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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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작전
沒落作戰 | Operation Downf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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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몰락 작전 지도.jpg
몰락 작전 당시 미군의 진격 계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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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기준 점령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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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초 제해권을 보여주는 지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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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항공대 B-35 편대가 P-51-XRJ-30-MA[2] 호위 편대와 함께 공습을 하고 귀환하는 도중 일본 육군 항공대 소속 Ki-98의 공격을 받고 있는 모습의 상상도

1. 개요
2. 구성
2.1. 핵폭격
2.2. 올림픽 작전
2.2.1. 파스텔 작전
2.3. 코로넷 작전
2.4. 번외: 타국과의 합동작전
2.4.1. 소련
2.4.2. 영국
2.4.3. 중화민국
2.4.4. 대한민국 임시정부
2.4.5. 뉴질랜드: 프로젝트 SEAL
3. 방대한 작전 규모의 이유
4. 취소된 원인
5. 실행 시 예상 규모
5.1. 미군과 연합군의 예상 피해 규모
5.2. 일본군/민간인의 예상 피해 규모
6. 작전 실행 후 각국의 예상 시나리오
7. 각종 매체에서의 몰락 작전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The result of the futile and senseless German resistance to the might of the aroused free peoples of the world stands forth in awful clarity as an example to the people of Japan. The might that now converges on Japan is immeasurably greater than that which, when applied to the resisting Nazis, necessarily laid waste to the lands, the industry and the method of life of the whole German people. The full application of our military power, backed by our resolve, will mean the inevitable and complete destruction of the Japanese armed forces and just as inevitably the utter devastation of the Japanese homeland.

각성한 전 세계 자유인들의 힘에 대한 독일의 무의미하고 헛된 저항의 결과는 일본 인민들에게 하나의 사례로써 지독하고 명확하게 다가온다. 이제 일본에 집중되는 그 힘은 저항하는 나치에 가했을 때, 어쩔 수 없이 모든 독일 인민들의 산업과 삶의 터전인 땅들을 초토화시켰을 때보다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우리의 결의가 지지하는 우리의 모든 군사력의 적용은 일본군의 완벽하고 필연적인 전멸과 그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의 고향의 철저한 파멸을 의미할 것이다.

포츠담 선언 중 일부

몰락 작전(Operation Downfall / ダウンフォール作戦)은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 연합군이 구상했던 일본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한 공세 작전이다. 이 작전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소련-일본 전쟁의 발발로 일본 제국이 항복하여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만약 실행되었다면 연합국의 압도적인 군사 전력이 일본 본토에 그대로 투사됨으로써 일본 열도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투입되는 육해공 병력은 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에서 약 70만 여명, 코로넷 작전(Operation Coronet)에서 약 110만 여명으로 총합 180만 여명의 병력이 일본 제국 본토에 투사될 예정이었다. 이 또한 초기 투입 전력으로 작전이 장기화될 시 더 많은 전력이 투입되었을 것이며, 서방 연합국 뿐만 아니라 소련까지 일본 제국을 침공한 실제 역사를 고려할 때 일본을 공략하는 군사 전력은 매우 막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버로드 작전을 초과하는 분량의 대규모 상륙 작전으로써, 미국에서부터 태평양을 건넌 수백만 명의 보급을 필요로 하는 이 계획은 종전 시점에서 타국을 압도하는 산업력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만이 가능한 작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미국 또한 예상되는 천문학적인 인명피해[1]와 그로 인해 발생할 자국 내에서의 정치적 후폭풍[2] 등이 걸림돌이 되어 최대한 이를 피하고자 포츠담 선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으로 일제의 항복을 유도하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어 몰락 작전은 취소되었다. 따라서 항복을 선언한 일본이나 작전을 중단한 연합군이나 각자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이후 이를 대체해 일본의 점령과 통치를 위한 미군의 신속한 전개를 목적으로 블랙리스트 작전을 발동되었으며, 일본은 "GHQ"라고 불리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 의해 7년 간 관리되는 상태가 되었다.


2. 구성[편집]


이 작전은 크게는 올림픽, 코로넷 작전으로 구성된다.


2.1. 핵폭격[편집]


상륙전에 앞서 미군은 핵폭격으로 일본군의 방어선을 증발시켜버릴 계획을 짜고 있었다. 나가사키 핵폭격 직후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의 지시로 공병대의 존 헐(John E. Hull) 중장은 핵무기 책임자이던 라일 시먼(Lyle. E. Seeman) 대령에게 핵폭격 준비 상황을 묻는 전화를 걸었다. 이 통화를 기록한 녹취록에 따르면 라일 시먼 대령은 몰락작전 직전까지 최대 7개의 핵폭탄[3]을 준비할 수 있고, 투하 계획과 그 적당한 날짜에 대한 견해 그리고 핵무기 투하 후에는 될 수 있으면 6일 이상 아무리 빨라도 3일은 지나서 상륙 작전을 시작하고, 핵폭격 48시간 전까지는 어떤 병력도 핵폭격 지점에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한 상세한 매뉴얼도 준비된 상태였다. (출처) 거기에 비축된 핵무기를 전부 쓰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륙 뒤에도 핵무기가 만들어질 때마다 필요한 곳에 하나씩 폭격할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문제는 당시까지는 방사선이 뭔지 알고는 있었으나 위험성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라, 피폭의 위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작전이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원자폭탄 자체도 그냥 좀 많이 센 폭탄 정도로만 알려졌을 정도로. 게다가 폭심지에 미군을 상륙시켰다간 전후 피폭 후유증으로 미국 전역이 고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2.2. 올림픽 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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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남부의 일본군 배치와 미군의 상륙 예정지.

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은 1945년 11월 1일에 규슈 남부에 14개 사단 250,000명의 육군[4]과 90,000명의 해병대, 지원을 위한 항공모함 42척을 시작으로 전함 24척, 400척 이상의 구축함, 수천 대의 상륙정, 그리고 약 2,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작전이었다.

8월 17일(X-75일)부터 일본 본토 전역에 걸친 대규모 전략폭격, 항모 기동부대에 의한 전략 요충지[5] 핀포인트 폭격과 기동함대의 대규모 연안 함포 사격이 개시될 예정이었다. 이는 간토 및 혼슈와의 연락선 차단, 잔존한 일본 해군 함정의 격멸, 철도와 도로의 수습점, 중요한 교각이나 터널 등 교통 요충 시설 파괴, 상륙 지점의 일본군의 손실 도모가 목적이었다.[6]

또한 대륙에 전개한 일본 육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중국 본토 연안부나 시코쿠에서 견제 작전을, 최종적으로 10월 28일(X-4일)에 선발대로 정예 제158연대 전투단의 타네가시마 강습 상륙과 제40보병사단의 고시키지마 열도의 상륙도 함께 실행될 예정이었다. 10월 31일(X-1일)에는 항공 폭격 및 주력 전함 최소 20척을 동원한 전함의 대지상 함포 사격[7]을 상륙 지점의 포대와 발화점에 집중하여, 상륙지역 인근 해상과 육상의 모든 장애물을 배제하고 X-day인 11월 1일 오전 6시에 맥아더 원수의 진두지휘 아래 지상 주력본대에 의한 대규모 상륙을 개시한다.

이때 전함 24척 동원이 가능한지에 대하여 세어보면 일단 종전(1945.8.15) 기준으로 23척이 나온다.
  • 와이오밍급 전함 (1): 아칸소
    • 네임십 와이오밍은 대전기 내내 훈련함이었고, 1944년 주포를 철거하여 대공훈련함으로 전용되어 동원 불가.
  • 뉴욕급 전함 (2): 뉴욕, 텍사스
  • 네바다급 전함 (1): 네바다
    • 2번함 오클라호마진주만 공습 당시 대파, 수리비 견적이 너무 높아 회생 불가 판정을 받았다. 다만 1945년 당시에는 아직 해군 공창 한구석에 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수리해 재투입할 수 있었다.[8]
  • 펜실베이니아급 전함 (1): 펜실베이니아
  • 뉴멕시코급 전함 (3): 뉴멕시코, 미시시피, 아이다호
  • 테네시급 전함 (2): 테네시, 캘리포니아
  • 콜로라도급 전함 (3): 콜로라도, 메릴랜드, 웨스트 버지니아
  •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2): 노스캐롤라이나, 워싱턴
  •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4): 사우스다코다, 인디애나, 매사추세츠, 앨라배마
  • 아이오와급 전함 (4): 아이오와, 뉴저지, 미주리, 위스콘신
  • 45년 8월 기준 현역 전함이 23척이고, 아이오와급 5번함 일리노이, 6번함 켄터키가 건조 중이었다. 5번함 일리노이는 건조 공정이 늦어 코로넷 작전까지 투입도 불가하고, 켄터키는 총력을 다하면 올림픽은 몰라도 코로넷 작전 시에는 투입이 가능할 듯 말 듯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몬태나 역시 총력을 다해도 올림픽은커녕 코로넷에도 투입이 불가능했다.
  • 미국 외 연합군 측 전력인 영국 해군의 종전 기준 전함 전력은 총 11척+1척(순양전함)이다.
  •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4): 퀸 엘리자베스, 워스파이트, 발리언트, 말라야
    • 이중 워스파이트는 독일군의 Fritz X에 피격되어 3번 주포탑의 회전이 불가했고, 종전 때까지 수리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여 화력지원을 하긴 했지만.
  • 리나운급 순양전함 (1): 리나운
  • 넬슨급 전함 (2): 넬슨, 로드니
    • 둘 중 한 척은 지퍼 작전으로 돌려질 예정이었다.
  • 킹 조지 5세급 전함 (4): 킹 조지 5세, 듀크 오브 요크, 앤슨, 하우
  • 리슐리외급 전함 (1): 리슐리외
    • 자유 프랑스 해군의 함정이지만 자유 프랑스군의 여력 부족 및 리벤지급 전함의 일괄 퇴역 이후 전함 부족으로 영국 해군이 빌려서 운용 중이었고, 영국 동양함대에 배속된 상태였다. 넬슨과 마찬가지로 지퍼 작전에 참가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몰락 작전에 참가가 불가능하다.
  • 이외에 리벤지급 전함 4척이 있으나 3척은 전쟁 중 예비역으로 편입, 1척은 소련에 대여되었고, 아이언 듀크급 전함 1척이 있긴 하지만 역시 지나치게 노후화되어 훈련함으로 쓰이는 중이었다.
  • 뱅가드의 경우 전후인 1946년 8월에 취역했기에 올림픽 작전은 물론, 코로넷 작전도 참여할 수 없다,
  • 단, 영국의 경우 1945년 9월 9일부터 싱가포르 탈환을 목적으로 하는 단독 공세인 지퍼 작전(Operation Zipper)을 계획하였다. 해당 작전에는 넬슨급 전함과 프랑스에서 대여한 리슐리외급 전함이 한 척씩 참가할 예정이었기에 보유 전함을 모두 일본 본토 상륙전에 투입할 수 없다.
  • 미군 단독으로 전함 24척 동원은 예비 전력 없이 모든 것을 퍼붓는 것으로 가능은 하지만 무리한 일이며, 동맹국 영국 해군의 지원을 감안할 경우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 기타 연합국 해군을 탈탈 털면 전함급 전력 몇 척이 더 있으나 이들이 일본 침공에까지 동원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작전은 큐슈 남부 점령 이후 종료될 예정이었는데, 코로넷 작전(후술)에 동원될 공군의 기지 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주요 목표는 가고시마 만과 비행장 건설에 용이한 미야자키 평야 일대로, 이를 신속히 탈취하기 위해서 미야자키 해안에 미 제1군단(육군 제25/33/41보병사단)을 필두로 제11군단(제43보병사단, 제1기병사단, 아메리칼 사단(Americal Div)), 그리고 일본 육군의 강한 반격이 예상되는 큐슈 서부엔 최정예 제5수륙양용 군단 휘하 2개 해병사단(제3/4 또는 제2/5해병사단)의 동시 상륙이 예정되었고, 전술한 최소 60척 이상의 항모와 30척 이상의 전함, 350척 이상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연합군의 대함대가 이를 지원한다.

상륙 후 각 부대는 11월 4일(X+3일)까지 해안 교두보를 확보, 11월 6일(X+5일)에는 미 제9 군단(제77/81/98보병사단)이 전략 예비대로 가고시마 만에 추가 상륙해 상륙부대의 손실 보충과 부대 교환을 마치며, 이후 상륙군은 큐슈 약 1/3을 가르는 선을 북진 한계점으로 삼아 카와치 북부의 산맥을 방어선으로 설정해 일본 육군의 예상되는 반격을 저지한다는 2단계 작전이 계획되었다.

