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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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말론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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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88-89 · 1989-90 · 1990-91 · 1991-92 · 1992-93 · 1993-94 · 1994-95 · 1995-96 · 1996-97
· 1997-98 · 1998-99
2nd : 1987-88 · 1999-2000
3rd : 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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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t : 1996-97 · 1997-98 · 1998-99
2nd : 198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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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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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말론
헌액 연도
2010년

유타 재즈 등번호 32번
존 브라운
(1979)

칼 말론
(1985~2003)


영구 결번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11번
조 크리스핀
(2001)

칼 말론
(2003~2004)


데빈 그린
(2005~2006)



유타 재즈 No. 32
칼 앤서니 말론
Karl Anthony Malone

출생
1963년 7월 24일 (60세)
루이지애나주 서머필드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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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출신학교
루이지애나 공과대학교
신장
206cm (6' 9")
체중
117kg (259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드래프트
1985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3순위
유타 재즈 지명

소속 팀
유타 재즈 (1985~2003)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3~2004)
지도자
루이지애나 공과대학교 코치 (2007~2011)
등번호
32번 - 유타
11번 - 레이커스

1. 개요
2. 커리어
2.1. NBA 데뷔 이전
2.2. NBA 데뷔 이후
3. 수상 내역
4. 플레이 스타일
5. 더티 플레이어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미국의 농구인. 18년간 유타 재즈에 몸담았으며, 통산 득점 36,928점으로 역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우편배달부(Mailman)[1]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2. 커리어[편집]



2.1. NBA 데뷔 이전[편집]


1963년 루이지애나 주 서머필드에서 아버지 셰드릭 헤이 말론(1920~1977)과 어머니 셜리 앤 잭슨(1939~2003) 사이에서 9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칼이 3세 때 다른 여자와 외도하며 따로 결혼했다가 1977년에 자살했고, 어릴 적 그는 친모 밑에서 자라면서 농장에서 일하는 한편, 벌목과 낚시 등을 하며 자랐다.

청소년기 때는 서머필드 고등학교에 다니며 1979년부터 3년 연속 주내 C클래스 대회에서 우승시키는 데 공헌했고, 그의 특출난 실력을 눈여겨 본 아칸소 대학교 측이 점찍었지만 칼은 집과 비교적 가까운 루이지애나 공과대학교를 택했다. 그러나 학업 성적이 저조해서 2학년 때에야 농구부에 합류했고, 앤디 루소[2] 감독의 지도 하에 1982-83 시즌 당시 윌리 시몬스[3]와 함께 탁월한 덩크 실력을 선보여 '덩킨 독스(Dunkin' Dogs)'라는 애칭을 얻은 바 있고, 1984년과 1985년 NCAA 전국대회 토너먼트에 각각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다. 특히 1985년 전국대회에서는 16강까지 진출시키며 올 아메리칸 세컨드 팀에도 뽑혔다.


2.2. NBA 데뷔 이후[편집]



2.2.1. 유타 재즈[편집]


그해 드래프트에서 전체 13순위로 유타 재즈에 지명돼[4] 루키 시즌부터 주전을 맡으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년차 시즌에는 20-10을 달성하는 리그의 엘리트 파워 포워드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 후에는 약점이었던 자유투도 향상시키면서 막기가 까다로운 선수가 되었다.

NBA에서 16-17 시즌 러셀 웨스트브룩이 다시 기록하기 전까지 30득점-10리바운드 이상의 시즌스탯을 기록한 마지막 선수로써(89-90 시즌 31.0득점 11.1리바운드) 득점력에 있어서는 역대 NBA 파워 포워드 중에서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단 플레이오프에서는 정규시즌 대비 득점과 효율이 다소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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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스탯. 무려 19 시즌을 NBA에서 뛰면서 커리어 평균 25-10의 위엄.

존 스탁턴과의 콤비 플레이는 지금도 올드팬들에게 많이 기억되는 부분.[6] 둘의 픽앤롤과 픽앤팝은 정말로 알고도 못막는 수준의 무시무시한 전술이었다. 당시 유타는 운동능력은 대체적으로 떨어지는 대신 농구에 대한 이해도와 볼이 없을때 움직임이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유타는 이를 바탕으로 한 수준 높은 모션 오펜스, 그리고 스탁턴과 말론의 투맨게임이 필살기인 팀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스크린플레이와 모션 오펜스가 있긴 했다. 애초에 모션 오펜스는 1934년부터 36년간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를 이끈 전설적인 대학 감독인 헨리 아이바(1904~1993)가 도입했다고 많이 알려진 개념이고,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게 7,80년대에 대학농구계를 주름잡았던 인디애나 대학교의 밥 나이트였다. 또한 끊임없이 볼없는 선수들이 움직이고 스크린을 걸고, 백도어 컷 등을 하는 전술은 이미 프린스턴 대학이 60년대 이전부터 이용하던 개념이다.

NBA에서 모션 오펜스를 적게 이용하는 이유는 선수 개개인의 운동능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모션 오펜스나 투맨게임을 잘 쓰지 않는 팀이나 지역 방어를 아예 안 쓰는 팀도 많다.[7][8] 르브론 제임스를 보유한 팀이 모션 오펜스를 쓴 적이 있던가? 예나 지금이나 모션 오펜스는 개개인의 운동능력보다 팀전술에 의존하는 팀들이 많이 쓰는 전술이다.

기본적으로 당시 팀들이 유타 재즈의 2대2 플레이를 못 막은건 그들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팀원들 모두가 득점욕심이 적고, 농구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고 패스/슛이 포지션 대비 좋은 편이었던 (예외는 센터 오스터텍 정도로, 오스터텍은 수비 스페셜리스트였다) 유타가 펼치는 모션 오펜스는 매우 위력적이었다.

슛/골밑득점이 모두 뛰어났고 스크린 능력이 역대급이었던 칼 말론과, 마찬가지로 골밑돌파/슛/패스가 모두 가능한 존 스탁턴이 펼치는 픽앤롤/픽앤팝은 뻔히 하는 걸 알고도 막기 어려웠다. 두 선수의 옵션이 다양했고 스탁턴은 실수를 거의 저지르지 않는 선수였기 때문에 상대 빅맨이 스탁턴을 압박해도 그는 교묘하게 말론에게 공을 빼내줬고 이때쯤 되면 말론은 특유의 빠른 발을 이용해 골밑까지 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상대 빅맨이 말론의 골밑침투 능력을 견제해 골밑으로 간다면? 말론은 중거리슛을 간단히 넣었다.[9] 그렇다고 말론만 견제했다간 스탁턴 본인이 외곽에서 슛을 쏘거나 골밑으로 침투하곤 했다. [10] 팬들은 칼 말론의 꾸준한 플레이를 빗대어 그에게 우편배달부[11]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본인도 마음에 들어하는 별명이었다고.

전성기가 정말로 길었던 존 스탁턴과 함께 NBA를 대표하는 철인 중 한명이였다. 11년 연속 All-NBA First Team은 수 많은 NBA 선수들중에서 오직 말론만 기록했었으나 르브론 제임스가 2017년 기준으로 동일한 기록을 달성했다. 현역 생활을 한 19 시즌 모두 플레이오프 진출했으며, 2002년 11월 3일 나이 39살 100일 근처에서 데뷔 이래 최초로 경기에서 무득점하였다.

1992년과 1996년 올림픽에서 미국농구대표팀 드림팀 1, 3의 멤버로 두개의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 두 번의 올림픽 때도 존 스탁던과 같이 뛰었다.

