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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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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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eltic_expansion_in_Europe.png
* 할슈타트 문화
* 켈트족의 최대 강역
* (논쟁)
* 현재 켈트어 사용자가 남아있는 지역
파일:Zrb6HOzgOANrg8CUNmYqJEtVTOlJLAS4pq317hYgQ5o.png
현대 켈트어파 화자 분포

1. 개요
2. 어원과 개념
4. 종교
5. 역사
6. 지역별 켈트족
6.1. 북이탈리아
6.2. 이베리아
6.3. 발칸
6.4. 일리리아
6.7. 브리튼 제도
7. 특징
8. 켈트 해
9. 매체



1. 개요[편집]


켈트어파 언어를 사용하거나 켈트 문화와 관련된 민족들의 총칭이다. 현대 남아있는 켈트인들은 게일인들과 브리튼인들로 나뉜다.


2. 어원과 개념[편집]


'켈트'의 어원은 그리스어 'Κελτοί'로,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를 차용한 'Celtae'에서 유래하였다. 라틴어의 또 다른 이름 'Gallus'는 이들의 일파가 살던 땅을 가리키던 갈리아의 어원이 되었다.

영어 Celt의 직접적인 어원은 프랑스어 Celte이기 때문에 본래는 셀트(/selt/)라고 읽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언어학이 발전하면서 궁극적인 어원인 Κελτοί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영미권 학계를 중심으로 '켈트'(/kelt/)라는 발음도 도입되었다. 켈트어파에서는 /k/ 발음을 c로 쓰므로 켈트인들은 모어에 관계없이 당대 민족주의 열풍을 타고 Celt의 발음을 /kelt/로 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현대에는 /kelt/도 표준이 되었다.출처

켈트족 자체가 고대에 켈트어를 쓰던 집단에서 파생되었기에, 근대 이후의 민족에 대입해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한국 사람들한테는 켈트하면 단순하게 유럽인종 이 정도로만 생각해서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중위도 하단에 위치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북아프리카, 중동-레반트 지역의 거주민들과 유사한 유전적 관계를 부정하기 위해서 켈트족의 역사를 본인들의 국가의 역사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레딧이나 유튜브 댓글에서 출몰하여 논쟁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1]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켈트족의 개념 자체는 현대의 민족보다는 문화권의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것이 더 옳바른 견해로 보는 편이다. 예를들어 '튀르크어족'이라거나, 남아프리카를 석권한 '반투어족' 같이 인종 상관없이 켈트어족의 언어를 사용을 했으면 켈트족이 되는 것이다. 켈트족의 기원이 되는 할슈타트 문화는 대략 기원전 1200년대에서 7세기경에 번성하기 시작한 문화권이라고 학계에서 추정한다.[2]


3. 켈트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켈트어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종교[편집]


현대 켈트인들도 사는 지역이나 나라마다 종교적인 차이가 있다. 아일랜드브르타뉴가톨릭이 주류이지만, 스코틀랜드웨일스개신교가 주류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주의 개신교의 일파인 장로회가 다수이고 국민교회(National church)로 지정되었다. 웨일스에는 잉글랜드처럼 성공회가 강세이다. 북아일랜드는 가톨릭을 믿는 토착 아일랜드인과 브리튼 이주민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로까지 발전했고, 지금도 서유럽에서 드물게 내전이 언제 다시 발발할지 모르는 세계의 화약고로 취급된다.


4.1. 켈트 신화[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켈트 신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켈트족과 관련된 신화로 켈트 신화가 있다. 아서 왕 전설 신화도 켈트 전설이다.


