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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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각지의 충렬사


1. 개요[편집]


충렬사()는 동아시아 문명에서 국가에 충성을 바쳐 자신을 희생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설치한 사당을 말한다.


2. 각지의 충렬사[편집]



2.1. 대한민국[편집]



2.1.1. 충렬사(통영)[편집]


후임 3도수군통제사였던 이운룡 장군이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으로, 1606년에 만들어졌다.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면서 김화의 충렬서원처럼 교육 시설이기도 했다. 사적 제236호.

한편 통영에는 1599년에 처음으로 세워진 이순신 장군 사당인 착량묘도 있었다.


2.1.2. 충렬사(남해)[편집]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사당. 인조 10년(1632년)에 세워졌으며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렬"(忠烈)이라는 현판도 같이 사용했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잠시 이곳에 모셔졌는데 그 후로 작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효종 9년(1658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의 사당이 완성되었고 현종 4년(1663년)에는 통영 충렬사와 함께 사액 현판을 받았다.

남해대교 바로 앞에 위치해있다. 사적 제233호.


2.1.3. 충렬사(충주)[편집]


임경업 장군을 모셨다. 사적 제189호.


2.1.4. 충렬사(부산)[편집]


임진왜란순국송상현정발 등 90여 위를 모셨다.


2.1.5. 충렬사(남원)[편집]


임진왜란남원성 전투에서 순국한 7위를 모셨다.


2.1.6. 충렬사(강화)[편집]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 등을 모셨다.


2.1.7. 충렬서원(김화)[편집]


철원에 흡수된 휴전선 남쪽의 김화가 아니라, (북)강원도에 속해 있는 김화(옛 금성현)에 있다. 병자호란 때 순절한 홍명구를 모셨으나, 6.25 전쟁 때 폐허가 되었다.


2.1.8. 충렬사(정읍)[편집]


전라북도 정읍시 충정로 228-13 (수성동 614-3)에 위치한 이순신의 사당. 정읍 시청 바로 옆이며 사당을 중심으로 충무 공원이라는 이름의 공원을 조성했다. 매년 충무공 탄신일인 4월 28일에 제사를 지낸다.

다른 충렬사와는 달리 광복 후인 1949년에 지역민들의 모금으로 창건기성회를 만들어서 건립을 시작했다가, 중간에 6.25 전쟁으로 조성을 중단했고 1963년 4월에야 정식으로 준공하였다. 정읍 또한 이순신과 연관성이 있는 곳인데,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가 되기 바로 전[1]에 정읍 현감에 부임하였다. 또한 정읍현이 설치된 후 초대 현감이 바로 이순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연과 지역민들의 존경심이 합쳐져서 충렬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2.2. 중화민국(대만)[편집]



2.2.1. 대륙 시절의 충렬사[편집]


중화민국(대만)은 국민정부 수립 이후 자국의 국가유공자를 위한 충렬사를 대륙 곳곳에 세웠다. 수도인 난징 외에도 600곳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지방정부가 세운 것으로 중앙정부 수준의 관리가 잘 안 됐다. 대륙에 있었던 충렬사의 대부분은 중일전쟁일본군이 파괴하고 중국 공산당에서 반동문물로 지정하면서 방치되었다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어 사라졌다. 현존하는 대륙의 충렬사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은 후난성 형산에 있다.


2.2.2. 타이베이의 충렬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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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국민혁명충렬사(國民革命忠烈祠).

중화민국 건국 공로자들과 중일전쟁, 국공내전, 진먼 포격전 전사자, 일제시대의 대만에서 일본에 항거하다 희생된 자 등 중화민국을 위해 순직한 사람들을 기리는 시설로 안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작전 시 승리를 얻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불사하여 공을 이뤘으나 희생당한 자

2. 작전 시 맡은 바 최선을 다하여 죽음을 달게 받던 자.