하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97년도98년도에는 팀을 파이널에 올려놓았으나 상대팀은 막강전력을 자랑하는 시카고 불스였고 이들은 분전했지만 우승은 하지 못했다.[12] 2003년 존 스탁턴은 미련없이 은퇴를 선언했지만, 정말 우승 한번 해보는게 소원이었던 칼 말론은 18년간 정든 유타 재즈를 떠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150만달러라는 헐값에 계약했다. 전년도 연봉으로 무려 1900만달러를 받던 말론이 얼마나 우승을 하고 싶었는지 알수 있는 대목.


2.2.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편집]


그러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가 사용하던 전술인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적응하느라 고생했고, 이제 좀 적응을 하는가 싶더니 부상크리를 당하면서 시즌 절반가량을 개점휴업해야만 했다. 하지만 유타에서의 1옵션이 아닌 블루워커로서 리바운드와 수비에 주력하는 스타일로 경기 스타일을 바꾸면서 최고령 트리플 더블을 달성하는 등 40세의 나이를 고려하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줬으며 플레이오프에서도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케빈 가넷팀 던컨을 상대로 좋은 수비를 보여주면서 팀은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이젠 우승을 하는가 싶더니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일격을 당하면서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말론은 04-05 시즌에도 선수생활을 하려고 했다. 부상을 당해 재활을 하던 중이었지만 많은 팀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부상회복이 더딘 탓이었을까. 선수생활 지속이냐 은퇴냐를 두고 고민하던 칼 말론은 결국 기자회견을 열고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 때 자신이 유타 재즈 시절 달던 등번호 32번이 델타 센터 천장에 오르는 걸 희망했다. "지금 사용하는 유니폼이 아닌 옛날 유니폼으로 걸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그리고 그 바람은 이루어졌다.

은퇴 후에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가 2010년에 명예의 전당에 개인자격과 1992년 드림팀1의 멤버 자격으로 헌액되는 감격도 누렸다.


3. 수상 내역[편집]


수상 내역
파일:NBA 로고.svg NBA 정규시즌 MVP 2회 (1997, 1999)
파일:NBA 로고.svg 올-NBA 퍼스트 팀 11회 (1989-1999)
파일:NBA-Allstar2021.pngNBA 올스타 14회 (1988-1998, 2000-2002)
파일:NBA-Allstar2021.pngNBA 올스타전 MVP 2회 (1989, 1993)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세컨드 팀 2회 (1988, 2000)
파일:NBA 로고.svg 올-NBA 서드 팀 (2001)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3회 (1997-1999)
파일:NBA 로고.svg NBA 올-디펜시브 세컨드 팀 (1988)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6)
파일:HOF-Logo.png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0)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파일:오륜기(여백X).svg 1996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


4. 플레이 스타일[편집]


역대급 공격력과 준수한 수비력, 리바운드, 패스능력을 지닌 선수였다. 그중에서도 말론의 가장 큰 장점은 단연 득점 능력. 러셀 웨스트브룩이 2017년에 시즌 평균 30점 10리바운드 10어시스트를 넘기는 미친 스탯을 기록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시즌 평균 30-10을 기록한(89-90시즌에 기록) 선수였으며, 최전성기 때 평균 31점까지 올렸던 특급 득점원이었다. 비록 마이클 조던과 전성기가 겹치는 바람에 한번도 득점왕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득점 2위만 네 번 기록하기도 했다.

공격에서 말론의 가장 큰 장점은 중거리슛과 빠른 발, 그리고 득점하기 쉬운 위치를 선점하는 감각이었다. 또한 빅맨치고 키가 크지 않고 점프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진 않은 대신 손끝 감각이 뛰어나 골밑 마무리 능력이 대단히 뛰어났다. 실제로 말론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30대 초반부터 덩크를 자제하고 레이업으로 주로 마무리를 했는데, 이는 말론이 오랜 커리어를 유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는 순간움직임이 그렇게 빠르진 않았지만 강한 체력으로 누구보다 많은 활동량을 자랑했고, 높은 농구이해도를 기반으로 수비의 빈틈을 노렸다. 이 과정에서 그의 강철같은 몸과 강한 힘도 도움이 되었는데, 워낙에 몸이 두텁다보니 딱히 손으로 미는 등 반칙을 하지 않아도 수비수가 알아서 튕겨나갔다.[13] 그가 역대 최고의 시야&패스능력을 지난 존 스탁턴의 동료였다는 것도 행운이었는데, 그가 이렇게 좋은 위치를 잡으면 스탁턴은 반드시 놓치지 않고 칼같이 정확한 패스를 해주곤 했다. 물론 스탁턴 입장에서도 질 좋은 패스를 반드시 득점으로 연결하는 말론같은 동료가 있다는게 큰 행운이었다.

또한 의외로 간과되는 능력이 그의 주력이었다. 그는 발이 엄청나게 빠른 선수는 아니었지만, 코트왕복능력은 역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14] 이를 바탕으로 그는 파워 포워드임에도 속공 때 앞선에서 열심히 달려서 득점으로 마무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말론의 특징은 평균 30점 언저리에서 노는 득점원치고 특이하게 1대1 공격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의 포스트업 플레이는 하이라이트 영상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다양하고 강력했다. 당시의 빅맨들이 대부분 등진상태로 패스공급을 받아 플레이를 이어나갔는데 이러한 플레이에서도 말론은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가서 페이더웨이나 스핀무브로 상대를 제쳐서 레이업 등도 그의 시그니쳐 무브였다. 등진상태로 골밑으로 들어가 스탁턴이 넣어준 공을 빠르게 스핀무브로 처리하는 모습은 일품이었다. 물론 위에 언급됐다시피 이렇게 1대1로 하는 플레이의 빈도수가 팀플레이보다 훨씬 적었다. 자신의 장점인 빠른 발과 위치 선정을 최대로 활용했던 선수. 파워풀하고 화려한 플레이 위주로 편집된 하일라이트 영상을 위주로 보면 오해를 할 수가 있는데, 분명 말론의 포스트업플레이가 떨어지지 않지만 실제 풀 경기로 보면 말론의 주득점루트는 패스를 받아서 점퍼 or 포스트업 후 페이더웨이고 힘으로 밀고 들어가는 플레이는 주무기라고 할만큼 빈도수가 높진 않았다.

90년대 중반에 점퍼를 장착한 후 그의 주 공격루트는 공없이 골밑에 침투해 패스를 받아 골밑슛을 하거나 픽앤롤 이후 패스받아 레이업, 픽앤팝 이후 패스받아 중거리슛, 1대1의 주옵션으로는 포스트업을 하다 페이더웨이슛이었다.[15] 실제로 그가 커리어하이인 61점을 기록했던 1990년 밀워키 벅스전을 봐도 1대1보다는 패스를 받아 넣는 득점이 많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16]

그는 역대 최고의 스크리너 중 하나였고 많은 득점을 픽앤롤&픽앤팝으로 했다. 말론은 큰 덩치와 강한 힘, 기민한 몸동작과 탁월한 농구감각을 기반으로 스크린을 거는데 굉장히 능했다. 게다가 스크린에 걸린 수비수를 슬쩍 잡아당기는 등 치사한 플레이에도 능해 그의 스크린에 걸린 PG수비수는 수비수는 거의 무력화되곤 했다. 상대방이 스위치를 해 빅맨 수비수가 스탁턴을 따라간다면, 말론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상대 PG가 자기를 막는걸 이용해 손쉽게 득점을 했다.

말론은 젊은 시절부터 중거리슛이 좋은 편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완성도를 높여갔다. 반면 골밑에서 덩크로 찍어버리는 야수같은 플레이는 80년대 후반 이후로 거의 볼 수 없게 됐다.