4.2. 켈트 십자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켈트 십자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역사[편집]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5e9aedcd360399cbfb5c2f4f3b92ff6c.jpg

발트족슬라브족 같은 다른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이 중앙아시아러시아 남부에서 이주해 온 것과 달리, 켈트족은 유럽할슈타트 문화로부터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물론 할슈타트 문화도 결국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이주민들로부터 형성된 문화이므로, 이들 역시 흑해 너머의 러시아 남부나 중앙아시아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켈트족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 이후에 넘어왔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 2022년 기준 문화인류학계의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켈트족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크림반도에서 살았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킴메르족의 후예들인데, 이들이 중부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켈트족이 되었고, 발칸 반도 북부를 거쳐서 이탈리아 반도로 유입된 분파는 라틴족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켈트인들의 최대 판도는 매우 넓어서 스페인 전역과 북아프리카 일부,[3] 흑해 부근에도 갈리아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흑해 연안은 갈리아인들의 본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이 설을 채용했는지, 빛의 신 의 창 게 아살(또는 아라드와르)를 살로니카에서 발견한다. 다만 당시 흑해 연안에 켈트족의 조상이 살았겠지만 그때 켈트족이라는 게 존재했을지는 의문이다. 흑해 연안은 인도유럽어족의 발원지와 그 인근 지역이기 때문. 원시 인도유럽인에서 켈트족으로 분화한 기원지는 북부 알프스 기슭 할슈타드-라 텐느 문명이다.

오늘날이야 게르만족, 라틴족, 슬라브족 같은 유럽의 여러 주요 집단들 중에선 소수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켈트족은 물론 로마가 존재하기 전부터 유럽 전역에 분포해 살며 유럽의 주인 노릇을 했다. 전성기에는 흔히 켈트족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프랑스 지역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나 동유럽은 물론이요, 바다 건너 아나톨리아이집트(!)[4]까지 진출하여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를 자주 약탈했다.

이 시절 켈트의 원정은 스키타이의 활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키타이가 폴란드보헤미아에 영향을 끼치며 그 지방 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390년 에트루리아가 켈트에 털리면서 도시 두 곳을 빼앗겼는데, 이때 빼앗긴 도시들은 메디올라눔,[5] 보노니아[6]로 개칭되었다.

이때 에트루리아는 다급한 나머지 한때 따가리 취급했던 로마 공화국SOS를 때렸고, 로마에서 온 지원군 덕에 수도 클루시움은 지켜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잔뜩 빡친 켈트가 남하하여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였고,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던 로마 공화국은 7개월 동안 처절하게 발리며 끝내 본진인 로마마저 약탈당한다. 하지만 켈트족은 로마에 들어와서 약탈만 하고 건물이나 시설은 거의 박살내지 않았다. 별다른 이유 없이 다음에 로마가 적당하게 무르익으면 다시 털어먹으려 했기 때문이다.[7] 이 당시 로마의 각종 기록들이 대규모로 유실되어서 기원전 390년 이전 로마사는 신화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켈트 남부 부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휘저을 때, 동방 부족들은 흑해 연안까지 진출, 이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그리스를 침공했다. 이때 그리스펠로폰네소스 전쟁코린토스 전쟁의 여파로 정상이 아니라 켈트 부족들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결국 델포이 신전까지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8].

6. 지역별 켈트족[편집]


파일:터키 갈라티아.jpg
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과 소장 '죽어가는 갈라티아 (갈라타) 인'. 기원전 3세기 아나톨리아로 진출한 켈트족 전사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때 지중해권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지배했거니와 야만족답지 않게 군사기술적으로도 우월해서 로마를 비롯한 여타 유럽 문명에 자신들의 군사기술을 널리 전파시킨 전투종족이었지만[9] 기원전 2세기부터 거짓말처럼 몰락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된 이유는 로마가 팽창했기 때문이었지만, 대체로 각 지역별로 켈트족의 몰락은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띤다.


6.1. 북이탈리아[편집]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은 이탈리아인들의 위협으로 계속 남았으며 자신들과 다른 야만족이 바로 위에 거주한다는 것은 로마 중심의 이탈리아 지배가 고착화되는 데 기여했다. 즉 로마가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인간 같지도 않은 야만족속들을 막기 위해서 로마를 중심으로 단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북이탈리아를 수시로 공격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북이탈리아 공격은 한니발 전쟁기를 제외하면 상시적으로 일어났으며 끝내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의 물량빨로 패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에 끈질기게 저항하고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도 7번이나 로마의 집정관-법무관 군대를 격퇴시켰으나, 그래봤자 그 다음 해에 똑같은 규모로 다시 쳐들어오니 GG. 기원전 2세기 중반이면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에 거의 복속되었다.


