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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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1927년부터 영국 빅커스 사의 빅커스 미디엄 마크 III를 모델로 설계 작업이 개시, 1929년 4월에 89식 전차라는 이름으로 설계가 완료된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 이 전차는 중형전차로 체급이 변경되는데, 개발과정에서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중량이 다소 증가되어 10톤이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당시 일본군의 전차분류는 10톤 미만을 경(輕)전차, 20톤 미만을 중(中)전차, 20톤 초과를 중(重)전차로 분류하고 있었다.
원래 이 전차의 생산은 시제 개발을 담당한 오사카 포병공창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지만 생산능력부족 문제가 지적, 미쓰비시 중공업이 이에 참여하여 양산에 들어간다. 1931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89식 중(中)전차는 곧 일본제국 육군 및 일본 제국 해군(해병대)의 기갑 전력의 주력이 된다.
도입 당시만 하더라도 90식 57mm 단포신 주포의 화력은 쓸만한 것이었고, 장갑도 대전차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못써먹을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1931년 기준으로 89식 중전차에 비견할만한 10톤 이상의 중형 전차를 보유한 다른 열강은 오직 소련과 영국뿐이었다. 당시 세계 1류 강대국이었던 영국이나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소련 정도 아니면 열강들조차도 탱켓이나 경전차 선에서 만족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도 시베리아와 중국 대륙에 야심이 있던 일본제국은 해당되지 않았지만.[3] 일단 시험 단계에서 보병지원용 단포신 37mm 속사포의 직사(150m)를 막아냈고 군부는 이에 만족했다. 다만 포탑은 2명이 탑승할 정도로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포탑 전면에 공축기관총을 설치할 수 없었고, 포탑 내 기관총을 후방에 설치해 이를 사격하려면 포수가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뒤 포탑을 표적을 향해 다시 돌려서 사용하는 문제가 있었다.[4]
일단 개발 당시엔 일본 육군의 전통적 가상 적군인 소련군의 기계화율도 당시에는 일본 이상으로 낮았기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실제 상대가 전차나 대전차포를 거의 보유하지 못했던 중국 군벌과 국부군 정도였기 때문에 단순히 진지 공략용 내지는 대보병전만을 생각해 본다면 그 상황에선 89식은 그럭저럭 활약을 할 수 있었던 셈.[5]
하지만 호평을 받던 시절에도 문제가 없진 않았다. 특히 현가장치의 성능이 떨어져 진동이 심했고 때문에 전륜 베어링이 종종 망가지는 바람에 이동 중에도 늘 그리스를 발라주어야 했다. 그리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전륜 자체가 빠져버리는 심각한 파손이 일어났다. 무한궤도도 연철로 만들었기 때문에 좀 큰 돌이라도 밟으면 핀이 부러지거나 궤도 자체가 휘는 경우가 많았다. 포방패 사이의 틈이 꽤 넓어 그 틈으로 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그나마 포방패의 문제점은 을형에서 개선된다.
엔진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독일제 다임러 가솔린 엔진(118hp)을 라이센스 생산한 것을 탑재해서 생산했으나 경비 절감을 목적으로 미쓰비시가 만든 국산 디젤 엔진<이호기(イ号機)>(118hp)을 탑재하는 개량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디젤 엔진으로 개수하게 된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연비 개선과 피탄시 화재 발생을 막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제시했으며, 이유 자체는 타당하였으나, 일단 분명히 연비는 개선되었지만 첫 국산 엔진의 성능이 형편없어 일선의 불만이 많았다. 출력이 고르지 못하고 야금기술 부족으로 엔진 실린더가 타버리는 고장이 잦았던 것이다. 게다가 디젤 엔진이 지나치게 무거워 모처럼 개선된 연비를 깎아먹었다.
속도의 경우에도 문제가 있었다. 물론 제원상으로는 26km/h의 속도를 기록했으므로 나름대로 준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수치는 제대로 된 포장도로에서나 나오는 것으로, 비포장도로에서 주행만 하면 앞서 언급한 무한궤도와 현가장치의 문제 때문에 속도가 팍 떨어진다. 당연히 험지주행은 안하는 것이 좋을 정도였으니, 국부군을 격파하더라도 전차 주제에 추격전을 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후속전차라고 볼 수 있는 치하는 주로 속도와 주행성능에 중점을 둬서 개량했다. 당장 화력은 동등하고 방어력은 약간 상승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장갑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는데 명색이 중형전차인 물건의 '전면' 장갑이 고작 17mm로 현대의 BTR은 커녕 동시대의 장갑차인 경정찰장갑차보다도 방어력이 낮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르노 FT '경'전차의 8~22mm 장갑보다 낮은 수치였다. 전차에서 장갑이 가장 두꺼운 부위인 전면장갑의 방어력이 장갑차보다도 약하니 다른 부위는 안봐도 비디오였다. 이렇게 처참한 종이장갑이다보니 M1 개런드에도 격파당한 기록이 있다. 그나마 국민혁명군이 사용하던 독일제 7.92mm 소총탄과 기관총탄은 간단하게 튕겨내버림으로써 합금 장갑판을 가진 10톤이 넘는 30년대 중형전차로서의 가치는 증명하긴 했다.[6]
하지만 디젤 엔진의 수급 상황이 좋지 않아 을형의 형태를 하고 있어도 갑형의 휘발유 엔진을 단 변종도 흔하다. 일단 약칭으로 갑형을 <치이(チイ)>, 을형을 <치로(チロ)>로 지정했으나 거의 쓰이지 못했다.[7]
초기형인 갑형의 경우 조종석과 전방기총 사수석의 위치가 우측통행을 하는 국가 기준인 좌-우로 배치된 반면 후기형인 을형은 일본이 적용한 좌측통행 형식인 우-좌 순으로 배치되었다.
