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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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bia Records
컬럼비아 레코드

모회사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1991-2004, 2008-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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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비아 그래포폰 회사(1925년 10월 5일 – 1931년 3월 31일)
그릭스비-그루노우 회사(1931년 12월 – 1934년 5월)
아메리칸 레코드(1934년 6월 – 1938년 12월)
컬럼비아 방송 시스템 (CBS)(1938년 12월 17일 – 1988)
소니 주식회사(1988-1991)
소니 BMG 뮤직 엔터테인먼트(2004-2008)

설립일
1889년 1월 15일 (135년)
설립자
에드워드 D. 이스턴
유통업체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
국가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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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위치
뉴욕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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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1889년 ~ 1929년: 컬럼비아 레코드
2.2. 1925년 ~ 1931년: 레코드 회사 소유권
2.3. 1931년 ~ 1936년: 소유권 분리
2.4. 1938년 ~ 1947년: CBS
2.5. 1948년 ~ 1959년: LP 레코드
2.6. 1950년대
2.7. 1960년대: deep groove
2.8. 1970년대
2.9. 1980년대: 소니
2.10. 1990년대 ~ 현재
3. 소속 아티스트들



1. 개요[편집]


일본 대기업 소니의 북미 사업부인 소니 코퍼레이션 오브 아메리카의 자회사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가 소유한 미국 음반사.

2. 역사[편집]



2.1. 1889년 ~ 1929년: 컬럼비아 레코드[편집]


컬럼비아 레코드 회사는 1889년 1월 15일, 속기사, 변호사, 뉴저지 출신 에드워드 D. 이스턴(1856–1915)과 투자자 그룹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것은 본사가 있던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이름을 따왔다. 처음에 그것은 워싱턴 D.C., 메릴랜드, 델라웨어에서 에디슨 축음기와 축음기 실린더의 판매와 서비스를 지역적으로 독점했다. 일부 지역 축음기 회사들의 관습처럼 콜롬비아는 많은 상업적인 실린더 음반들을 자체적으로 제작했고, 1891년에 그것의 음악 음반 목록은 10페이지였다.

1894년 북미 레코드 회사와 에디슨의 관계는 북미 축음기 회사의 해체와 함께 단절되었다. 그 후 자체 제조한 음반과 축음기만 판매하였다. 1902년 컬럼비아는 오래된 재고를 소진하기 위해 성형된 갈색 왁스 레코드인 "XP" 레코드를 도입하였다. 컬럼비아는 1903년에 검은색 왁스 레코드를 도입하였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1904년까지 갈색 왁스를 계속 성형하였는데 가장 높은 숫자는 32601 "하이니"로 아서 콜린스와 바이런 G. 할란이 듀엣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성형된 갈색 왁스는 (아마도 컬럼비아 제품에 대한 시어스의 옥스포드 상표로) 유통을 위해 시어스에 판매되었을 것이다.

컬럼비아는 1901년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의 에밀 베를리너(Emile Berliner)가 발명하고 특허 받은 디스크 레코드와 축음기를 실린더 시스템 외에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이보다 앞서 1899년에는 작은 크기의 세로로 잘린 레코드를 사용한 토이 그래폰(Toy Graphophone)을 판매했다. 10년 동안 컬럼비아는 에디슨 레코드 회사 실린더와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 디스크 레코드 모두와 미국 녹음 사운드 톱 3 중 하나로 경쟁했다.

초기 예술가 목록에 명성을 더하기 위해 콜롬비아는 1903년부터 녹음을 하기 위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많은 스타들과 계약을 맺었다. 이 스타들 중에는 마르셀라 셈브리히, 릴리안 노르디카, 안토니오 스코티, 에두아르 드 레스케 등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의 녹음 기술적 기준은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빅터, 에디슨, 영국의 "그의 주인의 목소리" 또는 이탈리아의 "포노티피아 레코드"가 거둔 성과만큼 높지 않다고 여겨졌다. 1904년 각각의 디스크의 양쪽에 녹음 홈이 찍혀있는 디스크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1908년 컬럼비아는 그들이 "Double-Faced" 디스크라고 부르는 것을 성공적으로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 10인치짜리는 처음에 개당 65센트에 팔렸다. 이 회사는 또한 경쟁사인 빅터 토킹 머신 컴퍼니가 판매한 매우 인기 있는 "빅트롤라"와 경쟁하기 위해 내부 경적인 "그라포놀라"를 선보였다.

이 시기에 컬럼비아는 매지컬 노트(Magic Notes)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16분의 1(semiquaver)은 원을 그리며 미국과 해외에서 사용되었다.

컬럼비아는 뉴욕주 올버니의 인디스트루서블 레코드 회사가 만든 셀룰로이드 실린더 레코드를 "컬럼비아 인디스트루서블 레코드"로 발행하기로 결정한 후 1908년 왁스 실린더 레코드의 녹음 및 제조를 중단했다. 1912년 7월, 컬럼비아는 디스크 레코드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1~2년 더 인디스트루서블 실린더를 컬럼비아 이름으로 계속 판매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린더 축음기의 제조를 중단했다. 컬럼비아는 두 개의 회사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레코드사, 하나는 플레이어사였다. 컬럼비아 축음기는 코네티컷으로 옮겨졌고, 에드 이스턴은 그것과 함께 갔다. 결국 그것은 딕타폰 회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2.2. 1925년 ~ 1931년: 레코드 회사 소유권[편집]


이 회사는 1925년 영국 자회사인 컬럼비아 그래포폰 컴퍼니(Columbia Graphophone Company)에 인수되었고, 레이블, 레코드 번호 체계 및 녹음 과정이 변경되었다. 1925년 2월 25일, 컬럼비아는 웨스턴 일렉트릭으로부터 허가받은 전기 녹음 과정으로 녹음을 시작했다. "Viva-tonal" 레코드는 78rpm 시대에 상업용 디스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음색과 선명성에서 기준을 세웠다. 최초의 전기 녹음은 "귓속말하는 피아니스트" 아트 길럼(Art Gillham)에 의해 이루어졌다. 빅터와 비밀 계약을 맺은 전기 기술은 음향 음반의 판매에 타격을 주지 않기 위해 비밀에 부쳐졌다.

Columbia Graphophone Company의 상무이사인 Louis Sterling은 Western Electric의 녹음 과정과 영국의 인수를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뉴욕 출신인 Sterling은 1925년부터 1931년까지 Columbia NY의 회장이 되었고 안정성과 성공을 감독하였다.

1926년, 컬럼비아는 오케 레코드와 루이 암스트롱과 클라렌스 윌리엄스를 포함한 재즈와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성장하는 안정적인 음반사를 인수했다. 컬럼비아는 이미 블루스와 재즈 아티스트들의 목록을 14000-D 레이스 시리즈에 포함시킨 베시 스미스를 포함하여 작성했다. 컬럼비아는 또한 댄 혼즈비 등과 함께 성공적인 "힐빌리" 시리즈(15000-D)를 보유했다. 1928년,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케스트라 리더인 폴 화이트맨이 빅터를 떠나 컬럼비아를 위해 녹음했다. 같은 해, 컬럼비아의 중역 프랭크 버클리 워커는 테네시에서 열린 존슨 시티 세션에서 클래런스 호튼 그린과 "피들린" 찰리 보우먼과 같은 아티스트들을 포함한 최초의 컨트리 음악 또는 "힐빌리" 장르의 녹음을 개척했다. 그는 그 다음 해에 테네시로 돌아와 남부의 다른 도시에서 녹음 세션을 진행했다. 1926년 '얼리 버드가 벌레를 잡는다'를 녹음한 두 마리의 검은 까마귀 역의 모란과 맥은 250만 장이 팔렸다.

1929년, 벤 셀빈은 하우스 밴드 리더이자 A. & R. 감독이 되었다. 비바톤 시대에 다른 인기 가수들은 루스 에팅, 폴 화이트먼, 플레처 헨더슨, 이파나 트루바두스(샘 라닌 그룹), 그리고 테드 루이스를 포함했다. 컬럼비아는 1929년까지 하모니, 벨벳 톤(둘 다 범용 레이블), 디바(W.T. 그랜트 매장에서만 판매)라는 레이블에 "예산 레이블"이라는 어쿠스틱 음반을 사용했다. 에디슨 레코드가 접혔을 때, 컬럼비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반사였다.


2.3. 1931년 ~ 1936년: 소유권 분리[편집]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의 여파는 음반 산업에 막대한 손실로 이어졌고, 1931년 3월 대주주였던 J.P. 모건은 컬럼비아 그래포폰 컴퍼니(1926년부터 소유하고 있던 오데온 레코드, 팔로폰과 함께)를 그라모폰 컴퍼니("His Master's Voice")와 합병하여 일렉트릭 앤 뮤지컬 인더스트리 주식회사(EMI)를 설립했다. 그라모폰 컴퍼니(HMV)는 빅터의 완전한 소유 자회사였고, 미국의 컬럼비아는 영국 컬럼비아의 자회사였기 때문에 빅터는 현재 미국에서 기술적으로 가장 큰 경쟁자를 소유하고 있었다. EMI는 독점금지법 제정을 피하기 위해 미국 컬럼비아 사업장을 매각해야 했고, 이 사업장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매트릭스의 프레스를 계속 발표했다.

