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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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군
奉祀君

9세손
공등


13세손
공패

14세손

공복

15세손

공방


16세손
공균

17세손

공지

18세손

공손

19세손

공요

20세손

공완


21세손
공선


서진

22세손
공진


23세손
공억

24세손

공무

25세손

공의

26세손

공선


정사
-
공정

-

공정지

-

공계지

-

공은지

-

공혜운

-

공매

-

공과

32세손

공영철


27세손
공승


28세손
공령진

29세손

공문태

30세손

공거

31세손

공장손


31세손
공장손


32세손
공사철


33세손
공덕륜

34세손

공숭기

35세손

공수지


당나라

35세손
공수지

36세손

공훤

37세손

공재경

38세손

공유질

39세손

공책

40세손

공진

41세손

공소검


오대십국시대

41세손
공막

43세손

공인옥


북송

44세손
공의

45세손

공연세

46세손

공성우

46세손

공숭원


연성공
衍聖公

46세손
공숭원

47세손

공약몽


46세손
공숭원

47세손

공약허


48세손
공단우


48세손
공단조

49세손

공번

50세손

공증

50세손

공총

51세손

공원조


48세손
공단우

49세손

공개

50세손

공진

51세손

공문원

52세손

공만춘

53세손

공수


원나라

51세손
공원용

52세손

공지전

51세손

공원조

53세손

공정


53세손
공치

54세손

공사성

54세손

공사회

55세손

공극견

56세손

공희학


명나라

56세손
공희학

57세손

공눌

58세손

공공감

59세손

공언진

60세손

공승경†

61세손

공홍서

61세손

공홍태

62세손

공문소

63세손

공정간

64세손

공상현

65세손

공윤춘†

65세손

공윤식


청나라

65세손
공윤식

66세손

공흥섭

67세손

공육기

68세손

공전탁

69세손

공계호†

70세손

공광계

71세손

공소환

72세손

공헌배

73세손

공경용

74세손

공번호

75세손

공상가

76세손

쿵링이


중화민국

76세손
쿵링이

77세손

쿵더청


77세손
쿵더청

79세손

쿵추이창


†: 추증




중화민국 7대 고시원장
32대 연성공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파일:공덕성.jpg
한문
孔德成
한국식 독음
공덕성
영문
Kung Te-cheng

달생(達生)

옥여(玉汝)
출생
1920년 2월 23일 중화민국 산둥성 취푸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지닝취푸시)
사망
2008년 10월 28일 중화민국 타이완성 타이베이현
(現 중화민국 신베이시)
국적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학력
가정교육
직업
교육인, 정치가
고시원장
재임 기간

7대 1984년 9월 1일 ~ 1993년 4월 24일

1. 개요
2. 생애
2.1. 온 중국이 주목하는 탄생
2.2. 마지막 연성공
2.3. 초대 봉사관
2.4. 대만에서의 삶
2.5. 역임 지위
3.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
4. 이모저모
5. 주요경력
6.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중화민국의 정치인. 공자의 77대 후손으로 공자의 후손들이 대대로 세습하던 작위인 연성공을 마지막으로 세습했던 인물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다.


2. 생애[편집]



2.1. 온 중국이 주목하는 탄생[편집]


1920년, 산동성 곡부에서 전대 연성공인 쿵링이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쿵링이의 첩 왕보취였고 쿵더지(孔德齊 1915-1940)와 쿵더마오(孔德懋 1917-2021) 등 누나 2명이 있었다.

