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자영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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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1.1. 축자영감설의 종류
2. 비판
2.1. 당시의 성서와 지금의 성서는 다르다
2.2. 성서 내용상의 문제와 번역의 문제 등
2.3. 애초에 이 해석법은 전통적이지도 않고 정통적이지도 않다.
2.4. 성경 내부에서의 모순점
3. 다른 영감설들
4.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공동번역)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개역개정)

디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편지(디모데후서) 3장 16절


verbal inspiration

성서(성경)이 기록된 것이 영감(靈感)을 받아서 쓴 것인데 그 영감의 방법이 축자적인 방법이라는 것. 축자(逐字)라는 단어의 뜻이 글자를 옮겨적다는 뜻이기 때문에 다른 용어로는 기계적 영감설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한국의 개혁주의 개신교 교단들도 결국 유기적 영감설을 축자영감설과 섞어서 지지하기 때문에 이 문서에서 비판하는 재세례파의 완전축자영감설과 다르다. 물론 재세례파의 성서문자주의를 한국교회에서 재부흥시켰다는 비판에는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성서의 기록이 신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인(개신교와 천주교 모두) 모두가 동의하는 것[1]인데 그 영감의 방법에 대한 해석은 교파별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특히 개신교에서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나온 교리가 바로 이 축자영감설과 성서무오설이다. 그중에서 완전축자영감설은 그 해석 중에서 가장 근본주의적인 해석이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글자를 옮겨적은 것이기에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신이 직접 골라서 알려준 글자이기 때문에 애초에 성경 자체의 단어에도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2]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기독교 교파들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 전통을 높게 여기는 교파들(천주교, 성공회 고교회파, 루터교회[3])와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 애초에 기독교 교회는 전통 vs 성경이라는 주제로 꾸준히 논쟁을 벌여왔기에 당연하다. 정교회도 천주교의 성상과 주교 체계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갈라졌고, 개신교야 잘 알려졌다시피 종교개혁으로 성경의 권위를 더욱 우선시하며 갈라졌다. 그래서 의외로 축자영감설은 개신교만 지지하는 학설이 아니다.

게다가 사회적인 통념과 반대로 결국 성경의 권위를 교회 전통보다 높게 여기는 종파들도 건전한 개신교 신앙과 복음주의가 기준이지,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가 기준이 아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축자영감설은 인간의 오류를 강조하기 때문에 사실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옳다는 의미이라서 기독교 종파나 교단마다, 성직자(목회자)마다 다른 학문의 연구성과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다. 사실 이러한 신앙 자체는 비판하긴 어렵다. 어차피 신앙을 지키려는 고전신학은 형이상학의 영역이고, 이를 형이하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는 시도도 신에게 있어서 교만죄로 해석될 수 있기에 종교계에서는 고전신학과 형이하학을 굳이 일치시킬 필요가 없다. 게다가 오히려 자연과학계는 종교계가 신앙과 과학을 일일이 일치시켜가면서 자신들에게 개입할 바에야는 차라리 자신들을 방치하길 원한다. 의외로 자유주의 신학계에서 보수주의 신학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는 마타도어들은 오히려 과학계의 정설은 커녕 아직 가설에만 머물러 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솔직히 자연과학계에서는 어차피 형이상학을 다뤄서 연구성과를 내지도 못하면서 자신들을 이용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인 통념처럼 성경에 무엇을 적든지[4]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완전축자영감설(성서문자주의)이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을 다른 주류 교파에게 반영시키려고 시도하기에[5] 성서비평학/역사비평학 등의 신학적 흐름들과 타협할 여지가 완전히 없어지고, 종교학/문화인류학 등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과도 접점을 잃게 된다. 다시 말해, 인류가 수천년간 이성 혹은 신학으로 쌓아올린 성과들을 무시 내지는 적대시해야 되는 입장이 된다. 결국 자신들이 삼위일체 하느님(하나님)의 견해를 완벽히 안다고 착각해서[6] 자신들의 견해만 옳고 다른 개신교 교파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환상에 빠져서 이단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상술한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교파들도 결국 이를 깨닫고 대부분 (진정한 의미의) 완전축자영감설 혹은 유기적 영감설을 지지하고 근본주의를 포기하고 있다.