최종적으로 작전은 12월 1일(X+30일)에 종료될 예정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작전이 지연될 때는 코로넷 작전에 투입될 부대를 이쪽으로 돌리거나 원자폭탄, 독가스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계획도 수립되었다.[9]

여담으로 리틀 데이비드 1문과 설치용 장비 한 세트가 올림픽 작전 시 전개할 병력과 장비 중에 들어 있었다.


2.2.1. 파스텔 작전[편집]


파스텔 작전(Operation Pastel)이라는 올림픽 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기만 작전도 준비해뒀다. 하지만 이 작전은 총 8만(!)의 병력을 시코쿠에 상륙시키는 '기만'이라는 말이 무색한 대규모 작전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D-day에 1진으로 상륙한 병력이 이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기만 작전에 동원된 이 8만의 병력조차 당시 잔존한 일본 본토 수비군으로는 막아내기 힘든 실정이었다. 1억 총옥쇄는 고사하고 일선 병사에게 보급되는 탄약과 총기조차 만들기 벅찬 상태였으니.


2.3. 코로넷 작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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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넷 작전(Operation Coronet) 간토 침공 작전 시 미군 상륙 예상지점과 일본군의 배치.

코로넷 작전은 1946년 3월 1일에 혼슈 지방에 720,000명의 병력과 약 3,000기의 항공기를 동원하는 관동 상륙 작전이다. 상륙 뒤 도쿄로 진격한다.

이 코로넷 작전에서는 상륙 예정 지역에 대한 대규모 항공 공격, 함상 포격이 2월 13일(Y-15일)부터로 올림픽 작전(X-1일)보다 길게 잡혀있었는데, 이것은 큐슈보다 시간에 여유가 있기에 일본군도 그만큼 방비를 굳힐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또한 소해와 수상 장애물 제거에 투입될 시간도 2월 24일(Y-4일)부터로 올림픽 작전보다 길었는데, 물론 이 이후에도 간토 각지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더 밀도 높게 실시될 예정이었다.

Y-day는 1946년 3월 1일로, 주 상륙지점은 치바 현 쿠쥬쿠리 해안과 가나가와 현 사가미 만 두 곳이었다. 쿠쥬쿠리 해안에 상륙하는 부대는 호지스 대장의 미 제1군으로, 작전투입 병력은 Y-day에 미 제24군단(제7, 27보병사단)과 제3해병상륙작전군단(제1, 4해병사단)이 선봉으로, 3월 6일(Y+5일)엔 제96보병사단과 제6해병사단이, 그리고 3월 31일(Y+30일)에는 가칭 B군단(제5, 44, 86보병사단)이 상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또한 사가미 만에는 아이켈버거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8군이 상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Y-day에 미 제10군단(제2, 4, 31보병사단)과 미 제14군단(제6, 32보병사단)이, 3월 6일(Y+5일)에 제37, 38보병사단이, 3월 11일(Y+10일)에 미 제13군단(제13, 20기갑사단)이, 3월 31일(Y+30일)에는 가칭 D군단(제4, 8, 87보병사단)이 상륙하는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이 밖에 미 제8군은 예비로 제97보병사단을 편제하기로 되어있었는데 그 외에도 태평양 방면 육군부대의 예비로(전략예비대도 포함) 가칭 C군단(제28, 35보병사단, 2공수사단)과 가칭 E군단(제91, 95, 104보병사단)이 또 있었다. 이렇게 사가미 만에 상륙하는 미 제8군의 병력은 제1군보다 많았는데, 제8군이 담당하는 사가미 만이 코로넷 작전의 주공방면이었기 때문이다.[10]


2.4. 번외: 타국과의 합동작전[편집]



2.4.1. 소련[편집]


만주와 한반도 북부, 남사할린, 쿠릴 열도를 점령하기로 미국과 합의했고 개별적으로 홋카이도 진공도 준비했다. 미국 역시 몰락 작전 수행 시 소련의 일본 본토 침공을 지원하기 위해 훌라 프로젝트를 실시해 상륙 역량이 부족한 소련군에 관련 장비를 제공했다. 자세한 내용은 소련-일본 전쟁, 만주 작전, 슘슈 섬 전투, 남사할린 침공 문서 참고.


2.4.2. 영국[편집]


영국은 1945년 9월 9일에 클랑 항과 포트 딕슨에 상륙하여 말라야 반도로 남하해 최종적으로 싱가포르를 탈환하는 계획인 지퍼 작전을 계획 중이었다. 그 외에도 아브로 랭카스터 몇십 대가 계획상으로는 "타이거 포스"로 명명된 영연방공군 폭격부대의 주력으로 활동할 예정이었고 처칠 크로커다일을 대일전에 사용하려고 했으나 조기 항복으로 이는 취소되었다.


2.4.3. 중화민국[편집]


카보네이드 작전으로 일본군을 패퇴시켜 중화민국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2.4.4. 대한민국 임시정부[편집]


서울 진공 작전 문서 참조. 그러나 폴란드를 비롯한 전후 동유럽의 상황을 보았을 때 국내 진공 작전은 참전 자체의 의의만 있지 영향은 미미했을 가능성이 높다.


2.4.5. 뉴질랜드: 프로젝트 SEAL[편집]


뉴질랜드 역시 미국, 영연방과 발맞추어 일본 본토 상륙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참고로 1944년과 그 이듬해에 미군과 뉴질랜드군은 몰락 작전에 쓰나미실전 투입할 계획이었다. 통칭 프로젝트 SEAL. 강력한 폭탄을 수중에서 여러 번 폭파하여 충격파를 만들고, 그 충격파로 인하여 발생한 높이 10m 정도의 쓰나미로 해안의 일본군 점령지와 해안 도시들을 초토화한다는 계획이었다. 다만 이 계획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1945년 초에 취소되었다.


3. 방대한 작전 규모의 이유[편집]


미군이 몰락 작전을 위해 준비한 물량 및 작전 내용을 보면 정말 몰락이라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수준이다. 아무리 상륙작전에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만, 바로 전 해 1945년의 일본 제국보다 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던 나치 독일을 상대로 1944년에 벌어진 노르망디 상륙작전 및 이후 전개한 서부전선의 연합군의 물량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어 보인다. 후대에 전개된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보다도 훨씬 큰 규모의 작전이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왜 미군은 이렇게까지 준비를 했나?'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한데 미군은 이 정도가 되어야 일본 수뇌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비이성적인 수준의 '의지'를 꺾어 없애는 것이었다. 바로 이 점이 나치 독일과의 차이였다. 당시 독일인들 역시 나치즘에 물들었기에 소년단원들과 국민돌격대를 전장에 투입하는 등 비이성적인 저항을 지속했지만, 일본 제국의 광기에 비견할 바는 아니었다. 또한 독일군의 방어전은 일본군이 태평양 전역에서 보인 자살 공격과 같은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자신들의 기술력과 일본과 차원이 다른 고급 교육을 받은 장교단, 아직 소수나마 잔존하고 있는 베테랑 병사들은 일찌감치 서방 연합군에 항복하거나, 아니면 정상적인 방어작전을 펼쳐 연합군에 피해를 강요했다. 게다가 사면이 바다인 일본 열도의 지형 또한 일본인들에게 근거없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1945년, 일본의 전황은 1944년 6월 독일보다 더 처참한 상태였다. 전황 자체를 만회하기는커녕, 상황을 일본에 조금이라도 덜 불리하게 만들 가능성조차 전혀 없었다. 미군은 몰락 작전을 시행하기 한참 전부터 일본 본토 공습과 잠수함 등을 이용한 제해권 장악을 통해 일본의 모든 국내외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공업 생산력 등 전쟁 수행 능력을 철저히 파괴하고 있었다. 외교적으로도 일본을 지지하거나 유리한 쪽으로 중재를 해 줄 수 있는 국가는 사실상 전무했다. 공식 참전하지 않았던 여러 중립국들도 이 시점에서는 형식적으로나마 연합군에 가담하거나 추축국들과 교류를 끊으려 했다.[11] 일본이 마지막으로 외교 창구로서 믿어 왔던 소련도 이미 얄타 회담에서 일본과의 전쟁을 하기로 약속하고 만주 작전의 시행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억 총옥쇄', '본토결전'을 주장하며 항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펠렐리우 전투, 이오지마 전투를 비롯해 태평양의 여러 섬에서 미군은 일본군의 끔찍한 방어전으로 인해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때문에 미군은 '대체 이 끈질긴 잽[12] 놈들을 항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일반적인 물량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게 되었다. 이는 결국 일본을 '확실하게' 굴복시키기 위해선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대규모 물량을 투입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미군은 그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4. 취소된 원인[편집]


미국은 지속적인 사상자 증가와 전비부담, 전쟁에 대한 피로 등으로 악화되는 여론과 오키나와에서의 엄청난 피해 등이 해당 작전이 실제로 실행되었을 경우 수십, 수백 배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이 존재했다. 역사학자인 존 키건은 이 당시 미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다소 섬뜩한 표현으로 묘사했다.

한여름에 미국 정부는 일본의 비타협성에 참을성을 잃고는, 굉장하고 장엄하고 뭐라고 항의할 수 없을 만큼 결정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끝내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 존 키건, <2차 세계대전사>. p.856

때문에 미국은 포츠담 선언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으로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유도했으며, 실제로 원폭 투하는 일제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기에 미국은 이 작전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원폭 투하와 몰락 작전은 양자택일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취한 모든 선택지가 무위로 돌아가고 일본이 항복을 거부했다면, 상술한 모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몰락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미 본토에서 반전여론이 확산되고 있음은 명백했지만[13] 그렇다고 대일전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고[14] 실행 또한 위에서 언급한대로 미국은 7발의 핵폭탄과 핵폭격 이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메뉴얼도 준비되어 있었기에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론에 대한 의식은 몰락 작전보다 맨해튼 프로젝트 쪽이 훨씬 강했다.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에 20억 달러가 넘는 거금을 투입했는데, 이는 모두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얼마나 기밀이 높은 수준이었는지, 트루먼 대통령조차 부통령 시절에는 이를 알지 못하다가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만약 실전에서 핵병기를 쓰지 못한다면 의회와 여론은 당장 20억 달러 어디다 썼냐고 들고 일어설 게 뻔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일본을 항복시켜 이후 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에 작전 실행을 주저하던 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미 윈스턴 처칠 또한 이후 찾아올 냉전 구도를 예상하여 몰락 작전 이후 소련이 참가하는 일본 분할 통치를 강하게 반대하였고, 당연히 이 작전이 실행되는 데 이는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일본에는 미국이 내밀 수 있는 최대한의 유화책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독일에 제시한 항복 조건에 비해서 훨씬 자비로운 포츠담 선언, 전후 GHQ 치하에서의 철저한 일본 편의주의, 애치슨 라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의 독도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 등에서 너무 명확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미국은 몰락 작전을 실행할 수 있는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일제에 항복을 종용했고, 실제로 포츠담 선언을 묵살당했음에도 대부분의 조건을 그대로 준수하면서 일본을 철저히 미국의 영향력 하에 놓았다.

다만 이러든 저러든 마음만 먹었으면 실행 가능했다는 의견이 중론이다. 이미 독일이 항복하면서 유럽 전쟁이 종결되었던 시점이라 전비를 축소하면서도 대일전 전력을 증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 이상의 미군 전력은 유럽에 묶여있었는데, 이를 투입할 수 있고, 전비 축소도 병행할 수 있어 반전 여론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해군의 대부분은 태평양에 배치되었고 유럽 쪽 추축군 해군은 영국이 담당하고 있었으며, 위협적인 일본 해군에 대해서는 미 해군이 전력으로 저지하고 해병대로 지연전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육군이 투입되어 밸런스가 확 기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육군이 총 100이고, 그 중 50이 유럽, 30이 본토대기 및 예비, 20이 태평양 전쟁에 있다고 치면, 유럽의 50 중 20을 점령군으로 두고 15를 전역시키거나 본토대기로 돌리고 나머지 15를 태평양으로 돌린 형국에서 독일이 항복했기 때문에 미국은 15의 육군을 줄이는 전비축소를 하면서 동시에 태평양 전선에 투입하는 육군을 15 늘릴 수 있었다. 물론 수치는 이해하기 쉽게 표시한 것으로 당시 실제 전력비와 일치하진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에겐 여차하면 연합군을 투입하는 선택지도 있었다. 위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미군 단독 작전에 기반한 것으로 투입 전력은 모두 미군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대독일 전쟁의 종결은 미군의 유럽전 투입여력만이 아니라 연합군, 특히 영국군의 투입을 가능케 한다. 영국도 오랜 전쟁으로 상황이 말이 아니긴 했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 해전 등의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상징적 의미와 전후 아시아-태평양 국제질서 재편에 참여해야 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었기 향후 대일전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실제 독일 해군 문제가 거의 해결된 1944년 하반기부터 윈스턴 처칠은 해군 주력함 상당수를 인도양으로 후퇴한 동양함대와 신설한 태평양 함대에 배치하였고, 오키나와 전투 종결 이후에는 영국 공군이 오키나와에 전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외에 호주, 캐나다, 인도 등 영연방군의 존재도 있으며 대륙에서도 카보네이드 작전을 발동해서 중국 대륙의 일본군을 섬멸할 준비를 갖추고 있던 국민혁명군과 미군/국민당군 수송기를 대여해 서울을 공격할 준비를 하던 한국광복군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식민지 문제 때문에 숟가락을 얹을 수도 있었다.