한편 이렇게 1대1보다 팀공격에 의한 득점이 많다보니 정작 중요할 때 한방은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농구에서 막판에 시간이 거의 안 남았을때 팀플레이를 하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클러치슛은 보통 1대1능력이 강한 에이스들이 맡는게 대부분이다. 그런데 말론은 혼자 힘으로 수비를 떼어내는 능력이 평이한 편이라 이 경우 스탁턴이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말론 자체가 큰 경기에서 스탯이 다소 떨어지는 등 약한 모습을 보인 적도 많았다. 또한 다른 에이스들처럼 팀공격이 부진할 때 본인이 원맨쇼로 활로를 뚫어주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이 역할도 97년 서부결승 6차전처럼 스탁턴이 하는 경우가 많았다.

리바운드의 경우 중거리슛 비중이 높은 선수이다 보니 공격 리바운드수치는 그렇게 높진 않았다. 파워 포워드로서 지극히 평범한 신장과 팔길이, 점프력이라 높이 자체가 그렇게 높진 않아서 리바운드를 20개 이상씩 쓸어담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사이즈가 워낙 좋다보니 박스아웃능력이 대단히 좋아 [17] 리바운드를 일정수치 이상 꾸준히 잡아주었다.[18][19]

위에 언급된 높이 부족으로 골대를 수호하는 rim protecting 능력이 부족하다보니 의외로 과소평가받는 수비수다. 커리어 평균 0.8개의 블락은 가드인 마이클 조던과 같은 수치다.[20] 실제로 블락에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는 선수로 점프력이 비교적 높았던 초창기에도 블락은 1개를 밑돌았다. 그러나 손이 상당히 빠른 선수로 빅맨치고 스틸에 능하였다. 커리어 평균 1.4개라는 스틸은 파워 포워드로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버티는 힘이 좋아서 상대 빅맨들을 준수하게 막아냈다. 그의 주무기는 포스트업을 하는 빅맨을 상대로 버티다가 기습적으로 손을 넣어 공을 슥 쳐내는 것이었다. 저 몸으로 스피드도 좋아서 스위치 된 상황도 제법 잘 막아냈다. 그 결과 all 디펜시브팀 세컨드 팀에 한 차례(1988년), 퍼스트팀에는 3차례나 뽑혔다. 특이하게 수비면에서 전성기가 30대 중반에 온 선수로 평가받고, 위에 언급됐다시피 애초에 운동능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선수라 오히려 기술이 원숙해진 이후에 더 뛰어난 수비력을 보였다. 실제로 만 40세가 넘은 04년 플레이오프에서 팀 던컨, 케빈 가넷이란 당대 최고의 파워 포워드들을 상대로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30대 중반 이전의 젊은 시절에 수비가 안 좋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신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이미 1992년에 최전성기였다. 수비력의 경우 갑자기 프로 12년차에 수비퍼스트팀에 오른 걸 보고 "수비력을 각성했나보다"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말론은 88년에 이미 수비세컨팀에 오른 선수이다. 말론은 항상 뛰어난 수비수였지만 최정상급엔 한끗 모자라는 선수였는데, 올디펜스팀의 단골멤버이던 데니스 로드맨이 나이가 들어 디펜스 팀에서 탈락하자 그 바로 밑 포워드 수비수들 (호레이스 그랜트, 찰스 오클리, P.J. 브라운 등) 중에서 가장 네임밸류가 높았던 말론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말론의 수비는 90년대부터 정평이 나서 일례로 데니스 로드맨은 더티플레이를 말론 상대로 서로간에 쌍으로 시전하며 자강두천했지만 정면대결로는 말론을 만난 파이널에서 시즌 평균 15개를 잡아내던 리바운드가 7~8개 수준으로 급감했다.[21][22]

샤킬 오닐도 힘으로 제압할 수 없던 말론에게 야투율이 떨어지며 큰 곤란을 겪었으며[23] 수비에선 픽앤롤까지 맞아 완전히 농락당하며 단단히 호구 잡혔다. 힘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찰스 바클리와[24] 최정상 기술 센터인 하킴 올라주원 또한 말론과 대결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 무엇보다 말론 수비의 정점은 샌안토니오 스퍼스데이비드 로빈슨, 팀 던컨을 완전히 버로우시킨 것이다. 1994년 시즌 평득 29.8점으로 득점왕이었던 데이비드 로빈슨은 말론과 만난 플옵에서 평득 20점에 그친 반면 말론은 평득 29.3점을 기록하며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침몰시켰다. 1996년 플옵에서는 더 처참해서 로빈슨은 6차전까지 평득 20점도 못 올린 반면 말론은 평득 25점을 기록했다. 1998년 플옵은 팀 던컨까지 샌안토니오에 가세했지만 말론은 평득 25점을 올리며 선전한 반면 던컨은 평득 20점에 로빈슨은 평득 10점대에 불과하며 대패했다. 말론이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옮긴 은퇴 시즌에 전성기에 오른 던컨의 샌안토니오와 다시 04년 플옵에서 맞붙었다. 던컨은 말론에게 제대로 밀리며 인터뷰에서 "가장 피로했던 시리즈"라 언급할 정도였으며 결국 어부샷에 무너지는 바람에 샌안토니오의 두 레전드는 영원히 말론에게 호구가 되었다.[25]
이런 면에서 스퍼스 입장에선 99플레이오프 당시 재즈가 2라운드에서 포틀랜드를 만나 탈락한 것이 천운이었다. 98년 플레이오프에서 재즈는 스퍼스를 4승1패로 이기며 손쉽게 올라갔는데, 말론 입장에서는 로우포스트 위주 플레이를 하는 트윈타워를 중심으로 구성된 샌안토니오가 훨씬 상대하기 수월했다. 반면 블레이저스는 슈퍼스타 한두명이 아니라 여러명의 스타들이 고른 활약을 하는 팀이었고, 특히 당시 전성기를 보내고 있던 아이재아 라이더나 데이먼 스타더마이어같은 가드진은 늙고 사이즈가 작은 유타의 스탁턴과 호너섹이 상대하긴 버거웠다. 반대로 재즈 입장에선 안타까웠던 것이, 이때 재즈는 스퍼스와 함께 37승(단축시즌으로 50경기)으로 NBA1위의 승률이었으나 타이브레이커에서 밀려 3번 시드까지 밀려났기 때문이다.[26]

전체적으로 보면 폭발력보다는 꾸준함으로 위력을 보여주는 선수. 실제로 그의 경기를 보면 화려한 플레이가 없어 정작 볼때는 임팩트를 못 느끼다가 경기가 끝나고 나면 엄청난 누적치에 놀라는 경우가 많다.[27]


5. 더티 플레이어[편집]


뛰어난 선수이긴 하지만 커리어 내내 더티 플레이때문에 말이 많았다. 특히 상대의 밀착수비를 팔꿈치를 휘둘러 떨어뜨리는 비신사적 플레이가 대표적. 사진에서 보면 알겠지만 팔뚝굵기도 장난이 아니어서 맞은 상대는 안드로메다로 날라가 버린다. 피해자들이 그래도 어느 정도 신체적 단련이 잘 된 똑같은 운동선수들이라서 그나마 저 정도이지 저 덩치에 일반인에게 저랬다간 거의 살인미수급이다.


칼 말론의 5대 핵꿈치 사건. 피해자들은 전부 명전에 헌액된 데니스 로드맨, 스티브 내시, 마이클 조던, 데이비드 로빈슨, 아이제아 토마스이다.

1위에 오른 악명높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아이제아 토마스의 경우는 경기중 칼 말론의 보복성 팔꿈치 공격[28]으로 이마 쪽을 40바늘이나 꿰메고 한동안 큰 원수 사이가 되었었다.# 세월이 지나 은퇴후 칼 말론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둘이 화해를 했다는 언급이 있었지만, 그 후 아이제아 토마스가 방송에서 한 발언[29]등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앙금은 남아있다고 봐야 옳다. 방송에 패널로 토마스가 참여했을 경우, 칼 말론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이 팔꿈치 어택 얘기가 나온다. 말론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과격한 반응을 보인 아이제아에게 "아이제아의 오래된 상처가 쑤시고 있다!!!"라고 레지 밀러가 드립을 날리기도 했다.