1931년 12월, 미국 컬럼비아 축음기 회사는 마제스틱 라디오와 냉장고 제조업체인 그릭스비 그루노우 회사에 인수되었다. 1933년 11월 그릭스비 그루노우가 파산선고를 받자 컬럼비아는 경영권을 갖게 되었고, 1934년 6월 이 회사는 7만 달러에 사크로 엔터프라이즈 주식회사("Sacro")에 매각되었다. 사크로는 뉴욕에서 매각되기 며칠 전에 법인화되었다. 공공 문서에는 어떤 이름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자회사인 미국 레코드 회사("ARC")가 레이블을 운영하면서 콜롬비아 주식을 보유하기 위해 통합 필름 산업 주식회사("CFI")에 의해 설립된 셸 법인으로 의심한다. 이 추정은 이후 CFI가 1938년 컬럼비아를 매각할 때 보여준 용이함에서 비롯되었다.

1931년 12월 3일, CFI는 Warner Brothers Pictures, Inc. ("WB")와 브런즈윅, 보컬리온 및 멜로톤 레이블의 상표와 마스터를 포함하는 브런즈윅 레코드사를 ARC에 임대하기로 계약하였다. WB는 카탈로그 판매의 일부를 받게 되는 반면, ARC는 새로운 음반을 위한 레이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브런즈윅은 즉시 $.75의 프리미엄 레이블이 되었고, 멜로톤은 새로운 힐빌리 및 기타 $.35 다임 스토어 할인된 디스크를 출시할 것이며, 보컬리온은 이전 ARC 음반을 재발매하는 한편 블루스-R&B 레이블이기도 하며, 밤마다 10,000명 이상의 고객이 춤을 추기 위해 모인 1930년대 중반의 경이로운 웨스턴 스윙 밴드인 밥 윌스와 그의 텍사스 플레이보이즈의 독점 매장이기도 하다. 1932년 중반에 컬럼비아가 추가되었고, 앤디 아이오나의 하와이 음악, 어빙 밀스 아티스트와 노래로 이루어진 어빙 밀스 마구간,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베니 굿맨과 같은 더 느린 판매자들로 밀려났다. 그것은 마케팅 전략, 즉 일치하는 레이블과 함께 화려한 파란색 합본 제품인 컬럼비아 "로얄 블루 레코드"를 시도하였다. 1932년 말부터 1935년까지 만들어진 로열 블루는 희귀성과 음악적인 관심으로 수집가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다.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있는 컬럼비아 공장은 로키 산맥 서쪽 지역을 판매하기 위해 컬럼비아의 압력을 가했으며 1936년 중반까지 로열 블루 소재를 계속 사용하였다.

남부 복음이 발전함에 따라 콜롬비아는 신흥 장르와 관련된 아티스트들을 녹음하기 위해 예리하게 노력해왔다. 예를 들어, 콜롬비아는 찰스 데이비스 틸먼을 녹음한 유일한 회사였다. 콜롬비아에게 있어 가장 운이 좋은 것은 불황 시대의 재정적인 문제들 중 1936년에 이 회사는 1970년대까지 지속된 엄청나게 성공적인 관계인 척 웨건 갱과 독점적인 녹음 계약을 체결했다. 남부 복음의 대표적인 그룹인 척 웨건 갱은 적어도 3천 7백만 개의 음반을 보유한 컬럼비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이 중 많은 음반들은 남부 복음 방송인 J. 바젤 멀이 라디오 (그리고 나중에 텔레비전)에서 후원한 멀 싱잉 컨벤션 오브 더 에어의 이지스를 통해 나왔다.

1935년, 18세의 운송 점원인 Herbert M. Greenspon은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의 주요 제조 공장에 첫 노동조합 가게를 조직하는 위원회를 이끌었다. 지역의 산업노조회의 (CIO) 회장으로 선출된 그린스폰은 공장 노동자들과 콜롬비아 경영진 사이에 첫 번째 계약을 협상했다. 30년 동안 지속된 콜롬비아와의 경력에서, 그린스폰은 회사의 부사장직을 달성한 후 은퇴했다. 컬럼비아는 또한 1937년에 인재 스카우트, 음악 작가, 프로듀서, 그리고 임프레사리오 존 해먼드를 고용했다. 스윙 음악 시대 동안 재즈, 블루스, 그리고 포크 아티스트의 발견자, 홍보자, 그리고 제작자로서의 그의 중요성과 함께, 해먼드는 이미 1932-33년에 콜롬비아에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 음악 신문 Melody Maker에서의 그의 관여를 통해, 해먼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미국 컬럼비아 레이블이 주로 특별히 제작된 콜롬비아 W-265000 매트릭스 시리즈를 사용하여 영국 컬럼비아 레이블을 위한 녹음을 제공하도록 주선했다. 해먼드는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진짜 재즈를 연주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정도로 경제가 충분히 좋지 않았던 시기에 플레처 헨더슨, 베니 카터, 조 베누티, 로저 울프 칸, 그리고 다른 재즈 연주자들을 녹음했다 (이 특별한 시리즈의 이것들 중 일부는 미국에서 발행되었다). 해먼드의 콜롬비아를 위한 일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그의 복무에 의해 중단되었고, 그는 비밥 시대 동안 음악계에 덜 관여했지만, 그가 1950년대에 컬럼비아를 위한 인재 스카우트로 일에 돌아왔을 때, 그의 경력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 - 그가 경력의 과정 동안 발견하고 콜롬비아에 계약했던 슈퍼스타 아티스트 목록에는 찰리 크리스찬, 카운트 베이시, 테디 윌슨, 피트 시거, 밥 딜런, 레너드 코언, 아레사 프랭클린, 브루스 스프링스틴, 스티비 레이 본이 있고, 1960년대 초 해먼드는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재발매를 위한 그의 로버트 LP들을 옹호한 덕분에 떠오르는 록 음악계에 거대한 문화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1937-38년까지, 음반 사업은 적어도 RCA 빅터와 데카에 있어서는 거의 죽을 뻔했던 대공황의 타격으로부터 마침내 회복되고 있었지만, 사적으로는, ARC에 대한 의심이 있었다. Columbia Broadcasting System, Inc. ("CBS")의 불행한 주주들에 의해 제기된 1941년의 법정 소송에서, RCA 1932년부터 1938년까지 임원이었던 Edward Wallerstein은 ARC에 대해 논평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주요 가치는 음반 산업이 특히 두 개의 다른 음반 회사들의 경우에 엄청나게 돌아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 수 있는 한, 모든 시설을 갖춘 American Record Company는, 지난 6년 동안 전혀 그것의 사업을 증가시키지 않았습니다."


2.4. 1938년 ~ 1947년: CBS[편집]


1938년 12월 17일, 미국의 컬럼비아 레이블을 포함한 ARC는 컬럼비아 브로드캐스팅 시스템 주식회사의 윌리엄 S. 팰리(William S. Paley)에 의해 70만 달러에 인수되었다. 1934년 ARC가 지불한 가격의 10배에 달하는 금액으로, 이는 이후 불만을 품은 주주들에 의해 소송의 불씨가 될 것이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원래 1927년 뉴욕의 탤런트 아서 저드슨과 함께 CBS를 공동 설립했으나 곧 회사 이름만 남기고 동업에서 현금화되었고; 팰리는 1928년에 신생 라디오 방송망을 인수했다.) 1939년 1월 3일, 월러스틴은 빅터를 떠나 12년 동안 맡게 될 CBS 축음기 자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CBS는 3개월 동안 ARC 이름을 유지했다. 그리고 4월 4일, 뉴욕 국무부의 "컬럼비아 축음기 회사, Inc."를 개정하여 자사 직원 몇 명을 이사직에 임명하고, 보도자료를 통해 "미국 레코드 회사 태그는 폐기된다"고 발표했다. 컬럼비아 레코드는 실제로 1939년 5월 22일 델라웨어주의 회사인 "컬럼비아 레코드 회사, Inc."로 다시 태어났다. NYDOS는 이후 1947년 4월 4일을 보여준다. 이 회사는 1954년 10월 11일에 컬럼비아 레코드 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고, 1962년 1월 2일에 컬럼비아 레코드 회사로 되돌아갔다. 컬럼비아 상표는 1929년에 제출된 델라웨어주의 컬럼비아 레코드 회사 산하에 남아 있었다. 아이크 형제와 레온 레비 형제는 CBS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1939년 2월, NYC 스튜디오는 1776 브로드웨이에 있는 ARC 본부에서 799 7번가, 6, 7층, 뉴욕시("스튜디오 A")로 이전했다. 회사 사무실, 스튜디오 및 프레스 플랜트 역시 CT 브리지포트에 있는 바넘 애비뉴 1473번지에서 계속될 것이다. 월러스틴은 존 해먼드를 7번가의 "Associate Director Popular Recording"으로 고용했다. ARC의 또 다른 임원인 아트 새털리는 그렇게 쉽게 인수인계할 것으로 예상되지 않았다. "CBS와 레비 부부는 아메리칸 레코드의 힐빌리 부서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수년간 이 부서를 운영해 온 아트 새털리가 그와 함께 회사에서 철수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트는 콜롬비아의 힐빌리/컨트리 아티스트들과 세션들의 모든 측면을 감독하며 더 많은 성공적인 해를 보냈다.