6.2. 이베리아[편집]






이베리아 반도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동남부 해안가는 비-인도유럽어족의 이베리아인들과 카르타고인들, 중부와 북부는 켈트족 혹은 켈트-이베리아 혼혈족, 남부는 카르타고인과 투르데타니아인, 서부는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루시타니아인[10], 북동부 구석탱이에는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한 종족이 켈트계 제민족이었고, 2차 포에니 전쟁으로 로마의 영향력이 이베리아에 미치자 이들은 로마에 맞서 100여 년간 투쟁하였다.

전쟁의 양상은 북이탈리아처럼 로마의 물량빨로 로마는 지든 이기든 꾸준히 군대를 보냈고, 처음에는 이베리아인들, 이후에는 켈트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했다. 이 와중에 누만티아의 학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 이어졌고, 켈트족을 포함한 이베리아의 민족들은 세르토리우스 반란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북부 바스크계 제민족들을 제외하고 모두 복속되었다.

6.3. 발칸[편집]


고고학적으로 선주민이었던 스키타이인들을 학살하고 동화시켰다고 확인되지만 기록이 충분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리스의 로마군과 카르파티아의 다키아인들에게 밀려서 거의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다키아인들 중 상당수가 켈트족 혈통이라고 추정한다. 실제로 문화적으로 다키아인들과 켈트족의 관계는 깊다.[11]

6.4. 일리리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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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리아의 켈트족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그들은 현재 보헤미아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보이족을 중심으로 통합하였지만 다키아인과 게르만족, 사르마티아인, 로마인이 진출하여 1세기에 복속되었다.

6.5. 갈라티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갈라티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를 공격한 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에 이주한 켈트족들은 소아시아 서부 내륙지역인 갈라티아에 정착하여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갈라티아의 켈트족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셀레우코스 왕조의 전쟁에 용병을 파견하면서 디아도코이 왕조 간 전쟁의 큰 변수가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189년 로마에 복속되었다. 이후 미트리다테스 전쟁 등 전화에 휩싸이고 최종적으로 속주가 된 때는 기원전 25년.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기원후 4세기에도 켈트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12]

성경의 갈라디아서가 이 갈라티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6.6. 갈리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갈리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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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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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03754742e5177ca47cab15015d3b5aa.jpg

기원전 7세기까지는 도나우 지방에서 이동해 온 켈트족이 현재의 프랑스에 해당하는 갈리아 지방에 정착했다. 켈트족이 이동 정주를 반복하며 켈트족의 "위대한 팽창"이 시작됐는데 그들은 이때 소아시아까지 이동하였다. 오랜 시간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하고 그곳에 영구 거주지를 만들기도 했는데 고대 로마 또한 카이사르처럼 대적하면서 확장하여 켈트족은 로마의 문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갈리아에 부임한 카이사르는 점점 갈리아를 평정해 나가고 켈트의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는 켈트족을 통합하여 로마와 동맹 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까지 로마에 등을 돌려 반기를 일으키게 한 후 로마와 전쟁을 벌였다.

하지만 모든 켈트족이 로마에 패배하고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가 처형당한 후 켈트족은 약체화되었고, 독일 북부 서부쪽에선 게르만족의 공격에 의해, 다른 쪽에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에 의해 사라졌다.

