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잔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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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과 해석
2.1. 예복의 해석


1. 개요[편집]


15 같이 앉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겠습니다." 하고 말하자

16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17 잔치 시간이 되자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자기 종을 보내어 준비가 다 되었으니 어서 오라고 전하였다.

18 그러나 초대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못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으니 거기 가봐야 하겠소. 미안하오.' 하였고

19 둘째 사람은 '나는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러 가는 길이오. 미안하오.' 하였으며

20 또 한 사람은 '내가 지금 막 장가들었는데 어떻게 갈 수가 있겠소?' 하고 말하였다.

21 심부름 갔던 종이 돌아와서 주인에게 그대로 전하였다. 집주인은 대단히 노하여 그 종더러 '어서 동네로 가서 한길과 골목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하고 명령하였다.

22 얼마 뒤에 종이 돌아와서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다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고 말하니

23 주인은 다시 종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

24 잘 들어라. 처음에 초대받았던 사람들 중에는 내 잔치에 참여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루가의 복음서 14:15~24 (공동번역성서)


성경루가 복음서14장에서 등장하는 이야기. "큰 잔치 비유" 라고 되어있는 해당 문서명과는 다르게 가톨릭 성경에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라고 소개되고, 공동번역성서에서는 아무런 부제나 소제목 없이 전개된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내용을 다루는 마태오의 복음서 22장에서도 공동번역성서는 아무런 제목없이, 가톨릭 성경에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라고 소개된다.

루가의 복음 14장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와 사도 일행이 어느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묘사한다. 해당 비유는 수종병자를 고치면서 안식일에 대해 물어보고[1], 상석과 끝자리를 통해 겸손에 대해 가르치고[2], 잔치에 초대한 이에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초대하라고 당부하는 부분[3] 이후에 전개된다.


2. 내용과 해석[편집]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개최했으나 손님이 단 한 명도 없자 주인은 광고를 한다. "제가 잔치 준비했으니 얼른 오세요." 하지만 초대를 받은 사람 모두가 다 사양한다. 성경은 그들이 사양한 사유를 더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어떤 이는 밭을 샀는데 이를 보러 가야 하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하고, 다른 이는 겨릿소[4]를 샀기에 몰아봐야 해서 못 간다라고 하고, 마지막 사람은 자신은 방금 장가를 들었기에 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종이 이 소식을 전하자 주인은 화가 났는지 "일단 갈 데 없는 장애인들 싹 다 데려오고 그래도 없으면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 억지로라도 다 끌고 와." 라고 한다. 그리고 처음 초대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잔치에 가지 못하고,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만 그 좋은 잔치에 가게 된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에 정통했던 유대인들은 정작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니 그를 거절했다. 그 자들은 절대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지만, 아무리 낮고 천한 자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2.1. 예복의 해석[편집]


참고로 마태복음 22장에서 위와 거의 비슷한 일화로 왕이 주최한 혼인 잔치에는 응하였으나 마지막 부분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석한 사람을 왕이 꾸짖고 밖으로 쫒아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여러 해석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를 설명하면, 고대 이스라엘 결혼 문화에서는 하객 예복은 주최측이 제공하는 것이 관례 이다. 일화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정황상 거지나 노숙자, 쪽방촌민, 장애인, 전쟁난민, 불치병자, 과부, 고아, 소년소녀가장, 가출청소년, 빈곤청년, 치매노인, 폐지수거 노인, 독거노인, 구조조정 실직자, 학폭 및 가정폭력 피해자, 전세사기 피해자, 기초생활수급자, 산재노동자, 이주노동자, 신용불량자 등등 당장 하루 먹고 살기도 힘겨운 온갖 사회취약계층이 초청 받아서 몰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뻔히 아는 정부측에서 그들에게 예복은 각자 알아서 마련해오라는 건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요구이므로, 하객들은 오랜 관례대로 행사장에 이미 준비된 예복을 입고 참석한게 확실하다.

또한, 굳이 고대 국가의 행사를 들먹이지 않아도, 요즘 시대에 국가규모의 행사를 실시할때도 사회 취약계층을 초청하는 경우는 자주 있다. 이런 경우에도 공통적으로 필요한 의복이나 물품은 국가에서 기획하고 일괄 지급 하는 것이 원칙이지 참여하는 개인이 알아서 준비하라는 식은 사회적 통념에도 맞지 않으며 당장 언론에 비난을 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공공기관등과 관련해서 업무를 진행해 본 사람들이라면 그런식으로 행사를 기획하진 않음을 알 것이다.

