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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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Qachiun / 蛤眞(합진) / 蛤赤溫(합적온)

생몰년도 미상

몽골 제국의 장수.


2. 생애[편집]


1216년부터 거란 잔당들이 몽골의 공격을 피해 동쪽으로 고려를 침공하면서 1218년 12월에 원수가 되어 살리타이와 함께 군사 10,000명을 이끌고 완안자연동진군 20,000명과 합류해 거란 유민을 토벌하겠다면서 고려의 영토로 들어와 화주, 맹주, 순주, 덕주 등을 공격했고, 당시 인주에서 고려의 관리인 홍대순이 항복했다.

1219년 1월 14일에 고려의 조충, 김취려, 동진의 완안자연과 함께 병사를 합해 강동성을 포위했다. 강동성을 포위하면서 고려군에게 군량을 요청했다. 또한 고려 조정에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요구해 김취려가 단독으로 찾아왔는데, 이때 카치운이 김취려에게 포선만노에게 절하라고 했지만, 김취려가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겠냐."

면서 칭기즈 칸이 있는 방향으로만 절을 했다.

카치운은 김취려의 언행과 아름답고 긴 수염을 갖춘 용모에 감탄해 나이를 물어봤다가 김취려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알고 그를 형으로 삼았으며 자신은 동생이 되었다. 수 일 후에 조충이 찾아오자 조충에게도 나이를 물어봤다. 김취려가 조충이 자기보다 위라고 하자 카치운은 조충도 형으로 모셨다.

완안자연과 함께 거란의 군사를 대주에서 공격하기 위해 대주 서쪽 독산에 주둔하다가 고려의 김인경이 사신으로 오자 잔치를 열어 위로했다. 강동성의 300보 되는 곳에 멈춰 성의 남문에서 동남문에 이르기까지 못을 파게 하고 완안자연과 고려군에게 강동성을 포위하도록 했다.

강동성의 거란 잔당이 식량이 떨어지고, 야율함사가 자살하면서 항복하자 거란 포로 중 700명을 고려에게 줬으며, 김취려와 조충에게 15살의 소녀 9명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푸타우 등 10명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면서 조서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2월에 몽골로 귀국하면서 동진의 관리와 종 41명 등을 의주에 남기고, 고려말을 배우도록 했는데 이때 자신이 다시 올 때를 기다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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