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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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ama
칼라마
파일:Escudo_de_Calama.svg
문양
국가
칠레

안토파가스타주
Región de Antofagasta
면적
15,596.9km²
인구
147,886명
(2012년 기준)
시간대
UTC -4
서머타임: UTC -3
고도
2,260m


Calama.







파일:calama.jpg
파일:av_medium__av_81093.jpg

1. 개요
2. 어원
3. 역사
3.1.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절
3.2. 스페인 식민지 시절
3.3. 볼리비아 공화국 시절
3.4. 칠레 공화국 시절
4. 지리와 기후
5. 산악
6. 인구 통계
7. 행정
8. 교통




1. 개요[편집]


칼라마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의 도시이다. 엘로아 주의 주도이며, 안토파가스타 주의 일부이다. 칼라마는 연평균 강수량이 5mm에 불과한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도시 중 하나다. 칠레에서 가장 긴 로아 강이 도시를 통과한다. 인구는 147,886명(2012년 기준)이다.

이 코뮌은 또한 에스타시온 산페드로, 토콘체, 큐포의 케추아 공동체와 타이라, 콘치비에호, 라사나, 샌프란시스코 데 추우추, 아이키나투리, 카스파나의 리칸안타이 공동체를 포함한다.

2003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구리 광산이었던 추키카마타 마을이 환경적인 이유와 광산 확장에 따른 침해를 이유로 해체되었다. 추키카마타 주민들은 이후 회사 소유의 주거지에서 벗어나 스스로 주택을 구하기 위해 칼라마로 이주했다.


2. 어원[편집]


'칼라마'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있지만, 두 가지 주요 기록은 엘로아 주에 거주하는 민족인 리칸안타이족이 과거에 사용했던 쿤자어에서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헥터 푸마리노 소토는 "칼라마"가 "물 한가운데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쿤자어 "Ckara-ama"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칼라마의 도시 부지와 주변의 오아시스는 양쪽으로 로아 강이, 반대쪽으로 비옥한 평원과 늪이 있어 사막 한가운데에 완전히 물로 둘러싸인 섬처럼 보였다.

한편, 에밀리오 바세(Emilio Va,se)는 칼라마가 "파리지가 많이 있는 곳"이라는 뜻의 쿤자 단어 "Ckolama"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서쪽 늪지대 한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에 사는 그런 새가 풍부하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3. 역사[편집]




3.1.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절[편집]



칼라마의 역사와 관련된 정확한 증거는 암각화와 얄킨차 동굴, 토파테르 굴파스(콜롬비아 이전 도시 동쪽에 있는 공동묘지), 구리 미라, 추키카마타의 다른 유적들을 포함한다.

카미노 델 잉카(세로방향)와 알티플라노 해안을 가로지르는 항로의 교차점에서, 칼라마는 아타카마 데스포블라도의 주요 피난처가 되었다. 옥수수와 알팔파를 재배하기 위한 그들의 광대한 땅은 차스키의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잉카에 공물을 바칠 수 있는 높은 능력을 입증한다. 실제로 쿠스코에서 돌아온 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칼라마 피난처를 지날 때, 원주민들은 그에게 구리 편자를 주었는데, 이 편자는 잉카인들이 정복한 마을들이 사용하는 신비로운 잉카 기술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기술의 과학은 아직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러한 말굽의 존재는 프리히스패닉 시대에 잉카인들의 강력한 영향력을 더욱 시사한다.


3.2. 스페인 식민지 시절[편집]


스페인의 식민지화는 분명히 약간의 변화를 일으켰지만, 적대적인 기후는 더 큰 통제권을 확립하는 것을 방해했다. 이러한 변화는 포토시 은과 살타, 투쿠만의 가축 농장의 퇴적물과 함께 사막을 건너 코비야 항구로 가는 무역로의 통제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 의미에서 칼라마는 상업 노선 제공의 요충지로서 지속되었다. 18세기에 부르봉 개혁과 함께. 칼라마는 18세기 칠레의 코피아포에 의존한 대장군 지도에 포함되었다.