2위의 데이비드 로빈슨은 하이라이트로 보면 이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메타 샌디포드아테스트제임스 하든후려깐것 처럼 대놓고 머리에 직격한다.# 로빈슨은 맞자마자 쓰러지고 뇌진탕 증세를 일으켜 실려가기도.

3위에 나와있는 1988년 시카고 불스전에서 마이클 조던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기도 했는데 이때 옆으로 몇센치만 더 안으로 들어왔다면 안면함몰이 될뻔했다.# 조니 맥도웰허재의 그 장면이 떠오른다[30]

이런 더러운 플레이 덕분에 2004년 ESPN이 선정한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더티 플레이어 2위에 선정되었다.[31] 그래서인지 위에 언급한 위대한 50인 선정발표때 유일하게 야유를 받은 인물이다. 한 명은 샤킬 오닐.[32] 야유의 이유는 확신할 수 없으나 팔꿈치 사용이 주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케빈 가넷같은 더티플레이어보다도[33] 말론이 더욱 악명이 높은 이유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게 팔꿈치이기 때문이다. 팔꿈치는 00년대에 NBA가 그 고의성과 상관없이 징계가 가능하게 하겠다고 룰을 개정할 정도로 위험한 부위이다. 신체 특성상 팔꿈치를 크게 휘두르면 바로 얼굴에 맞을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위험하다. 점잖기로 유명한 빌 카트라이트도 실수로 휘두른 팔꿈치에 하킴 올라주원을 병원으로 보낸 적이 있다. 그런데 NBA에서 가장 힘이 센 선수 중 하나였던 말론이 고의성이 다분히 있는 팔꿈치를 휘둘러대면 정말 위험하다. 게다가 키가 작은 가드들의 경우, 말론의 팔꿈치에 맞는 위치에 딱 얼굴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말론은 돌파해 들어오는 가드들에게 대놓고 팔꿈치부터 들이대곤 했는데, 이 경우 가속도까지 더해 골절이나 뇌진탕의 위험이 커진다.

덩치와 힘에 어울리지 않게 은근히 헐리웃 액션이나 플라핑이 심한 선수이기도 했다. 98년 파이널 6차전 당시에 보면 백코트할 때 토니 쿠코치가 왼팔로 살짝 밀자 크게 밀쳐진 것처럼 벌러덩 나가떨어진 적도 있는데[34], 그와 라이벌이었던 찰스 바클리는 이를 두고"세상에서 제일 덩치 크고 힘 센 놈이 사방팔방 날아다니고 있다(Biggest, strongest man in the world flying all over the place)"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6.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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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뒤에 장발이 아니라 앞에가 칼 말론이다(...)보다시피 저게 농구선수인지 프로레슬러인지 구분이 안될 근육맨이라 WCW 배쉬 앳 더 비치(1998)에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한 적이 있다. DDP와 함께 태그팀으로 헐크 호건과 데니스 로드먼 팀과 경기를 하기도 했다. 단발성 출연은 아니었고 몇 번 나오기도 했다. 또한 피트니스 영상도 찍었을 정도로 몸 관리가 매우 철저했던 선수이다. 대학 시절부터 근육질의 몸으로 유명했던 선수였는데[35], 프로 초창기부터 꾸준하게 벌크업을 해서 90년대 중반 이후 사진처럼 벌크업된 몸을 완성했다. 워낙에 몸 관리가 생활화된 인물이라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트레이닝을 하는 중인지 50이 훌쩍 넘은 지금도 현역 시절과 거의 차이가 없는 몸과 얼굴을 보유하고 있다. 말론이 딱 만 50세가 됐을 당시 솔트레이크 시티 트리뷴에서 기사를 냈는데[36], 매일 하루에 세시간씩 운동을 한다고 하며, 현역시절과 똑같은 256파운드의 체중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기록은 없지만 수십년간 이어진 습관이 바뀔 리도 없으니.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이 은퇴 후 엄청나게 몸이 불어버린다는 걸 생각하면 대단한 것.[37] 2020년 몸무게를 언급한 기사는 없지만 인터뷰 사진을 보면 수염과 머리가 하얗게 세었음에도 똥배나 군살이 전혀 없는 체형이며, 반팔 소매 밑으로 얼핏 보이는 우람한 팔뚝을 보면 별로 변한 건 없어 보인다. 사실 20년간 격렬히 운동한 프로선수가 은퇴 이후 운동할 이유가 없는데도 하루에 매일 세 시간 씩 운동한다는 건 운동중독이다. 은퇴 후 10년동안 취미로 운동하던 선수가 갑자기 이를 끊을리도 없으니 계속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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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관리 덕인지 나이에 비해 동안이다. 얼굴에 주름이 없고 팽팽하다. 2017년 6월[38] 지미 키멜쇼 악플 읽기 방송에 등장했을 때도 여전한 얼굴로 'X까 난 이런거 안읽음' 하고 나가버렸다. 태평양같은 어깨는 덤.


  • 그의 모습을 본뜬 레고 미니피겨가 레고 스포츠 시리즈 3564 제품으로 출시된 적이 있었다.

  • 그가 27세 때에 결혼한 부인인 케이 말론은 미스 아이다호 출신의 미녀이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 셋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후에 그가 결혼하기 전에 낳은 다른 숨겨진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미지가 엄청나게 실추되었다. 2012년 NFL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공격 라인맨으로 뛰었던 드미트레스 벨(1984년생)이 바로 말론이 20살에 당시 13살이었던 드미트레스의 어머니 글로리아에게서 낳은 숨겨진 아들이었던 것. 하지만 말론은 벨과 부자관계 성립을 거부한 반면, 벨의 어머니가 아닌 그가 17살에 사귄 다른 여자인 보니타 포드와 사이에서 낳은 또다른 아이들인 쌍둥이 남매(1981년생) 데릴 포드와 셰릴 포드와는 부녀관계를 유지하려고 해서 많이 까였다. 더군다나 벨 가족측이 벨의 양육비를 보내달라고 했을때도 거절했다해서 또 까였다. 양육비로 매주 200달러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매몰차게 거절했고, 이후 법원에서 매주 125달러를 보내주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벨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성인이 된 후에야 칼 말론을 처음으로 만났으며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서 말론이 "뭐 이제와서 친한척하기도 그러니까 스스로 알아서 잘 살아라"라고 말했다고 한다상남자. 최근에 들어서는 이 사생아 아들과의 관계가 좋아졌는지 칼 말론이 사냥하러 나갈 때마다 대동하고 다닌다고. 포드 남매와 드미트레스는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유전자는 어디 안가는지, 데릴 포드는 미식축구 선수로, 셰릴 포드는 WNBA 선수로 활동한다고 한다.

  • 가장 흑인문화가 발달한 루이지애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취미 생활은 낚시와 사냥이라고 한다(…). 찰스 바클리의 말에 따르면 흑인의 탈을 쓴 백인 우월주의자라고 평할 정도로 좋아한다고.[39][40] 물론 젊은 시절에 루이지애나에서 살았지 농구선수가 된 이후에는 오랜 기간을 사냥과 낚시하기 딱 좋은 유타 주에서 오래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2018년 현재 Eskamoes라는 디져트 가게와 Arby's 샌드위치 가게, 버거킹 가게도 갖고 있다. 그 외엔 Jiffy Lube라는 카센터 체인과 소유 빌딩의 부동산 임대업을 겸하는 등 사업가로 알찬 삶을 보내는 중.