쿵더청이 태어나기 이미 9년 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나라가 멸망하고 북양정부가 수립된 후였지만 공자의 종손(宗孫)이 태어남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쿵링이가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쿵더청은 전 중국의 주목을 받으면서 출생했다. 쿵링이가 사망전 쉬스창에게 왕씨가 임신 5개월이라고 상주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중화민국 내정부는 공씨 일족에게 왕씨의 임신 사실을 입증할 서류를 성장공서를 통해 보고하게 하였다. 이에 공부 족장 공흥환(孔興煥), 공상체(孔祥棣), 공령예(孔令譽), 공령후(孔令煦) 등이 중국 의사 류금패와 독일 의사 루돌프를 보내 왕씨를 진단하게 했고 결과를 정부에 제출했다. 이에 쉬스창은 왕씨가 임신한 몸임을 공인하였다.

왕씨의 뱃속에는 공자의 유일한 종손이 있을 수도 있었으므로 엄중한 대우를 받았다. 우선 왕씨를 위해 안채 후원에 별도의 주방을 만들어 두 사람이 식사를 만들어 왕씨에게 올렸는데 왕씨는 이 사람들이 만든 음식이 아니면 절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또한 딸이 태어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곡부의 공씨 일족들과 절강성의 남종 일가들이 모두 모여서 딸이 태어날 경우에 작위 세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논했다.

대총통 쉬스창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혹시나 아이가 뒤바뀌는 일을 막기 위하여 엄중히 곡부에 초소를 세우고 장군의 지휘 아래에 경호하였다. 5대10국 시대의 혼란기에 공자의 후손을 참칭한 사태가 벌어졌던 적이 있었다. 공씨 종가에서 대대로 노비를 한 공말(孔末, 원래는 유劉 씨)이 곡부에 있던 모든 공씨를 죽이고 자신이 종손인 것처럼 행세하다 사실이 들통나 그 역시 사형을 받았다. 당시 어린 종손 공옥인이 외가에 가 있던 터라 대가 끊기지 않을 수 있었다.

아들이 태어나길 기원하기 위해 공부의 불당루와 전당루의 송자관음상에서 제상을 차리고 불공을 드렸고, 공자의 제사 때만 여는 중광문까지 열고 아들이 태어나길 기원했다. 만일을 대비하여 외국인 의사들까지 불러온 상황이었지만 전통을 중시하기 위해 곡부의 모든 산파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가졌다.

몇 시간 동안 고통스러운 분만이 이어졌지만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 공덕제와 공덕무는 매우 쉽게 태어났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아무래도 이번에는 아들이 나오는 모양이라고 흥분했고 하인들이 폭죽과 오색비단, 붉은 종이를 준비하였다. 산파들이 중광문만 여는 것으론 부족하니 곡부현성의 정남문도 열라고 요구했다. 정남문도 황제가 올때나 공자의 제사 때만 여는 곳이었지만 이번에도 관례를 깨고 열어놓았다. 그런데도 분만이 계속되자 누군가 후화원의 지세가 높아 전당루를 누르고 있다면서 앞의 지세를 높이라고 했다. 이에 "노반이 여덟장을 높였다."라고 쓴 나무패를 전당의 각 문에 걸어놓았고 얼마 후에 쿵더청이 탄생했다.

쿵더청이 탄생하자 즉시 이를 축하하기 위한 예포 12발이 발사되었고 공부의 각 문에는 채색등불을 걸었다. 그리고 하인들이 징을 치면서 거리로 뛰어나가 "작은 성인이 태어났다."고 알렸다. 공흥환이 즉각 대총통 쉬스창, 국무총리 진윈펑, 내무총장, 산동성장에게 "선 연성공 령이의 첩 왕씨의 유복이 음력 정월, 초나흘 사시에 남자아이를 출산하였는데, 모두 무사하다."라고 전보를 보내며 작위 계승을 요청했다. 1920년 4월 20일, 쉬스창은 쿵더청을 대총통령으로 연성공에 봉했다. 쿵더청을 낳은 왕보취는 불과 17일 후에 사망했다.
파일:공덕성 생모 왕씨.jpg
쿵더청의 생모 왕씨


2.2. 마지막 연성공[편집]