알프스 이남의 켈트 세력은 로마와의 처절한 전투 끝에 소모전으로 나온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실제 기록상으로, 오랜 전란으로 약화된 켈트인은 포에니 전쟁 이후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동수의 로마군을 수차례 격파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여러 단편적인 기록을 검토해봤을 때, 리비우스가 켈트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겪은 패전을 다수 생략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는 이런 패배를 메꿀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했지만 이미 포에니 전쟁 이전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인수브리-보이족 켈트 세력은 이를 메꿀 역량이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군사적 역량이 성공의 핵심이었지만, 그전에 켈트인들은 게르만족에 의해 크게 소모되어 있었고, 카이사르 역시 깊이 골이 패인 여러 켈트 부족 세력들간의 반목을 적절히 이용해가며 갈리아를 평정했다. 그 후 아르베르니족이 켈트족을 통합하고 로마에 동맹 부족으로 있던 하이두이족까지 반기를 일으키게 했지만 패했다.

어쨌든 드루이디즘을 비롯한 전통 문화를 잃어버렸지만 대신에 로마식 문명을 기초로 하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갈리아어는 거의 소멸하고, 로마의 라틴어가 바로 이를 대체하였다. 이는 이후 서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지속되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까지 로마 제국의 비호를 받으며 로마 문화에 융합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7. 브리튼 제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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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파일:Map_Gaels_Brythons_Picts.png

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로만 브리튼)


브리튼 섬에 건너간 켈트 족들은 이후 브리튼과 아일랜드 등 브리튼 제도 곳곳으로 퍼졌다. 브리튼 섬의 켈트족들은 여타 지역의 동족들이 모두 로마에 복속된 이후에도 로마의 정복 활동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했다. 기원후 43년 로마 제국이 브리튼섬 남부를 정복하여 브리튼인들이 로마에 복속된 이후에도 하드리아누스 성벽 이북 픽트족들은 끝내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아 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켈트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 말기까지도 지속적으로 로마화한 브리튼인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다.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로마 제국이 브리튼섬에서 철수하면서 브리튼섬은 오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중세에는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네덜란드를 거쳐 바다를 건너와 침략해왔고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역시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드인(바이킹)이 침략해 왔다. 이때 브리튼 섬 남부의 브리튼인들 중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들에게 지배당하거나 섞이기를 거부한 브리튼인들은 웨일스로 쫓겨났다. 이때 브리튼인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인물을 신화화한 것이 아서 왕이다. 아마도 잠시나마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던 어떤 브리튼인 지도자가 미화되어 전설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파일:map_5_7ce_eng_little.jpg
[13]

파일:celtic_map_of_britain.png

그리고 11-12세기에는 윌리엄 1세가 이끄는 노르망디노르만족들이 브리튼 제도를 남쪽에서부터 휩쓸었고 그 과정에서 브리튼 인들은 노르만 계통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13세기 에드워드 1세에게 웨일스가 완전히 정복되며 그 이후로도 1370년대부터 15세기 초까지 반란을 일으키다 완전히 잉글랜드에 동화되었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켈트족들은 스코틀랜드 왕국이라는 잉글랜드와 별개의 나라를 구성했지만 1603년에 제임스 1세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1707년에 잉글랜드와 공식적으로 통합되어 영국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은 켈트족 위주의 나라는 아일랜드가 유일하다. 하지만 아일랜드를 400년간 지배한 영국에 의해 영어가 깊숙히 퍼진 데다가 영어의 힘에 압도되어 현재 아일랜드 인구의 대부분은 아일랜드어가 아닌 영어를 상용어이자 모어로 사용들 한다. 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어를 퍼트리고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는 있지만 상용자는 여전히 적다. 언어에서는 오히려 가장 먼저 잉글랜드의 영토가 된 웨일스가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웨일스인들의 웨일스어 화자 비율은 영어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타 켈트 지역 주민들의 켈트어 화자 비율보다 높다.