그 다음 변수는 몰락 작전을 준비하는 군 지휘부의 핵병기에 대한 인식이다. 미군 태평양 전쟁 지휘부에서도 맥아더와 니미츠만이, 그리고 워싱턴 D.C 행정부 및 군 최고지도부의 극소수만이 존재를 파악하고 있던 핵무기의 존재는 전쟁 막바지에야 통보되었다. 당연히 핵무기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포츠담 선언 묵살 이후 몰락 작전만이 답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일본 본토에 대한 전략폭격을 전담하던 커티스 르메이"대체 왜 최고사령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고쿠라, 교토 등을 폭격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가!" 하고 강력히 항의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실 이는 이미 폭격을 받은 도시에 원폭을 떨어뜨려봤자 쑥대밭은커녕 쑥도 못 자랄 땅이 될 뿐이니 최대한 후보지를 멀쩡하게 놔두자는 전략적 판단이었으나 커티스 르메이조차 핵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기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15]

어쨌든 몰락 작전만이 답이라 생각한 전선의 지휘부는 전쟁을 종결짓기 위한 최종 단계인 일본 본토 침공을 착실히 준비했고, 핵의 존재를 알고 있는 최고지도부 역시 핵무기는 기밀이므로 티나지 않게 몰락 작전 준비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당장 몰락 작전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건 오키나와 전투 직후인 1945년 6월경인데, 맨해튼 프로젝트에 의한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는 7월 16일에 시행되었다. 그 전에는 핵병기의 성공 여부조차 불확실했고, 트리니티의 성공 이후에는 핵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최고지도부 입장에선 핵을 쓰건 안 쓰건 일본 본토 침공을 준비해야 했다.[16]

다만 원자폭탄 투하와 만주 작전이 절묘하게 맞물려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기에 이 작전은 시행되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이 일본의 항복에 크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는데, 후자의 경우 비록 상당히 약체화된 병력이지만 당시 관동군의 양은 상당했다. 물론 이미 사이판 등 태평양에서 관동군 최정예는 미군에게 처참하게 박살난지 오래였다. 하지만 소련은 일본의 마지막 외교적 희망이었다. 이미 망해가던 일본이 소련전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지만 이것을 깨부순 게 만주 작전이다. 일본의 항복으로, 몰락 작전 대신 블랙리스트 작전이 실행되어 일본은 미국에게 점령당했다.

또한 아무리 종합적인 전력으로는 허술해도 결국 관동군이 어쨌거나 정식으로 편성된 병력으로서는 일본이 동원할 수 있던 마지막 예비대 자원이고, 이미 이오지마, 오키나와 등에서 집단자살에 가까운 옥쇄작전을 상대하며 진저리가난 미국의 입장에서도, 그동안 태평양 전선에서 격파한 일본군 병력 전체보다도 더 많은 숫자의 최대 60만 이상의 병력이 본토 방어전에 투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17]

그러나 일본이 관동군을 마지막으로 믿었다기엔 이미 관동군과 지나파견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지나방면 사찰을 다녀온 일본 장교들은 관동군과 지나파견군 전체를 합쳐도 미군 8개 사단의 전력도 안 된다고 평했을 정도로 이미 두 군대는 막장이었다. 다 합치면 자그마치 180만에 가까운 대병력을 자국에서 이리 평가 할 정도다. 그렇기에 일본이 고작 약체화된 관동군을 믿다가 항복했다는건 근거가 빈약하다. 히로히토는 이미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항복으로 마음을 굳힌 상태였고 원폭의 공포는 옥음방송에서도 드러났다.


5. 실행 시 예상 규모[편집]



5.1. 미군과 연합군의 예상 피해 규모[편집]


미군은 펠렐리우 전투,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극단적으로 줄어든 반자이 돌격 대신 매복, 기습, 저격, 위장, 농성, 자폭 등 일본군의 결사항전에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를 기초로, 일본 본토 상륙 작전 시 전사자만 10만 명 이상일 것이라 예상하였다. 작전 규모가 규모인 만큼, 또 일본도 나름대로 방어자 입장에서 있는 거 없는 거 쥐어짜 준비했고 무엇보다 일본 측에서는 홈 어드밴티지가 있는 셈이니까 진짜로 실행되었다면 미군의 전사자도 분명 적지 않았을 것이다. 상륙군의 입장에서 당시 일본 해군의 본토결전 전략을 대입해 생각해 본다면 먼저 카미카제와 공중/지상[18] 발사식 오카가 기동부대에 날아오면 격추시키겠지만 어쨌든 빈틈을 노리는 녀석이 있을 건 분명하고, 수송함이 근해로 접근하면 가이텐과 신요 보트가 떼로 몰려와 자폭하고, 상륙군이 해안으로 가는 도중에는 물속에서 창병들이 상륙정을 마구 찔러대고, 자살특공 외에도 수심 10-15m 지점에 깔아 놓은 기뢰들과 본토방어용 해안포대, 상륙군을 저지할 예정인 부대, 홋카이도와 한반도, 제주도[19] 등에 배치된 소수의 비교적 온전한 전력 같은 정상적인 공격 방법들과 세뇌 반 애국심 반으로 적이 본토에 상륙하는 것만은 막겠다는 병사들의 의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민간인을 이용한 자폭, 이후 일본의 여러 폭심지 혹은 살아남은 도시에서 밥먹듯 벌일 시가전은 물론 핵이나 화학무기를 투하할 수 없는 촌락이나 깊숙한 숲에서의 광대하고 지루한 게릴라전, 최종적으로 일본 왕실과 수뇌부가 대피하기로 되어 있었던 나가노 현 시나노 정[20]대규모 지하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험준한 산맥에서 벌어질 포위전까지 생각하면 피해가 나오지 않는 게 힘들다.

그러나 그 예상 피해 정도에는 다소의 이견이 있다. 약간 더 설명하자면 미군은 일본의 저항이 심하면 화학무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엄청난 양의 독가스를 일본 본토에 뿌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21] 실제 미군은 이미 대전 중반부터 일본의 화학 공격을 대비해 화학 포탄은 물론 각 보병 연대에까지 화학중대를 편성하여 언제든 4.2인치 박격포와 리틀 데이비드로 화학탄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화학전 준비를 철저하게 해놓고 있었다.

충분한 화학전 능력이 있고, 이오지마/오키나와를 거치며 최전선과 워싱턴으로부터 화학무기 사용의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음에도 미군이 화학전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일본이 화학탄을 쓰지 않은 것도 있지만[22] 무엇보다도 프랭클린 루스벨트지독한 화학무기 반대론자였기 때문이다. 회의석상에서 군인들은 아예 화학탄(Chemical Bomb)의 C자도 꺼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고. 그러나 후임인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원폭 투하를 허락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군의 피해를 줄일 수만 있다면 화학탄 따위(?)를 쓰는 것에는 전혀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든 전선이 막히면 화학탄을 도배해서 말려죽이는 짓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관련 내용 - 펠렐리우 전투에서의 화학전, 관련 내용 - 이오지마 전투에서의 화학전.

첨언하자면 미군이 화학탄을 아무 데나 막 뿌리려고 할 정도로 정신 나간 집단도 아니었다. 미군의 독가스 최우선 사용 대상은 다름 아닌 비행장이었다.[23] 그나마 제일 명중률이 높은 카미카제 공격을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전투 기간 내내 일본군의 모든 비행장을 가스로 도배할 생각이었다고. 일본군의 항공전 능력은 사실상 제로가 되는 셈이다. 화학전 능력이 비교할 수도 없이 좋아진 지금도 비행장에 화학탄이 한두 발 떨어지면 작전 재개까지 복구/제독에 하루 이상이 걸린다. 게다가 당시 일본군의 화학전 대비 수준은 처참했다. 애초에 일본군이 정상 수준일 때도 겨우 1차대전 수준의 화학전 능력밖에 없었으며, 전쟁 말기엔 그나마도 물자 부족 등으로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대인 화학전 이외에 제초제 살포로 논밭을 초토화한다는 계획도 세웠으며, 원자폭탄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하기 전에는 올림픽 작전 시 해안에 방어군 제거용으로 투하할 생각도 했다.[24]

오키나와 상륙작전 종료 후, 미국은 본토 상륙전 준비와 함께 원자폭탄의 양산에도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월 1~2기 정도의 원폭을 생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진행되었다. 따라서 상륙작전 실행 시 교두보에 원폭을 투하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는 시기는 1945년 10~11월 정도로 예상되었으며, 여기에 맞춰서 모든 작전 준비가 진행되게 되었다.

미군의 큰 피해를 예상하는 척도인 펠렐리우/이오지마/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의 전략/전술적 차이도 크다. 미군이 큰 피해를 본 이오지마, 오키나와는 '섬'이다. 섬은 공격자가 전략적으로 우회할 곳이 없으며 일본군은 그 섬들의 크기에 비해 대규모의 병력과 중화기를 꽉꽉 채워넣고 요새화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군이 그 섬들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방어거점을 피하지도 못하고 섬의 구석구석까지 뒤지며 섬멸전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피해가 그렇게 컸다.

반대로 일본 본토는 이야기가 다르다. 비록 산세가 험하기는 하나 일본 본토는 앞선 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넓다. 당장 혼슈만 하더라도 이탈리아 정도의 큰 섬이며 따라서 전략적으로 우회할 길목이 얼마든지 있으니, 독일군이 히트쳤던 그 전격전이 가능한 것이다. 더군다나 일본군은 여러 길목에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고[25]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요하게 된다. 실제로 우회할 공간이 전혀 없거나 없다시피 하고 크기 대비 주둔 병력이 엄청 많아 미군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했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보다 훨씬 커서 기동작전이 가능했던 필리핀에서는 미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전사자 비율 1대 39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무엇보다 지상전의 꽃인 전차 전력을 보게 된다면 일본 쪽이 참담해진다. 셔먼조차 전면에서 확실하게 상대할 만한 대전차 화기가 없었던 일본군에게는 장갑 강화형인 M4A3E2 점보 셔먼과 유럽 전선에서 판터를 때려잡으면서 활약한 바가 있는 이지에잇, 미국이 티거 쇼크 땜에 호랑이 잡자고 작정하고 찍어낸 1,000여 대의 M26 퍼싱과 티거 2를 잡고자 만든 105mm, 120mm, 155mm 주포를 탑재한 중전차인 T29 시리즈는 물론 지크프리트 선용 초중전차 T28/T95와 같은 괴물급 전차를 벙커 및 거점 파괴용으로 대일전에 투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26]

미국 단독 작전이 아니라 연합군이 참전했다면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소련군 기갑전력들은 물론이고 소련과 영국의 전력도 다수 가담한다. 공간의 제약이 있었던 남태평양의 섬들과는 달리 일본의 넓디넓은 본토에 미국이 얼마나 많은 중전차 사단들을 풀어놓고 굴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미군의 피해는 현재의 예상보다도 더욱 극단적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게다가 위에 서술한 강력한 신형 중전차들은 둘째치더라도 스튜어트 전차, M4 셔먼, 크롬웰 전차, T-34-76 등 비교적 구식이지만 대전차 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일본군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없는 전차들은 무지막지하게 남아도는 상태였다. 하여간 일본군의 장비로는 잘 해야 흠집밖에 낼 수 없는 수십 톤짜리 쇳덩어리가 수천대씩 대열을 맞춰 굴러다니는데 일본 국민이 7,000만 명이라 한들 그걸 대체 어떻게 막겠는가.

