔가 미심쩍었는데 세이도르프의 영입으로 카카-세이도르프-피를로-가투소로 이어지는 다이아몬드 미들진이 완성되고 이는 88~94년도의 밀란 제너레이션의 영광을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재현하는 데 있어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신체적으로는 그렇게 뛰어나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근육질 체형이었지만 키가 고작 176cm에 불과했던 것. 키가 무려 191cm였던 루드 굴리트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레알에서 약관의 나이에 10번을 달며 공격을 진두지휘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도 신체적으로는 최정상 레벨에서 특출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약간 내려간 위치에서 대성했다고 할 수 있다.


4. 지도자 경력[편집]


이후에는 브라질 리그에서 뛰다가 2014년 1월 15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동시에 AC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멀쩡히 현역으로 뛰다가 베를루스코니가 꼬셔서 감독직을 맡게 된 것이다.

부임 후 성적은 현 밀란의 선수단 수준[15]에 비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서 아직은 지켜봐야 하지만 밀란에서 사라진 위닝 멘탈리티를 되찾고 알레그리 시절 무전술에서 벗어났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직 초짜 감독이다 보니 전술의 미숙함이 아직까지 눈에 띈다는 지적이 있다.[16] 초중반엔 좀 해맸으나 후반에 5연승을 하며 분위기가 괜찮았으나 UEFA 유로파 리그로 올리기엔 쉽지 않았고, 결국 아탈란타전에서 역전패하며 힘들어졌다. 그러던 와중 현역이던 자신을 갑자기 선임한 은 다른 감독을 찾고 있다. 밀란 팬들은 괜히 레전드 데려와서 버리는 거 아니냐고 분노하고 있다.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17] 시즌 뒤 경질되고 필리포 인자기가 후임 감독으로 팀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인자기는 알레그리 이상의 무전술과 세이도르프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형편없는 선수단 장악력으로 전 시즌의 8위를 넘어선 시즌 10위를 기록, 역시 부임 1시즌 만에 사실상 해고를 눈앞에 두고 있다

다만 경질을 당한 후 밀란 선수들이 집단으로 그를 디스하는 것을 보면 성적은 준수했지만 선수들과의 관계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렇게 똥을 싸던 주제에 제깟것들이 뭔데 팀에서 10년간 공헌한 레전드 출신 감독을 디스하느냐며 선수들에게 반감을 드러내는 팬들도 존재하는 상황이다.

2016년 중국 갑급 리그선전 FC에 부임했으나, 성적 부진으로 1년 만에 해임되었으며 후임은 스벤 예란 에릭손이라고 한다.

2018년 라리가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취임했다. 계약기간은 잔여 시즌까지. 세이도르프에게 데포르티보는 감독 경력 명예 회복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였으나 팀은 부진 끝에 18위로 강등, 결별이 유력해보인다.

2018년 8월 5일,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 동행하는 수석코치는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네덜란드식 축구를 이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한다.

돈만 보고 중국에 가면 국대에 안뽑는다는 엄포를 놓았다. 아마도 중국에서 감독 생활을 할 때 태업을 하는 외국인 선수들을 많이 본 것으로 보인다.

감독 데뷔전인 코모로 원정 경기부터 그렇게 허세를 부리며 아시아 리거들을 싹 제외하고 철저하게 유럽파 선수들로만 꾸려갔으나 카메룬 축구 역사상 역대급 졸전을 펼치며 1-1 무승부를 거둔 뒤 아시아 리거들을 뽑으라며 맹비난을 받고있다.[18]

이대로라면 1년짜리 계약 기간을 채우긴 커녕 빠른 시일 내에 경질이 유력해보였기 때문에, 10월부터는 "중국파는 안뽑는다"는 허세를 철회하고 바소고그는 넣었다.(무칸조는 세이도르프의 중국파 배제 방침에 빡쳐 국대를 사퇴한다고 선언) 그럼에도 불구하고 10~11월 A매치에서 4전 1승 1무 2패를 거두는 저조한 성적을 내었다. 그나마 1승은 약체 말라위.