3. 위험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가 사망하여 총통에 의해 표창령을 받은 자


면적은 5만 2천여 평방미터이며, 건물 면적은 약 5천 3백여 평방미터다. 국방부 사정편역국(史政編譯局)에 예속되었다가 1998년 7월 1일 연합후근사령부 유수업무서(聯合後勤司令部留守業務署)에 이양되고, 다시 2006년 1월1일 후비사령부(後備司令部)로 예속했다.

타이베이 충렬사가 있는 자리에는 본래 타이완호국신사(臺灣護國神社)라는 일본식 신사가 있었으며 역할은 야스쿠니 신사와 비슷해서 일본을 위해 순직한 대만인들의 위패를 모셔두었다. 일본이 물러가고 중화민국이 타이완 섬을 접수한 이후에는 한동안 신사 건물은 그대로 둔 채 중화민국 국가유공자들의 위패를 모셨고 이름을 충렬사로 바꿨다. 현재의 건물은 타이완호국신사 건물을 밀어버린 자리에 1969년 3월 25일 완공되어 운영을 시작했다.

타이베이 충렬사는 중일전쟁 사망자들을 추모하는 역할도 맡기 때문에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만행 관련 내용들도 전시되어 있다. 중국어영어 밑에 일본의 만행을 일본어로 적어 놓았다.

3월 29일과 9월 3일[2] 총통이 직접 주례하는 제사를 지낸다. 또한 4월5일 황제릉(黃帝陵)을, 총통 취임식에 쑨원 국부릉(國父陵)을 멀리서 제사지낸다고 한다.[3]

본전은 자금성 태화전을 본뜨는 등 크고 아름다운 중국황궁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매 시간 칼같은 근위병 교대식도 명물이라서 외국인 관광객이 꽤 보이는 곳. 일본인 관광객, 본토 중국인 관광객도 많이 보인다(...) 타이베이 첩운 단수이신이선 위안산역이나 타이베이 첩운 원후선 다즈역 인근이며 근처에 공자를 모시는 타이완 공묘, 초대형 호텔 원산대반점(圓山大飯店)이 있다. 국립고궁박물원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편이다. 탈중국을 추구하는 요즘의 대만에서 '중(화민)국'에 왔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타이베이 충렬사 주변은 국방부 청사, 해군 본부, 공군 본부 및 쑹산 공항 내 공군 기지 등 군사 시설이 밀집한 대만 국방의 중심지이다. 당연히 충렬사 자체 시설을 제외한 주변 군사 시설들의 사진 촬영 등은 엄격히 금지하고 있으므로, 실수로라도 충렬사가 아닌 다른 지역을 촬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2.3. 기타 지역의 충렬사[편집]


대만에는 타이베이 말고도 수많은 곳에 충렬사가 있는데 거의 대부분 일본 신사를 밀어버린 자리에 설치하였다. 타오위안 충렬사만 유일하게 신사 옆에 별도의 위치에 짓게 되어 일본 신사가 여전히 남아있다.

가오슝 충렬사의 경우 바로 앞에 수산연인전망대가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다.

진먼 섬에는 태무산 충렬사가 있다. 1958년 진먼 포격전 당시 순직한 기자들의 위패는 이곳에 모셨으며 최병우 기자의 위패도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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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라좌수사 전에 진도 군수, 가리포첨절제사에 임명된 적은 있지만, 이는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하기 위해 선조가 일부러 파격 승진을 시킨 것이라서 해당 직위에 부임하기도 전에 곧바로 다음 자리로 임명된 것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부임은 정읍 현감에서 곧바로 전라좌수사가 된 형태에다.[2] 1945년 일본이 미주리함에서 미국 등 연합국에 항복한 날이다. 중국과 대만은 이날을 2차 대전 종전일로 규정하며, 대만에서는 이 날을 '군인절'(한국의 국군의 날 해당)로 기념한다.[3] 직접 황제릉과 국부릉에 제사지내고 싶지만 갈 수가 없으니, 멀리서 황제릉과 국부릉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제사지내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임진각 근처에 실향민이 세운 망배단처럼 충렬사가 망배단의 역할도 한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