그리고 익히 알려져 있듯 일본군의 병력과 장비는 질과 양 모두 절망적인 수준이 된 지 이미 오래였다. 한때 일본군의 최정예로 쳐주던 관동군도 이 시점에서는 소련군의 T-34 앞에서 자폭한답시고 달려들다가 픽픽 쓰러져 가는 잡병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27] 그 동안 남태평양과 이오지마, 오키나와에 투입된 일본군 병력은 대부분이 오랜 훈련과 중국 등지에서 경험을 쌓은 고참병이었기에,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정도나마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나마 쓸 만한 병력과 장비는 대부분 중국 본토에서의 광대하고 지리한 소모전에 발목이 잡혀 있었으며, 제공권/제해권을 완전히 잃은 상태에서 이들을 본토 방어를 위해 재배치시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28]

그래서 심지어 미군의 전사자를 10만 이상이 아닌 몇만 이하의 소규모로 잡는 견해도 있으며, 이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근거가 존재한다.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미군의 실제 피해는 작전을 실행에 옮겨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피해가 훨씬 클 가능성도, 작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다만 미국 청년층 다수가 군대에 있던 시기에 작전 시작부터 최대 7개의 핵이 날아갔다면 제아무리 7주일 정도 후에 상륙했어도 광범위한 방사능 피해가 전후 미국 사회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일본군의 결사항전, 1억 옥쇄 등 정신나간 계획을 보면 시행되지 않은 게 양측 모두에게 다행이다.

미국은 몰락 작전을 대비해 전투 중 부상당한 군인에게 주어지는 퍼플 하트 훈장을 대량 제작했으나, 몰락 작전이 시행되지 않음에 따라 50만여 개가 남게 되었다. 이 훈장들은 이후 6.25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테러와의 전쟁 때 잔뜩 뿌려졌는데도 아직까지 12만여 개가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미국 측에서 생각했던 몰락 작전의 예상 피해량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5.2. 일본군/민간인의 예상 피해 규모[편집]


일본군은 본토 상륙전에 대비해, 일본령을 작전 지역으로 한 방어전, 결호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나치와의 전쟁을 종결짓고 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일제에게 온전히 투입할 준비를 끝낸 연합군에 비해, 일본의 본토결전 전략은 카미카제를 비롯한 자살공격이 대부분이었다. 1억 총옥쇄[29] 타령을 하며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자는 식이었으니 사실 승기가 없음은 일제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통상 소티는 물론 카미카제를 하러 비행기를 날릴 비행장은 화학탄과 JB-2 룬 순항미사일[30]로 무력화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온갖 연합군 전투기와 지원기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을 상황에서 위 그림마냥 격추시키기는커녕 들이받을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31] 물론 그 와중에 소이탄을 쏟아내고 가끔씩 핵도 쏟는 B-29와 태평양 전쟁 중반부터 활약했거나 종전 직전에 유럽과 미 본토, 소련에서 추가로 날아오거나 그럴 예정인 여타 폭격기들의 근접 항공 지원은 논외로 치더라도...

지상전으로 가면 문제는 더더욱 심각해진다. 치하를 비롯한 대부분의 일본 전차는 미군 전차와 비교하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니 차라리 없는 셈 치는 게 낫다. 일본 본토에서 굴러다니는 미군의 중전차들을 상대할 수단은 기껏해야 민간인에게 폭약 들고 달려들게 하는 정도인데, 이런 전술은 이미 미군이 운용하는 수준의 전차에게는 잘해야 궤도나 끊어먹지 더 이상 약발이 먹히지 않았다. 기갑 전력이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갖춰져 있는 군대와 기갑 전력은 고사하고 소화기조차 제대로 못 갖춘 군대가 맞붙으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물론 급조폭발물로 미군을 죽일 수도 있겠으나 이미 일본군 상대로만 10만 명이 죽어나간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천 단위쯤의 전사자를 더 낸다고 꺾일 리가 없다.[32]

게다가 동계작전이 될 확률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그 미군도 동상 환자, 동사자가 꽤 있었을 텐데, 보급이 열악한 일본군은 1945년 11월 말[33]~1946년 2월[34]에 상당수의 병력이 동사하여 큰 손실이 생겼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실제로 작전이 진행되었으면 일본 지휘부가 항복하는 그 순간까지 엄청난 참극이 이어졌을 수밖에 없다.

일본 민간인의 경우는 상상을 초월한 피해가 닥쳤을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수백만의 일본 민간인이 사전 핵폭격, 대규모 전략폭격, 본토 결전에서 표적 #1, 자폭병기 #1, 총알받이 #1로 죽어나갈 건 당연한 일이였고, 설상가상으로 일본의 식량 상황은 정말로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기아 작전만으로도 45년 8월 이전에 이미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반 년 이상 전쟁이 더 진행되고 본격적인 본토결전이 시작되었다면 전쟁 역사상 유례 없는 대규모 아사(餓死)가 발생하여 핵이나 화학탄보다도 큰 피해가 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일본군이 쉽게 무너져 일본 본토가 조기 점령되어 의외로 민간인 피해는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미군이 어쨌든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식량을 대량 조달할 것이므로.

일본 국토 역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원폭의 방사능이야 2주 가량 지나면 괜찮아지니 전 일본이 체르노빌 예고편이 되는 상황은 없었겠지만 농사가 어려운 화학 오염 지역의 발생이나 기형 생물이 출현하는 등 향후 수십 년 이상 환경 오염 문제로 일본 정부가 꽤나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6. 작전 실행 후 각국의 예상 시나리오[편집]



6.1. 일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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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낙관적인 예측과 비관적인 예측이 가능하다. 두 가정 모두에서 확실한 것은 원 역사 이상의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공통적으로는 일본이 패배한 이후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군 해체뿐 아니라 쇼와 덴노의 폐위, 더 나아가 일본의 천황제 자체가 철폐되어 일본이 공화국이 될 수도 있었으며, 일본 영토 역시 독일처럼 분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이미 전쟁에 막대한 병력과 자본을 쏟아부은 상황에서 소련에 동북아전선에 참전할 것을 조르고 있었고, 종전 이후의 점령지 관리에도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영국, 소련, 중국에 제시한 것이 위와 같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분할통치안이었다. 한마디로 땅은 떼어줄 테니까 전쟁 좀 빨리 끝낼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전쟁이 좀 더 길어졌더라면 스탈린의 야망대로 소련이 사할린, 쿠릴 열도뿐만 아니라 홋카이도까지 모두 정복하고 류큐 열도, 오가사와라 제도 등은 연합군에 점령되어 역시 일본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컸으며 일본 본토 자체가 독일처럼 연합국에게 분할 통치를 당하고 일본 북부에는 소련군이 쳐내려와 괴뢰 위성국인 일본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일본인민공화국처럼 공산정권이 들어설 가능성도 있었다.[36]

하지만 종전 후 찾아올 또 다른 전쟁을 미리 예견한 영국의 처칠은 미국의 이 분할 통치 계획에 반대했고, 미국이 일본을 통치하며 소련 견제를 위한 전진기지로 삼아야 한다고 미국을 설득했다. 또한 루즈벨트의 사망으로 인한 정책 변화, 핵무기의 등장, 그리고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몰락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고 결국 이 분할 통치안도 없던 것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이 분단되지 않도록 어느 정도 도와준 셈이다.

낙관적인 예측을 해 보자면, 일본은 비서구권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국민들이 서구 열강들과 같은 수준의 기본 교육을 받은 근대 국가였으므로[37] 전후 청산이 이루어지고 미국의 손에 민주주의를 이식받으면서 빠르게 새로운 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고, 장차 미국 다음가는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 나치 독일이 전장으로 초토화되어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등을 뺏기고 나라가 서독, 동독으로 분단되었지만 유럽선진국으로 부흥한 것처럼 몰락 작전이 시행되고 홋카이도류큐 열도 등 본토를 더 상실했더라도 전후 일본은 다시 부흥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훨씬 비관적인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우선 몰락작전은 실행되지 않은 작전인 만큼 막상 터지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일본계 미국인들을 일본 본토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짠 적이 있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면 사망자 수가 일본의 7천만 인구 대부분 수준으로 불어날 가능성까지도 고려했다는 말이다. 이정도의 피해라면 국가 부흥은 커녕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사라지는 수준이다. 꼭 괴멸수준의 피해가 아니더라도 엄청난 사상자 탓에 반미감정이 극심했을 것이고, 심지어는 오노다 히로 같은 잔류병사가 트럭 단위로 쏟아져나와 종전 이후 수년간 일본의 과거 점령지 전역, 일본 본토에서 에서 연합군 (+ 항복한 일본군) 이 게릴라 사냥을 다녀야 했을 수도 있다. 일본 관료들이 전쟁으로 쓸려나간 탓에 미국의 점령 부담이 몇 배로 늘어나는 것은 덤. 게다가 만주국, 한반도등 일본 제국의 식민지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 소련 사이에서 갈등이 안 벌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6.2. 한국[편집]



6.2.1.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 시나리오[편집]


먼저 몰락 작전 시 미국은 이미 7월까지 함선을 수백 척씩이나 지원하는 등 소련군의 일본 상륙을 요청할 계획이었으므로, 일본 상륙 등을 이유로 부산항이 있는 한반도 남부까지 소련군이 진출했을 가능성도 높다.[38] 실제 역사에서도 8월 만주 작전으로 1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까지 진입한 상태였다. 뒤늦게 한반도의 중요성을 안 미국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소련이 이를 수용한 것이다.

몰락 작전으로 인해 미국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피로가 누적되어 한반도 정세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반도는 이곳을 선점한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들이 해방 이후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공산주의 국가로 재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역사에서도 해방 직후 사회주의 인사들의 지지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탄생한 사회주의 정권 하의 한반도가 지금의 북한처럼 종파 숙청, 주체사상 확립 등을 통해 완벽하게 집권한 김일성 가문의 신정체제가 될 가능성은 적다. 김일성 가문의 신정체제가 자리잡은 결정적인 계기가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인데, 이 사건들이 없는 상황에서 박헌영 같이 국내외 기반과 능력이 풍부한 라이벌들에 비해 어떠한 정치적 경쟁력도 없던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할 만한 명분이 서긴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한반도의 사회주의 정권은 아무런 정치적 경쟁력이 없고 그저 소련 빽+개인적인 출세욕만 많았던 김일성을 바지사장으로 만들거나 아예 배제한 후 소련파, 남로당파, 갑산파 등의 여러 분파에 의해서 동유럽의 폴란드체코, 불가리아처럼 공산 정권 내에서나마 그럭저럭 권력 균분이 이루어지는 체제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소련의 개혁개방으로 인한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자본주의화가 이뤄지면서 냉전 이후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한 제2세계 국가들과 비슷한 방향으로 갔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혹은 현재의 중국이나 쿠바, 베트남, 라오스처럼 공산주의 정권 자체는 유지하되 나름대로 유연하게 개혁/개방 정책을 수립해서 정치는 공산당 1당 체제(당명은 아마도 조선공산당?)를 유지하고 경제 구조만 국유경제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관료적 계획경제 체계에서 각 기업(소유 자체는 국가 소유이지만)의 운영에 자율권을 주고 영세 소기업은 개인 소유도 허락하는 체계[39]로 전환, 개편하는 등 생산력 향상 정책을 추진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주변국과의 관계나 지정학적 조건 같은 여러 정황상, 전자보다는 후자의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한반도의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파 및 남로당파의 노선인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와 갑산파의 노선인 정약용 사상[40] 등을 결합하여, 주체사상이라는 나쁜 것만 골라서 있는 대로 모아놓은 근본도 없는 사이비 동인지 수준의 사상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 노선을 취했을 것이다. 지금의 북조선과 같은 억압적이고, 병맛스러운 개인숭배가 강요되는 사회는 절대로 아니었을 것이란 이야기다. 그렇지만 (다당제) 노동자 민주주의를 온전히 구현하긴 어려웠을 것인데, 소련파든 남로당파든 갑산파든 스탈린주의를 긍정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북조선보다는 넘사벽급으로 민주적이지만, 지금의 쿠바처럼 1당제 체제 내에서 제한적으로 정치적 다양성을 인정하는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한반도 중남부 평야의 곡창지대를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을 영토로 차지하고 있기에 최소한 식량난에 시달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대신 농업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중공업의 발전은 뒤쳐졌을 공산이 크다. 요약하자면 지금과 같은 삶과는 거리가 먼 전반적인 산업과 기술의 수준은 낙후되었지만 그럭저럭 먹고 살 만은 한 쿠바나 라오스 수준의 농업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민주주의나 정치 개혁의 가능성은 1989년 중국의 천안문 6.4 항쟁과 같이 한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과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무력 진압과 탄압이 일어났을 공산도 매우 높다. 물론 개혁개방 이후에도 쿠바나 베트남, 라오스처럼 정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와 군, 경의 유혈진압 없이 안정적으로 정부가 유지됐을 가능성도 있다. 어찌되었든 다당제 체제는 아닐 것이라는 이야기다. 조선공산당 1당에 구색 맞추기용 소수정당 서너 개 있는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대외 관계, 특히 미국 및 일본, 중국과의 외교 관계는 좀 복잡한 편이다. 미국의 경우 냉전 시기에는 물론 동아시아 공산 블록의 최전선으로서 미국의 견제가 대단했을 것이라는 건 불보듯 뻔하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이후가 불분명하다. 쿠바처럼 계속해서 미국에게 극심한 경제 제재를 당할지, 아니면 베트남처럼 나름대로의 경제 협력을 행하며 우호적으로 나갈지는 알 수 없다.