1939년 8월 30일, 컬럼비아는 $.75의 브런즈윅 레코드를 $.50의 컬럼비아 레이블로 대체하였다. 브런즈윅은 1940년 4월에 점진적으로 폐지되었고, 마지막 호는 브런즈윅 8520이었다. 월러스타인과 페일리는 자신들의 행동 방침이 1931년 브런즈윅 임대 계약 위반으로 이어질 것을 미리 알고 1940년 6월에 보컬리온을 중단하고 오케를 해고하였다. 7월이 되자 진 오트리와 밥 윌스의 새로운 힐빌리 플래터를 출시하고, 선두가 0인 동일한 카탈로그 번호를 사용하여 과거의 보컬리온 디스크를 재발매하였다. 1941년 1월의 감사에서 1939년 12월 1일부터 1940년 12월 31일까지의 기간 동안 브런즈윅 레코드가 150,000장 이상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자, 1931년 12월 3일 이전에 만들어진 마스터 음반의 대여 상표와 카탈로그에 대한 통제권이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에 귀속되었다.

이 시점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컬럼비아 상표는 매직 노트를 왼쪽 원에, CBS 마이크를 오른쪽 원에 겹쳐 놓은 두 개의 원이었다. 로열 블루 레이블은 이제 짙은 빨간색을 선호하며 사라졌고, 이로 인해 RCA 빅터는 레드 씰 상표에 대한 침해를 주장했다(RCA는 패소했다). 블루 컬럼비아 레이블은 이후 1950년대 후반 회색 레이블로 전환하기 전까지 클래식 음악 컬럼비아 마스터웍스 레코드 계열을 유지하다가 이후 클래식 및 브로드웨이 음반 소유주들에게 친숙한 청동으로 바뀌었다. 캐나다의 컬럼비아 축음기 회사는 대공황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그래서 CBS는 1939년 스파톤 레코드와 유통 계약을 맺고 캐나다에서 컬럼비아 레코드를 컬럼비아 이름으로 발매했다.

1940년대에 콜롬비아는 Frank Sinatra와 계약을 맺었다. Sinatra는 콜롬비아의 수익 증대를 도왔다. Sinatra는 그의 어린 시절의 가장 인기 있는 노래들을 포함하여 콜롬비아와 200곡 이상의 노래들을 녹음했다. 콜롬비아에서 다른 인기 있는 아티스트들은 베니 굿맨(Victor 1939년 해먼드와 계약), 베이시 백작, 지미 런스포드(둘 다 데카와 계약), 에디 듀친, 레이 노블(둘 다 브런즈윅에서 콜롬비아로 이사), 케이트 스미스, 밀드레드 베일리, 윌 브래들리를 포함했다.

1947년에 그 회사는 Columbia Records Inc.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것의 멕시코 레코드 회사인 Discos Columbia de Mexico를 설립했다. 1948년에 최초의 클래식 LP Nathan Milstein의 Mendelszoin 바이올린 협주곡 녹음을 보았다. Columbia의 33rpm 형식은 빠르게 클래식 78rpm 기록의 종말을 의미했고 거의 50년만에 처음으로 Columbia가 RCA Victor Red Seal에 압도적인 리드를 주었다.


2.5. 1948년 ~ 1959년: LP 레코드[편집]


컬럼비아의 회장 에드워드 월러스틴은 팰리가 ARC 구매를 할 수 있도록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그의 재능을 앨범의 한 면에서 교향곡의 전체 움직임을 듣는 목표에 세웠다. High Fidelity Magazine의 25주년 기념호에 기고하는 Ward Botsfor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단지 발명가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그의 시대가 무르익은 아이디어를 포착하고 간청하고 명령을 내렸고, 이제 레코드 사업의 받아들여지는 매체가 되도록 천 명의 사람들을 유혹한 사람이었다." 월러스틴의 폭풍 같은 재임에도 불구하고, 1948년 6월, 컬럼비아는 분당 33번의 ⅓ 회전으로 회전했던 롱 플레잉 "마이크로그루브" LP 레코드 포맷(초기 광고에서 때때로 "Lp"라고 쓰여진)을 40년 동안 축음기 레코드의 표준이 되도록 소개했다. CBS의 연구 책임자인 Dr. Peter Goldmark는 공동의 노력에 관리자 역할을 했지만, 월러스틴은 엔지니어 William Socue에게 롱 플레잉 디스크를 대중에게 가져온 기술적인 능력의 공을 돌렸다.

1940년대 초까지, 컬럼비아는 더 오랜 마스터들뿐만 아니라 더 높은 충실도의 음반들로 실험을 해왔고, 이것은 1948년 LP의 성공적인 발매를 위한 길을 닦았다. 음악 감상자들을 위한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데 도움을 준 그러한 음반들 중 하나는 1946년 3월 4일에 발매되었던 더 보이스 오브 프랭크 시나트라의 10인치 LP 재발행이었는데, 이것은 새로운 LP 포맷으로 발매된 첫 번째 팝 음반이었다. 시나트라는 거의 틀림없이 콜롬비아의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었고, 그의 예술적 비전은 대중적이거나 클래식한 음악이라는 매체를 콜롬비아가 취하는 방향과 결합되어, 잘 맞았다. 더 보이스 오브 프랭크 시나트라는 또한 최초의 진정한 컨셉의 음반으로 여겨졌다. "LP"라는 용어가 12인치 33+1 ⁄3rpm의 비닐 디스크를 가리키게 되었기 때문에, 첫 번째 LP는 1948년 7월에 출판된 1949년 컬럼비아 레코드 카탈로그에서 발견된 Nathan Milstein과 Bruno Walter가 뉴욕 필하모닉(당시 뉴욕 필하모닉-심포니 오케스트라로 불림), 콜롬비아 ML 4001을 지휘한 Mendelszon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이다. 카탈로그에 나열된 다른 "LP"들은 가벼운 클래식을 위한 ML 2001부터 시작하여 대중가요를 위한 CL 6001 그리고 어린이 음반을 위한 JL 8001까지 10인치 포맷이었다. 워싱턴 DC에 있는 의회 도서관은 현재 ML 4001이 1948년 3월 1일에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콜롬비아 레코드 문서 보관소를 보유하고 있다. 1948년 6월 21일 LP가 소개되기 전, 콜롬비아가 딜러들에게 최소한 3개월 동안 배포를 위해 첫 번째 LP를 압박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카탈로그 번호 체계는 그 이후로 작은 변화가 있었다.

컬럼비아의 LP들은 특히 클래식 음악의 긴 곡들에 잘 어울려서, 초기 앨범들 중 일부는 Eugene Ormandy와 Philadelphia Orchestra, Bruno Walter와 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 그리고 Thomas Beecham 경과 Royal Philharmonic Orchestra와 같은 아티스트들을 특별히 포함했다. 이러한 녹음들의 성공은 Capitol Records가 1949년에 LP들을 발매하기 시작하도록 설득했다. LP 레코드가 공식적으로 시연되기 전에도, 콜롬비아는 경쟁자인 RCA Victor와 새로운 속도를 공유하겠다고 제안했는데, 그들은 처음에 그것을 거절했고 곧 그들의 경쟁력 있는 45 RPM 레코드를 선보였다. LP가 클래식 녹음에 선호되는 포맷이라는 것이 확실해지자, RCA Victor는 1950년 1월에 회사 자체의 LP들을 발매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다른 주요 미국 레이블들이 빠르게 뒤따랐다. 영국의 Decca Records는 1949년에 시작하여, 유럽에서 LP들을 발매한 최초의 레코드였다. EMI는 1955년까지 LP 포맷을 완전히 채택하지 않았다.

로저스 & 해머스타인의 남태평양 지역을 에지오 핀자와 메리 마틴이 함께 녹음한 '오리지널 캐스트 레코딩'은 1949년에 녹음되었다. 기존의 금속 마스터와 테이프는 모두 뉴욕 시의 세션에서 사용되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소니가 컬럼비아의 브로드웨이 음반에 헌정하는 CD 세트의 일부로 발매하기 전까지 녹음된 버전은 사용되지 않았다. 수 년에 걸쳐 컬럼비아는 데카와 RCA 빅터에 합류하여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헌정하는 음반들을 전문적으로 제작하고 오리지널 캐스트들의 멤버들과 함께했다. 1950년대에 컬럼비아는 또한 인기 영화들의 사운드트랙을 차용한 LP들을 발매하기 시작했다.