쿵더청을 키우기 위해 공씨 문중은 즉각 유모를 물색하였다. 하지만 쿵더청은 입맛이 까다로웠는지 젖을 먹지 않고 울기만 했고 10여명의 유모를 찾았으나 그때마다 탈이 났다. 결국에는 공부의 의사인 유몽영이 데려온 유모 장씨의 품에서 쿵더청이 얌전해졌다고 한다. 공씨 문중은 장씨에게 매일 아침에 돼지 뒷다리를, 저녁에 닭 한마리를 삶아 주었고 하루에 2근 반의 찐빵을 먹였다. 그리고 장씨의 남편에게는 10여무의 채소밭과 몇칸짜리 집을 내려주었는데 쿵더청이 9살에 젖을 완전히 뗀 후에도 이후 30여년 동안 공부에서 같이 살았다.

쿵링이의 정실 부인인 도씨는 쿵더청과 공덕제, 공덕무를 교육하기 위해 두개의 사숙을 건설하여 신식교육을 받은 왕육화(王毓華 1887-1952) 를 초빙하여 자식들을 가르쳤다. 왕육화는 공덕성의 평생 스승으로 공덕성이 장성한 이후에도 공부에 머물며 공덕성을 도왔고 중일전쟁이 일어나 공덕성이 충칭으로 몸을 피했을 때는 공부에 남아 공부의 업무를 처리하는 걸 도왔다. 1949년 국부천대 당시 공덕성이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가자 고향으로 돌아가 1952년 사망했다.

공자의 종손이 전통을 잊어버릴 것을 염려하여 국학에 정통한 한림 출신의 장해란과 거인을 지낸 여금산 등을 초빙하여 국학에 대해서도 가르치게 했다. 고로 쿵더청은 사서오경을 비롯한 전통교육과 더불어 수학, 영어, 지리, 역사를 비롯한 현대교육도 받아야 했다. 1924년에는 궐리명덕중학이 세워졌다. 이는 이듬해 명덕중학으로 개편되었고 쿵더청은 명덕중학 교장 겸 학생이 되었다.
파일:연성공사제.jpg
왼쪽부터 공덕성의 큰 누나 공덕제, 둘째 누나 공덕무, 공덕성 그리고 세 남매의 스승 왕육화

1925년 손봉전쟁이 일어나자 공씨 문중은 산동군벌 장쭝창에게 곡부현에서는 전쟁을 하지 말아줄 것을 호소했다. 쿵링이와 의형제였던 장쭝창은 이를 수락하였고 공씨 문중이 답례하기 위해 제남을 방문하자 자신의 아들인 14살의 장제악과 쿵더청이 의형제를 맺게 하였다. 1924년 북경정변의 발생으로 청나라 소조정이 폐지되고 국민혁명으로 북양정부가 멸망하고 중국 국민당이 영도하는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공씨 문중은 국민당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공화국에서 세습작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작위 취소를 청했으나 국민정부는 중화문명의 계승을 천명하였기 때문에 이를 당장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쿵더청을 보호하였다.

1929년 2월에는 도씨가 사망하면서 쿵더청과 공덕무, 공덕제가 공씨 문중의 주인이 되었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벌어진 반장전쟁 기간 동안 곡부도 전쟁에 휘말렸는데 특히 1930년 중원대전에서 옌시산 군대가 산동에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공묘와 임묘가 포격으로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조선 유림계에서 1931년, 안향의 후손 안순환의 지원으로 위문단을 파견하여 곡부에서 쿵더청을 만나 위로의 뜻을 전달했다. 장제스, 펑위샹, 쑨커 모두 이에 대한 위로전문을 보내왔다.

이 시기 장제스, 펑위샹, 쑨커, 쿵샹시, 다이지타오 등 많은 군정요인의 방문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이 건국된 후 만주국 황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선통제가 즉위했다.