외세에 지배당했지만 문화적으로 완전하게 동화된 것은 아니어서 켈트족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북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 등이 연합왕국의 구성원이 되거나, 프랑스의 한 지역으로 편입된 것은 겨우 근대 이후의 일이며, 지금도 그들의 민족적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하다.[14] 역사적으로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민족 침략자였던 잉글랜드(앵글로족)를 싫어하고 배척한 나머지 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라이벌 프랑스에 가서 용병으로 활약한 경우도 적지 않으며, 스튜어트 왕조 이전까지도 스코틀랜드 왕실은 물론이고 아일랜드, 웨일스의 여러 귀족들도 프랑스 왕족과의 꾸준한 통혼을 통해 옆의 잉글랜드를 견제하려 애썼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끼리도 "우리야말로 진짜 켈트 문화, 켈트 민족의 종주국이다, 너희는 찌질하게 잉글랜드 지배나 당했다"(아일랜드인), "아니다, 너희가 잉글랜드 꼬붕으로 보냈던 시절이 더 찌질했다(스코틀랜드인)"라는 식으로 서로 놀리며 상호 디스하는 풍경을 에딘버러, 글래스고, 더블린의 술집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물리적인 거리나 문화적인 거리도 상당히 가깝고 예나 지금이나 얼스터 지방과 하이랜드는 인구,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는 한 나라라고 볼 만큼 같이 해온 역사와 상호 소통, 교류가 깊어 스코틀랜드에도 아일랜드인들이 굉장히 많고 아일랜드에서도 스코트인들이 많이 산다.[15]

다만 이렇게 혈통적으로는 가깝고 친밀할 것 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관계도 역사와 종교 부분으로 들어가게 되면 험악해진다. 아일랜드로 건너간 스코틀랜드 신교도들이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아일랜드 지역에서 지주로서 토착민 구교도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하고 탄압한 역사나, 감자 대기근 이후 고향을 떠나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토착 스코틀랜드인들의 차별과 탄압의 역사,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북아일랜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16] 1990년대-2000년대까지 벨파스트 같은 북아일랜드 도시에서 농담이랍시고 이런 주제에 대해 잘못 말했다간 진짜 총폭탄이 날아왔다.[17]

영국의 켈트족들은 켈트족의 전성기였던 고대에는 동족들과 실질적으로 단절되어 기술적,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륙의 동족들이 로마화하여 정체성을 잃어버렸음에도 꾸준히 살아남음으로써 존재감을 지속하였고, 때문에 오늘날 내려오는 켈트족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들에게서 비롯되게 되었다. 상체만 벌거벗은 채 푸른 물감[18][19]을 몸에 바르고 바지[20]를 입고,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채 싸우는 야만적인 켈트 전사의 이미지는 실질적으로 브리튼 섬의 켈트족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이런 문화적 특성을 갈리아 전쟁 당시 브리튼 인들이 갈리아 인들에게서 구분되는 주요 차이점으로 묘사하였다.

참고로 영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선사 시대의 건축물 스톤헨지는 켈트족 도래 이전에 지어진 것이다. 후대에 켈트족들이 들어와서 종교적 의식에 쓰이긴 했지만.

영화 '폼페이'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마일로'는 이 영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이다.


7. 특징[편집]


영어로 발음하면 셀틱으로도, 켈틱으로도 모두 발음하며, NBA 농구팀 보스턴 셀틱스도 여기서 딴 이름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연고지로 하는 유명 축구팀 셀틱 FC도 있다. 둘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팀의 창단 기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프랑스 일대의 켈트족은 골족이라고도 불리고, 유명한 프랑스의 만화 아스테릭스도 켈트족의 영웅 아스테릭스가 로마에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괴롭히는 내용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네 선조들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만화라고 하면서 매우 좋아한다. 물론 근대 이전의 프랑스인들은 엄밀히는 골족과 라틴족프랑크족의 혼혈이지만[21], 라틴족은 프랑스어가 로망스어군에 속하긴 하나 이탈리아에서 기원하였고 스페인이나 루마니아 등지에도 많이 살고 있고, 프랑크족은 일단 독일과 연관이 깊은 게르만족의 분파였으므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선조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고 프랑크족과 프리시족의 혼혈이기도 하지만 언어로 볼 때 프랑크족의 직계후손인 네덜란드인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다. 그와 달리 갈리아의 골족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만의 선조였고 영국와 한창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와 공조해서 영국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에서는 아래와 같은 글이 고대 켈트족의 전통 기도문이란 이름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다만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하다.[22] 당장 지폐라는 단어만 봐도 고대의 기도문은 절대로 아니다.[23]