  • NBA 역사상 가장 유명한 콩라인 중 한 명으로 통산 득점순위 2위, 파워 포워드 랭킹 2위, 준우승만 3회(…)(그 중 마이클 조던에게만 2년 연속 준우승을 당했다), ESPN 선정 최악의 더티플레이어 2위인 선수이다... 여담으로 NBA 콩라인계의 대부인 엘진 베일러란 선수가 있어 그중 에서도 2위.[41]

  • 은근히 중요한 순간에 활약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다. 그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Mailman doesn't deliver on Sundays. (우체부는 일요일에 배달하지 않습니다) 흔해빠진 표현 같지만,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 칼 말론이 자유투를 쏘려는 순간 스카티 피펜이 한 도발이다. 칼 말론의 별명이 우체부이고 그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야 우체부 일요일엔 배달 안하지 않냐?ㅋㅋㅋ라고 도발을 날린 것. 결국 피펜의 도발이 성공하여 칼은 자유투를 실패하였다.[42] 놓친 자유투로 인해 실제로 결승전에서 지기도 했으니... 아이제아 토마스는 그를 가리켜 "약한 연결고리[43]" 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그의 실력이 아니라 중요한 순간에 실책을 종종 범했던 그의 유리 멘탈에 대한 이야기였다.[44] 실제로 말론은 훌륭한 선수로는 자주 언급되지만, "승부사" 라든지 결정적인 순간에 활약하는 선수로서 언급되지는 않는 편이다. 오히려 그의 파트너였던 존 스탁턴이 승부사 혹은 결정적인 순간에 활약하는 선수로 자주 언급되는 편이다.[45]

  • 자유투를 할때 상당히 특이한 버릇이 있는데, 몇 번씩이나 공을 튕기면서 혼잣말로 중얼중얼거린다. NBA에서는 선수가 심판으로부터 공을 받은 이후 10초 안에 쏴야 하기 때문에 보통 공을 받고 두세 번, 많게는 다섯 번 정도 공을 튕기곤 바로 던지는데 칼 말론은 이 중얼중얼거리는 습관 때문에 거의 매번 10초를 꽉 채워서 쏜다. NBA 선수들 정도 되면 (자유투를 정말 못 쏘는 선수들이 아니면) 기술의 달인들이라 자유투같이 기본적인 기술은 심리적인 요소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대부분의 매번 동일한 행동의 루틴을 한다.[46] 실제로 연습 때 자유투 성공률이 80%를 상회하는 드와이트 하워드가 실제 경기에서 잘 못 쏘는 이유도 심리적 요소가 크기 때문. 참고로 말론은 자유투 성공률이 루키 시즌에 5할을 밑돌았으나, 꾸준히 연습해 성공률을 끌어올려 커리어 하이 79.7%, 통산 74.2%를 기록한 선수다. 그러나 이런 실력과 반대로 중요한 순간에 자유투를 실패한 적도 있는데, 앞서 언급된 1997년 파이널 당시 두 개 실패가 대표적이다. 이런 걸 보면 심리적 요소가 역시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 존 스탁턴과 농구만이 아닌 인간적으로도 매우 친한 관계이다. 대부분의 듀오, 동료들이 같은 팀에서 뛸 뿐 오직 비즈니스 관계가 많은 것과 달리 말론과 스탁턴은 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하다. 은퇴 후 둘은 고향으로 돌아가 말론은 루이지애나, 스탁턴은 유타 주와 워싱턴 주에 거주하고 있지만 주기적으로 가족 동반 모임을 가지며 서로의 부인과 가족들끼리 친한 사이다. 서로를 잘 알기에 가족 동반 모임에서 말론의 생일에 스탁턴은 낚싯대를 선물했으며 반대로 스탁턴의 생일에 말론은 골프채를 선물했다. 그리고 둘은 서로의 딸들에게 서로 대부를 서줄 정도이다.[47] 델타 센터에 세워진 서로의 동상 제막식과 명예의 전당 입회식 등에도 같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말론이 아들을 갖고 싶어했을 때 아낌없는 조언을 한 이가 스탁턴이며, 말론이 아들을 얻게 되자 가장 먼저 전화했던 상대도 스탁턴이다. 보기 드물게 공사 구분없이 최상의 인생 파트너라고 할 수 있다.

7. 관련 문서[편집]



