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달로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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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 해군
3.2. 프랑스 해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편집]


7년 전쟁 시기인 1758년 4월 29일 인도 카르나틱 해안의 쿠달로르 인근 바다에서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이 맞붙은 전투. 양측 모두 상당한 손실을 입었지만 퐁디셰리에 주둔한 프랑스군에게 추가 병력과 보급품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프랑스 해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2. 배경[편집]


1757년 3월, 아쉐 백작 안 앙투안 휘하의 해군 편대는 퐁디셰리에 주둔한 프랑스군에게 추가 병력과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파견되어 인도로 이동했다. 이 편대는 오는 도중에 지연되어 12월 17일에야 모리셔스 섬에 도착했다. 1758년 1월 27일, 아쉐 백작은 모리셔스에서 함대를 이끌고 인도의 카르나틱 해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때 장마가 내리는 바람에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4월 28일 새벽, 마침내 아쉐 백작의 함대가 세인트 데이비스 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워낙 험난했던 항해였기 때문에 350여 명의 병사들이 기아와 병으로 사망했다.

한편 영국 함대는 적의 증원 병력을 실은 함대가 세인트 데이비스 항에 도착했는 첩보를 접하고 즉시 이들을 요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조지 포콕 중장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세인트 데이비스 항을 봉쇄하기 위해 출격했다. 하지만 아쉐 백작은 영국 함대가 오기 전에 세인트 데이비스 항을 떠났고 남쪽으로 3km를 내려가 쿠달로르 항에 닻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조지 포콕 중장은 곧장 쿠달로르 항으로 진격했다.

3. 양측의 전력[편집]



3.1. 영국 해군[편집]


- 타이거: 대포 60문. 토머스 라담 대위 지휘.
- 샐리스버리: 대포 50문. 존 스톨리 서머셋 대위 지휘.
- 엘리자베스: 대포 64문. 리처드 켐펜페트 대위 지휘.
- 야머스: 대포 64문. 존 해리슨 대위 지휘. 포콕 중장은 이 배에 탑승했다.
- 컴벌랜드: 대포 66문. 윌리엄 브레튼 대위 지휘.
- 뉴캐슬: 대포 50문. 조지 레지 대위 지휘.
- 위머스: 대포 60문. 니콜라스 빈센트 대위 지휘.
  • 프리깃 1척
- 퀸버러: 대포 24문. 제임스 콜빌 대위 지휘.

3.2. 프랑스 해군[편집]


  • 사령관: 아쉐 백작 안 앙투안
  • 전열함: 8척
- Bien-Aimé: 대포 58문, 드 라 팔리에르 대위 지휘.
- Vengeur: 대포 54문. 보벳 대위 지휘.
- Condé: 대포 44문. 드 로바우 대위 지휘.
- Duc d'Orléan: 54문. 드 샤빌 대위 지휘.
- Zodiaque: 대포 74문. 드 가쵸 대위 지휘.
- Saint-Louis: 대포 50문. 조안니스 대위 지휘.
- Moras: 대포 44문. 드 부엑시에 대위 지휘.
- Duc-de-Bourgogne: 대포 60문. 다프예 대위 지휘.
  • 프리깃 1척
- Sylphide: 대포 36문. 마히 대뤼 지휘.

4. 전투 경과[편집]


4월 29일 오전 9시, 포콕은 쿠달로르 항에서 8척의 전열함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를 목격했다. 하지만 저들이 적인지 아군인지를 확신하지 못한 포콕은 9시 30분에 그들에게 신호를 보냈지만 아무런 대답도 받지 못했다. 이에 포콕이 전투를 신청하는 의미로 예포를 쏘자, 아쉐 백작은 함대를 수습해 바다로 나아갔다. 정오가 됐을 무렵, 양측은 쿠달로르 바다에서 대치했다. 포콕은 적으로부터 5km 이내까지 접근한 뒤 전방의 전선에게 전투 개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파도가 워낙 거칠어서, 일부 영국 함선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느라 전투는 오랫동안 지연되었다. 이윽고 오후 3시 영국 함대가 접근해오자, 프랑스 함대는 발포를 개시했다.

오후 3시 55분, 포콕 중장은 뉴캐슬, 위머스, 컴벌랜드 호에게 아쉐 백작이 탑승해 있는 Zodiaque호와 교전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세척의 배들은 우왕좌왕하며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다. 만약 프랑스 함대가 이 기회를 포착해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면, 영국 함대는 이로 인해 패배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Duc-de-Bourgogne호의 선장 다프예 대위는 멀찍이 떨어져서 대포알이 닿지 않은 거리에서 적을 향해 포화를 퍼부었다. 그리고 프리깃함 Sylphide호는 전열에서 이탈한 채 적과 맞붙었다가 금세 쫓겨났고 Condé호는 방향타를 잃고 패퇴했다.

이렇듯 프랑스 함대가 우왕좌왕하던 오후 4시 30분, 포콕 중장은 컴버랜드, 뉴캐슬, 위머스 호에게 재차 신호를 보내 돛을 올려서 Zodiaque호와 근접 교전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세 함선들은 뒤늦게야 Zodiaque호로 접근하여 Zodiaque호, Bien-Aimé호와 포격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Zodiaque호에 수송되어 있던 탄약 상자에 불이 붙어 폭발하자 프랑스 함대는 혼란에 빠졌다. 아쉐 백작은 뒤에 쳐진 프랑스 함대에게 구원을 청하기 위해 신호를 올렸지만, 그들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편 타이거 호는 적의 집중 포격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으나 샐리스버리호와 엘리자베스호의 지원 덕분에 기사회생했다.

전황이 이렇듯 심각해지자, 아쉐 백작은 전 함대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일부 함대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도주해서 다시는 합류하지 않았다. 아쉐 백작은 잔여 함대를 이끌고 영국 해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퐁디셰리로 향했다. 이렇게 해서 쿠달로르 해전은 막을 내렸다.

5. 결과[편집]


영국 해군은 이 전투에서 29명이 죽고 89명이 부상당했다. 야머스호는 마스트, 야드, 돛대, 그리고 조타에 큰 손상을 입었고 타이거호와 셀레스버리호는 너무 큰 손상을 입어서 더이상의 항해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함대를 추격하지 못하고 마드라로 돌아가 재정비해야 했다. 한편 프랑스 해군은 162명의 전사자와 36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으며 일부 함선들은 다른 곳으로 도주해버렸다. 그들은 4월 29일 저녁 10시 퐁디셰리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알프파르바 해변에 정박하여 휴식을 취한 뒤 다음날 퐁디셰리에 도착하여 1,200명의 병들고 지친 프랑스 병사들을 하선시켰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임무를 완수한 아쉐 백작은 부르고뉴 공작 다프예 대위가 전투 당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임한 것에 책임을 물어 해임하고 보벳 대위로 대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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