전쟁 중 당시 일본령 조선에 배치되었던 1량을 제외한 전량이 유실되었으며, 그 1량은 현재 육군기계화학교에 전시 중에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소련과의 만주에서의 전투를 상정하고 있던 일본군은 소련의 국경 돌파 및 밀림, 늪지대를 돌파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여겨 1929년 연구방침을 제정하여 1930년에 장해물 제거 및 토치카 파괴를 주 목적으로 하는 전투공병전차의 개발에 착수했고, 1931년 6월에 89식 중전차 차체에 좌우 궤도 공간장갑과 포탑, 리턴 롤러 2개를 제거한 개량품 시제차량이 미쓰비시에서 완성된다. 완성된 시제차량은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참호파기, 화학무기 살포 및 제거, 화염방사, 지뢰 제거 등의 장비들을 장착 할 수 있도록 개발하였다.
개발이 완료된 시제차량은 공병학교로 보내져 시험운행에 들어갔고, 접이식 가교등의 추가 장비를 설치하는 개량을 거쳐 1936년에 96식 장갑작업기라는 이름으로 임시 제식화 되었다.
1937년에는 원본 치로와 마찬가지로 디젤 엔진으로 엔진이 변경되고 을(乙)형이 개발되었다. 그후 1944년까지 병(丙)형과 정(丁)형, 무(戊)형이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다양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개량과정을 거치며 최종형인 무형은 그 기능이 4가지로 좁혀졌고, 그 대신에 단일 기능을 갖춘 다양한 공병전차의 개발이 진행되었다고 한다.[8]
1934년에 독립 혼성 제 1여단 독립 공병 1개 중대에 처음 배치가 이루어졌고, 1937년에 중국 전선에 실전 참가하고 화염 방사 보병 지원을 실시했지만 1000km 가까이 되는 장거리 행군으로 고장이 속출했다고 한다.
1939년에는 전문 운용 부대로 독립 공병 제 5연대가 창설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1942년에 전차 사단 의 창설에 따라 장갑 작업기는 3개 전차 사단과 교도 전차 여단의 공병대에 분배되었다. 각 전차 사단의 공병대는 정수에 맞추어 24대가 배치되었다고 하는데, 중국 전선과는 달리 장거리 행군이 없었기 때문에 고장이 적어 대단히 효과적인 공병 차량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1930년대 초반만 해도 제대로 된 대전차 병기가 없던 국민당군을 상대로 89식은 나름 선전했다.
당시 할힌골에 배치된 치하는 4대 정도밖에 없어서 89식이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군의 주력전차였는데 이 전투에서 89식은 이미 시대에 뒤쳐진 물건이었고, 소련의 BT-5, BT-7 고속전차 부대들을 맞아 속절없이 털려나갔다.[10] 89식이 장비한 57mm 90식 전차포 따위로는 89식과 비슷한 장갑을 가진 BT 전차들에게 이빨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BT 전차도 장갑이 종잇장인데다가 당시 소련의 장갑판도 저질이라 500m 이내에서 57mm 포탄이 명중하면 격파되지만, 포탄이 산탄처럼 흩어질 정도로 탄도 성능이 떨어지니 치로쪽이 매우 불리했다. 반대로 BT의 45mm 전차포는 제조기술의 열악함과 조준장치의 부실에도 불구하고 1500m에서부터 89식은 물론 치하까지도 명중하면 완전 관통할 지경이었으며, 산탄현상도 당연히 57mm 90식 전차포보단 덜했다. 게다가 속도와 험지돌파능력 또한 일본의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했다.
이렇듯 할힌골 전투는 주력전차가 대전차전이 가능해야하며, 대전차 능력의 향상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줬으나, 일본군은 이를 상큼하게 씹고 만다. 그 결과 치하는 89식 전차의 컨셉을 그대로 이어받은 채로 태평양 전쟁 초기까지 전혀 발전을 하지 않았고, 이는 압도적인 전차 전력의 영연방군과 미군의 기갑부대 앞에 힘든 전투를 강요받아야 하는 대재앙의 서막이 된다.
전차가 없고 고작 2선급 장갑차나 경전차, 유니버셜 캐리어 등을 사용하던 식민지 영국군이나 마몬-헤링턴 CTMS, 마몬-헤링턴 MTLS 경전차 등으로 무장한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들은 손 쉽게 상대할 수 있었으나 여기에서도 제대로 활약한 것은 아니어서 필리핀에서 미군의 M2A4 경전차와 M3 스튜어트 경전차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며 격파당하는 바람에 신형 전차인 치하와 교대하며 후방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나마 태평양 전쟁 초반에는 스튜어트도 수량이 적고 경전차여서 일단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으나, 중반 이후에는 호주군의 마틸다 II와 미군의 M4 셔먼이 등장하고, 말기에는 M26 퍼싱이 등장을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1] 결국 태평양 전쟁 말기, 필리핀에 89식 전차가 배치되었다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 미군이 셔먼을 몰고 구름처럼 밀어닥치자마자 후속 전차인 치하와 함께 사이좋게 미군 셔먼의 자비심없는 75mm 주포 세례 앞에 사이좋게 고철덩이로 변함으로써 기나긴 노인 학대를 마감하게 된다.