[1] 그가 전성기시절 게임당 20점/10리바운드를 매번 기록했는데, 이걸 비가오나 눈이 오나 매일매일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편배달부에 빗대서 붙은 별명.[2] 1948년 5월 27일 일리노이 주 윌멧 출생. 젊은 시절 레이크 포레스트 대학교 재학 4년 간 농구부에서 뛰었으며 졸업 후 1971년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석사까지 땄다. 1976년 파놀라 칼리지에서 농구 감독으로 데뷔하여 1979년 루이지애나 공과대학교로 전근가서 임기 6년 동안 1981-82 시즌을 빼곤 5할 이상의 승률을 보였고, 1983-84 및 1984-85 시즌에는 디비전1 입성 이래 두 차례 NCAA 전국대회 진출을 연속 성사시켰다. 1985년 워싱턴 대학교로 옮겼으나 임기 4년 동안 포스트시즌 진출 2회 외에 평범한 모습을 보였고, 1989년 이탈리아 농구팀 리베르타스 리보르노 감독으로 이탈리아 무대에 진출했지만 1991년 레이어 베네치아를 끝으로 별 성과 없이 모국으로 돌아왔다. 1991년 플로리다 공과대학교 감독으로 다시 미국 대학무대로 돌아와 2003년 린 대학교를 끝으로 대학 무대를 떠났고, 이후 세인트 존 폴 2세 아카데미에서 감독을 하다 최근에는 유소년 농구캠프 'Andy Russo's Future Hoop Stars'를 운영 중이다.(개인 페이스북, 상세 정보)[3] 1985 NBA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 6픽으로 새크라멘토 킹스에 지명되었으나 한 번도 NBA 무대에서 못 뛴 채 호주로 건너가 2003년까지 총 5개 팀을 전전했다.[4]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이미 말론의 평가는 대단히 높은 편이었으나, 말론은 대학에서 학년이 오를수록 스탯이 떨어지는 현상을 보여 평가를 상당히 깎아먹었고 드래프트에서 13픽까지 밀리게 되었다. 덕분에 유타는 명전급 빅맨을 겨우 13픽으로 득템하고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하지만 우승을 못했다 여담이지만 "ESPN Sports Century" 칼 말론 편에 나온 바에 따르면, 그는 8번 픽을 갖고 있던 댈러스 매버릭스에 뽑힐 것이라 너무 확신한 나머지 드래프트가 열리기 전에 벌써 댈러스에 아파트를 구했다고 한다.[5] 승부처에서 소극적이었던 면도 마이너스 요소 중 하나. 당시 유타 재즈의 승부처 해결사는 존 스탁턴의 몫이였다.[6] 당시 최고의 농구선수를 뽑으라면 한 명이면 마이클 조던, 두 명이면 존 스탁턴&칼 말론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7] 2000-01 시즌까지는 지역 방어가 금지돼 있었다. NBA의 흥행을 위해 공격적인 농구를 지향하며 지역 방어를 금지하였다가 앨런 아이버슨을 보유한 필라델피아처럼 지공 아이솔레이션 일변도를 쓰는 팀 때문에 페이스가 느려지는 부작용이 일어나자 다시 지역 방어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후 NBA는 2004년에 핸드체킹까지 금지하며 2010년대에 공격농구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핸드체킹 금지와 넓어진 수비 범위로 돌파가 90년대나 이전에 비해 쉬워지면서 외곽선수들의 전성기가 열리고, 반대로 로우포스트 위주 농구의 비중은 낮아진다. 현대에 공격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빅맨들은 거의 모두 외곽 농구가 가능한 선수들이다. 그리고 지역 방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NBA에서 지역 방어 사용도는 가장 높을때 3%, 대부분 시즌엔 1% 미만이었다. 많이들 착각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NBA는 기본적으로 맨투맨 수비를 하는 리그이다. 2022년 현재는 피지컬 위주 수비가 금지되었기에 과거에 비해 수비전술이 더 다양해졌을 뿐. 핸드체킹의 금지가 시사하는 것은 몸으로 부딫히고 손으로 밀던 수비에서 공격수 앞에서 발로 뛰며 방해하는 수비로 변했단 것으로, 이 때문에 빈스 카터는 2017년에 "과거에 비해 득점은 쉬워졌는데 수비는 더 어려워졌다"고 평했다.[8] NBA에서 지역 방어가 부활한 이유는 기존 버전에서처럼 국제 대회에서 고전한 것 때문이 아니다. 지역 방어 부활이 결정됐던 2001년 당시에 NBA 스타들로 구성된 팀이 국제 대회에서 패한 적은 아직 없었으며, 애초에 국제 대회에서 부진하다고 프로리그인 NBA의 규칙을 바꾸진 않는다. 그리고 NBA는 출범 당시부터 지역 방어를 허용하지 않았었다. 지역 방어 부활은 근본적으로 아이솔레이션 일변도 때문이다. 지역 방어가 부활할 당시인 2001년 4월 워싱턴 포스트 기사를 보면 자세히 알 수 있다. 당시 NBA관계자들은 한 선수에게 공을 건네주고 원맨쇼를 하는 하프코트 아이솔레이션 일변도의 플레이가 경기를 루즈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으며, 이 점은 부총재 러스 그레닉이 "우리는 한 플레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적했는데 그건 아이솔레이션을 강조하는 것이었다"고 직접 언급한다. 90년대 중반부터 로우페이스, 저득점 트렌드로 인해 계속 평균득점이 줄어들던 NBA는 앨런 아이버슨,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등 뛰어난 1대1 플레이어 한명에게만 의존하는 아이솔레이션 일변도팀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걸 줄이고 팀공격을 강제하기 위해 지역 방어를 부활시킨 것. 물론 아이버슨나 맥그레이디 같은 선수들은 지역 방어 도입 전이나 후나 동일하게 높은 공격수치를 유지했고 지역 방어 부활 후에도 득점가뭄은 계속되는 등 (03-04 시즌에는 평균 25점을 넘긴 선수가 득점왕 맥그레이디 단 한 명이었다.아이버슨은 경기수가 부족해 자격 미달) 지역 방어의 영향력엔 한계가 있었지만 04년 핸드체킹 금지룰 강화를 포함한 외곽선수 보호 조치 이후 외곽선수들의 득점력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공격력이 서서히 올라가게 된다. 빈스 카터폴 피어스가 2017년 당시 "현재가 90년대보다 득점하기 더 쉽다"며 댄 이유가 바로 핸드체킹의 차이였다.[9] 이런 방식으로 농락당한게 바로 샤킬 오닐이었다. 그는 발이 느려 외곽에서 거의 쓸모가 없었기 때문에 상대가 픽앤롤을 하면 상대 포인트 가드를 따라가지 않도 골밑으로 뒷걸음 쳐서 돌파만 견제했다. 문제는 말론과 스탁턴 모두 중거리슛이 포지션에서 정상급이었던 것. 이 때문에 오닐은 아무리 공격에서 많은 점수를 쌓아도 수비에선 거의 민폐급이었다. 물론 오닐 자체의 수비력은 좋은 편이고 1대1에선 역대급이었지만 팀수비가 극히 약했는데 1대1을 거의 쓰지 않고 팀공격이 최강인 유타는 정말 최악의 상대였던 것. 여담이지만 오닐은 2대2 수비에서 약점을 은퇴할 때까지 극복 못했다.[10] 유타 재즈가 시카고 불스를 상대로 유독 고전했던게 바로 이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픽앤롤/픽앤팝은 다양한 미스매치를 유발하는데서 파괴력이 크다. 그런데 시카고 불스의 1-4번 라인은 6-6 론 하퍼, 6-6 마이클 조던, 6-7 스카티 피펜, 6-8 데니스 로드맨까지 전원이 팔이 길고 기동력과 운동능력이 좋으며 스윙맨 사이즈인 선수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누가 누구랑 스위치해도 버틸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미스매치 유발이 힘들었다. 게다가 당시 만 35세가 넘어가던 스탁턴이 발이 느려지기 시작했다는 것도 문제였다. (게다가 98년에는 큰 부상까지 입었었다. 이러다보니 유타의 공격력이 거의 파훼당해 1998 파이널 3차전에선 역대 최저 득점이라는 굴욕도 당했다.[11] 비가 오나 눈이 오나...[12] 사실 97시즌에도 두 팀간의 전력 차이는 크지 않았고, 98시즌에 두팀은 동률이었지만 홈코트 어드밴티지가 유타에 있었으며, 37세에 가까운 로드맨의 기복과 말론에게 밀리는 상성, 피펜의 컨디션 악화로 오히려 재즈가 전력상 유리했다. 말론은 재즈 팀 전체의 공격이 부진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제 몫을 해주었으나, 6차전 막판 본인의 치명적인 실수와 마이클 조던의 클러치 플레이로 우승을 아쉽게 놓쳤다.[13] 물론 그는 다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반칙을 저질렀다(…).[14] 그의 라이벌인 찰스 바클리는 그가 역대 가장 잘 뛰는 선수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15] 사실 포스트업 페이더웨이는 마이클 조던도 애용하던 옵션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론의 중거리슛이 파워 포워드 중 정상급이라도, 가드가 아닌 빅맨이 이런 옵션에만 의존하긴 한계가 있었다. 