컬럼비아와 다른 주요 음반사들이 함께 만든 많은 음반 커버들은 앞면과 뒷면을 한 장씩 판지 한 장(반으로 접힌)과 종이 '슬릭' 두 장을 사용하여 조립되었다. 앞면 슬릭은 상하좌우를 휘감고(음반을 표지에 삽입하기 위해 오른쪽이 열려 있다), 위와 아래의 판지 두 장을 함께 붙인다. 붙여넣은 앞면 슬릭의 가장자리에 뒷면 슬릭을 붙여 음반 커버가 하나의 연속적인 조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컬럼비아는 모노용과 스테레오용으로 두 장의 전면 커버 슬라이크를 인쇄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며 불필요하게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1959년 여름, 8월에 발매된 앨범들 중 일부를 시작으로, 그들은 "붙여넣기"된 전면 슬릭으로 옮겨갔다.


2.6. 1950년대[편집]


1951년, 미국 컬럼비아는 빅터가 2년 전에 선보였던 45rpm 포맷의 레코드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테드 월러스타인이 컬럼비아 레코드 회장직에서 은퇴했고, 컬럼비아 또한 수십 년간 지속된 EMI와의 유통 계약을 끊고 필립스 레코드와 유통 계약을 체결하여 북미 이외의 지역에 컬럼비아 레코드를 판매하게 되었다. EMI는 1968년까지 오케(Okeh)와 이후 에픽(Epic) 레이블 음반을 지속적으로 유통하였다. EMI는 또한 호주와 뉴질랜드에 컬럼비아 레코드를 지속적으로 유통하였다. 아메리칸 컬럼비아는 EMI가 오랜 연주 음반을 도입하는 것을 꺼리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컬럼비아는 1950년 프로듀서이자 밴드 리더인 미치 밀러를 머큐리 레이블에서 멀어지게 한 후 1950년대에 가장 성공적인 비 록 음반 회사가 되었다. 많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컬럼비아는 1960년대 중반까지 10대 로큰롤 시장에 주로 관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주로 밀러가 로큰롤을 혐오하는 표현을 자주 했던 것 때문이었다. (밀러는 1930년대 이스트만 음악 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컬럼비아의 경영 간부 고다드 리버슨과 친구였던 고전적으로 훈련된 오보이스트였다.) 밀러는 빠르게 머큐리의 가장 큰 아티스트인 프랭키 레인을 영입했고, 토니 베넷, 마할리아 잭슨, 지미 보이드, 가이 미첼(밀러의 이름에서 따온 예성), 조니 레이, 포 래드, 로즈메리 클루니, 케이 랜드, 레이 코니프, 제리 베일 및 조니 매티스를 포함한 10년 내 가장 큰 음반 스타들 중 몇 명을 발굴했다. 그는 또한 10년 내 레이블의 최고 여성 음반 스타 도리스 데이(Doris Day)의 초기 싱글들을 감독했다.

1953년에 컬럼비아는 새로운 자회사 레이블인 에픽 레코드(Epic Records)를 설립하였다. 1954년 컬럼비아는 스파톤 레코드(Sparton Records)와의 유통 계약을 종료하고 캐나다의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를 설립하였다. 이미 마티 로빈스(Marty Robbins), 레이 프라이스(Ray Price), 칼 스미스(Carl Smith)를 포함한 컨트리 음악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컬럼비아는 1955년 선 레코드(Sun Records)로부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의 계약에 15,000 달러를 입찰하였다. 프레슬리의 매니저인 톰 파커 대령(Colonel Tom Parker)은 그들의 제안을 거절하고 프레슬리를 RCA 빅터(RCA Victor)와 계약하였다. 그러나 컬럼비아는 1958년 두 명의 선 아티스트 조니 캐시(Johnny Cash)와 칼 퍼킨스(Carl Perkins)와 계약하였다.

1954년, 미국 컬럼비아는 컬럼비아의 예술 감독 S. Neil Fujita가 디자인한 새로운 모더니즘 스타일의 "Walking Eye" 로고를 선보였을 때, 결정적으로 과거와 결별했다. 이 로고는 사실 음반(눈)에 스타일러스(다리)를 묘사하지만, "눈"은 또한 미묘하게 CBS의 텔레비전 주요 사업과 그 부서의 상징적인 눈 로고를 나타낸다. 콜롬비아는 음반사에 "notes and mike" 로고를 계속 사용했고 1958년에 "notes and mike"가 단계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심지어 두 로고를 모두 보여주는 홍보 라벨을 사용했다. 캐나다에서, 콜롬비아 78s는 1958년에 "Walking Eye" 로고로 압박을 받았다. 원래의 Walking Eye는 키가 크고 견고했다; Walking Eye가 1990년대 대부분 동안 산발적으로만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1961년에 여전히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는 익숙한 것으로 수정되었다.

비록 빅 밴드 시대는 지났지만, 컬럼비아는 듀크 엘링턴과 몇 년 동안 계약을 맺고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 엘링턴의 밴드가 자정 이후 광란을 일으켰던 역사적인 순간을 포착했는데, 이는 경력이 교착 상태에 빠진 밴드 리더에게 활력소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새로운 수석 프로듀서 조지 아바키안(George Avakian)의 지휘 아래 컬럼비아는 일반 대중의 재즈 감상과 이해에 가장 중요한 레이블이 되었고(아바키안의 다작하고 지각력 있는 플레이 바이 플레이 라이너 노트의 도움으로) 루이 암스트롱의 LP 시리즈를 발매했으며, 1959년에 남아있는 두 현대 재즈 아티스트 데이브 브루벡과 마일스 데이비스(Dave Brubebeck and Miles Davis)와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이 음반은 브루벡 콰르텟의 Time Out by the Brubebeck Quartet과 Kind of Blue by the Davis Sextet으로, 2003년 롤링 스톤의 "역대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 목록에 12위로 등장했다. 또 다른 프로듀서 테오 마케로(Teo Macero)와 함께 컬럼비아는 재즈 작곡가/음악가인 Thelonious Monk 및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와 계약을 맺었고, 마케로는 데이비스의 1958년 6집 앨범 Milstones부터 록과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재즈 결합의 혁신자이자 아바타인 Miles Davis 경력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954년, 콜럼비아는 데이브 브루벡 콰르텟과 계약을 맺음으로써 소그룹 현대 재즈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현장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재즈 앨범(현재까지)인 재즈 고즈 투 컬리지(Jazz Goes to College)의 발매로 이어졌다. 동시에, 브루벡 콰르텟의 레이블 데뷔이기도 한 소그룹에 의한 컬럼비아의 첫 번째 현대 재즈 발매와 함께, 대학 캠퍼스에서의 브루벡의 성공 현상에 대한 타임지 커버스토리였다. 겸손한 데이브 브루벡은 재즈 음악가에 대한 두 번째 타임 커버스토리(루이 암스트롱의 사진이 첫 번째 주인공)는 자신이 아니라 듀크 엘링턴이 만들었다고 말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2년 안에 엘링턴의 사진은 1956년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그의 성공에 이어 타임지 커버에 실릴 것이었다. 컬럼비아에서 녹음된 뉴포트의 엘링턴은 또한 밴드 리더이자 작곡가, 피아니스트의 베스트셀러 앨범이었다. 게다가, 타임지 커버에 실렸던 재즈 거물들의 독점적인 삼위일체는 모두 컬럼비아 예술가들이었다. (1960년대 초, 컬럼비아 재즈 아티스트 Thelonious Monk는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콜롬비아는 1956년 ARC가 캐피톨 레코드를 사들이면서 잃어버린 캐피톨 레코드 제품을 대체하기 위해 호주 레코드사가 미국 컬럼비아 제품 유통을 인수하면서 호주와 뉴질랜드의 유통업체를 바꿨다. 당시 EMI가 컬럼비아 상표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컬럼비아 자료는 CBS 코로넷 레이블에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발행됐다.

같은 해, 전 컬럼비아 A&R 매니저였던 고다드 리버슨은 회사의 다양한 국제 부문과 라이선스뿐만 아니라 컬럼비아와 에픽을 포함한 전체 CBS 음반 부문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지도력 아래, 회사의 음악 부문은 곧 RCA 빅터를 제치고 세계 최고의 음반 회사가 되었고, 스타가 많이 출연하는 아티스트 명단과 대중적인 재즈, 클래식, 무대와 스크린 사운드트랙 타이틀에 대한 비교할 수 없는 목록을 자랑했다. 1938년에 A&R 매니저로 콜롬비아에 합류한 리버슨은 그의 개인적 우아함과 품질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했으며, 많은 크게 성공한 앨범과 싱글의 발매를 감독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잘 팔리지 않은 프레스티지 발매와 심지어 아놀드 쇤베르그와 안톤 폰 베번의 작품의 완전판과 같이 제한적인 매력을 가졌던 일부 타이틀들까지 감독했다. 그의 첫 번째 주요한 성공들 중 하나는 1957년에 전 세계적으로 500만 장 이상이 판매된 마이 페어 레이디의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팅 앨범으로, 그 당시까지 발매된 가장 성공적인 LP가 되었다. 리버슨은 또한 오랫동안 재임한 CBS의 윌리엄 S. 팰리 사장에게 50만 달러를 투자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제작의 유일한 후원자가 되도록 설득했고, 이는 이후 회사에 약 3,200만 달러의 수익을 안겨주었다.

