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슬리 모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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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3. 차종
3.1. 1939~1942년형
3.2. 1946~1952년형
4. 여담
5.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Crosley Motors Incorporated (크로슬리 모터스 주식회사)

1939년부터 1952년까지 존속한 미국의 경차 제조사. 미국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에 본사와 연구개발시설을 두었다.


2. 역사[편집]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에 보급형 라디오, 냉장고를 비롯한 가전제품과 방송사업으로 성공한 미국의 사업가 파월 크로슬리 주니어(Powel Crosley, Jr.)가 인디애나 모터 스피드웨이에서 1939년 4월 28일에 첫 차를 공개하며 출범했다.

파월 크로슬리 주니어는 청소년기에 단순한 구성의 자작차를 만드는가하면 20대에 자신만의 자동차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투자자를 모집하려고 했으며, 가전제품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타이어를 비롯한 자동차 애프터마켓 용품 사업을 했을 정도로 자동차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파월 크로슬리는 사업 리스크 때문에 자동차 사업 진출을 만류하는 동업자이자 동생 루이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의 아메리칸 밴텀이 영국에서 도입해 온 오스틴 모터 컴퍼니의 보급형 자동차 세븐을 벤치마킹하여 1937년에 첫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인디애나 주 마리온의 리치몬드에 공장을 세운 뒤 크로슬리 모터스 주식회사(Crosley Motors Incorporated)를 출범하며 보급형 자동차 시장을 겨냥했다.

첫 신차는 1939년형으로 출시된 휠베이스 2,032mm의 2인승 경차로 워키쇼 엔진(Waukesha Engines)으로부터 공급받은 공랭식의 2기통 12마력(hp) 637cc 수평대향 엔진에 싱크로메시가 없는 3단 수동변속기를 맞물렸으며 서스펜션은 전후륜 모두 빔 액슬 + 리프 스프링 조합, 여기에 공차중량이 454kg 수준에 불과해 최고시속과 연비는 각각 50mph(약 80km/h)와 50mpg(약 21.3km/l)를 기록했다. 판매는 크로슬리가 기존에 확보한 2만 5천 곳의 가전제품 판매망을 통해 이루어졌고, 당대 시작가격 325~350달러를 책정해 오스틴 세븐을 따돌리고 미국에서 가장 저렴한 신차로 등극했다.

크로슬리 모터스의 신차판매는 1939년 첫 해에 2,017대를 생산하는 것을 시작으로 1940년에는 422대가 판매될 정도로 수요가 미미했으나 1940년형에서 가격을 299달러로 인하하고 2도어 컨버터블 쿠페, 2도어 컨버터블 세단의 2가지뿐이었던 라인업을 다양하게 확장하며 1941년에는 2,300대에 달하는 생산대수를 확보했다. 또한 크로슬리는 태평양 전쟁에 따른 전시상황으로 인해 연료 배급제가 시행되는 상황에서 연비라는 장점을 어필하며 인기를 끌었고, 정부의 명령에 따라 민수용 자동차 생산이 중단된 1942년까지 1,029대를 더 생산하며 총 5,757대의 차를 생산했다. 특히 크로슬리는 이 시기 미국에서 가장 늦게까지 민수용 자동차 제조를 지속하는 기록을 남겼다.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전시상황 동안 크로슬리는 경형 군수차량을 제조하는 등, 군수품 제조에 집중했다.

전쟁이 끝난 후 파월 크로슬리는 크로슬리 모터스를 제외한 모든 사업부를 매각했으며, 신규 경차 라인업인 CC 시리즈를 1946년형 신차로 출시했다. 유선형 펜더가 강조되는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디자인 트렌드에 충실했던 A 시리즈 및 CB 시리즈와 달리, 유선형 2.5박스 패스트백 스타일에 평평한 측면부의 현대적인 디자인을 동일한 휠베이스 위에 구현하며 1946년형 카이저-프레이저와 함께 대량생산차 최초로 채용하는가하면 파워트레인도 군수차량에 먼저 사용한 수냉식의 코브라(CoBra, Copper Braced) 724cc 직렬 4기통 엔진으로 교체하며 오버헤드 밸브 구성이 주류였던 시절에 대량생산차 최초로 오버헤드 캠샤프트 구성의 엔진 헤드를 채용하고, 최고출력도 26.5마력(hp)까지 상승했다. 가격도 2배 수준으로 상승했으나 크로슬리는 전시상황 동안 신차에 굶주려 있었던 미국의 신차수요를 등에 업고 1946년에는 4,999대, 1947년에는 1만 9천 대 이상, 1948년에는 2만대 이상을 판매하며 이전보다 높은 판매량과 2년 연속 흑자를 기록해 연 8만대의 생산대수를 전망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CC 시리즈의 코브라 엔진이 민수용 차량의 유지보수가 불안정한 운행환경과 맞지 않아 품질문제가 속출하는 악재를 겪었다.

이 악재에 대응하여 크로슬리 모터스는 같은 사이즈에 코브라 엔진 대비 내구성을 개선한 CIBA(Cast Iron Block Assembly) 엔진을 개발해 1949년형의 크로슬리 CD 시리즈에 적용하고 라인업도 다각화하여 복륜 타이어와 트럭 베드를 추가할 수 있는 경지용 다목적차 팜오로드(Farm-O-Road), 전쟁 이후 미국 최초의 국산 대량생산 스포츠카인 크로슬리 핫샷(Hotshot)과 슈퍼 스포츠(Super Sport), SUV의 "Sports Utility"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직접 적용한 스테이션 왜건 기반의 오픈형 모델 스포츠-유틸리티, 미제차 최초의 강철 바디 스테이션 왜건 라인업[1]과 4륜 디스크 브레이크 탑재 등의 의의를 남겼다.