3월 코모로와의 경기에서 3-0 완승을 거두며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2019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16강에서 나이지리아에 패해 탈락한 후 전격 경질되었다. 경기 직후 카메룬 체육부 장관이 라커룸으로 직접 전화해서 해임을 통보했다고 한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5.3. 수훈[편집]


  • 오라녜나사우 훈장


6. 세이도르프에 대한 말말말[편집]


내가 보기엔 세이도르프야 말로 어떤 의미에서든 세계 최고의 선수다. 그렇게까지 완성도가 높은 현역선수가 또 있을까? 양발을 무기로 하며 롱패스도 숏패스도 잘한다. 사이드에서도 중앙에서도 게다가 톱 아래에서도 절묘한 패스를 보낸다. 어디서든 어떤 자세로든 아무리 심하게 수비당해도 정확하기 짝이 없는 패스를 노리는대로 차는 선수다.

크리스티안 키부


그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고 매우 특별합니다. 그는 실력을 조금씩 향상시키고 있고 이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철학과 자신의 일을 실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카카


클라렌스 세이도르프는 지난 수십 년간 유럽에서 가장 완벽한 미드필더 중 한 명입니다. 그의 뛰어난 신체 준비는 그가 모든 것을 얻었던 프로 축구에서 오랜 경력을 가질 수 있게 했습니다.

레알마드리드(공식 홈페이지)


7. 여담[편집]


  • 에레디비시 최연소 선수 기록 : 1992년 아약스에서의 첫 경기 당시 나이는 16세 242일로 이것은 2018년 3월 11일 세프 판덴베르흐 가 데뷔 (16세 81일) 하기 전까지는 최연소 기록이었다.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미드필더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미드필더들 중 4위에 이름을 올렸다.

  • 그의 조카들 중 상당수가 축구선수로 활약 중에 있다. 콜린, 레길리오, 케인, 셔윈, 쿠엔틴 등이 있다. 그러나 삼촌만큼 성공하지는 못했다.