중국의 경우 국공내전의 결과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이 승리했을 경우, 자본주의진영 국가인 중화민국과 공산 한국은 대립하겠지만 친소련 성향이 강한 이 공산 한국의 특성 때문에 장제스의 중화민국과는 그래도 나름대로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 장제스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긴 하지만 소련과의 관계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승리했을 경우, 지금의 북한처럼 명목상 같은 사회주의 블록 내에서의 친선 교류는 있었겠지만 중월 관계처럼 조금 불편한 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래도 몰락 작전에 실행되었면 국공내전에서 중화민국에게 유리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앞의 시나리오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반도 정부의 법통을 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자유시 참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등으로 김구 등 임시정부의 핵심인사들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의도와는 관계 없이 별달리 해낸 것도 없었기 때문에 소련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해낸 게 있었다고 해도 반공 성향이 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소련이 인정해 줄 가능성은 낮다. 비슷한 선례가 있는데 폴란드 임시정부의 경우, 소련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국제적으로 공인하였고, 실제 참전했는데도 무시당했다. 그냥 이름만 올리는 수준이 아니라 20만에 달하는 자유 폴란드군을 정규편성해 프랑스 침공, 영국 본토 항공전, 비스마르크 추격전, 마켓 가든 작전, 몬테카시노 전투등 굵직굵직한 전투들에 참전했다. 거기다 폴란드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긴다는 바르샤바 봉기에서는 두 달간 처절하게 항전해 독일군에게 2~3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안기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군 치하에 들어가자 완전히 무시당했고, 자유 폴란드군은 오히려 반동이라며 시베리아에 끌려가거나 숨어 살거나 망명 정부와 함께 떠돌이 살이를 해야 했다. 이런 폴란드의 사례를 볼 때 기껏해야 병력이 기천 수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별 고려 대상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정부 수립에서 아예 배제되거나 금방 제거되어 이란 팔라비 왕조 망명정부나 비아프라 망명정부 같이 유명무실한 망명 정부로 떠돌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실제 역사의 좌우합작운동과 같이 일부 인사가 개인 자격으로 공산 한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할 여지는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일부 여론의 불만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으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을 회유, 포섭해서 형식적으로라도 구색정당을 조직하도록 하여 정부 수립에 참석시킬 가능성이 있다.


6.2.2. 일부 지역의 공산화 시나리오[편집]


몰락 작전은 핵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을 경우에나 실시되었을 것이므로, 작전 중 일본 본토에 핵을 대여섯 발 떨구고 난 미국이 소련에 한국분할통치를 요구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배짱을 튕길 수 있을지는 좀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 작전이 시행되었다면 소련군 역시도 열심히 싸워야 했는데 이때 이미 소련은 상당히 지친 상태려였다. 일단 독소전쟁에서 소련인이 무려 2,000~2,700만이나 죽어 4년새 전체 인구의 14%, 청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증발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2차 대전 말기 소련이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손에 넣고 싶어했던 지역은 한반도보다는 홋카이도와 만주였다. 그 예로 제2차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걱정했던 것은 중공군이 이겼을 경우, 과거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체결했던 <중소우호조약>이 무효가 되어 그때까지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만주의 창춘 철도와 뤼순, 다롄 두 항구의 조차권이 소멸되어 소련군이 이 지역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스탈린은 제2차 국공내전 초기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군이 내전에서 이길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공산당 측에 적극적인 지원까지는 하지 않았으며, 결국 공산당이 승리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자, 모스크바를 방문한 중국 사절단에게 공식적으로 "내가 잘못 판단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다. 결국 만주에서 소련의 조차권을 보장하던 <중소우호조약>은 1950년 2월 14일에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새로 맺은 조약으로 인해 무효화되고 소련군은 만주에서 철수했다.

다른 예로는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의 영향으로 개박살이 난 채 북으로 도망가던 북한 지도부를 스탈린이 적극적으로 구제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중국마오쩌둥에 참전 의사가 있는지 물어보기는 했지만, 만약 중국도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냥 중국 동북지방에 북한 망명 정부를 세우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스탈린은 기본적으로 공산권의 이웃나라들을 '소련을 지킬 성벽' 정도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직접 개입하는 등 소련에 위협이 되는 행동은 최소화하고자 했다. 스탈린이 한반도를 그리도 소중히 여겼다면 북한이 패주할 때 더욱 직접적인 방안을 마련했을 것이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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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국 정부는 한반도 점령 계획에 영국중화민국을 끌어들이고자 했는데, 그 계획 중 하나가 위의 일본 점령 후의 분할도와 같은 것이다. 미국은 4개국 분할통치를 통해 미국 단독의 일본 점령으로 인한 부담을 덜고자 한 것이다.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4개국 분할통치안은 당시 국제 사회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없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우익 계열의 한국 정치 세력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이다. 위의 일본 점령 후 일본 제국 분할도에서 한반도 4개국 분할안이 실시된다는 전제로 검토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평안도황해도를 점령한 영국은 실제 역사에서 2차 대전 직후 국력이 쇠퇴하여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마저 포기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인도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한반도 서북 지방에 큰 미련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윈스턴 처칠소련을 경계하여 미국에 협조했으므로 영국이 점령한 한반도 서북 지방을 미국과 우익 성향의 신생 한국 정부의 관할로 넘겨줬을 가능성이 크다.

서울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경상도를 점령한 미국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넘어가고, 충청남도전라도제주도를 점령한 중화민국의 경우에는 장제스가 어떤 행보를 취하느냐에 따라서 거취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선 장제스의 대일본 반격작전은 이미 실행에 옮겨진 후였고 보급도 형편없고 민심도 얻지 못하고 사단 정족수도 채우지 못하던 일본군미국의 지원을 받아 강력해진 중국군을 더 이상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중화민국의 종전 후 목소리가 더 커지고 한반도에 대한 강한 영향력 보장을 요구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실제로 국공내전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중화민국은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시코쿠를 통치하기 위해 장교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공내전이 터지면서 시코쿠에 파견한 장교단은 모두 철수시켰고 한반도도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됐다. 만약 장제스가 측근들의 말을 들어 국공내전을 재개하지 않고 산해관을 국경으로 삼아 전후 피해를 복구하고 전열을 정비하여 후방을 탄탄히 해놓은 다음에 중국 공산당을 쳤다면 가뜩이나 소련과 사이도 안 좋았던 공산당은 그냥 국민당에게 쓸리는 것 말곤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될 시에 한반도가 중화민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올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설령 만주를 점령한 소련에 의해 공산정권이 들어선다 하더라도 현행 역사대로 중화민국의 지분 요구에 따른 분할점령의 가능성이 있으며 한반도의 공산정권은 자본주의 세력에 샌드위치로 포위되어 개털이 되는 것이다.

또한 중화민국총통 장제스는 2차 대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은 친한 인사인데, 그게 단순히 그가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감격을 했다는 이유만이 아니라 전후의 동북아시아에서 장제스 자신이 지원을 해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반도의 정권을 잡았을 경우 신생 대한민국이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편입되는 효과를 누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42] 이를 미루어 보아 자칫 반중 감정을 살 수 있는 충청남도전라도제주도의 신탁통치보다는, 중화민국의 점령지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한국 정부 또는 미국 관할로 넘겨주어 중화민국에 우호적인 한국 정부를 지원하는 게 더 이득이다.

결과적으로 이 상황의 남한서독의 경우에서처럼 미, 영, 중 3개국 분할통치 지역의 통일로 말미암아 실제 역사의 대한민국보다 다방면으로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일단 대한민국의 영토가 38선 이북에 걸쳐져 있는 데다가, 38선 이북 영토가 한반도 북부의 인구 밀집 지역이자 평야지대인 평양을 포함한 서북 지방이다. 만약에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과 같은 내전이 발발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영토나 인구의 역량에서 실제 역사와는 비교가 안 되게 남한이 유리하다. 여기서 북한이 지배할 영토라고 해봤자 함경도가 전부인데, 이곳에는 한반도 최악의 혹한지대인 개마고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농사를 지을 만한 토지가 거의 없어 식량 생산에도 불리하며 인구도 적다. 그나마 이점이라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설치한 함흥, 흥남 등의 중화학 공업지대 정도인데, 이것만으로 북한의 경제력을 떠받치기엔 역부족이다.

설령 북한이 공산권에서 지원받은 군사력으로 실제 역사에서와 같이 남한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다가 남한과 UN군의 반격으로 위기에 몰린다고 해도, 남한 정부가 굳이 북한의 영토인 함경도를 점령하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일단 위의 서술대로라면 중화인민공화국이 존재하고, 그럴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국가일지는 차지하고)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할 명분도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실제 역사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유엔군에게 "38선을 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했으나 유엔군이 이를 무시하고 북진한 것을 자국에 대한 심각한 안보적 위협으로 받아들여 참전을 결정했는데, 여기서는 이미 전쟁 전의 대한민국 영토가 38선 이북에도 있으니 그런 명분을 내세우기도 어렵다. 38선 이북의 대한민국의 영토 수복을 위해 유엔군이 진입하는 것이니 국제 사회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진군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해야 유엔군의 함경도 진입에 대해 경고하는 정도로 그쳤을 것이다. 당초에 중국 건국 초기의 대외적 목표는 대만 점령이었지, 북한의 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 역사에서도 중국의 고위층 인사 대다수의 6.25 전쟁 참전 반대 입장에 부딪혀야 했던 마오쩌둥의 참전 지지 입장은 실제 역사에서보다 영향력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대신에 압록강 남안에 배치될 한국군 또는 유엔군을 경계하여 한중 국경지대에 상당한 군사력이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중국이 북한과 연계하여 수시로 남한과 국경 충돌을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 설령 중공군의 침공으로 북한을 구원했다손 치더라도 남한은 이미 북한과의 체제 경쟁을 이기면서 시작한 거나 다름없기에 냉전이 종료될 시점인 1989년~1992년 무렵에 북한이 자동적으로 체제 붕괴되어 남한에 흡수통일됐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4개국 분할에 따른 결과 가정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에 비해 현실성이 떨어진다. 미국이 소련의 남하 속도가 상당히 빨라 한반도 전역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을 제한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가정이다. 당연 소련군의 일본 상륙이 벌어지는 시점에서 한반도 전역이 소련 치하에 놓이게 되며, 설령 전략적 중요성을 이유로 미국과 중화민국에 점령지를 할양하게 되더라도 소련군 혼자서 한반도를 소위 '해방'시켰다는 사실로 인해 남한을 구성하는 영토는 결국 한국의 현재 영토에 못 미칠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당시 영국이 전후상황에서 유의미한 전력을 지구 반대편인 한반도에 파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국이 핵으로 소련을 압박하는 상황이 나오기도 희박한데, 이는 미국이 38선 제안을 하기는 했으나 애치슨 라인의 사례처럼 미국이 한반도를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으로 생각하지는 않았고, 설사 한반도를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들 미국 역시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누적된 피로감과 피해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 자칫 잘못하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핵으로 소련을 압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편, 해당 4개국 분할안을 두고 함경북도 지방을 소련이 연방속 자치공화국 쯤으로 꿀꺽하지 않았겠냐 하는 가정도 보인다. 상술했듯이 독립국으로 놔두기엔 상당히 제약이 많은 협소한 땅이기에 저렇게 분할된다면 독립국을 꾸리기보다는 소련이 최소 부동항 나선을 연해주의 연장선으로 흡수해버리고 친소련 인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워 소비에트 연방 산하 자치 공화국쯤으로 두지 않았겠냐 하는 가정이다.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하면 한국은 독립할테니 카이로 선언에 직접적으로 저촉되는 것은 아닌데, 이미 2차대전 중에도 다음 적국은 소련이 될 것임을 누구라도 알던 시기였고 전후처리 과정에서도 그런 면면들이 알게모르게 드러나는데 소련의 그러한 노골적인 직할령 확장을 연합국들이 용인할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6.2.3.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양분 시나리오[편집]