당신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 지갑에 언제나 한, 두 장의 지폐가 남아 있기를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태양이 비치기를

가끔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 대해선 가난하고, 축복에 대해선 부자가 되기를

적(敵)을 만드는 것에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빠르기를, 이웃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안 하기를

당신이 죽을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당신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늘 당신 곁에 함께 계시기를

아일랜드 켈트족 전통 기도문


8. 켈트 해[편집]


켈트 해는 영어 표기로는 Celtic Sea이며, 영어 발음에 가깝게 하는 표기법으로 적용될 경우, 셀틱 해로 표현한다. 통상적으로 아일랜드 섬 남쪽의 대서양 해역을 지칭한다. 동부는 세인트 조지 해협과 브리스틀, 영국 해협 등을 경계로 정한다.


9. 매체[편집]


일본에서 나온 중세풍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특히 쯔꾸르 계열)에서 채용되곤 하는 BGM이나 OST들 중 뭔가 중세 유럽 분위기의 멜로디가 나온다 싶으면 보통 이 켈트족의 전통민요가 모티브인 경우가 많다. 이런 부류를 많이 접한 사람의 경우 유튜브 등지에서 Celtic folk라 검색해서 들어보면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상당히 익숙한 느낌의 멜로디를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9.1. 소설[편집]



9.1.1. 얼음과 불의 노래[편집]


웨스테로스의 3대 민족 중 하나인 최초인들은 켈트족이 모티브다.


9.2. 게임[편집]



9.2.1. 문명 시리즈[편집]


문명 2부터 문명 5까지 등장했다. 역대 지도자로는 부디카(2, 4~5), 브렌누스(3~4), 쿠노벨리누스(2) 등이 나왔다.
  • 문명 3: 식량을 추가로 제공해 도시의 성장을 빠르게 하는 농업적 특성과 문명의 전체적인 운영을 원활하게 해 주고 행복과 문화에 약간의 보너스를 주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유 유닛인 갈리아 검사는 일반적인 검사보다 행동력이 빠르다.
  • 문명 4: 언덕에서의 방어전, 기동성 등에 보너스를 받는 갈리아 전사를 고유 유닛으로 받으며, 고유 건물인 산성도 이런 보너스를 제공한다. 지도자인 브렌누스는 문명의 전체적인 운영을 원활하게 해 주는 종교적 특성과 행복 보너스를 제공하고 유닛들의 진급에 경험치가 덜 필요한 매력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디카는 매력적 특성과 함께 유닛들의 전투력을 증가시키는 등 전투와 관련이 있는 공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문명 5: 숲과 인접한 도시가 자동으로 신앙을 생성하여 빠르고 편하게 종교를 창시할 수 있으며, 고유 유닛인 픽트족 전사는 일반적인 창병과 달리 기병 계통 유닛을 상대로 전투력 보너스를 받지 못하지만 적을 제거할 때마다 신앙을 제공한다. 고유 건물인 케일리 홀은 행복을 다량으로 제공하여 운영을 보다 편하게 해 준다. 다만 도시와 인접한 숲에 시설물을 건설하면 신앙 보너스가 날아가는데다 신앙과 행복 외에 문명의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가 달리 없어서, 그다지 강력하다는 평을 받지는 못한다.
별개로 문명 5에서는 지도자가 부디카인 것과 별개로 수도가 에든버러에 스코틀랜드의 대도시들이 도시 목록에 있는 등 스코틀랜드를 많이 챙기는 모습을 보이더니 최신작인 문명 6에서는 스코틀랜드가 아예 독립된 문명으로 나왔으며, 문명 3과 4에 고유 유닛으로 등장했던 갈리아도 별개의 문명으로 등장했다.


