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1세 루트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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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30년 전쟁의 피해로부터 팔츠 선제후국을 복구하는데 힘썼다.
2. 상세[편집]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차남으로 1629년 형 프리드리히 하인리히가 익사하는 바람에 계승자가 되었다.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 프리드리히 5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보헤미아 왕국의 개신교도 귀족들이 제의한 보헤미아 왕위를 받아들였고, 이로써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보헤미아 반란군은 제국군(Kaiserliche)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하이델베르크까지 위협받은 프리드리히 5세는 팔츠를 떠나 외가인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피신했다. 때문에 어린 시절은 네덜란드와 어머니의 본가인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며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의 궁정에서 자랐다.
잉글랜드 내전이 벌어지자 동생 루프레히트와 모리츠는 찰스 1세의 편에서 활약했으나 그는 올리버 크롬웰과 손잡고 의회파에서 활약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팔츠 선제후국을 되찾았으며 이듬해 런던으로 건너가 외삼촌이 처형되는 장면까지 지켜보고 팔츠 선제후국으로 되돌아왔다.
이후 그는 30년 전쟁의 피해로 잿더미가 된 팔츠 선제후국을 복구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특히나 합스부르크 가문과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이 다스리는 바이에른의 친척에게 당한 것을 잊지 않아, 프랑스와의 외교에 집중하여 딸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를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의 필리프의 후처로 시집보냈다.
원래는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 5세의 딸 샤를로테(Charlotte von Hessen-Kassel 1627~1686)와 결혼했으나 그녀와 이혼하고 마리 루이제 폰 데겐펠트(Marie Luise von Degenfeld 1634~1677)와 귀천상혼했다. 잉글랜드에서 의회파와 손잡았던 것, 샤를로테와 이혼하고 귀천상혼 한 것으로 인해 어머니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동생 루프레히트, 모리츠, 조피 등과의 사이는 최악을 달려 사실상 가족들과 의절한 채로 살다가 168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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