물론 여기도 예외는 있는데 디르크 노비츠키같은 경우 파워 포워드임에도 슈팅력이 정상급 가드 뺨치는 수준이라 포스트업페이더웨이를 강력한 1대1옵션으로 활용했다.[16]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받아먹는 득점이니 1대1로 넣은 것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득점하기 쉬운 위치를 선점하는 것 역시 굉장히 중요한 능력이며, 이 분야에서 말론에 필적하는 선수들은 역대 통틀어봐도 몇 없다.[17] 실제로 03-04 시즌 당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서 샤킬 오닐과 골밑을 수호했을때는 두 선수의 사이즈와 파워가 너무 압도적이다보니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를 상대하는 팀은 공격 리바운드를 거의 못 잡는 모습을 보였다.[18] 사실 초심자들이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프로수준에서의 리바운드 경합은 단순 높이의 고저가 그렇게까지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다. 물론 높이 또한 주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 외에도 여러 요소들이 리바운드에 관여한다는 소리. 상대방에게 유리한 위치를 뺏기지 않는 힘과 박스아웃 기술, 낙구지점 포착 능력 및 유리한 위치를 찾아내는 감각, 그 위치까지 신속하게 점령하는 순발력 등 리바운드에 관여하는 능력 요소들은 의외로 상당히 복합적이다. 해당 능력들이 아주 출중한 선수들은 높게 점프를 하지 않고도 리바운드를 잡아낼 수가 있다. 당장 역대 최고의 리바운더 중 하나인 데니스 로드맨은 맨발 2m 전후의 신장에 수직 점프력이 특별히 높은 편은 아니었음에도 낙구지점을 누구보다 빨리 포착해 몸을 날리고, 빠르고 짧은 단발성 점프 및 칩아웃을 반복해 어떻게든 공을 잡아내는 감각이 비상할정도로 탁월했다. 찰스 바클리는 부상으로 점프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막강한 힘과 박스아웃으로 위치선정에서 우위를 점하여 점프조차 하지 않고 리바운드를 잡아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NBA 역사를 보면 그리 크지 않은 빅맨들이 리바운드로 이름 날린 경우는 매우 많은 편이다.[19] 말론의 경우 정직한 페인트존에서의 1on1보다는 픽앤롤 플레이로 빠지거나 미드레인지에서 점퍼 득점이 많은편인 말론은 공격 리바운드를 많이 잡아낼 상황이 못 되었다. 따라서 공격 리바운드는 골밑에서 많이 득점하던 초창기에 세 시즌 연속으로 3개대를 잡아낸 것 외에는 꾸준히 수치가 내려가, 전성기 때는 1개대 후반~2개대 초반 정도만 잡아냈다. 유타 재즈의 팀 페이롤 사정상 말론은 골밑 파트너인 센터가 마크 이튼, 그렉 오스터택 등 발 느리고 골밑슛밖에 못하는 평범한 센터들밖에 없어 이들이 골밑에 짱박혀 있고 이들이 골밑 공리를 책임졌다. 그러나 그는 수비시 강철같은 몸으로 아주 뛰어난 박스아웃 능력을 자랑하던 선수였기에 수비 리바운드는 항상 꾸준히 잡아줬으며, 스스로 리바운드를 못 잡더라도 다른 선수들이 잡을 수 있게 박스아웃해주곤 했다. 보통 공격 리바운드가 뛰어난 선수들이 공/수 리바운드 비중이 1:2, 말론 본인은 전성기 때 1:3 에서 1:4 사이의 비중일 때가 많았는데, 커리어 말년의 그는 공/수 리바운드 비중이 1:5에 달했다. 달인까지는 아니지만 워낙 뛰어난 하드웨어를 타고나 믿음직한 리바운더였던 셈이다.[20] 물론 조던이 보통 가드가 아니라 슈팅 가드 역대 최다 블락을 기록한 선수란 걸 감안해야 하지만... 그래도 가드와 수치가 같다는 건 블락 능력이 떨어진다는 거다.[21] 말 그대로 7~8개였다. 97파이널에선 7.7개, 98파이널에선 8.3개. 로드맨은 정규시즌에서 96-97시즌엔 공격리바운드만 5.8개, 97-98시즌엔 무려 5.3개나 잡아낼 정도의 특급 리바운더였는데, 유타와의 파이널에선 97년엔 1.7개, 98년엔 3.3개에 그쳤다. 물론 98파이널의 경우 2차전에 공리 5개, 5차전에 7개를 잡는 등 활약한 적도 있지만 운명의 6차전에서는 공격리바운드 0개, 수비리바운드 단 3개로 3리바운드에 그치는 등 들쭉날쭉한 보드장악력을 보였고, 이는 말론의 강력한 박스아웃 영향이 컸다. 게다가 이때 양 팀에서 공격에서 제 몫을 해준 선수들이 조던, 말론 뿐이었던 걸 생각하면 수비에서 제대로 막은 것도 아니다.[22] 둘이 몸싸움할 때 모습을 보면 피지컬이 압도적인 말론에게 로드맨이 상성이 안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장면을 예로 들면 시카고의 론 하퍼가 슛을 쐈을 때 슛쏘기 전에 바깥쪽(림과 먼쪽) 위치에 있어 불리했던 로드맨이 쏘기 직전 재빨리 한발짝 돌아가며 말론과 한발씩 안쪽에 걸치고 있는 포지션을 차지한다. 동시에 말론의 팔에 자기 팔을 낀다. 완전히 유리한 위치는 아니지만 5대5 정도 되는 위치고 상대방이 점프를 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만 되어도 로드맨이 대부분 공격리바운드를 잡아낸다. 그러나 상대가 말론일 땐 얘기가 달라지는데, 슛이 날아가는 1초 동안 계속해서 등빨로 밀어내며 유리한 위치를 다시 차지한다. 동시에 한쪽에 로드맨을 메달고도 점프하면서 리바운드를 따내는 것이다. 그만큼 수비리바운드 단속능력이 경이적으로 뛰어났다.[23] 다만 공격에서 호구 잡힌 건 아니다. 둘이 매치업 할때 모습을 보면 말론이 힘이 워낙 세어서 오닐이 정직하게 백다운할 경우 밀고 들어가는 건 많이 못했지만 두 선수가 워낙 키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골밑에서 공을 잡으면 그냥 훅슛을 올려버리면 됐다. 실제로 둘이 붙으면 서로 못 막아 동반으로 30점을 넘기는 적이 많았다. 물론 오닐이 말론을 상대하는게 고생스러웠던 건 맞다.[24] 바클리는 포스트업 상태에서 힘으로 상대를 밀어내면서 백다운해 골밑까지 간 다음 공격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워낙 힘이 세서 이 패턴에는 로드맨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말론은 바클리의 백다운에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패턴을 쓰기 힘들었는데, 말론의 키가 더 크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사실 포스트업+백다운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던 말론의 힘이 가장 돋보였던 부분이 이 로우포스트 수비인데, 누가 상대라도 마치 바위처럼 버티고 밀려나질 않았다.[25] 말론은 로테이션 수비가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1대1 골밑수비는 굉장히 뛰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로우포스트에서 공격하는 두 선수는 말론을 정면으로 뚫어야하는데, 말론의 피지컬이 둘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상대하기 힘들었던 것이다.(두 선수 모두 키는 크지만 말론보다 몸무게가 가볍고 힘이 딸린다) 사실 트윈타워 시절보다 볼움직임이 뛰어난 2010년대 스퍼스가 말론같은 수비수를 상대로는 훨씬 효과적이다.[26] 스퍼스는 재즈를 상대로 시즌 2승1패를 했다. 재즈는 시즌 49번째 경기까지 스퍼스에 1.5경기 앞선 1위를 달리고 있었으나, 스퍼스와 맞대결에서 패하면서 기록도 타이, 타이브레이커까지 내주었다. https://www.deseret.com/1999/5/2/19443255/jazz-spurs-square-off-for-best-in-midwest-br-winner-has-inside-track-on-homecourt-advantage-througho 만약 재즈가 1번 시드를 받았다면 2라운드에서 전 시즌에 스윕한 레이커스, 3라운드에서 스퍼스를 만났을 것인데, 두 팀 다 전년도 플레이오프에서 손쉽게 물리친데다가 결승상대는 패트릭 유잉이 부상으로 빠진 닉스였으니 우승 확률이 매우 높았다.[27] 이 때문에 말론을 과소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아무래도 스윙맨 포지션의 득점기계들처럼 수십점을 쏟아붓는 플레이어는 아니라 시각적으로 임팩트가 떨어지기 때문. 그러나 농구는 결국 누적된 득점의 총합을 따지는 경기인데, 한쿼터에 25점을 쏟아붓고 나머지 쿼터에 5점 넣는 선수가 4쿼터 내내 꾸준히 30점을 넣는 선수보다 못하다고 할 순 없다. 물론 마이클 조던같은 선수들은 꼭 득점해줘야하는 승부처에 득점을 퍼부어주는 선수였고, 이 점은 말론이 분명 부족한 점이었다. 종목이 누적의 스포츠인 야구였다면 다르지만 농구는 분명히 클러치 승부사가 존재하며 우승의 가치는 비할 수 없이 크다. 그가 조던의 수준에 끝내 미치지 못한 이유, 그리고 그와 한때 비교되던 팀 던컨과의 평가가 역전된데는 이 이유가 크다.