9.2.2. 도미네이션즈[편집]


적군에게 투창을 던져 공격하는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켈트 전차(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켈트 철공소(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2.3. 타임 크라이시스 4[편집]


VSSE 소속 주인공들의 서포터이자 특수부대 소속의 대위인 윌리엄 러쉬가 켈트족의 후예인 아일랜드계으로 나온다.


9.2.4. 켈트의 전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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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혹은 본인의 얼굴이 금발벽안에 전형적인 서양인이라면서 우월감을 드러내면서, 본인 가족들과 지인들도 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외국인들이 커뮤니티에 상주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유럽 국가들 중 대표적인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조차도 금발벽안타입 외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유럽에서도 머리색은 밝은 갈색도 많고 눈색깔도 갈안 계열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 물론 위에 언급한 서양국가출신 국민들이 관상의 형태나 체형은 전형적인 서구인인 모습인 경우가 많지만 애초에 서양인이라고 금발벽안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류이다.[2] 레딧이나 유튜브에서 키배를 벌이는 유저 본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과 연관성이 짓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켈트인들은 할슈타트 문화에서 기원이 된 켈트족이다. 그러나 켈트족 자체가 원시 인도유럽인에서 분화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민족으로 중부유럽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전 켈트족과 라틴족의 공통 조상 혹은 켈트족의 조상이 존재했으며 이들 일부가 유럽 각지로 먼저 이동을 했는지, 할슈타트 문화가 기원이 된 중부유럽에서 먼저 정착을 한후에 유럽 각지로 이동을 한 것인지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현재로써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3] 용병으로 내려가 헬레니즘 제국에서 복무하다 그 대가로 파윰 분지를 받아 정착했다. 다만 켈트족들의 후손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이집트 아랍인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에 현대에는 아랍어를 쓰고 종교도 이슬람을 믿는다.[4] 다만 이집트의 경우는 단순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요청에 따른 켈트족 용병대의 평화로운 이집트 정착이다.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침략해서 갈라티아 왕국을 세운 켈트족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정착한 것. 이런 식으로 정복이나 군사적 원정이 아닌 단순 이주까지 따지면 전 세계에 진출하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5] 현재의 밀라노.[6] 현재의 볼로냐.[7] 이때 로마를 털어먹은 켈트의 족장 브렌누스는 로마 쪽에서 화평의 대가로 내놓은 재물에 검을 얹으며 "패자에겐 재앙이 있으라."(Vae victis) 하고 조롱했다. 저울이 균형이 맞지 않아 당초 약정한 무게보다 더 많이 내놓게 된 것을 로마 측에서 항의하자 저렇게 대꾸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켈트에게 털린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해 침공당한 날에 개를 패고 거위는 방석에 모시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왜냐하면 켈트군이 쳐들어왔을 때 개들은 조용하고 거위들이 꽥꽥 설쳤기 때문.[8] 그리스 역사가인 스트라보는 켈트족들이 델포이 신전을 약탈하려는 순간, 아폴로 신이 나타나서 지진을 일으키고 벼락을 내리쳐 켈트족들을 쫓아내어 신전이 무사했다고 기록했으나 그로부터 174년 후인 기원전 105년 무렵, 로마 장군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에피오가 갈리아 남부의 마을인 톨로사(프랑스 남부 도시인 툴루즈)에 살고 있던 켈트족들의 신전을 방문했다가 과거 그들의 조상이 그리스로 쳐들어가서 약탈해 와서 신전 안에 보관해 둔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을 발견했다는 로마인들의 기록을 본다면, 스트라보는 켈트족들의 델포이 신전 약탈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이를 숨기기 위해 역사왜곡을 했다고 추정된다#[9] 켈트식 장검과 투구, 갑옷은 로마군에게 거의 그대로 차용되어 로마 제국 시기는 물론, 중세까지도 이어진 유럽인들의 군사기술의 기초가 되었다.