2.3. 초대 봉사관[편집]


파일:공덕성결혼식.jpg
1936년, 쿵더청의 결혼식

1935년 1월 18일. 국민정부는 연성공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라는 관직으로 대체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중앙관리 중에서도 가장 높은 직위인 특임관의 지위를 부여하였다. 쿵더청은 맹자의 종손 맹경당(孟慶棠), 안회의 종손 안세용(顔世鏞), 증자의 종손 증번산(曾繁山) 등과 함께 제남과 산동성부에 들러 주요 관리들과 인사한 후 난징으로 갔다. 안세용은 복성(復聖)봉사관, 증번산은 종성(宗聖)봉사관, 자사의 종손은 술성(述聖)봉사관, 맹경당은 아성(亞聖)봉사관에 봉해졌다. 3월 1일에는 공자의 남종 후손들이 남종봉사관에 임명되었다. 7월 8일,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천리푸 등 국민정부의 고위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쿵더청은 국부 예당에서 정식으로 봉사관에 취임했다.

광활한 중화민족, 유교를 널리 알린다.
대동 세계, 예의로써 나라를 흥성시킨다.
명을 받아 제사를 받듦을, 대대로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성실하게 공경하면서, 악장을 영원히 계승한다.
성인의 도리로 교화하고, 종묘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선인의 유적을 본받아서, 지키면서 영원히 알린다.
쿵더청의 취임선서

다이지타오는 쿵더청에게 "소년이 영민하고 품위있고 소박하며 조상의 미덕을 계승하여 완성하고 잘 지키어 친인들이 경축할 일이다!"라고 칭찬하며 효경 등의 여러 책을 선물로 주었다. 취임 후 쿵더청은 국민당 중앙대표 저민의와 재정부 대표 공상면과 함께 공원거리 부자묘에서 고묘 의식을 거행했다. 이후 상하이에서 쿵샹시가 주재한 환영 연회에 참가한 후 곡부로 돌아왔다. 곡부로 돌아온 후 출퇴근 시간과 각자의 역할, 근무수칙을 새로이 정하고 회계제도를 정비하여 공부를 개혁하였다.

1936년 12월 16일, 공부 후당루 건물에서 손가내(孫家鼐, 1827-1909)의 증손녀 쑨치팡(孫琪芳)과 결혼식을 올렸다. 손가내는 청나라의 학자 겸 정치가로 과거에서 장원을 차지한 사람. 한족으로는 최고의 직위라고 할 수 있는 대학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증손녀 쑨치팡과 달리 신해혁명 이전의 인물이라 한국식 독음으로 표기.) 결혼식에는 중국의 명사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장제스 역시 참석할 계획이었으나 4일 전 서안 사건이 발생하면서 장쉐량에게 감금당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장제스가 갇힌 줄 몰랐던 하객들은 장제스를 위해 기다렸으나 오후 2시에 72사단장 손동훤이 장제스가 참석할 수 없다고 알려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에서는 중체서용의 정신을 표방하기 위해 쿵더청은 중국식 예복을 입었으나 손가내는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결혼식도 중국식과 서양식을 섞은 형태로 치러졌다. 국민정부 주석 린썬,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 전 대총통 쉬스창, 차오쿤, 고시원장 다이지타오, 엽초창,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 쑹저위안, 주중 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 판첸 라마 9세 등 전 중국의 명사들이 선물을 보내왔으며 심지어 상하이의 청방 우두머리 황진룽도 선물을 보내왔다.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도 국민당 명의로 예물을 보냈다.