1958년 10월, 컬럼비아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조니 매티스, 도리스 데이, 가이 미첼, 조니 레이, 조 스태포드, 토니 베넷, 로즈마리 클루니, 프랭키 레인, 포 래드 등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한 'Greatest Hits' 시리즈 패키지를 내놓았다. 몇 달 후, 매티스의 모음집만이 차트에 올랐는데, 이는 당시 빌보드 앨범 차트에 25개의 자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음집들이 너무 성공적이어서 컬럼비아는 대개 아티스트의 경력이 쇠퇴할 때 광범위한 기준으로 이러한 패키지를 수행하게 되었다.

스테레오

비록 컬럼비아가 1956년에 스테레오로 녹음을 시작했지만, 스테레오 LP는 1958년까지 제조되기 시작하지 않았다. 컬럼비아의 최초 스테레오 발매 중 하나는 뉴욕 필하모닉과 웨스트민스터 합창단이 지휘한 헨델의 메시아(1956년 12월 31일, 앰펙스 300-3 기계를 사용하여 1 ⁄2인치 테이프로 녹음)의 축약되고 재구성된 공연이었다. 번스타인은 예수탄생과 부활 부분을 결합했고, 공연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끝냈다. RCA 빅터와 마찬가지로, 브루노 월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컬럼비아를 위해 축약된 메시아를 녹음하기도 했던 유진 오먼디가 지휘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포함하여 초기 스테레오 녹음의 대부분은 클래식 아티스트들에 대한 것이었다. 1949년 컬럼비아의 뉴욕시 스튜디오에서 토마스 비첨 경과 함께 처음 녹음을 했던 뉴욕의 선두 음악가들의 앙상블인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일부 세션이 이루어졌다. 조지 셀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주로 에픽을 위해 녹음했다. 에픽이 클래식 음악을 중단했을 때, 명단과 카탈로그는 컬럼비아 마스터웍스 레코드로 옮겨졌다.

컬럼비아는 1958년 여름에 첫 번째 팝 스테레오 앨범을 발표했다. 처음 12개 정도의 앨범들은 모두 이미 모노로 발매된 스테레오 버전이었다. 1958년 9월이 되어서야 컬럼비아는 동시에 모노/스테레오 발매를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테레오 녹음의 모노 버전은 1968년에 중단되었다. LP의 도입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컬럼비아는 1958년에 전 세계의 음악을 선보이는 "Adventures in Sound" 시리즈를 시작했다.

카탈로그 번호 체계만 따지면, 처음 몇 년 동안은 모노 버전과 스테레오 버전 간에 상관관계가 없었다. 콜럼비아는 팝 스테레오 발매를 위해 새로운 CS 8000 시리즈를 시작했고, 스테레오 발매를 일종의 전문 틈새 레코드로 간주하면서, 2년 동안 모노와 스테레오 번호를 연결할 수고를 하지 않았다. 마스터웍스의 클래식 LP들은 MS 6000 시리즈를 가지고 있었던 반면, 마스터웍스의 쇼튠즈 앨범들은 OS 2000이었다. 마침내, 1960년에, CL-1510으로 발행된 램버트, 헨드릭스 & 로스 싱 엘링턴, 램버트, 헨드릭스 & 로스 앨범에 필적하기 위해 팝 스테레오 시리즈는 8300개에서 8310개로 뛰어올랐다. 그때부터, 팝 음반의 스테레오 번호는 정확히 모노보다 6800개가 더 높았고, 스테레오 클래식 음반들은 모노 번호에 600을 더했고, 쇼튠즈 앨범들은 모노 번호에 3600을 더했다. 각각의 카탈로그 시리즈에서 오직 마지막 두 자리 숫자만 일치했다.

팝 스테레오 LP들은 CBS 레코드가 모든 레이블에 걸쳐 카탈로그 넘버링 시스템을 개편하고 통일했던 1970년까지 높은 9000년대에 진입했다. 마스터웍스 클래식 앨범들은 7000년대에 있었고, 쇼튠즈는 낮은 2000년대에 머물렀다.

컬럼비아의 공학부는 모노 소스로부터 스테레오를 에뮬레이트하는 프로세스를 개발했다. 그들은 이 프로세스를 "Electronically Rechanneled for Stereo"라고 불렀다. 1962년 6월 16일자 빌보드 매거진(5면)호에서 컬럼비아는 도리스 데이, 프랭키 레인, 퍼시 페이스, 미치 밀러, 마티 로빈스, 데이브 브루벡, 마일스 데이비스 및 조니 매티스의 앨범을 포함하여 모노로 녹음된 대히트 컴필레이션의 "리채널화" 버전을 발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7. 1960년대: deep groove[편집]


1961년 후반까지 컬럼비아는 더 새로운 장비로 압착 공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deep groove" 압착은 더 오래된 압착기에서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홈은 결과적인 기록이 중앙에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둥근 중앙 "블럭"에 금속 스탬퍼를 부착하는 인공물이었다. 더 새로운 기계는 조금 다른 기하학적 구조를 가진 부품을 사용했는데, 이 부품은 깊은 홈이 있던 곳에 작은 "다리"만 남겼다. 이러한 전환은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았는데, 다른 공장들이 다른 시기에 기계를 대체했기 때문이며, 깊은 홈과 다리의 종류가 모두 원래의 압착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겼다. 전환은 1961년 후반에 시작되었다.

CBS Records

1961년 CBS는 필립스 레코드와의 계약을 종료하고 1962년에 자체적인 국제 기구인 CBS 레코드 인터내셔널을 결성하였다. 이 자회사 레이블은 미국과 캐나다 이외의 지역에서 컬럼비아 레코드를 CBS 레이블(영국 필립스가 1964년까지 판매)로 발매하였다. EMI가 북미 이외 지역에서 콜럼비아 그래폰 컴퍼니라는 이름의 별도의 레코드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컬럼비아 레코드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발매할 수 없었다. 이는 1930년대 초 EMI의 탄생으로 이어진 법적 조치의 결과였다.

이 일이 일어난 동안 1961년 말부터 국내 컬럼비아 발매 음반들의 모노와 스테레오 음반들은 모두 레이블 상단에 작은 "CBS"를 달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것은 특정 날짜에 바뀐 것이 아니라, 압박 공장들이 먼저 오래된 (CBS 이전) 음반들의 재고를 다 써버리라고 지시받았기 때문에, 몇몇 발매 음반들에 대한 레이블들이 혼재되었다. 몇몇은 모노 음반들에 대한 CBS의 텍스트로 알려져 있고, 같은 음반의 스테레오 음반들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확실히 전부는 아니지만, "ledge" 변형이 있는 초기 숫자들 중 많은 수가 (즉, 깊은 홈이 없는) 작은 "CBS"를 가지고 있었다. 이 텍스트는 1962년 6월까지 컬럼비아 레이블에서 사용되었다.

콜롬비아의 멕시코 방송국인 디스코스 콜롬비아는 디스코스 CBS로 이름을 바꾸었다.

CBS 레코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면서 CBS는 1960년대 초 호주를 시작으로 자체적인 유통망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 CBS는 호주와 뉴질랜드의 배급사인 호주 레코드 컴퍼니(1936년 설립)를 인수하였는데, 이는 당시 대표적인 호주의 독립 음반 및 유통 회사 중 하나인 코로넷 레코드(Coronet Records)를 포함한다. CBS 코로넷 레이블은 1963년 '워킹 아이' 로고를 가진 CBS 레이블로 대체되었다. ARC는 1970년대 후반 공식적으로 사업명을 CBS 오스트레일리아로 변경할 때까지 그 이름으로 거래를 지속하였다.

1961년, 컬럼비아의 A&R 매니저이자 밴드 리더인 미치 밀러가 NBC에서 미치와 함께 하는 버라이어티 시리즈 '싱어롱(Sing Along)'의 진행자가 되었을 때, 컬럼비아의 음악 레퍼토리는 엄청난 힘을 받았다. 이 쇼는 밀러의 대중적인 기준의 '포크함'이지만 매력적인 '코러스(chorus)' 스타일의 공연을 기반으로 했다. 네 시즌 동안 진행된 이 시리즈는 밀러의 '싱어롱(Singallong)' 앨범을 홍보했는데, 이 앨범은 2천만 장 이상 팔렸고, 1964년에 취소되었을 때 34%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미치 밀러가 텔레비전에 출연했다?