3.3. 볼리비아 공화국 시절[편집]


볼리비아의 독립 선언 이후(1825년 8월 6일) 점차적으로 영토의 행정에 변화가 생기면서 칼라마는 1829년 리토랄 주(Department of Litoral, 1829년)에 속하게 되었고, 아타카마 주는 코비야 주(Department of Lamary la Provincia de Atacama)에 속하게 되었다. 칼라마는 1832년부터 코비야와 살타, 포토시 사이를 오가는 아타카마 주의 중요한 마을이었다. 1840년, 주도는 치우추에서 칼라마로 이전하면서 통신 붐이 일었다.

칠레볼리비아의 국경 분쟁은 칼라마 주나 아타카마 주 어느 쪽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 큰 논쟁은 중앙 대초원과 해안에서 집중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풍부한 은 퇴적물, 솔트페터, 그리고 구아노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국경 분쟁으로 이어진 모호함은 중부 평야와 아타카마 해안의 소유였다. 1879년 2월 14일 아침 에밀리오 소토마요르 바에자 대령이 지휘하는 칠레군이 안토파가스타 항을 침공했을 때 환경은 긴장되었다. 이후 볼리비아는 3월 1일 칠레에 전쟁을 선포했다.


3.4. 칠레 공화국 시절[편집]


그날 이후 정권의 변화가 매우 깊다. 볼리비아의 2° 행정 중심지의 일부이며 칠레 행정부에 의해 4° 행정 구역 중 하나로 반환되었다. 1888년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의 통치 하에 칼라마는 3° 행정 중심지로 돌아와 10월 13일에 시로 취임했다. 1886년, 칼라마는 안토파가스타-볼리비아 철도의 철도역으로 선택되었고, 칼라마를 통한 선적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4. 지리와 기후[편집]


칼라마는 사막과 안데스 산맥이라는 두 개의 별개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 사막 기후(BWk)는 연간 강수량이 35mm(1.4인치)를 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연평균 기온은 11.2 °C이고, 겨울에는 하루 평균 최고기온이 20 °C 이상, 여름에는 30 °C 이상이다. 아침에는 약한 동풍이 불고 오후에는 강한 서풍이 분다. 그곳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햇빛이 잘 드는 곳으로 여겨진다.


5. 산악[편집]


칼라마의 서쪽 경계는 칼라마 북쪽의 로아 강 기슭에 있는 산기슭의 봉우리들로 표시되어 있는데, 북쪽에서 남쪽으로 시에라 모레노, 세로스 추키카마타 세로스 데 몬테크리스토라는 이름이 많다. 세로 포키스(Cerro Poquis, 4,589m)는 추키카마타 북쪽의 최대 고도이다. 그 남쪽에는 코르디예라 데 도미코 구릉이 있는데, 이 구릉은 시에라 데 리몬 베르데와 코르동 바로스 아라나의 이름을 가진 남쪽 경계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로아 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통과하면 칼라마와 오아시스가 있는 평원이 남는다.


6. 인구 통계[편집]


2002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칼라마의 면적은 15,596.9km, 인구는 138,402명(남성 70,832명, 여성 67,570명)이다. 이 중 13만6600명(98.7%), 농촌 1802명(1.3%)이 거주했다. 인구는 1992년과 2002년 사이에 3.6%(16,595명) 증가했다.


7. 행정[편집]


칼라마는 칠레의 3급 행정 구역으로, 4년마다 직접 선출되는 알칼데가 이끄는 지방 자치체가 관할한다. 2008-2012 알칼데는 에스테반 벨라스케스 누녜스이다.

칠레의 선거구 내에서 칼라마는 제3선거구(토코필라, 마리아 엘레나, 올라게, 산페드로 데 아타카마와 함께)의 마르코스 에스피노사(PRSD)와 펠리페 워드(UDI)에 의해 하원의원에 선출된다. 상원은 카를로스 칸테로 오헤다(인도)와 호세 안토니오 고메즈 우루티아(PSD)가 제2선거구(안토파가스타 주)의 일부이다.


8. 교통[편집]


칼라마는 엘로아 공항이 운영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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