즉, 나중에 행사장에서 쫒겨난 사람은 형편이나 상황이 안 돼서 무슨 허름한 런닝 바람으로 참석 했을 거란 추측은 애초부터 앞뒤가 맞지 않는 논리이고, 그는 사실상 처음부터 아예 고의로 행사복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쉽게 예를 들자면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랑하기 위해, 또는 지도층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사제 명품 같은 것을 입고 참석한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입고 온 옷이 얼마나 좋고 안좋은가라는 식의 평가는 전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하객은 주변 지인이 여는 동네 잔치 수준이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실시하는 행사의 규정을 멋대로 무시하고, 한 나라의 통치자가 정성들여 준비한 성의 마저 대놓고 거절한 셈이다. 그 오만한 태도에 당연히 국왕은 분노 할만 했고 이는 그 하객의 신분에 관계 없이 현시대 기준으로도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결례다. 하객이 강퇴 당하면서 한마디 변명 조차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의 큰 잔치가 천국 혹은 구원을 비유한다는 점은 표준적인 기독교 성서신학적 해석에서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서에서 입지 않아서 쫓겨나는 '예복'이 무엇을 의미하냐에 대해서는 몇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중세 이후 전통적으로 이때의 '예복'은 기독교식 '세례'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해왔다.[5] 즉, 구원의 요건으로서 기독교식 세례를 뒷받침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신구교와 동서교회가 동일한 해석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6]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비유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출발점이고, 부가적인 의미를 덧붙인다. 특히, 마태복음서의 비유에서 주어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다시 예복을 주지 않는다는 지점을 재세례에 반대하는 논리로 본다.#

개신교 중 칼빈의 칭의론을 받아들이는 교파에서는 칭의론적 해석에 따라 옷을 '그리스도의 의'로 해석하고 신자는 그것을 입어야('의롭다'라고 칭함을 받음)만 천국 잔치를 온전히 즐길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본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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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께서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일이 법에 어긋나느냐? 어긋나지 않느냐?" 하고 물으셨다." 루가 14:3[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루가 14:11[3] "그러므로 너는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같은 사람들을 불러라." 루가 14:13[4] 소 두 마리로 끄는 쟁기를 겨리라고 하며, 이를 끄는 소를 겨릿소라고 한다[5] 갈라디아서 3장 27절의 상응.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 2판 1244항 ('세례성사' 부분)에서 "혼인 예복을 입다" 참조. [6] 단, 세례를 구원의 요건이 아닌 단순한 상징으로 이해하는 침례회나 재침례파 계열에서는 결코 '옷'='세례'라는 전통적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칭의론에 따른 해석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7] 덧붙여 아르미니안주의를 따르는 일부 교회들에서는 (주어진) 옷을 입지 않는 것을 두고 "칭의를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 내세우는 자기 의나 철학, 행위 등으로는 해당 자격이 주어질수 없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특히나 자신들의 의와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바리새인들이 이 비유를 듣고 화를 냈던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연관지어 보면 더욱 의미심장하다."라고 해석한다.[8] 대표적으로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에서 선호하는 '호크마 주석'이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호크마주석은 더 나아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결어를 마태가 후대에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청중과 논적(論敵)을 향한 결론적 경구로서 진정한 예수의 말씀임을 부인(否認)하기 어렵다."라는 이해할 수 없는 첨언을 덧붙인다. 후에 첨가되었는지 여부는 그것이 신학적 의미를 가지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지학적으로 오래된 판본에서 해당 구절이 발견되느냐에 있다. 즉, 호크마는 고고학적 근거들을 무시하고서라도 해당 구절을 고수해야한다고 주장할 만큼 편향된 것이다. 또한 통상적으로 '부름'의 행위를 칭의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부름'과 별개인 예복까지 칭의로 이해하는 것은 과잉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란 시각도 있다. 다만, 처음에 왕의 초청을 받고도 온갖 핑계를 대고 불응하거나 소식을 전달하는 국가 공무원들 까지 잡아 모욕하고 살해한 부류도 있는 것으로 볼때 ‘ 부름’ 자체가 칭의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 편이다. 즉, 잔치의 ‘부름’ 이란 초청 자체는 왕의 분노로 군대에 의해 멸망 당하는 사람들(지옥에 가게 되는 악인들)이나 나중에 쫒겨나는 사람이나 누구나 받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