1.1. 축자영감설의 종류[편집]


단순히 기계적으로 받아적은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기계적으로 받아적게 한 방법에 대해서도 개신교 교파들의 견해가 갈린다.
  • 축자영감된 비중에 따른 분류
    • 완전축자영감설 : 두말할 것 없이 성서 전체[7]가 100% 축자영감되었다고 믿는 경우. 이 항목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주로 이쪽이다.
    • 부분축자영감설 : 전체적인 맥락은 축자영감되었으나 일부 단어나 문화적인 부분은 축자영감되지 않았다고 보는 부분.

  • 축자영감의 방식에 따른 분류
    • 받아쓰기 : 성령이 옆에서 불러주고 사람이 받아적었다는 것.
    • 기계적 영감설 : 옆에서 불러주면 틀리게 받아적을 수 있으므로 아예 성서 저자의 팔을 붙잡고 그 팔을 움직여서 기록하였다는 것. 심령학에서 말하는 자동서기(Automatic writing)와 같다. 단지 그 주체가 일반적인 영이 아니라 성령이란 점이 다를 뿐. 뜨억할 수준의 얘기지만 의외로 이걸 지지하는 목사들이 많지만 사실 이 또한 인간의 오류를 강조한다면 유기적 영감설과 똑같아진다. 이 문서에서 비판하는 축자영감설은 인간의 오류를 배제하는 기계적 영감설이다.
    • 성령감동축자영감설 : 쉽게 말해서 성령에 신들려서 지시하는대로 썼다는 것. 일반적인 성령감동설[8]과는 다르게 개인의 의지나 사고방식이 100% 배제된 상태에서 썼다는 것이다.

2. 비판[편집]



2.1. 당시의 성서와 지금의 성서는 다르다[편집]


일단, 디모데후서나 다른 신약성경이 쓰일 당시의 성경과 지금의 성경이 다르다는 설이다. 애초에 신약성경이라는 구분도 없었고, 정경이라는 개념이 잡힌 시기는 200년이 훨씬 더 지난 시기이기에 당시의 성서로 접근한다면 구약만이 여기에 해당된다. 즉, 가장 보수적인 완전축자영감설을 인정하더라도 이것은 당시에 구약성경만 해당되고 신약은 벗어나게 되므로, 전체 66권[9]중에서 신약 27권이 빠진 39권만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 이 방식으로 본다면 영감설을 언급한 디모데후서는, 영감을 얻지 못한 성서일 수도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2.2. 성서 내용상의 문제와 번역의 문제 등[편집]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축자영감되었기 때문에 성경이 오류가 없다라는 부분을 확대해석하여 과학적인 영역에까지 오류가 없다고 주장해 버리면 심히 곤란해진다. 단적인 예로 구약에서 토끼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라고 기록[10]된 것만 봐도 그렇다. 좀 더 나가면 천동설까지 가게 된다. 자세한 건 성서무오설 참조.

그리고 성서비평학상으로 보면 애초에 성서의 원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성경의 글자 수 만큼의 사본은 존재한다.) 과연 본문이 아닌 사본도 영감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인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성경의 사본의 내용을 보면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는 내용들이 존재한다. 성경상에 없음이라고 표기된 부분이다 대괄호 처리한 부분들이 바로 사본들끼리 다른 내용이 존재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대표적 사례가 마가복음. 긴 결말과 짧은 결말이 이 문제로 생긴 것이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가 더해지면 머리가 더 아파진다. 아예 코란처럼 번역을 금지하지 않는 한 원문의 내용과 미묘하게나마 달라지는 번역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이 부분은 성경/번역항목을 참조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2.3. 애초에 이 해석법은 전통적이지도 않고 정통적이지도 않다.[편집]


9절: 성경은 은유적·상징적 화법을 쓰고 있다.