1961년, 컬럼비아의 A&R 매니저이자 밴드 리더인 미치 밀러가 NBC에서 미치와 함께 하는 버라이어티 시리즈 '싱어롱(Sing Along)'의 진행자가 되었을 때, 컬럼비아의 음악 레퍼토리는 엄청난 힘을 받았다. 이 쇼는 밀러의 대중적인 기준의 '포크함'이지만 매력적인 '코러스(chorus)' 스타일의 공연을 기반으로 했다. 네 시즌 동안 진행된 이 시리즈는 밀러의 '싱어롱(Singallong)' 앨범을 홍보했는데, 이 앨범은 2천만 장 이상 팔렸고, 1964년에 취소되었을 때 34%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밥 딜런

1961년 9월 CBS A&R 매니저 존 해먼드 시니어는 포크 가수 캐롤린 헤스터의 첫 번째 컬럼비아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헤먼드는 그의 친구를 녹음 세션 중 하나에 초대했다. 해먼드는 여기서 처음 밥 딜런을 만났고, 그는 처음에 하모니카 연주자로 계약했다. 딜런의 자작 데뷔 앨범은 1962년 3월에 발매되었고, 적당한 가격에 판매되었다. 컬럼비아의 일부 임원들은 딜런을 "해먼드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며 딜런을 레이블에서 삭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존 해먼드와 조니 캐시는 딜런을 두둔했고, 그는 이후 4년 동안 컬럼비아에서 가장 수입이 높은 가수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에 걸쳐 딜런은 컬럼비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초기 민요들은 많은 공연들에 의해 녹음되었고 피터, 폴 앤 메리 그리고 터틀즈의 히트곡이 되었다. 이러한 커버 버전들 중 일부는 포크 록 장르의 기초가 되었다. 버드는 딜런의 "Mr. Tambourine Man"의 버전으로 그들의 팝적인 돌파구를 이루었다. 1965년, 딜런의 '전기를 타고' 록 음악가들과 함께 일하기로 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결정은 그의 청중들을 갈라놓았지만, 그의 1965년 히트 싱글 "Like a Rolling Stone"으로 그를 더 큰 상업적 성공으로 이끌었다. 1966년 투어 활동에서 탈퇴한 후, 딜런은 그의 후원 그룹인 밴드와 함께 많은 곡들을 녹음했고, 이 곡들은 '데모 레코딩'으로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도달했다. 이것들은 맨프레드 만("The Mighty Quin")과 브라이언 오거, 줄리 드리스콜 앤 트리니티("This Wheel's On Fire")의 히트곡으로 이어졌다. 딜런의 1960년대 후반 앨범 존 웨슬리 하딩과 내슈빌 스카이라인은 신흥 컨트리 록 장르의 초석이 되었고, 버드와 플라잉 브리또 브라더스에 영향을 미쳤다.

Rock and Roll

1964년 1월, British Invasion이 도착했을 때, 컬럼비아는 1963년 레이블의 첫 번째 메이저 록 스타로 계약된 디온(가수)과 1963년에 계약된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Paul Revere & the Riders)를 제외하고는 록 음악가가 명단에 없었다. 당시 가장 인기 많았던 대중가수 중 하나인 디온에게는 그가 앨범을 발매하든 안하든 간에 무조건 연봉 10만 달러를 주기로 계약했다. 디온이 컬럼비아 레코드로 이적 후 발매한 Ruby Baby는 빌보드 핫 100에서 2위까지 올랐지만 그외 다른 앨범들은 죽을 쑨데다, 존 해먼드로부터 클래식 블루스를 소개받아 블루스로 전향을 꾀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컬럼비아 레코드와 갈등을 겪었다. 결국 디온은 1965년 일방적으로 계약을 파기해버렸고, 이때문에 원래 1965년에 발매예정인 Kickin' Child는 무려 52년이 지난 2017년에 발매되었다.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는 머지비트 앨범인 The Exciting New Liverpool Sound (컬럼비아 CL-2172, 모노로만 발행)를 발매했다. 도리스 데이의 아들인 테리 멜처(Terry Melcher)는 히트 기록 없이 6년을 보낸 프랭키 레인(Frankie Lain)을 위해 하드 드라이브인 "Don't Make My Baby Blue"를 제작했다. 이 노래는 팝 차트에서 51위에 올랐고, 이지 리스닝 차트에서 17위에 올랐다.

멜처와 브루스 존스턴은 어니 브링어스와 필 스튜어트로 구성된 보컬 그룹인 립 코드를 발견하고 컬럼비아로 가져왔고, 프로듀싱 기술을 통해 록 그룹으로 변화시켰다. 이 그룹은 웨이드 플레몬스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Here I Stand"와 "Hey Little Cobra"에 히트를 쳤다. 컬럼비아는 이 두 개의 음반이 로큰롤에 입문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았다. 멜처와 존스턴은 1964년에 컬럼비아를 위해 "Bruce & Terry"로 몇 개의 싱글을 추가로 녹음했고, 나중에는 "The Rogues"로 녹음했다. 멜처는 버드와 폴 리비어 & 더 레이더스가 컬럼비아를 위해 초기 음반을, 존스턴은 캐피톨 레코드를 위해 비치 보이스를 프로듀싱했다.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승천

Mitch Miller가 1965년에 은퇴했을 때, 컬럼비아는 전환점에 있었다. 로큰롤과 팝 록에 대한 밀러의 경멸이 컬럼비아의 A&R 정책을 지배하고 있었다. 브로드웨이 사운드트랙과 미치 밀러의 싱얼롱 시리즈의 판매는 시들해지고 있었다. 세전 수익은 매년 약 5백만 달러로 평평하게 되었다. 그 당시 레이블의 유일하게 중요한 "팝" 활동은 밥 딜런, 버드, 폴 리비어 & 더 레이더스, 사이먼 & 가펑클이었다. 카탈로그에는 다른 장르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선별된 R&B 아티스트들과 함께, 그들은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컬럼비아가 R&B 장르에서 프랭클린을 주요 탤런트로 마케팅하는 데 문제가 있었고, 이것이 그녀가 1967년 애틀랜틱 레코드로 레이블을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관찰했다.

1967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변호사 Clive Davis가 컬럼비아의 회장이 되었다. Davis가 임명된 이후, 컬럼비아 레이블은 주로 Janis Joplin을 포함한 여러 주연 배우들을 발견하고 서명했던 몬터레이 국제 팝 페스티벌에 참석하기로 한 Davis의 우연한 결정 덕분에 록 음악 레이블에 더 가까워졌다. Joplin은 여러 세대의 여성 락앤롤러들을 위해 길을 이끌었다. 그러나 콜롬비아/CBS는 여전히 전통적인 팝과 재즈에 손을 잡고 있었고 이 시기 동안 그것의 주요 인수들 중 하나는 Barbra Streisand였다. 그녀는 1963년 콜롬비아에서 그녀의 첫 솔로 앨범을 발매했고 오늘날까지 그 레이블에 남아 있다. 게다가, 그 레이블은 Miles Davis를 명단에 유지했고, 1960년대 후반에 녹음한 In A Silent Way and Bitches Brew는 재즈와 록 음악의 융합을 개척했다.

모비 그레이프라는 샌프란시스코 그룹은 웨스트 코스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었고, 1967년 데이비스와 계약을 맺었다. 그들을 세상에 화려하게 소개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은 데뷔 앨범과 함께 D-Day 이후 23년만인 1967년 6월 6일, 같은 날, 모두 그 앨범의 다섯 개의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그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24위를 차지했지만, 그 싱글들은 차트에 거의 구멍을 내지 못했고, 최고 성적은 단지 3주 동안 핫 100에서 88위에 올랐던 "Omaha"였다. 다른 차트인 "Hey Grandom"은 Bubbleing Under 차트에 올랐을 뿐이고 일주일 만에 빛이 바랬다. 또한, 그 그룹이 그 이후 판매량이 감소하기 시작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두 번째 압박으로 편집되어야만 했던 앞 표지의 성조기에 대한 약간의 불평도 있었다. 그 싱글들을 위한 모든 홍보 예산에 대한 수익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비록 그 그룹이 두 개의 앨범을 더 만들었지만, 이러한 특정한 홍보 스턴트는 콜롬비아나 다른 주요 레이블에 의해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다.

사이먼과 가펑클

밥 딜런을 제외한 이 시기의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컬럼비아 팝 가수는 사이먼 & 가펑클이었다. 1965년, 이 듀오는 딜런, 버드 등의 포크 록 실험에 영감을 받은 컬럼비아 프로듀서 톰 윌슨이 자신들도 모르게 또는 승인 없이 "The Sound of Silence"의 이전 녹음에 드럼과 베이스를 추가하면서 깜짝 1위를 차지했다. 실제로, 이 듀오는 데뷔 LP의 저조한 판매에 낙담하여 이미 몇 달 전에 해체되었고, 폴 사이먼은 영국으로 이주하여, 언론을 통해서만 이 싱글이 히트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곡의 극적인 성공은 사이먼이 미국으로 돌아오도록 자극했고, 이 듀오는 개혁했고, 그들은 곧 1960년대 중반 포크 록 붐의 대표적인 가수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들의 다음 앨범인 파슬리, 세이지, 로즈마리, 그리고 라임은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4위에 올랐다. 이 듀오는 그 후 탑 20 싱글인 "A Hazy Shade of Winter"를 갖게 되었지만, 사이먼이 작가의 차단과 끊임없는 투어의 요구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1966-67년 동안 진전이 둔화되었다. 그들은 사이먼이 마이크 니콜스 영화 "The Graduate"를 위해 곡을 쓰기로 동의한 후 1968년에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 후 나온 싱글인 "Mrs. Robinson"은 대히트가 되었다. "The Graduate" 사운드트랙과 사이먼 & 가펑클의 다음 스튜디오 앨범인 "Bookends"는 총 판매량이 500만 장을 넘으며 앨범 차트에서 주요 히트였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Bridge over Troubled Water"(1970)는 1970년 1월 미국 앨범 차트에서 1위에 올랐고, 역대 가장 성공적인 앨범 중 하나가 되었다.