[10] 문화적으로는 거의 켈트화가 되었다. 그러나 혈통적으로도 루시타니아인이 켈트계열 민족이 아닌 라틴계 민족의 조상격인 원시 라틴 민족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리고 세부적인 혈통 상황을 보면, 지배계층이었던 부족의 추장이나 귀족이나 인도유럽어 계열 민족 비율이 높았지, 피지배계층인 노예나 부족원들은 토착 이베리아인과 페니키아 혈통 주민들이 많았다. 다만 언어 만큼은 혈통 상관없이 인도유럽어족 계통인 루시타니아어를 사용했으며, 켈트어파의 어휘나 문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언어였다. 이후에는 로마, 게르만, 무어, 베르베르, 유대인과 광범위한 혼혈로 이루어진 민족으로 포르투갈 왕국이 구성이 되었고 대항해시대를 거쳐 여러 대륙을 식민지 혹은 거점도시를 세우면서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일부 원주민과 광범위한 혼혈이 더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것이 현대의 포르투갈인의 근간이 되었다.[11] 물론 다키아인들은 켈트가 아닌 트라키아인들에게서 파생된 민족으로 추정되며, 문화적으로는 트라키아와 스키타이의 영향이 더 짙다. 다만 켈트족과 부대끼면서 그들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12] 그런 이유로 오늘날 독일 지역인 게르마니아에 살있던 켈트 계통 주민들과 통역이 없이 서로 대화가 통했다고 한다. 출처: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 라인하르트 쉬메켈 지음/ 한국 게르만어 학회 옮김/ 푸른역사[13] 지도에서 북부 스코틀랜드에 침입한 것은 노르만족이 아니라 노르드인이다. 노르만족은 11세기에 와서야 남쪽 노르망디에서 올라온다.[14] 같은 영국 국가안에 있지만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축구 시합을 하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15] 스코틀랜드라는 국명의 기원이 되었던 스코트족 자체가 원래는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종족이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상한 스코트족이 브리튼 섬 북부로 건너가서 패권을 잡으면서 스코트족의 땅, 즉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특히 얼스터 지방)는 거리가 가까워서 교류가 많았다.[16] 위에서 말한 스코틀랜드계 신교도 중 상당수가 북아일랜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아일랜드 독립 이후 남부 지역의 스코틀랜드계 신교도들이 북부로 이주하였다.[17] 첨언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로울랜드 스코트인들이 영국 왕의 비호를 받아 주로 얼스터로 이주하였고, 아일랜드인들 역시 가난한 조국을 떠나 발전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로울랜드로 이주했다. 이들이 결성한 축구팀이 셀틱 FC. 그때까지 켈트족 풍습이 많이 남아 있던 하일랜드 주민들은 촌놈 취급 당했다. 현재도 스코틀랜드는 로울랜드-하일랜드 간 지역 감정이 꽤 깊으며, 이때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을 차별했던 과거로 인해 현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반인종차별적, 진보적 성향이 강한 편이다.[18] 예부터 파란색 천연안료의 재료로 쓰이는, 대청이라고 부르는 유럽쪽풀을 빻은 가루에 과 함께 오줌을 섞어 발효시킨 것으로 출진 전에 몸에 워페인트를 그렸다.[19] 여담으로 B.C. 50년 이베리아 반도의 켈트족은 오줌으로 입을 헹궈 치아 미백효과를 냈다. 기사[20]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켈트족의 먼 후손인 근대~현대 스코틀랜드에선 킬트라는 치마를 입어 로마 등의 고대 지중해 복식의 전통을 본토보다 더 잘 지키며 보존하고 있다.[21] 근대 이후에는 다른 이주민들도 들어왔기 때문에 프랑스인의 정체성이 생긴 시점의 근대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22]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으로 시작하는 축복문('Go n-éiri an bóthar leat')은 있기는 한데 오역이다. 그냥 대충 '좋은 여행이 되기를'이라는 말인데, 여기에 살이 더 붙여 켈트식 축복/아이리쉬 축복(기도)문이라는 형태로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23] 지금까지 알려진 지폐 중 가장 이른 것은 북송의 교자. 10-12세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