쿵더청의 명망을 노린 일본 제국에서도 쿵더청을 포섭하기 위해 수시로 학자들이나 정치인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냈다. 도쿄에 공묘를 건설하는 등 쿵더청에게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며 1935년에는 도쿄의 공묘인 사문회가 건설된 후 쿵더청을 초청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쿵더청을 중국의 황제로 옹립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하지만 쿵더청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자신을 얼굴마담으로 이용하려는 수작임을 눈치채고 초청을 거절했다. 이후로도 일본에서 집요하게 쿵더청의 방일을 요구했으나 쿵더청은 병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국민혁명군 72사단장 손동훤이 산동성 정부가 이미 황하를 건너 피했으며 장제스가 쿵더청을 내지로 피신시키라고 지시했다고 알렸다. 당시 아내 쑨치팡(孫琪芳)이 막 임신한 상태인데다가 자신이 곡부를 떠나면 제사지낼 사람이 없어서 쿵더청은 당황했지만 일본인들이게 이용당할 수는 없다고 여겨 결국 9촌 아저씨인 공영욱(孔令煜)에게 제사를 책임지게 하고 자신은 수행원들을 데리고 우한으로 피신했다.

우한으로 가던 중 호북성에서 장녀 공유악이 태어난다. 쿵더청은 우한에서 항일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우한 함락 후에는 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했다. 충칭에서 장제스의 배려로 봉사관부를 설치하고 국민참정회에 출석하는 등 정치활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공자 탄신일은 무척이나 성대하게 거행되었는데 장제스는 엽초창을 대표로 파견하였으며 고시원 대표 임상민, 민정청장 이수춘, 산동교육청장 하사원 등 수십명의 정부대표가 참석했다.

파일:1947년공덕성일가.jpg
1947년의 쿵더청 일가


2.4. 대만에서의 삶[편집]


1949년, 국부천대 시에 장제스의 특별지시를 통해 스승 여금산 등과 함께 대만으로 이주했다. 1955년, 국립대만대학 중문과와 인류학과 겸임교수로 초빙되어 교편을 잡게 되었다. 타이베이 공자묘를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만인궁장의 문패를 직접 썼다. 중화문명의 정통을 자처하는 국민정부의 안배에 따라 총통부 자문위원, 고시원장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한국에도 몇차례 방문하였다. 1959년에는 서울 성균관에서 열린 석전대제에 참석했으며,(대한뉴스 영상)1980년에는 대한민국의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퇴계 이황에게 참례를 올리고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휘호를 남겼으며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예일 대학교의 연구원으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고시원장으로 재임하던 1988년 1월 13일 장징궈 총통이 사망하자 부총통 리덩후이, 행정원장 위궈화, 입법원장 예문아, 사법원장 린양강, 감찰원장 황존추, 장징궈의 3남 장샤오융과 함께 <경국선생유서>에 서명한 후 장징궈가 사망한 당일에 발표했다.

1989년, 장남 쿵웨이이가 만 50세에 심장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 대만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말년까지 꾸준히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 강연하였다. 2006년, 손자 쿵추이창이 결혼식을 올리고 증손자 쿵유런을 낳았다.

파일:external/www.kong.org.cn/083407.jpg
쿵더청(공덕성)[1], 쿵추이창(공수장)[2], 쿵유런(공우인)[3]

2008년 대만 타이베이현에서 작고했다. 사과 수출 문제 때문에 대만을 방문 중이었던 김휘동 당시 안동시장이 조문하였다. 안동시는 그가 생전 방문한 도산서원이 있는 등 마침 인연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후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직위는 쿵더청의 손자 쿵추이창이 잇게 되었다.


2.5. 역임 지위[편집]


지위
임기
연성공
1920년 6월 6일 - 1935년 7월 7일[4]
대성지성선사봉사관
1935년 7월 8일 - 2008년 10월 28일[b]
제헌국민대회 대표
1946년 - 1948년[c]
국민참정회 참정원
1947년 - 1948년[d]
국민대회 대표
(1기)1948년 - 1991년 12월 31일[*c ]
총통부 자정(자문위원)
1948년 -2000년 5월 19일[5]
2002년 5월 20일 - 2006년 5월 19일[6]
타이완성립농학원(국립중흥대학)중문과 겸임교수
1949년 - 1955년[e]
국립대만대학 중문과/인류학과 겸임교수[7]
1955년 - 2008년 10월 28일[*b ]
대륙회복설계위원회 위원
1957년 -1962년[*d ]
국립고궁중앙박물원 연합관리처 주임위원
1956년 7월 - 1964년 4월[*e ][8]
대만 서예학회 고문
1964년 - 2008년 10월 28일[*b ]
고시원 원장
(7기)1984년 9월 1일 - 1990년 8월 31일[*c ]
(8기)1990년 9월 1일 - 1993년 4월 24일[*e ]
산동 곡부 사범학교 명예교장
2005년 6월 26일 - 2008년 10월 28일[*b ]
산동 곡부 공자연구원 종신명예원장
2007년 2월 - 2008년 10월 28일[*b ]