호이트 액스턴과 톰 러시

데이비스는 1969년 아티스트 호이트 액스턴과 톰 러시를 컬럼비아로 유인했고, 두 사람 모두 레이블로부터 "팝 대우"로 알려진 것을 받았다. 호이트 액스턴은 1960년대 초부터 포크/블루스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했는데, 호이트 액스턴은 호라이즌, 그 후 비제이를 위해 여러 앨범을 만들었다. 그가 컬럼비아에 합류할 무렵, 그는 "Greenback Dollar"와 같은 성공적인 팝송과 같은 해 영화 이지 라이더에서 사용된 "The Pusher"와 같은 스테펜울프를 위한 하드 록 곡을 혼합했다. 그가 컬럼비아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앨범 My Griffin Is Gone은 "모든 종류의 악기들과 심지어 줄로 가득 찬 '과다생산'의 포스터 차일드"로 묘사되었다. 그 앨범 이후, 액스턴은 떠나 캐피톨 레코드에 합류했고, 그곳에서 그의 다음 앨범은 "Joy to the World"와 "Never Been to Spain"이 수록되었으며, 이는 던힐의 쓰리 독 나이트의 히트곡이 되었다. 액스턴은 결국 컨트리 가수가 되었고, 자신의 음반사인 예레미야를 설립했다.

톰 러시는 러시가 엘렉트라로부터 유혹을 받은 콜롬비아에서 근무하기 전과 후에 항상 "스토리텔러" 또는 "발라드어" 유형의 민속 예술가였다. 악스턴과 마찬가지로 러시는 컬럼비아에서 데뷔하면서 "대접"을 받았다. 그의 평소 솔로 기타에 추가되는 수많은 악기들은 물론 모두 "맛있게" 이루어졌지만, 러시의 청중들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그는 음반사 역사학자 마이크 캘러핸에게 논평했다.

"스튜디오에 있을 때는 '감미료'와 그런 것들을 꺼내놓기도 하고, 거기에 있을 때는 '네, 좋아요'라고 말하곤 하죠. 하지만 앨범을 집에 가지고 오면 그런 소리를 거의 들을 수가 없어요."


결국 러시는 컬럼비아에서 그의 다음 세 장의 앨범에 적용했던 평소의 사운드로 돌아갔고, 그 이후로 계속 감상적인 관객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2.8. 1970년대[편집]


카탈로그 번호

컬럼비아 앨범 시리즈는 1951년 앨범 GL-500(CL-500)으로 시작하여 1970년에 어색한 대기록에 도달했는데, 이때 스테레오 넘버링 순서가 패티 페이지 앨범 허니 컴 백에 할당된 CS-9999에 도달했다. 이것은 컬럼비아가 13년 동안 네 자리의 카탈로그 번호를 사용했고, CS-10000은 번거로워 보였기 때문에 카탈로그 넘버링 시스템에 도전을 제기했다. 컬럼비아는 대신 CS-1000으로 앨범을 발행하기로 결정했고, 네 자리의 카탈로그 번호를 보존했다. 그러나 이것은 1957-58년에 이전에 사용되었던 번호를 다시 사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1970년 7월, 카탈로그 부서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여 30000으로 시작하는 모든 레이블을 통합 카탈로그 넘버링 시스템으로 결합했다: C for Columbia, Epic, Harmony(예산 재발급 라인), M for Columbia Masterworks, S for Movie Soundtrack 및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Y for Columbia Odyssey, Z for Columbia Odyssey, 그리고 Z는 CBS가 배포한 다른 모든 레이블(CBS Associated라고 통칭함). 접두사 G는 두 개의 앨범 세트에도 사용되었다 - 즉, KC2와 같은 레이블 문자 뒤에 있는 세트의 레코드 수. 새로운 시스템 하에서 발매된 첫 번째 CBS 앨범은 F 30001(Fillmore albums는 'Z'가 아닌 'F' 접두사를 사용함)이 할당된 엘빈 비숍 그룹의 자체 타이틀 앨범인 반면, 시스템 하에서 실제 콜롬비아가 발매한 첫 번째 앨범은 C 30004가 할당된 허셜 버나디의 쇼스토퍼였다. 오래된 시스템에서 발매된 가장 높은 카탈로그 번호는 세서미 스트리트 북 앤 레코드에 할당된 CS-1069였다. 연대순으로 컬럼비아는 8월에 이 시리즈에서 적어도 한 장의 앨범을 발행했지만, 그 무렵에는 새로운 레이블 디자인으로 7월에 발매를 시작한 CBS 통합 30000 시리즈가 거의 100장에 가까운 앨범을 발행하는 등 잘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스템은 나중에 더 많은 접두사로 확장되었다(캐리어의 경우 R과 V, 특수 제품의 경우 A와 W, 소니 원더의 경우 L, 소니 클래식의 경우 S, 모뉴먼트의 경우 N, 혼돈 레코딩의 경우 O, 550 음악의 경우 B).

쿼드러포닉스

1970년 9월, 클라이브 데이비스의 지도 아래 컬럼비아 레코드는 웨스트 코스트 록 시장에 진출하여 최첨단 녹음 스튜디오(샌프란시스코의 폴섬가 827번지에 위치하여 나중에 오토매트로 바뀌었다)를 열고 (당시 컬럼비아와 배급 계약을 체결한) 모뉴먼트 레코드의 프로듀서이자 아티스트이자 닐스 롭그렌과 로이 뷰캐넌의 전 밴드 동료였던 조지 데일리가 이끄는 피셔니스 워프에 샌프란시스코에 A&R 헤드와 사무실을 설립했다. 녹음 스튜디오는 1978년까지 CBS에서 운영되었다.

1970년대 초, 컬럼비아는 쿼드라포닉이라 불리는 4채널 과정에서 특별한 증폭기에 의해 디코딩된 후 각 스피커를 방 구석에 두고 4개의 스피커를 통해 재생되는 전자 인코딩 과정을 사용하는 SQ(스테레오 쿼드라포닉) 표준을 사용하여 녹음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RCA는 4채널 재생을 위해 "이산적" 녹음을 재생하기 위해 특별한 카트리지를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쿼드라포닉 과정으로 맞섰다. 컬럼비아와 RCA의 쿼드라포닉 녹음은 기존의 스테레오 장비에서 재생될 수 있었다. 비록 컬럼비아 과정이 적은 장비를 필요로 했고 꽤 효과적이었지만, 많은 회사들이 경쟁적인 시스템에 혼란을 겪었고 컬럼비아의 매트릭스 녹음과 RCA의 이산 녹음 모두의 판매는 실망스러웠다. 몇몇 다른 회사들도 몇 년 동안 매트릭스 녹음을 발행했다. 쿼드라포닉 녹음은 레너드 번스타인과 피에르 불레즈를 포함한 클래식 아티스트들과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 빌리 조엘, 핑크 플로이드, 조니 캐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레이 코니프, 카를로스 산타나, 허비 행콕, 클래시, 블루 외이스터 컬트와 같은 인기 아티스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컬럼비아는 심지어 쿼드라포닉으로 된 퍼니 걸의 영화 버전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발매했다. 이러한 녹음 중 많은 것들이 나중에 리마스터링되어 CD에 있는 돌비 서라운드 사운드로 발매되었다.

예트니코프가 사장이 되었다?

1975년, 월터 예트니코프는 컬럼비아 레코드사의 사장으로 승진했고, 공석이었던 CBS 레코드 인터내셔널의 사장 자리는 딕 애셔에 의해 채워졌다. 이 시점에서, 음악 역사학자 프레데릭 대넌에 따르면, 수줍음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예트니코프는 그의 성격을 변형시키기 시작했고, (애셔의 말에 따르면) "야성적이고 위협적이고, 거칠고, 무엇보다도 매우 시끄럽다"고 한다. 대넌이 보기에, 예트니코프는 그의 선천적으로 민감하고 관대한 성격에 대해 과도하게 보상했을 것이고, 그가 음치였기 때문에 "음반에 귀를 기울이고 현재의 유행과 예술가들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희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신 "색채로운 캐릭터"가 되기로 결심했다. 예트니코프는 곧 그의 난폭한 성질과 규칙적인 짜증으로 악명이 높아졌는데, 그는 유리그릇을 산산조각 내고, 이디시어와 바니야드(barnyard)라는 수식어를 섞어 뱉었고, 사람들을 CBS 건물에서 물리적으로 쫓아냈었다고 한다.

