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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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프리드리히 벤츠
Karl Friedrich Ben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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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44년 11월 26일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1]
사망
1929년 4월 4일 (향년 84세)
독일국(바이마르 공화국) 라덴부르크
가족
아버지 요한 게오르그 벤츠
어머니 요제피네 벤츠[2]
아내 베르타 벤츠(1849~1944)[3]
장남 오이겐 벤츠(1873–1958)
차남 리하르트 벤츠(1874–1955)
장녀 클라라 벤츠(1877–1968)
차녀 틸데 벤츠(1882–1974)
삼녀 엘렌 벤츠(1890–1973)
학력
카를스루에 공과대학교[4]

1. 개요
2. 내연기관 자동차를 개발하다
3. 아내 베르타 벤츠의 모험
4. 아우토반의 아이디어
5. 기타




1. 개요[편집]


독일의 기계공학자이자 기업인이다. 최초로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한 인물이자, 메르세데스-벤츠의 설립자이다. 수평대향 엔진과 내연기관 자동차들을 개발하여 특허권을 얻었다. 내연기관 자동차의 특허번호는 37435번.

휘발유가 발생하는 힘에 의해 움직이는 탈것

- 카를 벤츠가 특허 신청서에 기재한, 자동차를 부르는 말.


또한 독일 최초이자 세계 최초로 운전면허를 발급받은 사람이다.


2. 내연기관 자동차를 개발하다[편집]


파일:Patent Motorwagen.jpg

카를 벤츠가 1885년 최초로 특허를 받은 자동차

카를 벤츠는 1879년에 내연기관을 만들었고, 온갖 고생 끝에 동년 12월 31일에 내연기관 시동에 성공했다. 그리고 1886년에 내연기관 자동차(페이턴트 모터바겐)를 만들어 특허를 얻었으나, 상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창고에 처박아뒀다.

덧붙여, 공교롭게도 훗날 벤츠를 인수한 다임러 AG의 창립자인 고틀리프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도 같은 해에 가솔린 자동차를 만들었다. 다만 카를 벤츠보다 3개월 뒤의 일이었고, 아내 엠마 다임러를 위한 생일 선물이었다고 한다.

카를 벤츠는 모터바겐을 일종의 장기적 연구 과제로 생각하고 창고에 처박아둔 채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다. 아내 베르타가 훗날 밝힌 바에 의하면 자신의 개발품이 그렇게 두드러진 성과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상당히 의기소침해 있었다고 한다. 상술한 것처럼 실제로 카를 벤츠가 자동차를 개발한 그 해에 다른 기술자들도 비슷한 내연기관 자동차를 개발하기도 했는지라...


3. 아내 베르타 벤츠의 모험[편집]


결국 1888년에 그의 아내였던 베르타 벤츠가 남편 몰래 새벽에 남편의 자동차 발명품 중 하나인 모델 3(Modell 3)를 가지고 두 아들(15살인 오이겐 벤츠, 14살인 리하르트 벤츠)과 함께 만하임(Mannheim)에서 친정이 있는 포르츠하임(Pforzheim)까지 남편의 도움 없이 직접 몰고 갔다 왔다. 베르타는 1879년 12월 31일의 첫 성공까지 계속해서 남편의 시동 테스트를 지켜봤고, 성공할 때까지 계속하도록 격려했으며, 차량의 구조와 가동 절차도 전부 숙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자동차가 당시 처음 만들어진 물건임에도 직접 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하임에서 친정인 포르츠하임까지 가는 거리는 104km, 만하임까지 되돌아오는 길은 90km의 거리였다. 현재야 100km/h로 2시간이면 그만이지만, 당시에는 고속도로는커녕 자동차 전용도로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고, 근대 유럽을 다룬 영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듯이, 짐마차나 겨우 다니던 비포장 시골길을 털털거리며 왕복한 것이다. 게다가 내연기관 자동차의 최고 속도는 20km/h도 되지 않았으며, 이 자동차는 갓 개발한 제품이었고, 당연히 현대와 같은 품질 보증 공정은 안 거친 물건이라, 중간에 말썽도 많이 일어나서(브레이크 마모, 연료관 파열, 냉각수 증발, 연료 부족 등) 만하임에서 친정까지 가는 데만 편도 12시간을 몰아야 했다.

베르타는 연료관이 막히면 머리핀으로 후벼파서 뚫고, 가터벨트를 뜯어서 점화 플러그의 전선을 절연 처리했으며 냉각수가 다 떨어지면 일일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식혔다. 오르막길을 만나면 작은 아들에게 핸들을 맡기고, 본인은 큰 아들과 함께 차를 밀어올리는가 하면, 브레이크 패드가 닳아 없어지면 구두방에서 가죽신을 구해다 끼우는 방식으로 때웠다. 덕분에 세계 최초의 브레이크 라이닝 발명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또한 연료가 다 떨어져서 주행이 불가능해지자, 근처를 수소문하여 찾아낸 약국에서 리그로인(벤진, 석유 에테르)을 구입해서 연료를 보충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주유소는 커녕 별도의 자동차 연료로 확립된 물질도 없었다. 약국의 이름은 비스로흐(Wiesloch) 약국인데, 이 덕분에 역사상 최초의 주유소로 꼽힌다.

이 운전은 현대에 들어서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 장거리 운행'으로 인정되고 있고, 당연히 베르타 벤츠 또한 '세계 최초의 장거리 자동차 운전 드라이버'로 꼽힌다.[5] 베르타가 그 동안 겪은 문제점들을 사과 대신으로 직언으로 들은 카를 벤츠는 이를 참고해 개량한 뒤 3마력 엔진을 탑재한 '빅토리아'를 출시하여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카를 벤츠가 자동차 역사에 이름을 제대로 올릴 수 있게 됐다.