이외에 일본 본토에 남은 89식 전차는 본토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땅에 묻힌 채 토치카로 변경되었다가 패전과 함께 고철로 스크랩처리되었다.
해당 니쿠는 원래 일본군 소속의 기갑장비기에 처분되었어야 했으나, 전투장비가 아니라 비전투장비인 야포 견인 트랙터기에 처분을 피하고 대한민국 국군 편제에 들어가 운용 중, 동란 와중 사용되었다가 격파된 걸 회수한 것으로 추정된다.[15]
다른 가능성이 높은 의견으로는 제주도에서 주둔하던 결7호 작전을 수행하던 일본 제58군이 철수 직전, 땅에 파묻은 것을 후일 발견해 이관했다는 설인데, 이에 대한 증거로는 우선, 니쿠는 주로 야포나, 비행기 견인용 토잉카로도 주로 이용되었으나, 제일 많이 이용된 용도는 바로 150mm 가농포 견인용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 내에는 150mm 가농포가 투입된 곳은 없으나, 대신 비슷한 중량의 120mm 해안포의 경우, 요새화를 진행하던 제주도에 많이 배치되었던 것이 확인되었기에, 따라서 58군이 운용하던 니쿠가 전후 의도적으로 매장되었든, 유실되었든 하여 종전 후, 해당 니쿠를 발견 후 육군기계화학교에 이관했다는 것이 골조이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여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치하, 하고와 더불어 일본군이 주력으로 사용한 전차이나, 전간기에 개발된 탓에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아이고/치로라고 되어있는 특이 케이스.
'치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같은 게임에서 등장하는 M4 셔먼이나 6호 전차 티거보다도 원본과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름과 플레이버 텍스트를 보면 이 치로가 확실. 아래는 그 플레이버 텍스트의 전문이다.
대물저격총도 아니고 평범한 소총 따위에 뚫리는 걸 보니 확실히 전차는 아니다 게다가 셔먼은 스토리 후반부에 개수받으면서 아이셔먼으로 강화되었기 때문에 리벤지 매치고 뭐고 꿈이고 희망이고 없었다. 다만 이건 스토리상의 취급이고 실제 카드 성능은 전차 카드들 중 최강. 5성인 티거의 스킬은 대 하후돈 덱이 아닌 이상 잉여인 돌진이고, 셔먼은 메이저 스킬인 방어가 붙어있지만 등급이 3성, 파이어플라이는 1성이며 바리에이션인 강철의 파이어플라이도 5성이지만 스킬이 애매한 억압이다. 반면 치로는 4성이라는 낮지 않은 등급에 메이저 스킬인 폭격이 붙어 있으며 초반엔 저코스트일 수록 유리한 폭격 특성상 저코스트인 치로는 초기 딜덱용으로 굉장히 쓸모있는 카드다. 게다가 스토리상에서도 치로의 현 주인(?)인 나디르샤가 티거와 함께 직접 동료 인증하셨다.
상륙정인 대발동정에 육전대와 함께 탑승했다는 장비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고 전차(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극장판에서는 치하탄 학원의 치하 떼를 지휘해 대학 선발팀의 M26 퍼싱 2대(...)를 잡았는데 이것도 본인의 화력으로 부순게 아니며 최종장에서는 BC자유 학원의 1차 대전 구식 병기인 마리의 르노 FT(...)[16] 와 치하탄 학원의 한 체급 아래인 후쿠다 하루의 하고에게 박살나기도 했다. 또한 블루레이 특전 영상에선 포르쉐 티거로 둔갑당하는 영예를 얻기도 한다(...)
이딴 고물 구닥다리 저질 전차가 주역 팀의 일원으로 나온 이유는 사실 제작진이 기획 당시 처음 현장답사를 간 육자대 기지에 전시되어 있던 게 89식이었고 "그래도 일본산 전차니 기본은 하겠다" 라는 생각으로 넣었으나 실상은 일본군 꼬라지가 그러했듯이 고철덩이 그 자체였고 결국 화제를 돌려서 38(t)가 담당할 예정이었던 경전차 역할을 몰아주는 것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덕분에 주행력과 가속력, 신뢰성 등은 고증과 무관하게 엄청나게 빠른 전차가 되었다.[17] 그래도 이런 점을 빼면 저질 위력을 그대로 재현[18] 하는 등 나름대로 현실적인 범주 내에서 활약했다는 평이 많다.
유명한 밈 중 하나인 2차대전 전차개그에서 일본군 전차로 나온다.
1. 개요[편집]
일본 제국에서 전간기에 개발되어 제2차 세계 대전과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운용한 중형전차. 일본 최초의 자국산 실용 전차이기도 하다. 별명은 이고, 치이, 치로.
2. 제원[편집]
3. 시제 1호 전차/87식 중(中)전차[편집]
일본군의 전차 국산화 계획은 1925년 일본군 육군기술본부(陸軍技術本部)가 추진한 국산 전차 프로젝트에서 출범한다. 원래 군은 예산을 절약하기 위해 수입으로 충당하려는 계획이었으나 육기본이 세계 수준의 전차를 개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임에 따라 국산화로 전환한다. 그리하여 등장한 시제 1호 전차는 첫 개발 치고는 외제 수입 전차와 비해도 손색없는 성능이었으나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일본의 열악한 도로, 철도 인프라에 비해 18톤이라는 중량은 지나치게 무거웠던 것이다. 이는 최초 군부의 요구에서 6톤이나 초과한 것이었고 그로 인한 느린 속도와 늘어난 연료 소비량 또한 예산 책임자의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결국 군부는 10톤으로 중량 제한을 두고 경전차의 개발을 요구했다.[2]
이에 1927년부터 영국 빅커스 사의 빅커스 미디엄 마크 III를 모델로 설계 작업이 개시, 1929년 4월에 89식 전차라는 이름으로 설계가 완료된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 이 전차는 중형전차로 체급이 변경되는데, 개발과정에서 당초 예정했던 것보다 중량이 다소 증가되어 10톤이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당시 일본군의 전차분류는 10톤 미만을 경(輕)전차, 20톤 미만을 중(中)전차, 20톤 초과를 중(重)전차로 분류하고 있었다.