3.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편집]


대륙에 누나 쿵더마오를 비롯한 친족들이 일부 남았는데 중국 작가 위스춘의 책 '세가'에 따르면, 양안관계가 개선된 후 대륙에 잔류한 친족들이 공부가주를 가지고 대접하자 문화대혁명 중에 공림이 홍위병의 만행으로 파괴된 사실 때문에 분격하여 "우리 가문은 이런 술은 모른다(我们孔家没有这种酒)"고 함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적이 있다고 한다. 공부가주의 존재가 가짜라는 얘기가 아니라, 중공 정권이 문혁 시기의 만행에 대해 일체의 반성도 하지않은 채로,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만 노리고 환심을 사려는 것에 대한 반발을 드러낸 발언이다. 원래도 공산당이 타도의 대상으로 천명했던 공자의 후손인 그가 공산당과 친할 수 없는 관계였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공산주의보다는 유교를 일당독재의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공자를 이용하고 있다. 다만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에서는 대만도 자유롭지는 않다. 공화국이지만 국가가 특정 가문 종손을 위해 형식적이지만 관직을 만들어놓는다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것을 유지하고 있으니 말이다.[9][10]

쿵더청은 특히 문화대혁명 중 자행된 반달리즘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문제는 이 때 홍위병들이 가문의 무덤을 모조리 파헤치고 심지어 시체를 끄집어내 나무에 매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공산정권에 극도의 반감을 품어 1990년 1월, 누나 쿵더마오와 재회할 때도 중국 본토에서 만나기를 거부하고 일본과 대만에서 2차례 만났다. 다만 일본에서 이루어진 최초 상봉은 계획적 만남이 아니라, 일본에서 강연이 있을때 쿵더마오의 일본인 지인들이 황급히 쿵더마오를 초청하여 상봉을 주선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때의 만남은 겨우 30분 동안 이루어졌으며 제대로 된 상봉은 1995년, 쿵더마오의 대만 방문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쿵더청은 곡부의 공묘에 묻히지 않은 공씨의 종손 3명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묘는 신베이시 싼샤구에 있다.) 공씨 종가가 대만으로 이주한 현재는 앞으로도 계속 신베이에 공씨의 종손들이 매장될 것으로 예상된다.

4. 이모저모[편집]


대만 독립파들의 세력이 커질수록 이들이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극렬 독립파들 입장에서 공자와 그 후손은 대만인이 아닌 중국인, 즉 '외국인'이기 때문. 이들은 진정한 대만인은 본성인(민남인, 객가인)과 대만 원주민이고 외성인은 '중국'이라는 외국에서 이주한 이민자라고 여긴다. 대만취청의 4민족(원주민, 민남인, 객가인, 외성인) 중 하나도 외성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렬 독립파의 극단적인 시각으로 일반적이지는 않다. 앞으로 공씨의 종가는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랄 것이며, 독립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만인들은 몇 대째 대만에서 살아온 현재의 외성인들을 대만인으로 인정해주는 추세이므로 이들을 대만인으로 인정해주기는 할 것이다.