나아가 크로슬리 모터스는 슈퍼 스포트를 통해 모터스포츠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코브라 엔진과 디스크 브레이크에서 불거진 신뢰성 문제로 인해 나빠진 평판을 수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1950년대가 다가오면서 제너럴 모터스, 포드 모터 컴퍼니,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3대 미국 자동차 대기업이 가격경쟁으로 전국의 중소규모 자동차 제조사들을 위기에 빠트리고 미국 소비자들도 다시 기존의 대형차를 찾기 시작하며 크로슬리 신차 대신 비슷한 가격의 중고차를 구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경영난에 빠진 크로슬리 모터스는 결국 판매량을 회복하는 데 실패하여 1952년 7월 3일에 신차생산을 중단, 폐업했다.

크로슬리 모터스는 이때까지 약 8만 4천대의 차를 생산했으며, 공장과 CIVA 엔진의 판권은 각자 다른 곳으로 매각되어 제너럴 타이어 앤 러버(General Tire and Rubber)가 공장을 인수했다.


3. 차종[편집]



3.1. 1939~1942년형[편집]


크로슬리 모터스의 첫 차종으로,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전시상황 돌입 전까지 생산되었다.#

보급형 경차로 기획됨에 따라 각종 설계를 단순화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연료 펌프 없이 중력에 의존하여 연료를 엔진으로 공급하는 엔진룸의 4갤런(약 15.2L) 연료탱크,[2] 기계식 브레이크, 미닫이식 창문, 수동식의 단일 와이퍼 암이 적용되었으며 엔진 동력을 변속기에서 구동축으로 전달하는 관절부인 유니버설 조인트도 제거하고 고무 재질의 엔진 마운트로 대체, 토크 튜브를 통해 엔진 동력을 직접 구동축으로 전달했다.

  • 시리즈 1A
1939년형 라인업으로 캔버스탑에 2열 쪽창이 있는 4인승의 컨버터블 세단, 2열 쪽창이 없는 2인승의 컨버터블 쿠페로 구성된 2개 라인업으로 운영되었다. 두 차량은 2열 쪽창의 유무, 그리고 도어 프레임의 모서리[3]로 구분할 수 있다.

  • 시리즈 2A
1940년형 라인업으로 컨버터블 세단에 고급형 트림인 딜럭스(Deluxe)가 신설되었으며 신규 라인업으로 목제 바디가 적용된 스테이션 왜건, 그리고 1열 캔버스탑이 적용된 상용밴인 파크웨이 딜리버리(Parkway Delivery)가 합류했다. 외형상으로는 앞뒤 펜더 사이에 발판처럼 생긴 바디컬러 스커트가 추가되었다.

  • 시리즈 CB41
1941년형 라인업으로 픽업, 캔버스탑이 적용된 스테이션 왜건인 커버드 왜건(Covered Wagon), 그리고 신규 상용밴 라인업인 패널 딜리버리(Panel Delivery)가 추가되었다. 또한 유니버설 조인트가 없는 구동계 설계에서 신뢰성 문제가 발생함에 따라 기술적으로도 개선이 이루어져 엔진 마운트의 재설계, 구동축의 유니버설 조인트 추가, 윤활장치 설계 수정은 물론 엔진의 내구도를 항상시키고자 엔진 실린더의 스트로크를 줄이고 엔진 베어링도 접촉면을 넓혔다. 이에 따라 가격도 339~496달러로 상승했다.

  • 시리즈 CB42
1942년형 라인업으로 철제 지붕이 적용된 리버티 세단(Liberty Sedan)이 라인업에 합류했다. 가격은 468~582달러로 다시 상승했다.

3.2. 1946~1952년형[편집]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시상황이 해제되며 생산이 시작되었다. 괄호의 연도는 년형이 아닌 생산기간 기준.

  • CC 포(CC Four, 1946~1948)
  • CD 포(CD Four, 1948~1952)
  • 핫샷(Hotshot, 1949~1952)
크로슬리가 처음으로 출시한 스포츠카 모델. 별도의 승객석 문이 없는 2인승 로드스터 차체를 적용했다. 보다 효율적인 무게 배분을 위해 엔진을 앞 차축 뒤에 배치하는 FMR 구조를 채택한 것이 특징으로, 제원상으로는 26.5마력의 미약한 힘을 내었으나 공차중량이 500kg이 채 되지 않았기에 시속 80마일(130km/h)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 슈퍼 스포트(Super Sport, 1951~1952)
  • 팜오로드(Farm-O-Road, 1950~1952)
초경량 다목적 오프로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업용 차량이지만 일반 도로, 심지어 고속도로에서도 레저용으로도 운행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고안되었다. 상대적으로 험로주행에 취약한 FR 구동방식을 채택함에 따라 험로 및 비포장 노면에서의 높은 기동성을 위해 뒷바퀴에 복륜 구성을 채택하고 농기계용 오프로드 타이어가 장착되었다. 이외에도 동력인출장치(PTO)포트가 차량 전면에 위치하여 농기구를 차량에 부착해 사용할 수 있었다.

4. 여담[편집]


  • 크로슬리 차종을 전문으로 다루는 오너 클럽이 있다. 1969년에 설립되어 2024년 기준 800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또한 메인 페이지를 통해 크로슬리 차종들의 중요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5. 참고 자료[편집]




[1] 이때까지만 해도 스테이션 왜건은 강철 대신 목재로 승차공간을 만들었으며, 이 시기 목재 바디가 적용된 스테이션 왜건들은 "우디 왜건(Woody wagon)"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2] 컨버터블 쿠페 기준. 컨버터블 세단은 6갤런 연료 탱크가 후방에 설치되었다.[3] 컨버터블 쿠페는 둥근 모서리, 컨버터블 세단은 각진 모서리가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