원래 이 전차의 생산은 시제 개발을 담당한 오사카 포병공창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지만 생산능력부족 문제가 지적, 미쓰비시 중공업이 이에 참여하여 양산에 들어간다. 1931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89식 중(中)전차는 곧 일본제국 육군 및 일본 제국 해군(해병대)의 기갑 전력의 주력이 된다.
4. 성능[편집]
도입 당시만 하더라도 90식 57mm 단포신 주포의 화력은 쓸만한 것이었고, 장갑도 대전차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못써먹을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1931년 기준으로 89식 중전차에 비견할만한 10톤 이상의 중형 전차를 보유한 다른 열강은 오직 소련과 영국뿐이었다. 당시 세계 1류 강대국이었던 영국이나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극도로 두려워했던 소련 정도 아니면 열강들조차도 탱켓이나 경전차 선에서 만족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르고도 시베리아와 중국 대륙에 야심이 있던 일본제국은 해당되지 않았지만.[3] 일단 시험 단계에서 보병지원용 단포신 37mm 속사포의 직사(150m)를 막아냈고 군부는 이에 만족했다. 다만 포탑은 2명이 탑승할 정도로 크기가 작았기 때문에 포탑 전면에 공축기관총을 설치할 수 없었고, 포탑 내 기관총을 후방에 설치해 이를 사격하려면 포수가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 뒤 포탑을 표적을 향해 다시 돌려서 사용하는 문제가 있었다.[4]
일단 개발 당시엔 일본 육군의 전통적 가상 적군인 소련군의 기계화율도 당시에는 일본 이상으로 낮았기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실제 상대가 전차나 대전차포를 거의 보유하지 못했던 중국 군벌과 국부군 정도였기 때문에 단순히 진지 공략용 내지는 대보병전만을 생각해 본다면 그 상황에선 89식은 그럭저럭 활약을 할 수 있었던 셈.[5]
하지만 호평을 받던 시절에도 문제가 없진 않았다. 특히 현가장치의 성능이 떨어져 진동이 심했고 때문에 전륜 베어링이 종종 망가지는 바람에 이동 중에도 늘 그리스를 발라주어야 했다. 그리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전륜 자체가 빠져버리는 심각한 파손이 일어났다. 무한궤도도 연철로 만들었기 때문에 좀 큰 돌이라도 밟으면 핀이 부러지거나 궤도 자체가 휘는 경우가 많았다. 포방패 사이의 틈이 꽤 넓어 그 틈으로 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그나마 포방패의 문제점은 을형에서 개선된다.
엔진의 경우에는 초기에는 독일제 다임러 가솔린 엔진(118hp)을 라이센스 생산한 것을 탑재해서 생산했으나 경비 절감을 목적으로 미쓰비시가 만든 국산 디젤 엔진<이호기(イ号機)>(118hp)을 탑재하는 개량을 거치게 된다.
이렇게 디젤 엔진으로 개수하게 된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연비 개선과 피탄시 화재 발생을 막기 위함이라는 이유를 제시했으며, 이유 자체는 타당하였으나, 일단 분명히 연비는 개선되었지만 첫 국산 엔진의 성능이 형편없어 일선의 불만이 많았다. 출력이 고르지 못하고 야금기술 부족으로 엔진 실린더가 타버리는 고장이 잦았던 것이다. 게다가 디젤 엔진이 지나치게 무거워 모처럼 개선된 연비를 깎아먹었다.
속도의 경우에도 문제가 있었다. 물론 제원상으로는 26km/h의 속도를 기록했으므로 나름대로 준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런 수치는 제대로 된 포장도로에서나 나오는 것으로, 비포장도로에서 주행만 하면 앞서 언급한 무한궤도와 현가장치의 문제 때문에 속도가 팍 떨어진다. 당연히 험지주행은 안하는 것이 좋을 정도였으니, 국부군을 격파하더라도 전차 주제에 추격전을 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후속전차라고 볼 수 있는 치하는 주로 속도와 주행성능에 중점을 둬서 개량했다. 당장 화력은 동등하고 방어력은 약간 상승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장갑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는데 명색이 중형전차인 물건의 '전면' 장갑이 고작 17mm로 현대의 BTR은 커녕 동시대의 장갑차인 경정찰장갑차보다도 방어력이 낮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르노 FT '경'전차의 8~22mm 장갑보다 낮은 수치였다. 전차에서 장갑이 가장 두꺼운 부위인 전면장갑의 방어력이 장갑차보다도 약하니 다른 부위는 안봐도 비디오였다. 이렇게 처참한 종이장갑이다보니 M1 개런드에도 격파당한 기록이 있다. 그나마 국민혁명군이 사용하던 독일제 7.92mm 소총탄과 기관총탄은 간단하게 튕겨내버림으로써 합금 장갑판을 가진 10톤이 넘는 30년대 중형전차로서의 가치는 증명하긴 했다.[6]
5. 형식[편집]
크게 갑형과 을형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초기 생산분인 휘발유 엔진 탑재형을 <갑(甲)형>, 후기 생산분인 디젤 엔진 탑재형을 <을(乙)형>이라 구분했다.