때문에 연성공 가문이 대륙으로 추방당하거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자연인'으로 대만에 사는 것과 '우리나라(중화민국)가 낳은 위대한 선현의 후손'으로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며, 대만이 중화권으로부터 독립하거나 중화권으로서의 정체성이 거의 옅어진다면 이 직책은 없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11] 다만 그렇게 될 경우, 중국에서 그와 유사한 직책을 만들 가능성이 높다.[12] 이미 남종 출신으로 하여금 공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있고, 과거 역사에서도 북종이 정통이 된 것은 공묘를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므로 이렇게 되면 남종 출신이라고 해서 정통성이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해외에서도 한 나라의 귀족 가문이 전쟁 등의 이유로 타국으로 이주해서 이주한 나라 사람이 되는 경우는 많다. 조선 왕족 중에도 일본으로 귀화한 모모야마 켄이치가 있다.

누나 쿵더마오는 문혁으로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유교가 다시 대륙에서 대접받는 지금은 정협위원을 3차례 지내고 영화 공자의 시사회에 초청받기도 하는 등 사회적 활동을 계속 했다. 2001년 정협중앙위원 자격으로 안동에서 열린 유교문화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하였고, 동생보다 장수하여 2018년 101세 나이로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 유림과 만나기도 했다. 생전에 베이징에 거주했는데, 2019년에는 한국공자문화센터 사람들이 베이징으로 찾아가서 문안을 올리기도 했다. 11월 15일 105세 나이에 병환으로 사망했다.


5. 주요경력[편집]


중화민국 역대 고시원장
파일:중화민국 고시원 휘장.svg
6대

7대

8대
유계홍

쿵더청
(1984년 9월 1일 ~ 1993년 4월 24일)

구창환


6. 참고문헌[편집]


  • 가란, 공자 家 이야기(서울: 선, 2010)
  • 신승하, 中國當代 40年史 : 1949 - 1989(서울: 고려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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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자의 77대손, 의자에 앉은 사람.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추이창의 조부.[2] 공자의 79대손, 아기를 안고 서 있는 사람. 현직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아버지인 쿵웨이이(공유익, 공자의 78대손)는 요절하여 봉사관을 맡지 못했다.[3] 공자의 80대손, 쿵추이창의 품에 안긴 아기. 차기 대성지성선사봉사관.[4] 폐지 [b] 사망 [c] 임기 만료로 퇴임 [d] 해산 [5] 장제스가 임용한 뒤에 역대 총통이 계속 임명했으나, 정권교체로 리덩후이 총통의 임기 만료와 함께 퇴임 [6] 천수이볜 총통이 재임용했다. 이후 천수이볜이 총통부 자정을 폐지하면서 퇴임. 총통부 자정 자체는 후임 마잉주 총통이 2009년에 부활시켰다. [e] 사임 [7] 중문과와 인류학과의 교수를 겸임해서 겸임교수가 아니다. 겸임교수 항목 참고. [8] 박물원에서 소장하던 사고전서회요(사고전서 본책이 아니다.) 여러 권이 1963년에 비 피해를 입은 것에 책임지고 사임하였다. [9] 다만 민주주의 국가라도 입헌군주국으로 왕실이 있는 국가들도 많으므로 이와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10] 애시당초 공씨 가문이 받은 작위인 연성공부터가 이미 정치적인 목적으로 수여된 것이다. 역대 중국 왕조가 대대로 우대한 공자의 가문을 품고 있다는 것은 중화로서의 정통성 확보에 큰 명분을 안겨주기 때문. 하지만 동시에 공씨 가문은 역대 중국 왕조의 가장 중요한 학문인 유교의 시조의 가문인 이상 예우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집안인 것도 사실이다.[11] 이미 리덩후이 총통 시절인 1998년에 정부 조직에서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의 업무를 보좌하는 부서가 사라지고 봉사관이라는 직책만 남았다가, 쿵더청이 사망한 2008년에는 무급직으로 바꿔버렸다.[12] 또는 이들을 중국 대륙으로 데려오려고 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