(물론 우승횟수가 크긴 하지만, 실력평가로 봐도 던컨의 승부사적 면모로 인해 확실히 더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의외로 기량 자체만 따져보면 득점은 말론 우세, 수비는 던컨 우세에 리바운드는 비슷해서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28] 이전 경기에서 디트로이트가 유타의 존 스탁턴에게 고의로 거친 파울을 했었고, 말론은 이에 다음 경기에서 복수하겠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29] "말론은 스탁턴과 함께했었기 때문에 그 정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요지의 발언.[30] 여담으로 저 플레이는 파울이 안 불렸다. 2000년대 이후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수 보호가 안되던 시기라 저런 말도 안되는 컨택이 있어도 고의성 여부를 따져서 파울을 줬기 때문. 저 거구를 실어서 팔꿈치로 찍었는데도 고의성이 안 보였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간 것이다. 참고로 저게 만약 플래그런트 파울로 불렸어도 당시 규정이면 불스의 덕 칼린스 감독이 자유투를 던질 선수를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는 약한 페널티 밖에 없었다.(플래그런트 파울 누적->퇴장이 도입된 것은 90-91시즌부터이다) 80년대가 얼마나 거친 시대였는지 엿볼 수 있는 디테일. 실제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말론이 가장 거칠게 플레이하던 시절이었음에도 당시 영상이 대부분 보존되지 않아(당시는 TV 중계권이 현재보다 훨씬 쌌고, 재즈는 인기팀이 아니라 전국 중계가 많지 않았다) 그의 악랄한 플레이들이 많이 묻힌 감이 있다.[31] 1위는 그 유명한 타이 콥인데 그가 20세기 초반을 호령했던 야구선수라는 것을 생각하면 현대에는 칼 말론이 탑이다.[32] 이때 위대한 50인 선정발표때 세 명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피트 마라비치는 이미 고인이었고, 제리 웨스트는 지병 때문에 불참. 샤킬 오닐은 무릎부상을 이유로 불참했는데, 당시 최연소 선정자였음에도 얼굴도 비추지 않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다.[33] 사실 가넷이나 론 아테스트, 브루스 보웬같은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영상 자료가 많은 00년대에 활동했던 선수들이라 이들의 거친 플레이가 대부분 잘 알려져있다. 그러나 말론이나 데니스 로드맨, 빌 레임비어 같은 선수들이 활동한 80년대 영상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아 현재 팬들이 접하기 어렵다. 즉 영상으로 남아있는 이들의 만행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말론의 위 영상에 나오는 내쉬나 로드맨 가격은 사실 80년대 후반 그의 플레이를 기준으로 보면 귀여운 수준이다.[34] 쿠코치가 7피트에 달하는 키에도 불구하고 빅맨으로 불리지 않는 것은 가볍고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상대가 말론같은 덩치라면 전력으로 밀어도 꿈쩍이나 할까싶은 마당에 한팔로 살짝 밀었는데 나가떨어졌으니... 실제로 이때 콜이 안 불리자 재빨리 일어나 쿠코치를 상대로 포스트업해서 힘으로 손쉽게 밀어내는 모습을 보였다.[35] 드래프트 때 당시로선 센터급 몸무게였던 240파운드였다.[36] http://archive.sltrib.com/story.php?ref=/sltrib/jazz/56632474-87/malone-jazz-karl-coach.html.csp[37] 현역시절 완벽한 몸매로 유명한 조던도 은퇴 이후 220파운드 언저리이던 몸이 260파운드까지 불었고 (2013년에 복귀 떡밥이 돌 때는 워싱턴 시절에 가깝게 감량하긴 했었다), 원체 마른 체형인 레지 밀러존 스탁턴이 아닌 이상 운동량의 감소로 몸무게가 크게 느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카티 피펜도 몸관리를 잘한 편이지만 근육량이 현역 때보다 눈에 띄게 줄었는데, 말론은 몸이 불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현역 시절과 거의 똑같은 근육량과 지방량을 유지하고 있으니...[38] 54세 생일을 한달 앞둔 시점이다.[39] 물론 이 말은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게 아니라, roughneck이라는 말로 불리는 사냥과 낚시, 총기, 거대한 오토바이 등을 즐기는 미국 백인 촌사람들같이 행동한다는 뜻이다. 바클리는 다른 NBA 선수들처럼 골프를 즐겼는데(모종의 이유로 현재는 안 한다. 찰스 바클리 항목 참고), 말론은 골프장을 딱 보고 "땅을 낭비하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40] 실제로 칼 말론의 생활 양식을 보면 일반적인 아프리카계들과 많이 다르다. 억양도 흑인 특유의 말버릇이 다소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남부 변두리 지역의 백인 억양에 좀 더 가까우며,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등 일반적인 흑인들과 많이 다르다.[41] 참고로 엘진 베일러는 등번호가 22번일뿐더러 준우승만 수차례 차지했던 선수이다.[42] 2020년 발표된 다큐멘터리 The Last Dance에 의하면, 피펜도 말론이 실제로 자유투를 놓치기 전까지는 그게 말론한테 통했는지 긴가민가 했다고.[43] weaky link, 우리식으로는 대충 '구멍' 정도 뉘앙스일 것이다.[44] 아이제아와 말론의 관계는 그닥 좋지 않으므로 개인적 감정이 들어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으나, 같이 패널에 앉아있던 케니 스미스 등도 동참하는 등 어느 정도 동의를 얻어내기도 했다. 아이제아의 개인적 감정이 어느 정도 섞인 평가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의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일리있는 평가이기도 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45] 아이제아 토마스는 스탁턴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평가를 많이 남겼는데 대충 다음과 같은 어록들이 전해진다. "생각해보라. (상대 입장에서) 스탁턴이 슛을 쏘게 하는 건 큰일 날 일이다. 제프 호너섹이 슛을 쏘게 해도 안 된다. 그러나 말론이 슛을 쏘게 할 수는 있다." "만약 이 플레이 (1998 파이널 6차전 마지막)에서 말론에게 스탁턴이 패스를 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경기를 이겼을 것이다." "스탁턴은 패스를 우선으로 하는 전형적인 패스 중심의 포인트 가드였고, 그 선입견에 스스로 사로잡혀 슛을 쏘기보다는 패스를 많이 하였다. 아마 그가 그 강박관념을 버리고 슛을 더 많이 쏘았더라면 그가 우승을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결국 "스탁턴이 클러치 상황에서 말론에게 공을 넘기지 말고 직접 해결했더라면 유타 재즈는 더 무서운 팀이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저때 말론의 실책과 뒤이은 조던의 '라스트 샷' 이후 공격권에서 스탁턴이 받자마자 수비를 달고 던진 3점슛이 간발의 차이로 안 들어갔는데,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던 저 공격권에서 말론이 포스트업이 아닌 스크린을 서줘서 스탁턴에게 공격기회를 줬다면 승리하는 것은 유타였을 수도 있다.[46] 특이한 자유투 루틴을 가진 선수들은 많은데, 제이슨 키드는 자유투를 쏘기 전에 림을 향해 키스를 날리고, 제프 호너섹은 자기 볼을 쓰다듬고 쏘고, 척 헤이즈나 앤쏘니 메이슨 같은 경우 자유투를 쏘는 듯 하다가 멈칫하는 펌프페이크(?)를 한번 하고 쏘고, 닉 반 엑셀은 라인에서 한 발짝 뒤에서, 제리 스택하우스는 거의 쪼그려 앉는 수준으로 무릎을 아주 많이 굽혔다가 쏜다. 길버트 아레나스의 경우, 볼을 던지기 전에 허리 옆으로 세번 돌리고 쏜다. 물론 평범하게 쏘는 선수들도 마찬가지로 루틴은 있는데, 마이클 조던은 공을 세 번 튕기고 바로 쏘는 평범한 루틴이지만 특징이 절대로 슛을 쏘기 전까지 림을 보지 않는다. 아래를 보면서 공을 튕기고 감을 잡은 다음, 쏠 때가 되어서 림을 바라보는데, 볼을 쏠 때가 되어서야 림을 바라보게 되는 야투와 같은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47] 대부는 가장 가까운 친구여야 부탁하고 세울 수 있는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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