그러나 4개국 분할 점령이 현실성은 떨어진다는 말이지 실제와 유사하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양분했을 거라는 가정은 무시할 수 없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미국과 대한민국에 분할이 더 유리해지거나 대한민국 정부 단독 수립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스탈린의 관심사는 홋카이도와 만주였고 딱히 미국을 자극하고 싶지도 않았다. 미국이 핵으로 소련을 압박할 수는 없었지만 반대로 소련이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상황도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주 작전 당시 소련군은 철저하게 만주 지역의 장악과 관동군 완전 섬멸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며,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 또한 한반도 북부가 이미 1945년 초에 관동군 관할로 넘어갔던 상황에서 작전 수행 중 측면 지원 성격으로 이뤄졌음을 고려해야 한다. 소련이 만주 지역을 장악한 다음 시점이 변수이겠지만, 스탈린의 관심사가 홋카이도라는 점에서 미국을 자극할 수 있는[43] 한반도 전체 점령보다는 대일전 참전 전에 논의된 바와 같이 39~40도선까지만 남하하거나, 미국 간의 정치적 거래로 한반도를 미국에 양보한 후 본토 점령에 초점을 맞추어 홋카이도로 진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탈린 입장에서는 괜히 미국을 자극할 만한 행동을 했다가 일본의 옛 식민지나 그 일부만 가질 바엔 곧장 일본 본토로 진격하여 홋카이도를 점령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된 전후 연합국의 일본 본토 분할 점령 계획에서도 소련의 점령지로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이 배정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소련군은 상륙작전을 홋카이도 쪽에서 펼치는 편이 낫지, 머나먼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가서 미군과 가까워지는 규슈나 혼슈 서부에서부터 침공할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다만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다면, 이미 중화민국이 중국 주둔 일본군, 나아가 잠재적인 적성세력인 중국 공산당보다 대륙 본토 점유율에서 압도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지므로 분단 이후의 역사가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의 대한민국이 실제 역사의 대한민국보다 사정이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중화민국이라는 거대한 친미 국가가 멀쩡히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있으니 미국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안중에도 없을 테고, 이러면 실제 역사의 대한민국보다 안보 측면에선 좋지만[44] 경제 및 문화 측면에선 바로 옆에 중화민국이라는 거대한 대국의 존재로 미국을 비롯한 타국의 관심과 투자를 기대하기 어렵기에 이 시나리오의 대한민국은 경제소프트 파워 모두 실제 역사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떨어질 가능성도 크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 실제로 한국전쟁 발발 전만 하더라도 미국의 외교 전문가들이 한반도를 두고 내린 결론은 전부 "지정학적 가치가 거의 없는 곳"이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직후 갑자기 그 가치가 떡상했기 때문이다.


6.3. 미국[편집]


예상 피해 규모는 유동적이지만 미국이 태평양 전쟁 역사상 제일 많은 전사자를 껴안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대가이다. 그리고 지나친 장기전은 집권당의 미국 국내 정치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매우 높다. 거기에 재주는 뭐가 넘고 돈은 누가 챙기는 격으로 소련만 '동아시아에서의 엄청난 영향권' 이라는 선물을 챙겨갈 뿐이니 국제정치적으로도 매우 불리하다.

물론 미국이 비상륙/봉쇄전으로도 일본을 끝장낼 수 있었다. 제공권/제해권을 완전 장악한 지 오래되었으니 일본 주위의 전 해역을 기뢰로 봉쇄하고(Operation Starvation: 기아작전) 주요 도시는 네이팜 폭격으로 일본의 산업생산력을 고갈시키며 느긋하게 기다리면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이미 일본은 식량 상황이 거의 한계에 다른 상황이기도 했다.[45]

일본 열도는 한반도보다도 더 산악지가 많은 지형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바닷길이 험해지면 전국 각지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로 연안 해운의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나라가 일본이었으며 2차대전 당시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도로/철도가 여기저기 만들어지고 나라 전체가 연결된 건 한국에 비해서도 그리 오래 되지 않은 현대의 일이다. 원자폭탄보다도, B-29의 융단폭격보다도 이 기아 작전이 훨씬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21폭격부대의 출격의 5.7%(1529소티)만 가지고 침몰톤수 30만 톤에 파손톤수 40만 톤을 내었고 세토 내해의 그나마 멀쩡한 대형 항구이던 고베라든지 오사카항의 물동량을 대폭 감소시켜 버렸다.[46]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런 봉쇄전도 선택지가 되기 힘들었다. 본토 침공 자체보다 시일이 훨씬 길어지며 태평양 곳곳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상자와 오랜 전쟁에 국민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고 반전 여론도 점차 거세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존 바실론 등 슈퍼스타를 이용한 세일즈 등 국채를 이용한 미국의 재정 충당도 이미 한계였다. 그래서 정치권과 합동참모본부는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야만 하는 부담이 점차 증가했다. 군부조차 예상 사상자에 대한 분석자료를 받아들고는 큰 부담을 느낄 정도였다. 이때는 소련이 대규모로 일본 본토에 먼저 침공하게 될 것이다.

상륙을 하든 안 하든 미국으로서는 이래저래 비용 지출이 너무 컸다. 괜히 몰락 작전이 쓰고 싶지 않은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던 것.

다만 미국의 이득도 없는 건 아니다. 이 경우 일본은 이렇게 되면 냉전 시기, 그리고 그 이후 중국과의 대치 상황에서 골칫거리로 작용하고 있는 요소들이 알아서 제거되면서 말 그대로 안정적으로 일본을 완벽히 2인자화하여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을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47] 또한 중화인민공화국이 21세기 현재처럼 급성장하리라는 예상은 아무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그 당시에 수십 년 후인 21세기 초반의 국제 정세를 내다보는 놀라운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몰락 작전을 지지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가정이다. 애초에 21세기 중국의 급성장을 견제하지 못한 것은 서방이 테러와의 전쟁과 대침체로 너무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큰데 50년 뒤에 소련의 붕괴 이후 중국이 급성장하는 것을 이런 사건으로 견제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면 그건 놀라운 통찰력이 아니라 미쳤거나 무당일 것이다.

그 외 몰락작전의 결과 국공내전이 중화민국에게 유리하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실제 역사보다 소련 견제가 유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러면 중화민국과 미국의 신냉전을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중재했을 수도 있다.

6.4. 소련[편집]


몰락 작전이 실행된다는 것은 일본과의 전쟁이 매우 장기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은 일본군의 소탕을 핑계로 만주, 한반도는 물론 중국, 그리고 일본 방면으로도 진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거기에 사할린, 쿠릴뿐만 아니라 홋카이도까지 소련군을 상륙시켜 점령하고, 추후 영토로 강제 병탄했을 가능성도 높다. 사실 1945년 8월 일본 항복 이전 소련은 홋카이도를 공격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사실 당시 소련은 극동에서 작전을 전개할 상륙함이 모자랐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및 장거리 상륙작전을 해본 경험이 없기에 경험 부족으로 사상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고 더이상의 인명피해는 소련이 감당할 수 없었다.[48] 가장 가능성 있는 계획은 소야와 이시카리에 협공을 하는 건데, 워낙 지형이 위험하고 일본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우기 때문에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은 구레 군항 공습 이후로 해군이 소멸된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수송과 장비 문제에서 소련 자력이 아닌 미국에 손을 벌려 해결할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국은 몰락 작전을 수행할 시 소련의 참전을 원했고, 1945년에는 만주 작전과 일본 공격을 위해 소련군에 함선을 지원하는 훌라 계획(Project Hula)을 진행했다.[49]

모양새만 놓고 보면 스탈린은 다 된 밥상에 숟가락 얹는 꼴이다. 소련의 이런 뻔뻔한 태도는 애초에 소련에 돈은 돈대로 꿔주면서 쓸데없이 손을 벌려 명분과 약점만 잡힌 대소 유화론자이자 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책임이 크다.[50] 소련의 태평양 전쟁 개입의 명분도 분명히 미국이 먼저 준 것이 사실이다.[51] 대소강경론자인 해리 S. 트루먼이 훨씬 일찍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았다면 애초에 소련이 극동에 끼어들 여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52] 결과적으론 루스벨트가 한반도 분단을 야기한 셈이 되었다.[53] 루스벨트가 얄타 회담 이전에 사망했으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간단히 말하면 소련의 일본 본토 상륙 여부와는 상관없이, 몰락 작전의 실행 자체가 소련이 엄청난 이득을 보는 상황이다.[54]

다만 이미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2,000~2,700만의 피를 흘린 상황에서 일본 본토에 상륙해 전쟁을 수행해야 될 경우 피를 더 흘려야 했는데 소련은 그러힌 여력이 없었기에 상술한 것과 같이 큰 성과를 수확하지 못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기본적으로 상륙 작전은 공격자의 피해가 큰 작전인 데다가 일본이 진짜 정신 차리고 요새를 구축하고 방어전을 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소련이 만주, 북한, 남사할린, 쿠릴 열도에서 일본군을 쉽게 격퇴한 이유 중 하나는 원폭과 소련군의 참전으로 일본이 전쟁 수행 의지를 잃었기 때문인데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소련은 일본 본토는 커녕 이 지역들에서도 막심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즉, 소련의 입장에선 더 이상의 인구손실이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인구 손실을 더욱 감수해야 한다. 결국 몰락 작전이 수렁에 빠질 경우 소련의 국력이 크게 저하되었을 가능성 역시 있다.


6.5. 중화민국[편집]


높은 확률로 중화민국엔 상당한 이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히 말하면 장제스 정권에게는 상당한 이득이다. 일본이 항복 안 하고 버티면 필연적으로 국민당 정권이 일본군 점령지를 무력으로 탈환하는 '카보네이드 작전'이 실행되었을 것인데, 이미 즈장이나 라오허커우 전투에서 일본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중국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고 국민당군이 제손으로 자기 영토를 탈환하게 된다. 이는 전후 국민정부의 영향력이나 지방 장악력이 더욱 올라간다는 것을 의미할뿐더러 실제 역사대로 주력 부대가 죄다 사천, 운남에 박혀 있는데 난데없이 전 중국을 한꺼번에 재점령하고 그 엄청난 혼란상을 모조리 정리해야 한다는 하드코어 상황을 맞이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된다. 무엇보다도 화북에 깔린 100만 명의 홍군이 일본군 항복을 틈타 마음대로 설치는 상황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으며 장제스의 패망의 기로가 갈린 만주 재점령 문제[55]에서도 실제 역사보다 훨씬 유리한 지분을 차지할 수 있다. 그리고 이후 국공내전을 대비할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병력과 재정을 점검할 시간과 여유가 주어진다는 것도 이득. 다만 전쟁이 최소 몇달 이상 지속되면서 피해는 늘어났을 것이고 장제스 세력의 전후 자세한 행적을 예측할 길이 없기 때문에 중국 국민들에게도 이득이었을지는 의문스럽긴 하다.


7. 각종 매체에서의 몰락 작전[편집]


가끔 일본대체역사물격인 가공전기에서 이런 전개를 다루기도 한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5분 후의 세계 및 속편 5분 후의 세계: 휴가 바이러스는 바로 이 몰락 작전이 시행되고 4개국의 점령하에 들어간 평행세계 설정이다. 일본인은 거의 전부 각국의 혼혈화가 되어 우민정책 아래 노예 취급을 받으며 각국 본토인들 거주지역과 대비되는 대규모 슬럼가를 형성해 살아가고 남은 순수 일본인 26만 명은 지하세계를 세우고 저항한다. 그 세계의 일본인들은 RPG로 장갑차를 한 명당 한 대씩 잡는 교환비를 세우는 전투종족.[56] 좀 종잡을 수 없는 소설이며 설정 상 안 저러면 저항을 해도 성과가 없어진다 전쟁소설대체역사물로서도 별로 가치는 없다. 애초 그쪽으로 중점을 두고 쓴 물건도 아니고. 소설로서는 그저 평작이다.

HOI2의 시나리오로 구현되었는데 이쪽의 연합군 목표는 소련군이 일본에 상륙하기 전에 일본의 모든 군대를 분쇄하고 일본의 빅토리 포인트[57], 즉 대만과 일본 전역을 점령해야 한다. 일본의 VP가 단 1점이라도 남아있으면 게임은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다만 일본에게 엄청 유리하다. 일본의 모든 영토에 주둔병과 민병[58]이 2~3사단씩 있는 데다 소련은 수송선이 얼마 없고 그나마 상륙 가능한 포인트가 홋카이도인데 여기서 본토 공격해봤자 삿포로→센다이 도강 페널티 먹었다. 연합국은 대만부터 섬 하나하나 다 찍고 올라와야 하는 데다 육군이 얼마 없다. 반면에 일본은 그냥 상륙 포인트에 이동 가능한 사단 전부 꼴아박아놓고 세월아 네월아 기다리면 이긴다. 물론 일본이 실제로 이랬다면... 소련이 이길 경우 당연히 한반도는 적화되며[59] 연합국이 이길 경우 그냥 일본 항복, 일본이 이길 경우 싸대기를 맛깔나게 후려맞은 연합국이 일본인의 끈기에 감복하여 협상해준다충공깽스런 결말.