딕 애셔 vs 더 네트워크

CBS 레코드는 인기 있는 음악가 명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필라델피아 인터내셔널 레코드, 블루 스카이 레코드, 아이슬리 브라더스 티넥 레코드, 모뉴먼트 레코드 (1971년부터 1976년까지)를 배급했다. 그러나 음악 산업은 재정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총 매출은 11% 하락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큰 폭으로 하락했다. 1979년에 CBS는 세전 수입 5,100만 달러와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그 레이블은 수백 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CEO 존 백은 딕 애셔를 사업 담당 부사장에서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비용 절감과 수익 회복을 책임지고 있는 애셔는 그 역할을 맡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그는 예트니코프가 그의 승진을 원망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백은 애셔의 경험에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1972년 애셔는 영국 CBS 방송국을 손실에서 수익으로 전환시켰다. 백은 그를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겼고, 회사에 대한 애셔의 충성심에 호소했다. CBS의 직원들은 애셔가 지루하고 중간 상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리무진과 식당 같은 특전과 비용을 줄였다. 예트니코프와 그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애셔는 라디오 방송국 프로그램 책임자들에게 새로운 싱글을 홍보하기 위해 지불되는 독립적인 에이전트들을 고용하는 데 드는 막대한 그리고 급속하게 증가하는 비용에 대해 점점 더 걱정하게 되었다. 음반사들은 "Indies"를 여러 해 동안 새로운 음반들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해 왔지만, 그가 체계적으로 CBS 레코드의 비용을 조사하면서 애셔는 이러한 독립적인 프로모션 담당자들을 고용하는 것이 이제 CBS에서만 연간 천만 달러나 되는 비용이 든다는 것을 알고 실망했다. 애셔가 1972년 CBS의 영국 사업부를 인수했을 때, 프리랜서 프로모션 담당자는 주당 100달러만 청구할 수 있었지만, 1979년까지 미국 최고의 독립적인 프로모션 담당자들은 스스로를 "The Network"로 알려진 느슨한 공동체로 조직화했고, 그들의 수수료는 이제 연간 수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음악 역사학자 프레데릭 대넌은 1980년까지 주요 레이블들이 "Network" 프로모션 담당자들에게 곡당 10만 달러에서 30만 달러의 비용을 지불했고, 그것은 연간 8천만 달러나 되는 비용을 업계 전체에 지불했다고 추정했다.

이 기간 동안 컬럼비아는 핑크 플로이드 싱글 "Another Brick in the Wall"로 탑 40 히트곡을 기록했고, 그 모 음반인 The Wall은 1980년 초 빌보드 LP 차트에서 4개월 동안 1위를 했지만, 업계에서 딕 애셔가 사실은 핑크 플로이드의 새 싱글을 홍보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더 네트워크의 해로운 영향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한 비밀스러운 실험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과는 즉각적이고 매우 골치 아픈 것이었는데, 이 그룹이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스포츠 아레나에서 정교한 The Wall Tour를 통해 처음 7번의 콘서트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앤젤레스의 주요 라디오 방송국 중 어느 곳도 이 음반을 프로그래밍하지 않았고, 극찬을 받고 매진된 군중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애셔는 이미 더 네트워크의 성장하는 힘과 그것이 레이블의 통제 밖에서 운영된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했지만, 그는 더 네트워크가 사실상 거대한 갈취 라켓이었고, 그 운영이 조직 범죄와 잘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실망했다. 예트니코프는 이 우려를 단호하게 "인디"를 옹호하고 그것들을 "멘치"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딕 애셔는 이제 더 네트워크의 진정한 힘은 라디오가 음반을 픽업하는 것을 막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경험 많은 미디어 변호사이자 충실한 CBS 직원으로서, 그는 이것이 CBS 회사 전체를 집어삼킬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페이올라 스캔들이 될 수 있다는 것과,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불법에 연루되었음이 밝혀지면 CBS의 가장 중요한 방송 허가를 취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차렸다.


2.9. 1980년대: 소니[편집]


1980년까지 미국 컬럼비아의 구조는 그대로였으며, 이 때는 고전/브로드웨이 단위인 컬럼비아 마스터웍스 레코드에서 분리되어 CBS 마스터웍스 레코드로 분리되었다.

1988년 컬럼비아 레코드 사업부를 포함한 CBS 레코드 그룹이 소니에 인수되면서 1991년 모 사업부인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가 다시 이름을 올렸다. 소니는 CBS 레코드 명칭에 대한 임시 라이선스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70년대 초부터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EMI로부터 미국, 캐나다, 스페인(BMG 소유 상표) 및 일본(닛폰 컬럼비아) 밖의 컬럼비아 상표(컬럼비아 그래폰)에 대한 권리를 취득하였다. 1991년 1월 1일, 스페인(2004년 소니가 BMG와 합작 회사를 설립하여 권리를 취득한 곳)과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적으로 CBS 레코드 레이블은 공식적으로 컬럼비아 레코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CBS 마스터웍스 레코드는 소니 클래식 레코드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6년 12월, CBS 코퍼레이션은 텔레비전 부동산과 밀접하게 연결된 새로운 마이너 레이블(우연히 새로운 CBS 레코드는 현재 또 다른 소니 뮤직 사업부인 RED Distribution에 의해 유통되고 있다)을 위해 CBS 레코드 이름을 부활시켰다.


2.10. 1990년대 ~ 현재[편집]


컬럼비아 레코드는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최상위 자회사 레이블로 남아있다. 2009년 소니 뮤직의 재통합 기간 동안 컬럼비아는 에픽 레코드 자매와 제휴하여 컬럼비아/에픽 레이블 그룹을 결성하고 각인으로 운영되었다. 2011년 7월, 추가적인 기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에픽이 자이브 레코드로부터 다수의 아티스트를 영입하면서 콜롬비아/에픽 그룹으로부터 분리되었다.

2013년 3월 현재, 컬럼비아 레코드에는 로렌 자우레귀, 로비 윌리엄스, 캘빈 해리스, 다프트 펑크 등 90명의 아티스트가 소속되어 있다.

2018년 1월 2일, Ron Perry가 컬럼비아 레코드의 회장 겸 CEO로 선임되었다. 2018년 9월, Jennifer Mallory가 EVP 겸 총괄 매니저로 선임되었다.


3. 소속 아티스트들[편집]


※ 다른 음반사와 공동 소속인 아티스트는 ♤, 사망한 아티스트는 ★, 해체된 그룹은 ◎ 표시

※ 혼란 방지를 위해 미국 배급한정인 경우는 제외합니다.

※ 서술상의 어려움이 없는 한 A ~Z > ㄱ~ㄷ 순으로 기재합니다.

  • AC/DC
  • Adele
  • Arizona Zervas
  • Au/Ra
  • blink-182
  • Diplo
  • DJ Snake
  • Dominic Fike
  • HAIM
  • IVE
  • Kaskade
  • LCD 사운드시스템
  • Lil Nas X
  • Lil Peep
  • LSD[1]
  • Nelly
  • N.E.R.D
  • OMI
  • The Internet
  • The Neighbourhood
  • TREASURE
  • Tyler, The Creator
  • 그레이스 밴더월
  • 글렌 굴드
  • 노아 사이러스
  • 더 스크립트
  • 로비 윌리엄스
  • 리틀 믹스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밥 딜런
  • 비욘세
  • 빌리 조엘
  • 다프트 펑크
  • 데이비드 보위
  • 데스티니스 차일드
  • 마데온
  • 마빈 게이
  • 맥스웰
  • 마일리 사이러스[2]
  • 셀린 디옹
  • 솔란지 놀스
  • 수잔 보일
  • 시스템 오브 어 다운
  • 원 디렉션[3]
  • 장 미셸 자르[6]
  • 제임스 아서
  • 존 레전드
  • 존 메이어
  • 체인스모커스[7]
  • 카밀로 에체베리
  • 토니 베넷
  • 트레인
  • 캘빈 해리스[8]
  • 패티 스미스
  • 퍼렐 윌리엄스
  • 핑크 플로이드
  • 해리 스타일스
  • 호지어
[1] Labrinth, Sia, Diplo의 합작 프로젝트 그룹.[2] 본래 RCA 소속이었으나 2021년 이적했다.[3] Simco. James Beckham 공동소속.[4] Masterdisk. Oxygene 7-13의 마스터링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다.[5] Yakuda Audio.[6] 2015년작 Electronica 1 The Time Machine 이후. 다만 1997년작 Oxygene 7-13부터 에픽 레코드를 통해 그의 앨범이 발매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 발표한 음반들이 미국 뉴욕[4]에서 리마스터링을 거쳐서 재발매되기도 했다. 2014년~2015년에는 Oxygene부터 Chronologie까지의 앨범이 프랑스 파리[5]에서 새로 리마스터링되어서 에픽 레코드가 아닌 소니뮤직을 통해 다시 한번 재발매되기도 했는데, 이들 두번째 재발매반은 지금도 판매중.[7] Distrupt Records와 공동소속.[8] Fly Records와 공동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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