하지만 디젤 엔진의 수급 상황이 좋지 않아 을형의 형태를 하고 있어도 갑형의 휘발유 엔진을 단 변종도 흔하다. 일단 약칭으로 갑형을 <치이(チイ)>, 을형을 <치로(チロ)>로 지정했으나 거의 쓰이지 못했다.[7]
초기형인 갑형의 경우 조종석과 전방기총 사수석의 위치가 우측통행을 하는 국가 기준인 좌-우로 배치된 반면 후기형인 을형은 일본이 적용한 좌측통행 형식인 우-좌 순으로 배치되었다.
6. 파생형[편집]
6.1. 92식 8톤 견인차 니쿠[편집]
일본군이 운용했던 치로 차대 기반의 8톤 견인 트랙터이다. 원본 치로처럼 갑형과 을형이 있었으며, 주로 96식 150mm 곡사포를 견인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게시물을 보면 150mm 곡사포 외에도 A6M 제로 전투기나 기타 화포 및 차량을 운용하는데 사용되었다.
전쟁 중 당시 일본령 조선에 배치되었던 1량을 제외한 전량이 유실되었으며, 그 1량은 현재 육군기계화학교에 전시 중에 있다.
6.2. 장갑작업기[편집]
전투공병전차 파생형. 장비를 교체하는 것으로 토치카 공격용 전차, 지뢰제거 전차, 가교 전차, 화염방사 전차 등으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갑(甲)형부터 무(戊)형까지 5종이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소련과의 만주에서의 전투를 상정하고 있던 일본군은 소련의 국경 돌파 및 밀림, 늪지대를 돌파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여겨 1929년 연구방침을 제정하여 1930년에 장해물 제거 및 토치카 파괴를 주 목적으로 하는 전투공병전차의 개발에 착수했고, 1931년 6월에 89식 중전차 차체에 좌우 궤도 공간장갑과 포탑, 리턴 롤러 2개를 제거한 개량품 시제차량이 미쓰비시에서 완성된다. 완성된 시제차량은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참호파기, 화학무기 살포 및 제거, 화염방사, 지뢰 제거 등의 장비들을 장착 할 수 있도록 개발하였다.
개발이 완료된 시제차량은 공병학교로 보내져 시험운행에 들어갔고, 접이식 가교등의 추가 장비를 설치하는 개량을 거쳐 1936년에 96식 장갑작업기라는 이름으로 임시 제식화 되었다.
1937년에는 원본 치로와 마찬가지로 디젤 엔진으로 엔진이 변경되고 을(乙)형이 개발되었다. 그후 1944년까지 병(丙)형과 정(丁)형, 무(戊)형이 개발되었다. 처음에는 다양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개량과정을 거치며 최종형인 무형은 그 기능이 4가지로 좁혀졌고, 그 대신에 단일 기능을 갖춘 다양한 공병전차의 개발이 진행되었다고 한다.[8]
1934년에 독립 혼성 제 1여단 독립 공병 1개 중대에 처음 배치가 이루어졌고, 1937년에 중국 전선에 실전 참가하고 화염 방사 보병 지원을 실시했지만 1000km 가까이 되는 장거리 행군으로 고장이 속출했다고 한다.
1939년에는 전문 운용 부대로 독립 공병 제 5연대가 창설되었다.
태평양 전쟁 발발 후 1942년에 전차 사단 의 창설에 따라 장갑 작업기는 3개 전차 사단과 교도 전차 여단의 공병대에 분배되었다. 각 전차 사단의 공병대는 정수에 맞추어 24대가 배치되었다고 하는데, 중국 전선과는 달리 장거리 행군이 없었기 때문에 고장이 적어 대단히 효과적인 공병 차량이었다고 한다.
7. 실전[편집]
7.1. 만주사변[편집]
치로의 최초 실전 투입 기록이자 전성기 시절이다. 다른 수입 전차 및 기존 자국 경전차보다 훨씬 운용 실적이 좋아 군부에 중형전차의 필요성을 완벽하게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만 열하작전에서는 상기의 결함으로 이동중에 탈락차가 속출, 결국 투입 차량 전부가 고장으로 전선 앞에서 멈추는 추태를 보여 결국 군부가 신형 중형전차, 즉 후일의 97식 전차 치하의 개발을 서두르게 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1930년대 초반만 해도 제대로 된 대전차 병기가 없던 국민당군을 상대로 89식은 나름 선전했다.
7.2. 중일전쟁[편집]
만주사변 이후로 지속적으로 일본군의 전차 전력으로 기용되었으나, 1930년대부터 국민당군도 장제스의 군 현대화 사업들을 거치게 되어 나치 독일과 소련, 미국 등지에서 대전차포나 전차를 상당수 도입하기 시작한다. PaK 36의 경우 아예 중국 현지 공장에서 라이센스 생산까지 했다. 겨우 소구경 보병포를 막는 수준인 경장갑의 89식은 목숨에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7.3. 할힌골 전투[편집]
할힌골 전투 때는 소련의 BT-5, BT-7 쾌속전차의 45mm 20-K 전차포를 맞고 벌집이 되었다. 그리고 장착한 90식 57mm 전차포는 '산탄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명중률이 좋지 않아 사실상 대전차능력이 제로에 가까웠다. 관통력은 단포신 치고는 나쁘지 않은 정도였다고 하지만, 그래도 전차 상대로 교전할 위력은 안 나왔다. 초기에는 이것으로 일부 중국 군벌이 운용하던 르노 FT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가능은 했지만 실제 제대로 된 적 전차와의 교전은 위에 언급된 할힌골 전투가 처음이었다.