[1] 국제음성기호로는 /ˈklɛrəns ˈseːdɔrf/. 이름인 'Clarence'와 'Clyde'는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한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네덜란드어 표기법 규정을 적용시키지 않는다.[2]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3] 아약스 94-95, 레알 마드리드 97-98, AC 밀란 02-03, 06-07.[4] 세이도르프 외에는 사무엘 에투(99-00 레알 마드리드, 08-09 바르셀로나, 09-10 인터 밀란)만이 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에투의 경우에는 99-00 시즌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는 조별리그 3경기(몰데 FK와의 2경기, FC 포르투와의 1경기)만 교체출전으로 뛴 다음 99-00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서 RCD 마요르카로 임대된 후 00-01 시즌을 앞두고 마요르카로 완전 이적을 한 케이스 이기 때문에, 세이도르프처럼 모두 우승 시즌 내내 해당 클럽에 소속되어 활약한 것은 아니였다.[5] 당시 인테르의 감독이었던 마르코 타르델리가 똥을 싸지른것을 감안하면 세이도르프의 기량하락을 세이도르프에게만 책임을 돌리는건 억울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엑토르 쿠페르가 와서 인테르를 어느정도 정상궤도에 올리는 동안에도 세이도르프는 폼을 회복하지 못했으니 기량 저하에는 본인의 책임이 제일 큰 것도 맞다.[6] 2004-05 시즌은 우승팀 유벤투스가 승부조작 사건을 일으키며 우승 기록이 말소되었고 우승팀이 없는 시즌이 되었다.[7] 봄멜은 은퇴 번복하긴 한다. 참고로 반봄멜의 장인은 2010년 월드컵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은 베르트 판마르베이크이며, UEFA 유로 2012네덜란드가 삽질하면서 반 마르베이크 감독이 경질되자 반 봄멜도 장인의 경질에 충격을 받아 다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8] 프란체스코 토티알레산드로 델피에로 또한 클럽에서의 활약에 비해 국대에서의 활약이 저조했던 선수들이었다. 그나마 토티는 유로 2000 준우승 당시 대회 MVP급 활약을 보여주면서 좋은 평가를 받을만한 업적을 기록했으나, 델피에로는 그 유로 2000 결승전에서 여러 찬스를 놓지면서 유로 2000은 델피에로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9]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후반까지 활약한 선수 가운데 파트리크 비에이라, 미하엘 발락, 질베르투 실바, 제 호베르투, 에메르송과 함께 전술 이해도가 뛰어난 선수로 꼽힌다. 또한 비에이라나 질베르투 실바가 자국 동료인 지네딘 지단이나 히바우두와 같은 걸출한 플레이메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의 존재로 인해 전문 공미를 맡은 적이 적은 것과 다르게 세이도르프와 발락, 제 호베르투는 정말로 미드필더 전 포지션에 걸쳐서 골고루 뛰었었다.[10] 한때 스페인 대표팀, FC 바르셀로나의 핵심 미드필더인 안드레스 이니에스타의 최종 완성형으로 바로 이 선수가 꼽힌 적도 있을 정도. 그러나 이것은 이니에스타의 플레이 스타일이 완성되기 전인 08-09 시즌 이전의 이야기로, 세이도르프와 이니에스타의 롤은 확연하게 다르다. 또한 현재 세간의 평가는 이니에스타가 확실히 우위에 있다.[11] 젠나로 가투소의 경우엔 대체자인 암브로시니, 브로키등이 있었으며, 안드레아 피를로가 빠지면 세이도르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게 가능했지만, 세이도르프가 빠지면, 피를로와 가투소 사이에서의 패싱 밑 공격전개 연결을 수행할 선수가 없어져버려, 08-09 시즌 AC 밀란처럼 카카의 치달에 의존하는 상황만이 나올수 밖에 없었다. 카카마저 이적해버린 09-10 시즌 밀란은 말 그대로 눈이 썩는 경기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당시 호나우지뉴, 알레샨드리 파투, 세이도르프, 주세페 파발리가 없었으면 강등권도 이상하지 않았을거란 말도 들을 정도이다. 이때 피를로, 가투소는 부상 및 부진으로 골골대어 제대로 활약을 못하였다. 결국 밀란은 피를로를 포기하고 전술을 갈아 엎어버린다.[12] 90분으로 환산하면 5km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 리오넬 메시가 챔스 13-14 시즌 8강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 존재감 없었다고 비난받았을 때 활동량조차 6.8km였다.[13] 세이도르프보다 나이가 많은 필리포 인자기가 교체 투입되어 멀티골을 기록했기에 더 비교되었고, 세이도르프가 산책하는 추가시간에 페드로 레온이 동점골을 넣었기에 더 까였다.[14] 대한민국 vs 이탈리아의 16강전 당시 레프트백으로 양파망을 쓴 그 선수다. 본래 말디니의 뒤를 이을 차세대 수비수이자 조각외모로 이탈리아 내에서는 탤런트 뺨치는 외모로 인기를 끌었으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성공을 한게 문제일까... 이후 방탕한 생활 및 자기관리 미숙으로 유리몸 생활을 하다 말디니보다 빨리 은퇴하고 모델 및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15] 명성과 이름값에 비해 제 실력을 발휘하는 선수가 마리오 발로텔리, 카카뿐이다.[16] 4-2-3-1 전술이 선수들에게 녹아든다면 급속도로 무서워진단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지금 밀란에겐 미묘한 전술이라 팀에 전술을 맞추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17] 세이도르프 부임기간의 성적을 중국식 계산으로 시즌 전체로 확대해보면 해당 시즌 4위를 기록한 피오렌티나의 성적보다도 좋다.[18] 대표팀 주장인 벵자맹 무캉조와 17년 네이션스컵 대회 MVP인 크리스티앙 바소고그 두명을 제외하니 공격 전개가 하나도 안되며 장렬하게 멸망했다. 또한 선수들이 전술을 따라가지 못해서 진거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세이도로프 본인도 지고있는 상황에서도 전술변화는 커녕 감독석에 앉아서 눈만 끔뻑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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