겁스 관련 TRPG 웹진인 피라미드에 소개된 적이 있는 겁스 무한세계의 예제 세계관 중 케츠고가 있다.[60] 이 세계관을 꾸밀 때 제안할 가능성으로는 당연히 일본 본토에 대한 여러 번의 핵 폭격. 미국이 방심한 사이에 스탈린(을 위시한 공산세력)이 한반도 전역과 홋카이도를 점령한다거나 일본의 분단, 1948년에도 공화당이 미국의 정권을 잡는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코에이 사의 대전략류 게임인 '개가의 호포' 는 몰락 작전이 시행되고 승전국의 점령하에 쪼개진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각 점령국의 지원하에 쪼개진 일본을 통일하는 것이 목표.

일본라이트 노벨 All You Need Is Kill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에서 주인공 케이지가 수백, 수천번 죽어 나가는 상륙 작전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세가새턴판 1995년작 월드 어드밴스드 대전략~강철의 전풍~에 수록되어 있다. 게임판의 맵은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일본군과 미국, 소련군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일본군의 공중전 전력이 미국에 비해 좀 더 강하게 설정되어 있다. 스탠더드 모드에서는 단독 맵으로 즐길 수 있으며, 캠페인 모드에서는 미국 시나리오 분기 중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다. 색적모드를 On으로 할 경우 공격하는 미군이나 방어하는 일본이나 피칠갑이 되는 격렬한 맵. 소련 극동방면군은 니가타 방면에서, 미 1군 및 8군은 실제 계획대로 쿠쥬쿠리 해안과 사가미 만에서 내륙을 향해 진격하며 일본 36군은 마에바시, 12군은 내륙 깊숙한 마쓰시로를 거점으로 방어한다. 엔딩에서 일본 수뇌부는 미소 연합군에 함락 직전 마쓰시로 대본영과 함께 자폭하여 일본 제국은 소멸한다. 이후 일본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도호쿠 이북에 소련이 극동아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며, 미국은 소련과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일본의 남은 절반을 위임통치 하에 두는 것으로 시나리오는 끝난다.

별이 펄럭일 때에서도 나오는데, 차이점이라면 하는 건 미국이 맞는데 맞는 건 추축국 포지션의 판타지 측 국가다. 다섯 단계로 구성된 작전으로 특히 세번째부터가 몰락 작전의 핵심이 되는데 최고의 숙련병만 모아서 통신을 마비시킨 수도와 군항을 폭격한 다음 함포로 갈아엎는다는 비범한 작전.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판에서도 비슷하게 나온다. 작중 시대가 1960년대 쿠바 미사일 위기가 평행세계에서도 다르게 벌어져 히틀러의 사망을 일본의 암살로 판단하여 독일이 일본을 상대로 기습 핵공격을 가한다는 것. 잠수함과 원거리 로켓을 이용해 핵공격을 가하고 폭격기를 동원하여 2차 핵공격, 이후 상륙부대로 일본을 점령하는 작전을 세운다. 작중 일본은 원자폭탄 기술이 전무해서 핵반격도 못하는 상황으로 독일 수뇌부도 낙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때 하인리히 힘러가 "일본인은 천황을 신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신이 항복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면 끝까지 저항할 것"이라고 만류한다. 다행히 진짜 히틀러 암살자를 찾아내고 주연들의 활약으로 독일-일본 간의 핵전쟁은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히틀러라니!에서도 이 작전이 조금 묘사된다. 원 역사와는 달리 이오지마 전투오키나와 전투에서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은 히로시마 등의 선제 핵공격을 연기하고 몰락 작전을 그대로 시행한다. 시기 또한 실제 몰락 작전보다 약 1년 정도 앞당긴다. 또한 소련은 처음부터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서 미국 단독으로 실시한다. 당연히 일본군 및 일본 민간인의 피해는 막대하였고 도호쿠의 일부 지역을 제외한 일본 본토 전역이 미군에게 쑥대밭이 된다. 작전 시행 이전의 일본 인구가 7,000만 정도인데, 종전 직후의 인구가 2,500만까지 감소[61]했으니 말 그대로 일본어를 지옥에서나 들을 수 있는 대참사가 벌어진 것. 여기에 도피 중이던 쇼와 덴노가 실종되고 이우오토 스코르체니의 주도로 아키히토 황태자가 미군에게 납치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일본군은 더 이상 전쟁 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한다.

아라카와 히로무백성귀족 2권에도 등장한다. 만약 몰락 작전이 그대로 실현되어 도호쿠와 홋카이도가 소련 땅이 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라는 망상으로 전개되는데, 집 근처에 심은 농작물을 팔기 위해 미국이 차지한 도쿄로 몰래 밀입국하다가 사살당하거나 작가 曰 국경 감각이 없는 섬나라 태생 일본인 상황 속에서 정전으로 우유를 손으로 짜내고, 옐친 정권에게 논밭을 돌려받았다고 기뻐하다가 무거운 상자처럼 묘사된 경제위기에 치이고 깔리는 소여사와 다른 농민들의 표정도 백미.

오리진 시스템즈의 전투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인 "퍼시픽 스트라이크"(1994년작)에서는 몰락 작전을 뒤집은 시나리오가 등장한다. 주인공(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전투기 조종사다)이 잘해서 몰락 적전을 성공시키면 일본에 핵무기가 투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주인공의 전과가 변변치 못하면 핵무기 투하.