이후 베르타 벤츠가 당시 이동했던 경로는 현재 기념 루트로 지정됐다. 베르타 벤츠 메모리얼 루트와 비스로흐 약국. 이 일화는 벤츠 미국법인의 '여성의 날' 기념 광고로도 제작됐다. #
  • 다만 고증오류가 있는 것이 모델 3가 아닌 모델 1을 타고 나온다. 아마도 상징적인 의미에서 사용한 듯. 또한 실제 마을 사람들은 자동차를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르타 일행이 탄 자동차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등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었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도 열차나 증기 자동차처럼 동물이 끌지 않는 탈것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고, 전기 자동차 실험도 1830년대부터 시도되는 등 자동차의 아이디어 자체는 다들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그 때문에 이 광고는 일각에서 중세시대나 다를 바 없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여성이 앞서 선진 문물을 전파한다는 페미니즘적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해 고증을 무시한 것으로 비판받았다.

독일에서 제작된, 고증에 더 신경쓴 버전과 미국 버전을 비교한 영상. 약국 주인이 되돌아오는 길에 쓸 리그로인을 더 준비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새로운 자동차의 발상에 호의적이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베르타는 이 최초의 장거리 자동차 여행이 성공하자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유럽 각국의 유력 신문사, 그리고 심지어 미국 뉴욕의 신문사에까지 전보를 직접 보내어 자동차 여행의 성공을 알렸다. 그리고 벤츠의 모터바겐에 관심이 높아지자 베르타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꺼내 들었는데 바로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모터바겐의 참가 신청을 낸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주저하는 카를 벤츠 대신 아내 베르타가 직접 했다(...) 박람회에서 모터바겐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입소문을 타고 대흥행했다.

이처럼 아내인 베르타 벤츠가 없었다면 카를 벤츠는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게 현재의 중론이다. 무엇보다도 파산할 뻔한 적이 있는 카를 벤츠의 회사를 약혼자이던 부잣집 아가씨인 베르타가 결혼 지참금을 친정으로부터 미리 받아내고, 동업자의 지분을 전부 구매하면서 겨우 살린 적이 있다. 당시 가부장적이던 독일법에 의하면 결혼 이후에 배우자는 투자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리는 제약이 있었기에, 약혼자 신분일 때 주도적으로 투자한 것이다.[6] 이처럼 베르타 벤츠는 전 재산을 남편의 연구개발에 투자해서 성공한 사례이자, 남편의 발명품을 과감하게 실증한 사례로 꼽히며, 카를 벤츠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필수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4. 아우토반의 아이디어[편집]


또한 카를 벤츠는 자동차 전용도로(아우토반) 건설의 기초적 아이디어도 제시한 바 있다. 자신의 자동차에 내무장관을 태우고 가면서 "더 빨리 갈 수도 있지만 경찰이 법으로 자동차 속도를 6km/h로 제한을 걸어서 그러하지 못하니,[7] 속도 제한 없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도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요청했다. 물론 아우토반의 첫 삽을 뜬 것은 히틀러가 집권한 전간기의 일이고 완전히 개통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도 끝난 뒤의 일이었지만, 내무장관이 경찰에게 6km/h 이상으로 달리더라도 단속하지 말라고 지시하면서 적어도 불합리한 속도 규제를 없앴다는 점에서 원하는 기본 목적은 달성했다. 이 점에서 독일과 영국의 자동차 공업은 완전히 궤도가 달라지게 되어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자동차 공업이 눈부시게 발전할 때 영국은 적기조례에 계속 묶여 있었다.


5. 기타[편집]


자동차를 상용화하면서 벤츠 & Co.(Benz & cie)라는 회사를 창업했는데, 이 회사는 1926년에 다임러 모터 코퍼레이션(Daimler Motoren Gesellschaft)과 합병하면서 다임러 AG의 일원이 되어 지금의 메르세데스-벤츠가 됐다. 그리고 21세기에 다임러 AG는 아예 메르세데스-벤츠 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하면서 다시 한 번 네이밍의 주종관계가 역전되었다.

그의 묘지는 브란덴부르크에 있으며. 아내 베르타 벤츠와 합장되어 있다.

[1] 지금도 카를스루에 항구가 있는 그의 고향 뮐부르크(Mühlburg)에는 S&G Automobil이라는 메르세데스-벤츠 대리점이 있다.[2] 본래 성씨는 베일란트.[3] 본래 성씨는 링거(Ringer).[4] 이후 1914년에 모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5] 그 전까지는 자동차 운행이라고 해봤자, 짧은 거리에서 무엇인가가 작동하며 굴러간다는 시연을 군중들 앞에 보이는 정도였다. 따라서 진정한 '자동차 운행'은 베르타 벤츠의 시도가 세계 최초였다.[6] 이는 로마법을 받아들이면서도 가부장제이던 프로이센의 융커들이 장원을 운영하던 방식이 그대로 법에 녹아든 것이다. 이런 가부장 제도는 후일 한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에서는 1918년 1차대전 패망 이후 수정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상속녀 베르타 크루프에 의한 크루프 그룹 지분의 향방이 유명한 사례이다.[7] 과거 영국에서 적기조례를 실시할 때, 증기 자동차는 시가지에서 8km/h, 그 외 구간에서 16km/h로 속도 제한을 걸었다가 1865년에 각각 3.2km/h, 6.4km/h로 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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