당시 할힌골에 배치된 치하는 4대 정도밖에 없어서 89식이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군의 주력전차였는데 이 전투에서 89식은 이미 시대에 뒤쳐진 물건이었고, 소련의 BT-5, BT-7 고속전차 부대들을 맞아 속절없이 털려나갔다.[10] 89식이 장비한 57mm 90식 전차포 따위로는 89식과 비슷한 장갑을 가진 BT 전차들에게 이빨조차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BT 전차도 장갑이 종잇장인데다가 당시 소련의 장갑판도 저질이라 500m 이내에서 57mm 포탄이 명중하면 격파되지만, 포탄이 산탄처럼 흩어질 정도로 탄도 성능이 떨어지니 치로쪽이 매우 불리했다. 반대로 BT의 45mm 전차포는 제조기술의 열악함과 조준장치의 부실에도 불구하고 1500m에서부터 89식은 물론 치하까지도 명중하면 완전 관통할 지경이었으며, 산탄현상도 당연히 57mm 90식 전차포보단 덜했다. 게다가 속도와 험지돌파능력 또한 일본의 어느 전차보다도 우수했다.
이렇듯 할힌골 전투는 주력전차가 대전차전이 가능해야하며, 대전차 능력의 향상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줬으나, 일본군은 이를 상큼하게 씹고 만다. 그 결과 치하는 89식 전차의 컨셉을 그대로 이어받은 채로 태평양 전쟁 초기까지 전혀 발전을 하지 않았고, 이는 압도적인 전차 전력의 영연방군과 미군의 기갑부대 앞에 힘든 전투를 강요받아야 하는 대재앙의 서막이 된다.
7.4. 태평양 전쟁[편집]
전선 초기부터 투입되었고 패전 때까지도 현역자리를 유지했다.
전차가 없고 고작 2선급 장갑차나 경전차, 유니버셜 캐리어 등을 사용하던 식민지 영국군이나 마몬-헤링턴 CTMS, 마몬-헤링턴 MTLS 경전차 등으로 무장한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들은 손 쉽게 상대할 수 있었으나 여기에서도 제대로 활약한 것은 아니어서 필리핀에서 미군의 M2A4 경전차와 M3 스튜어트 경전차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며 격파당하는 바람에 신형 전차인 치하와 교대하며 후방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나마 태평양 전쟁 초반에는 스튜어트도 수량이 적고 경전차여서 일단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으나, 중반 이후에는 호주군의 마틸다 II와 미군의 M4 셔먼이 등장하고, 말기에는 M26 퍼싱이 등장을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1] 결국 태평양 전쟁 말기, 필리핀에 89식 전차가 배치되었다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승리한 미군이 셔먼을 몰고 구름처럼 밀어닥치자마자 후속 전차인 치하와 함께 사이좋게 미군 셔먼의 자비심없는 75mm 주포 세례 앞에 사이좋게 고철덩이로 변함으로써 기나긴 노인 학대를 마감하게 된다.
이외에 일본 본토에 남은 89식 전차는 본토 결전을 준비하기 위해 땅에 묻힌 채 토치카로 변경되었다가 패전과 함께 고철로 스크랩처리되었다.
7.5. 인도차이나 전쟁[편집]
전후에 다시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인도차이나 반도 등지에서 압수된 치로들은 프랑스군 소속으로 증가장갑을 용접하는 등의 개조를 거친 뒤 사용되었다.#[12] 이중 일부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소모되었다.
8. 운용국[편집]
8.1. 일본[편집]
원조 사용국. 일본 제국 시절부터 사용해오고 있는데, 패전 이후 대부분의 차량이 스크랩 처리를 받았으나, 1대가 기동계가 복원된 상태로 쓰치라의 자위대 무기학교에 보존되어 현재는 의장용으로 운용 중에 있다.
8.2. 대한민국[편집]
전후, 일부 92식 8톤 견인차 니쿠를 최소 1량 이상 대한민국 국군 편제로 운용한 것으로 추정되며[14] 현재는 육군기계화학교 내 M110 왼편에 전시 중에 있다. 특히 해당 니쿠는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마지막 니쿠로, 엄청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해당 니쿠는 원래 일본군 소속의 기갑장비기에 처분되었어야 했으나, 전투장비가 아니라 비전투장비인 야포 견인 트랙터기에 처분을 피하고 대한민국 국군 편제에 들어가 운용 중, 동란 와중 사용되었다가 격파된 걸 회수한 것으로 추정된다.[15]
다른 가능성이 높은 의견으로는 제주도에서 주둔하던 결7호 작전을 수행하던 일본 제58군이 철수 직전, 땅에 파묻은 것을 후일 발견해 이관했다는 설인데, 이에 대한 증거로는 우선, 니쿠는 주로 야포나, 비행기 견인용 토잉카로도 주로 이용되었으나, 제일 많이 이용된 용도는 바로 150mm 가농포 견인용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시기 한국 내에는 150mm 가농포가 투입된 곳은 없으나, 대신 비슷한 중량의 120mm 해안포의 경우, 요새화를 진행하던 제주도에 많이 배치되었던 것이 확인되었기에, 따라서 58군이 운용하던 니쿠가 전후 의도적으로 매장되었든, 유실되었든 하여 종전 후, 해당 니쿠를 발견 후 육군기계화학교에 이관했다는 것이 골조이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여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8.3. 네덜란드령 동인도[편집]
네덜란드령 동인도 육군 제 3보병연대 측에서 일본군의 치로를 1대 노획해 운용한 이력이 있다.