8.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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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무리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의 전력이 압도적이고 일본군의 상황이 암울하다 하더라도, 일본 제국 내 대도시들에서 벌어지는 전례 없는 수준의 거대한 시가전과 일본 민간인의 저항으로부터 연합국 측만으로도 100만 여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일본인 민간인 사상자는 더 막대할 것으로 예측되었다.[2] 일본에 대한 전쟁 지지가 높던 초기와 달리 1945년 시점에서 미국 대중들은 전쟁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지독했던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고 유권자들은 더 이상의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하길 원치 않았다. 이를 무시한 채 100만 여명에 달하는 유권자들의 자식들을 전장에서 죽게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은 정치계에 막대한 부담이 되었으며, 이는 실제로 몰락 작전 대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등으로 일본의 항복을 유도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3] 이 일곱 발의 핵 중 가장 먼저 준비되는 것은 8월 18일 이후 맑은 날을 잡아 지난번에 폭격하려 했다가 포기한 고쿠라에 투하될 예정이었다.[4]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미 육군은 유럽 전선 뿐만이 아니라 태평양 전쟁 초기부터 태평양 곳곳에 전개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해병대 병력만으로는 그 넓은 태평양 전선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때문에 미군은 유럽 전선의 노르망디 상륙작전도 육군이 해병대 대신 수행해야 했다. 태평양에선 육군 사단과 해병대 사단이 혼성 편제된 수륙양용군단으로 구성했고, 해병대가 없는 전장에선 육군부대가 해병대처럼 쓰였다. 일본이 항복할 당시 21개의 육군 사단과 해병대 6개 사단이 해외에 파견되었다. 특히 올림픽 작전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서 경험을 쌓은 육군 사단들이 주로 대거 투입될 예정이었다.[5] 여담으로 당시 일본군이 제주도를 전략거점 중 하나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때 제주도 역시 폐허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6] 실제 역사에서는 종전식이 끝난 10월에 오키나와 동부에 정박한 미 해군 선단을 태풍이 덮쳐서 꽤 피해가 났는데 문제는 이 정박지가 일본 본토로의 침공이 시작될 경우 규슈 침공 부대가 머무를 정박지라는 것이다. 만약 계획대로 상륙이 이루어졌다면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7] 전함 하나의 화력은 러시아군의 포병 사단 하나와 거의 맞먹는다. 즉 20개 포병 사단과 맞먹는다. 전성기 때 소련의 포병 사단이 16개였다.[8] 오클라호마는 1947년 스크랩을 위해 운송하던 중 침몰했다.[9] 여기서 계산에 빠진 게 하나 있는데, 종전 며칠 전에 서일본 지역을 방어할 병력의 지휘체계는 히로시마에 있었고, 따라서 종전 시점에서는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사령관은 아슬아슬하게 핵을 피했지만 직후 만주를 시찰하러 갔다가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10] 사실 상륙작전에 적합한 곳은 쿠쥬쿠리 해안 쪽이었는데 그곳은 해안가의 면적도 넓고 근처에 여러 항만이 있어 상륙 후 교두보 확보에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곳에서 간토 내륙으로 향하려면 에도가와나 아라카와 등의 하천하구가 있어 이후 진격에 꽤 어려움이 있으리라 예상되었다.[11] 한 예로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스페인 내전 당시 지원해준 독일, 이탈리아와 같은 추축국과 매우 각별한 사이였고 실제로 의용군 명목으로 독소전쟁에 병력을 파견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일본과도 그 관계가 매우 돈독했다. 하지만 필리핀 전투 당시 벌어진 일본군의 마닐라 대학살로 인해 스페인 외교공관까지 공격받는 일이 발생하자, 스페인은 일본과 단교했다.[12] Jap,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을 비하하던 멸칭이다.[13] 전쟁의 결과가 사실상 결정되었음에도 일본 지도부의 고집으로 인명손실이 계속 발생한다는 것에 느끼는 불만에 가까웠다. 아예 조기종전과 미군 측의 불필요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화학무기로 싹 쓸어버리자는 과격한 여론까지 일어나고 있었으나 루즈벨트가 생전에 화학무기 사용에 매우 부정적이어서 그나마 현실화되지는 않았다.[14] 실제로 여론이 조속한 조기 종전을 원했다면 당장 1944년 말 대통령 선거에서 루스벨트가 낙선해야 했으나 여유 있게 압승했다. 다만 상대 후보 토마스 E. 듀이 또한 종전주의자가 아니었고, 진주만 공습의 대한 대가로 어떤 형태로든 일본을 무조건 항복시켜야 한다는 대전제에는 정치인들 역시 이견이 없었다.[15] 커티스 르메이가 왜 원자폭탄의 존재를 몰랐는지 하면 간단한데, 원자폭탄의 존재는 당시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Chief of Staff to the Commander in Chief of the Army and Navy) 이하 합동참모회의의 멤버들을 포함해 니미츠, 맥아더 등 최고위층과 레슬리 그로브스 등 실무자들만 알았던 극비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리 S. 트루먼조차 부통령으로 있던, FDR의 서거 후 대통령직의 승계 전까지도 맨해튼 프로젝트와 그 결과물인 원자폭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16] 실제로 핵폭격당한 이후의 최후의 어전회의에서도, 항복에 찬성한 해군 및 외교관료층과 달리 육군은 끝까지 항복에 반대했다. 육군의 항복불가론은 어느 정도 형식적이었지만 최종적으로 그 항복불가론은 쇼와 덴노가 아니면 꺾을 수 없었다.[17] 이라크 전쟁에서도 전면전 상황에선 존재가 무의미할 정도로 순식간에 박살난 이라크군이었지만, 점령 이후의 처리 과정의 실책으로 어쨌거나 정식으로 훈련받고 편성을 지닌 정규군이던 인원 다수가 저항군에 가담하게 된 것이 이후 난장판의 주요 원인의 하나였음을 생각해보면, 설령 정규전 기준의 전력으로는 허접함을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정식 군대이기는 한 대규모의 예비정식 병력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저 무시해 버릴 문제는 아니다. 게다가 당시의 미군은 이미 수 차례 일종의 '비대칭 전투' 형태로 광신적으로 저항하는 일본군을 상대해 본 상황이었다. 그런 '미친 놈'들을 앞으로도 60만은 더 상대해야 했다. 물론, 특히 당시 일본 국내에서 실상을 보았던 이들 상당수의 평가처럼, 실제로 미군이 본토까지 상륙한 다음에도 일본군은 물론 동원된 일본 민간인들이 정말로 '대본영'이 시키는데로 '총옥쇄'에 뛰어 들었을지는 회의적으로 판단될 여지가 적지 않았지만 이는 일본 내에서 상황을 실제로 볼 수 있던 이들이 할 수 있던 판단이다. 미군과 연합군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가 지금껏 상대한 일본군은 (심지어 간혹 민간인들조차) 집단자살을 마다하지 않는 정신나간 집단이었지만, 본토에서 만나게 될 나머지 일본 국민들과 본토 방어군은 제 정신일 것이다'라고 낙관할 근거가 적었다. 따라서 몰락작전 역시 대규모의 잔존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최후까지 광신적으로 발악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짜여진 계획이었다. 사실 카미카제와 집단자살이 벌어지던 태평양 전선은 물론, 막 종결된 유럽 전선에서도 연합국은 십대 소년들과 노인들까지 전투에 내모는 최후의 발악을 이미 직접 목격한 바 있다. 그리고 연합국은 일본 제국이 나치 독일보다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전력이 아무리 허접하다고, 어쨌거나 규모로만 따지면 이제껏 태평양 전선에서 격파한 일본군 병력 전체보다도 더 많은 숫자의 정규 병력이 본토 방어에 투입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연합국으로서도 부담이었다.[18] 지상발사식 오카는 일본 해안가 곳곳에 배치까지는 되었다.[19] 루머지만 당시 G8N 리타가 제주도에 배치되었다고 한다.[20] 원래는 본토를 포기하고(...) 지금의 용인으로 아예 천도할 계획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무산되고 나가노에 요새를 구축한 것이다.[21] 동양인인 일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라는 의견이 있지만 화학무기의 군사적 이용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1925년의 제네바 화학전 금지협정에는 일본과 프랑스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이 두 나라에 대한 화학전 자체는 국제법상 불법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둘 중 하나는 죽는다며 악에 받칠 대로 받힌 상황이었다.[22] 다만 중국의 국민혁명군홍군을 상대로는 엄청나게 뿌려댔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군의 저항이 거세 전선 돌파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사단 단위에서 자체적으로 독가스를 퍼부었다. Yuki Tanaka, Poison Gas, the Story Japan Would Like to Forget, 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 October 1988, p. 16-17[23] 그것은 지금의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다. 공군이 괜히 3군 중에서 화학전 훈련을 제일 빡세게 하는 게 아니다. 비행장을 무력화할 만한 수단으로 화학탄만 한 게 없다는 걸 우리 군도 북한군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접경 지역의 비행장은 국제법이고 자시고 간에 화학탄의 집중포화를 받을 것이다.[24] 당시 미군 지휘부는 원자폭탄의 방사능 위험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방사능 피해가 있어봤자 X-레이 몇 번 찍는 수준의 그냥 엄청나게 강력한 슈퍼폭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계획이다. 미군이 방사능 피해를 본격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건 전후의 여러 핵실험 및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피해 사례를 종합하고 크로스로드 작전으로 인해 직접적인 방사능 피해를 입으면서부터이다. 실제로 개발 초기엔 원폭 투하 후 참호에서 나와 폭심지로 진격하는 훈련도 했었다. 기록 필름을 보면 핵실험 뒤에 방사능을 씻어내고 시설을 재사용한다며, 지금 기준으로 변면한 방호구 없이 병사들이 물청소하는 장면도 나온다. 1950년대까지 라스베가스 시에서 원자폭탄 버섯구름을 구경할 수 있었고 핵물질이 들어간 아동용 실험 키트가 팔렸다. 만약 실제로 수행되었다면 폭격당하는 일본군이나 일본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미군 병사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방사능에 쩔어서 단명했을지도 모른다.[25] 군사학에서는 이를 공격자의 이점이라고 한다.[26] 하지만 수송 비용에서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했다. 전후 아이젠하워의 명령으로 퍼싱 500대를 서부에서 동부로 옮기는 실험을 했을 때 2달이나 걸렸기 때문. 이 경험은 아이젠하워가 인터스테이트 고속도로 건설을 적극 추진하는 원인이 되었다.[27] 더 퍼시픽 8화에서 존 바실론이 괜히 일본군 병력을 칭찬(?)한 게 아니다.[28] 심지어 이때쯤 되면 일본군에게 있어서 보급은 어디 4차원 세계에나 존재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29] 당시 일본 국민으로 취급되었던 내지와 대만, 그리고 한반도.[30] V1 미사일의 미국 카피판이다. 미군에 정식 채용되어 75,000발을 생산하여 일본 본토 공격에 사용할 예정이었다.[31] 간단히 육군 항공대가 시행한 도쿄 대공습의 해군 버전인 구레 군항 공습만 봐도 답이 나온다.[32] 그 당시 미국의 태도를 본다면 전사자가 많아질수록 상륙/도시 진입 이전에 핵을 투하하거나 화학탄을 뿌렸을 것이다.[33] 연합군이 카와치 북부의 산맥으로 진격하는 시기[34] 코로넷 작전에 의한 사전 포격과 폭격이 남은 것을 몽땅 박살내는 시기.[35] 위의 지도는 2차대전 말기 미국 참모본부 산하 기구인 통합전쟁계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 JWPC)가 작성한 'JWPC-385' 계획의 일본어 번역본이다. 미국만의 일본 단독 점령으로 인한 정치적 부담 및 미국의 일본 독점 지배에 대한 다른 연합국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방책이었으나,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구상 단계에서 폐기된 계획이다.(출처: 권성욱 지음,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36] 단, 이 시점에는 이미 미군이 대규모로 전개하고 있었고 소련군의 단독 상륙작전 수행 역량이 떨어졌기에 소련군이 홋카이도를 넘어 도호쿠까지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37] 이런 근대화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면 애초에 식민제국으로 거듭나고 미국과의 전쟁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38] 부산항은 당시 한반도 최대의 항구였으며, 빠른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필요로 한다. 실제로 실제로 소련이 한반도 북부와 함께 부산항, 제주도는 점령 계획이 있었다는 구 소련 외교문서도 공개되었다.# 다만 몰락 작전 시 계획된 소련의 점령지가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이라는 점, 만주 작전 당시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소련군의 성격, 스탈린의 관심 순위를 고려하면 소련군이 한반도 남부까지 왔을거냐에 대한 반론도 가능하다. 이 부분은 후술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양분 시나리오 문단에 나온다.[39] 흔히 이런 체제를 '자본주의를 도입'했다고 오해하는데,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이지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각 국영기업의 운영에 자율성을 부여했다고 해도 기업의 소유권(대주주로서의 권한)은 여전히 국가에 있으며, 국가 전체의 경제정책의 기조 역시 중앙정부(공산당)가 수립한 계획에 따르기 때문이다. 국영기업 사장들은 공산당이 임명하며 상당수는 공산당 당원이고, 중대한 사고를 치면 파면된다.[40] 갑산파는 한국의 전통 정치 사상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목민심서 등 정약용의 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41] 마오쩌둥북한이 무너지면 치명타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 만주가 버티고 있기에 상황이 나았다.[42] 다만 장제스의 친한 성향이 전적으로 이해관계에 의거했다고만 단정하기는 어려워보인다. 실제로 그는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커녕 중국 본토를 상실하고 대만에서 겨우 버티던 1963년에도 흉년이 든 한국으로부터 식량 지원 요청을 받자, 자국의 식량 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식량을 수출하면서 "한국 같은 나라에게 겨우 쌀을 5만 톤밖에(!) 주지 않으면서 돈까지 받아야 하는 게 한스럽다.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면 55만 톤 정도는 그냥 주었을 텐데."라고 말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단순히 장기적인 국익 획득 목적에서 친한 성향을 유지했다기보다 한국에 대한 개인적인 애정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한국에 구휼 식량을 지원하던 당시의 주대만 한국 대사였던 김신(김구의 차남)과는 김 대사 본인이 부담스러워할 만큼 극진한 대접을 해주며 대사만을 위한 안가까지도 장제스가 주선하는 등 거의 가까운 친척과도 같은 사이였다.[43] 올림픽 작전이 벌어지는 규슈 북부에서 부산은 꽤 가깝다. 실제 역사에서 미국이 한반도는 소련이 먹고 일본은 자신들이 차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본도 자신들이 온전히 먹고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소련과 맞닿는 선을 최대한 뒤로 물리고자 한 의중도 있었다. 소련군이 대한해협을 사이로 미군과 맞닿는게 되는건 충분히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이 될 수 있다[44] 다만 중국 특유의 중화사상 때문에 실제 역사의 중소관계 마냥 중화민국이 미국과 알력 다툼을 벌이다가 사이가 틀어질 가능성도 있어서 애매하다.[45] 반딧불의 묘에서도 처절하게 묘사된다.[46] 예: 고베항의 경우 3월달의 물동량은 32만 톤 정도였는데 이 기아 작전이 이루어진 후인 7월에는 4만 4000 톤으로 감소하였다고 한다.[47] 한반도 전역이 공산화되었을 수도 있으나 실제 역사처럼 두 진영이 양분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후자의 경우라면 딱히 손해보는 것도 아니다. 한반도에 대한 가정은 해당 단락에 나온다.[48] 대전기 소련군의 상륙전 경험은 1941년 동계전역 당시 케르치 반도 상륙전, 슘슈 섬 전투를 비롯한 쿠릴 열도 상륙전, 남사할린 침공 과정에서 있었던 마오카 상륙작전,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중 있었던 청진 상륙전 등으로 손으로 꼽을 정도이며, 하나같이 상륙부대의 모항에서 상륙지까지의 거리가 가깝고 슘슈 섬 전투를 뺀 나머지는 지상군 주력부대와의 협동작전이었다. 또한 몰락 작전 수행의 전제조건인 일본의 저항 의지도 상당히 꺾였기에 원역사의 소련군은 만주와 남사할린, 쿠릴 열도를 쉽게 점령했는데 만약 이 문서에 전제한대로 일본의 저항 의지가 강했다면 소련군은 이 지역들조차도 빠르게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다.[49] 1945년 7월까지 100척의 함선이 소련으로 보내졌고, 이 시점에서 180척을 더 지원하는 방안이었다. 수백 척의 함선을 일본 공격을 위해 지원했다.[50] 물론 루스벨트의 정관(政觀)만 탓할 게 아니라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본군이 질기게 저항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누적되는 막대한 인명 손실에 대한 부담이 루스벨트로 하여금 소련의 개입을 바라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소련도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지만 이는 루스벨트의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단, 그럼에도 같은 상황에서 트루먼이 보인 태도를 상기할 때 루스벨트의 태도가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고 이는 1950년대 내내 루스벨트가 비난받았던 원인이다.[51] "전쟁을 속히 종결시켜야 된다는 판단에서 미국 내부의 반공주의 인사들의 반대에도 그는 소련에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의사가 있음을 전해왔고..."(위키백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52] 스탈린은 '흥분한 100만 대군' 앞에서 말없이 밥숟가락 얹을 정도로 멍청한 자도, 용감한 자도 아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100만 대군을 보고 쫄아서'는 개입할 명분을 주지 않았을 때만 소용 있는 말이다. 내 손에도 100만 대군이 있는데 별 다른 이유가 없으면 개입할 수 있으면 개입한다.[53] 다만 루스벨트가 4선 당선되고 얼마 안 가서 사망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과연 대책없이 소련 지분을 키워준 것인지, 아니면 나름의 소련 견제책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이를 실현에 옮기기도 전에 사망해버린 것인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큰 논쟁거리이다.[54] 그래서인지 밑에서 서술할 HOI의 전투 시나리오에서도 소련이 남하하는 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만 한다라고 쓰여 있다.[55] 만주에 죽치고 있었을 소련군이 큰 변수이긴 하다.[56] 고대 기독교 카타콤의 현대판스러운 거대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숨어들어 살고 있으며 그런 주제에 기술력도 킹왕짱이라 저항세력이 세계 최초로 컴퓨터를 발명한 것으로 되어있는 등 정신 나간 묘사가 일품이다. 한마디로 일본판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아포칼립스 판타지.[57] 하지만 이 시나리오에서 일본은 물론 45년 당시 일본이 붙잡고 있던 마지막 영토까지도 전부 빅토리 포인트로 지정되어 있다.[58] 영구적으로 이동 불가 설정이 되어있는 방어용 민병이며 주둔병에게 주는 하리츠케 사단의 이름이 붙어있다.[59] 시작부터 북한 지역은 소련군이 점령해있다.[60] 결호작전에서 이름을 따온 것 같다.[61] 몰락 작전으로 인구수의 65% 정도, 무려 4,500만명이 사망했다는 것인데 사망자 숫자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다. 그래도 가능은 한데, 일본을 완전히 봉쇄하고 대기근을 일으키면 수백~ 수천만명이 사망하는 게 가능하긴 하다. 대표적으로 2년 만에 인구수의 25%가 날아간 아일랜드 대기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