8.4. 미국[편집]
태평양 전쟁 당시 노획한 차량 일부를 운용하였다.
8.5. 프랑스[편집]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일본 제국군 측에서 압수한 차량들을 M24 채피 전차를 수령받기 전까지 운용했다.
9. 미디어[편집]
치하, 하고와 더불어 일본군이 주력으로 사용한 전차이나, 전간기에 개발된 탓에 그렇게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9.1. 게임[편집]
9.1.1. 월드 오브 탱크[편집]
일본 중전차 트리를 시작하는 2티어 중형전차로 을형이 추가되었다. 95식 하고보다 시야가 좋고 포가 더 좋지만, 오로지 57mm 똥포를 낄 수 밖에 없는데다가 추중비가 9미만이라서 다루기가 애매하다. 일반적으로 크레딧이 아주 많지 않는한 2티어 전차를 훈련시키는 경우도 드물고 금방 졸업하기 때문에 50퍼센트 승무원이 대부분인데 57mm 똥포와 합쳐지면 최악의 정확도를 자랑한다. 기동전은 역시 꿈도 못 꾼다. 그리고 이름이 89식 이고
9.1.2. 큐라레: 마법 도서관[편집]
'치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같은 게임에서 등장하는 M4 셔먼이나 6호 전차 티거보다도 원본과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름과 플레이버 텍스트를 보면 이 치로가 확실. 아래는 그 플레이버 텍스트의 전문이다.
참고로 이 게임에서의 취급은 실제 성능 이하로, 메인 스토리에서는 아주 짧게 꿈속에서 알카트라즈와 함께 등장하는 것이 전부고 시즌 17에서는 과거회상에선 셔먼에게 75mm 전차포로, 본 스토리에선 발터 슈미트에게 전차조차 아니라는 평을 들으며 저격소총 한방에 리타이어.제2차 강철 대전에 출전했던 전차 소녀.
전투원으로서는 부적합할 정도로 허약했지만, 그녀가 속해 있던 세력은 절망적인 전세를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는 심정으로, 가엾은 그녀를 억지로 전장에 밀어 넣었다.
결국 그녀는 다른 세력의 강력한 전차 소녀들 앞에서, 귀여운 용모로 동정심을 사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슬픈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9.1.3. 함대 컬렉션[편집]
상륙정인 대발동정에 육전대와 함께 탑승했다는 장비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9.1.4. 도미네이션즈[편집]
자세한 내용은 이고 전차(도미네이션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1.5. 워 썬더[편집]
일본 예비 전차로 갑형이 등장. 이전 대전차고폭탄 패치 이전까지는 성능이 최악에 가까웠으나 업데이트 이후로 고폭탄 성능이 향상되어 상당히 쓸만해졌다.
9.2. 만화[편집]
9.2.1. 걸즈 앤 판처[편집]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 소속으로 을형이 나오며, 집오리팀이 몰고 다닌다. 세인트 글로리아나 여학원과의 연습 경기에서는 루쿠리리의 마틸다 II 후방에 주차장을 이용해 매복한 채 연속으로 영거리 사격을 날리지만 외부 연료통만 파괴했을 뿐 격파에는 실패해 도망도 치지 못하고 역관광당한다. 1회전 선더스 대학 부속 고교전에서는 플래그 차량인 아리사의 M4A1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아리사한테서 도망다니다가 나오미가 쏜 셔먼 파이어플라이의 17파운더에 후면을 얻어맞고 탈락한다. 2회전을 다룬 OVA '이것이 진짜 안치오전입니다!'에서는 CV-33을 4대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나마 이것도 상대가 탱켓이라 가능했던 것. 준결승인 프라우다 고교전에서는 플래그 차량을 맡고 논나의 IS-2로부터 도망치는데 경기가 끝나고 나니 격파 판정이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손상이 심했다. 그리고 쿠로모리미네 여학원전에서는 8호 전차 마우스를 상대로 그 위에 올라가 포탑 회전을 방해했다. 이런 도중에 상대 전차장이 경전차 취급을 하자 중형전차라고 반박한다(...) 그 후로는 별 다른 활약도 없이 쓰레기스러운 행동만 하며 티거 2에게 포를 쏘면서 깝죽대다 손상 하나 없는 티거 2의 공격 한방에 사지가 찢겼다.
극장판에서는 치하탄 학원의 치하 떼를 지휘해 대학 선발팀의 M26 퍼싱 2대(...)를 잡았는데 이것도 본인의 화력으로 부순게 아니며 최종장에서는 BC자유 학원의 1차 대전 구식 병기인 마리의 르노 FT(...)[16] 와 치하탄 학원의 한 체급 아래인 후쿠다 하루의 하고에게 박살나기도 했다. 또한 블루레이 특전 영상에선 포르쉐 티거로 둔갑당하는 영예를 얻기도 한다(...)
이딴 고물 구닥다리 저질 전차가 주역 팀의 일원으로 나온 이유는 사실 제작진이 기획 당시 처음 현장답사를 간 육자대 기지에 전시되어 있던 게 89식이었고 "그래도 일본산 전차니 기본은 하겠다" 라는 생각으로 넣었으나 실상은 일본군 꼬라지가 그러했듯이 고철덩이 그 자체였고 결국 화제를 돌려서 38(t)가 담당할 예정이었던 경전차 역할을 몰아주는 것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덕분에 주행력과 가속력, 신뢰성 등은 고증과 무관하게 엄청나게 빠른 전차가 되었다.[17] 그래도 이런 점을 빼면 저질 위력을 그대로 재현[18] 하는 등 나름대로 현실적인 범주 내에서 활약했다는 평이 많다.
9.3. 인터넷 밈[편집]
9.3.1. 2차대전 전차개그[편집]
유명한 밈 중 하나인 2차대전 전차개그에서 일본군 전차로 나온다.
10. 모형[편집]
10.1. 프라모델[편집]
11.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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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일본에서 자위대가 의장용으로 운용 중.[갑(甲)형] [을(乙)형] [2] 이 시제 1호 전차의 뒷이야기는 95식 중전차 항목 참조.[3]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30년대 초반까지 대부분의 열강들은 군비를 억제하기 위해 신무기 도입에 소극적이었다. 독일은 아예 전차 보유를 금지당해 1934년에나 1호 전차를 간신히 개발할 수 있었다. 1차대전 승전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 역시 30년대 초반에는 르노 FT의 복제판이나 다름없는 피아트 3000 이나 카든-로이드 탱켓의 이탈리아판인 CV-33를 개발해 배치하는 선에서 만족한 상태였다. 미국 역시 35년에야 M2 경전차를 개발했다.[4] 일본의 이런 포수를 배려하지 않은 설계는 치리까지도 이어졌다. 98식 경전차 케니와 그 개량형, 그리고 플로트를 달고있어 전방 기총 사격에 제한이 있는 특 2식 내화정 카미에만 공축기관총을 장착했다.[5] 전차의 유무에 따른 전력차이는 싱가포르 전투에서 전차전력이 거의 전무하던 영국군이 치하 수준의 전차를 운용하던 일본군에게 무너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6] 만주사변 이전 중국군도 대전차전 경험이 아예 없진 않았다. 군벌 내전 당시 봉천군벌이 러시아에서 탈출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르노 FT 십수대 정도를 인수해 실전에 투입했었다. 이 전차들의 최소한 일부는 국민혁명군의 포격에 격파되기도 했다.[7] 89식 중전차 전반을 가리킬때 イ号라 하였고, チイ와 チロ는 각각 갑형, 을형에 명명한 것인데 이러한 가타카나 두 글자로 된 개발명칭 명명은 1930년대 중후반에 와서야 생긴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명명법은 지켜지지 않고 당대 군 자료를 보면 갑형과 을형 모두 チイ로 표기되어있다.[8] 이 "단일 기능을 갖춘 공병 전차"의 예시중 하나가 치하의 벌목 개수 버전인 호키이다.[9] 전차 측면 국적 표시가 왼쪽으로 치우친 해군용 욱일기다. 육군 깃발은 태양이 국기마냥 정 가운데에 있다. 또한 전차 정면에 있는 문양 역시 육군 전차는 오각성 문양을 쓰나 해병대 전차는 사쿠라 위에 닻이 세겨진 문장을 그 자리에 달았다.[10] 이 와중에 89식의 얼마 안 되는 성능을 제대로 뽑아 낸 니시즈미 코지로라는 일본 제국 육군 소속 전차장이 있었다. 그 열악한 전간기 성능의 89식으로 BT도 잡았다.[11] M26 퍼싱을 태평양 전선에 투입하려고 일단 12대가 1945년 5월 말에 배에 실려서 오키나와로 갔는데 도착한 건 8월 4일이라 실전 투입을 못했다. 만일 몰락 작전이 현실화되었으면 투입되었겠지만 몰락작전도 실행되지 못했으니.[12] 지금이야 C-5나 An-124 등의 대형 수송기로 실어나르면 되지만 당시엔 선박 외에는 전차를 수송할 수단이 없었고, 결국 본토에서 미국제 M24 채피 등의 제대로 된 기갑전력이 올 때까지 임시변통으로 쓴 것이다.[13] 변속기, 엔진 블럭, 차체 및 구동륜만 남아있는 상태로, 상부 엔진룸, 조종석이 모두 유실되었으며, 측면 궤도 상면 로드휠도 3개 유실된 상태이다.[14] 이는 특이하게도 해당 니쿠가 일본 제국군 특유의 황토색/올리브색 도장이 아닌, 냉전시기 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던 옅은 연두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상태로 녹이 슨 모습까지 보이기에 아마 인수받은 직후 도장을 덮어씌운 것으로 추정된다.[15] 비슷한 예로 닛산 80 트럭의 경우도 원래 일본군 소속의 수송트럭이기에 폐기처분 되었어야하나, 역시 마찬가지로 민간이나, 관청, 혹은 신생 대한민국 국군에 불하되어 6.25 전쟁 시기 사용되었다. 아마 해당 니쿠도 동일한 케이스로 추정된다.[16] 게다가 이게 해당 라운드에서 르노 FT 플래그차의 유일한 킬카운트다.[17] 걸판은 스피디한 전차 액션 신 연출을 위해 화력과 장갑은 몰라도 기동력, 신뢰성에서는 고증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마우스가 정상적으로 대전차전을 할 수 있고, 야크트티거와 엘레판트가 5호 전차 판터의 뒤를 무리 없이 따라가거나 르노 B1이나 처칠 전차가 그럭저럭 준수한 기동력을 보이는 등.[18] 애니화된 모든 작품을 통틀어 89식이 격파한 적 전차는 안치오 고교의 탱켓 CV-33 4대가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