10절: 성경은 한 구절안에서 문자적·알레고리적·도덕적·전의(轉義)적·신비적 의미 등을 동시에 내포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권 1문제 9-10절

토마스 아퀴나스개신교에서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라서 찜찜하다면, 교부 시대의 관점을 보자. 그리스도교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공인 받기 한참 이전인 2세기에 이미 오리게네스가 알레고리 해석법을 성경에 도입했다. 물론 오리게네스는 관할 주교의 허락 없이 다른 주교에게 서품을 받은 문제 때문에 당시에는 영 좋지 않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법을 발전시켰고, 교부 시대의 가장 명성있는 학파 중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한편 그렇다고 무조건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을 고집하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 신천지처럼 교주 숭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완전축자영감설을 알레고리적 방법론을 사용하여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

게다가 결국 개신교의 재세례파 계열을 제외한 종교개혁가들도 성경은 직역과 연역이 섞였다고 주장했기에 결국 개신교 전통으로도 전혀 정통적이지 않다. 성경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이단들이 왜 퇴출됐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2.4. 성경 내부에서의 모순점[편집]


신이 순간순간 마음이 제멋대로 변하지 않는 한 성서 저자를 타자기 삼아 쓴 것이 맞다면 앞뒤가 맞아야 정상일 것이다.

이에 대한 부분은 성경/논란/모순 문서를 참조하자.

3. 다른 영감설들[편집]


  • 성령 감동설
  • 유기적 영감설 : 흔히들 개신교 교단들이 주장하는 축자영감설도 이 쪽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 문학적 영감설


4. 같이 보기[편집]


  • 근본주의
  • 성경
  • 성서무오설 : 성서무오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근거가 바로 이 축자영감설이다. 그러나 유기적 영감설이나 신앙적 관점에 국한한 성서무오설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기계적 영감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오류(죄, 교만, 타락)를 배제하는 완전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신이 신의 관점을 완벽히 이해했다는 환상을 갖게 되거나, 성경에 무엇을 적던 무조건 믿어야하기에 더이상 정상적인 교회가 아니라 사이비 단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교회에서 정경(과 제2경전)을 정한 것이며, 개신교 교단들도 개신교 정통 교리문답서복음주의로 상호합의한 것이다.
  • 신사도 운동
  • 예수쟁이
  • 장 칼뱅 : 완전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종파들에서 축자영감설의 시초로 주장한다. 그러나 칼뱅은 신학적 관점에서의 성서무오설을 주장했지 모든 분야에 대한 성서무오설을 주장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칼뱅이 주장한 것은 유기적 영감설이다.
  • 장로회 : 칼뱅파의 후예이며, 이들은 다른 개신교 교파와 마찬가지로 칭의론을 주장했기에 오히려 완전축자영감설을 주장한 종파들과 지독하게 사이가 나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박형룡 목사가 완전축자영감설이라고 자칭한 성서해석학을 주장한 것과 장로회를 사칭하는 소수종교들이 많아서 그런지 상당한 오해를 받고 있다. 오히려 완전축자영감설을 자칭한 장로회 칭의론을 한국교회에 각인시켜줘서 진짜 개신교 근본주의를 박살내준게 아니겠느냐는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1] 디모데후서 3:16 외에 갈라디아서 3:16이나 베드로후서 1:21에도 이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다만 디모데후서가 워낙 유명하니까 웬만한 기독교인이라면 디모데후서가 먼저 떠오를 뿐이다. 천주교 미사나 성공회 감사성찬례에서는 성경을 사제가 강독하고나서 "주님의 말씀입니다/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끝맺는다.[2] 이 오류를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신학적 오류가 되고 확대해석하면 성서에 나온 모든 것을 부정한다.[3] 국가마다 조금씩 달라서 일반화시키긴 어렵다. 일단 한국 루터교는 칼뱅교회의 영향을 받았기에 차라리 저교회파에 더욱 가깝다.[4] 재세례파와 달리 완전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국내의 개혁주의 개신교 교단들은 함부로 내용을 첨삭하지 않는다. 그리고 기존의 성서해석학을 애용하며 번역을 조심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세례파와 다르게 개혁교회에서는 굳건한 믿음을 통한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다른 주류 개신교 교단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으며 창조과학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그래서 결국 이 문서에서 비판하는 완전축자영감설과 아예 개념 자체가 다르다. 이를 유의할 것.[5] 즉, 기존의 고전신학에서 그토록 경계했던 우상숭배와 일맥상통한다. 역으로 성경을 형이하학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신앙이 변질되거나 잃어버릴 것이다.[6]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재세례파와 그 영향을 받은 이단 교단들에게 한정되는 믿음이다. 개혁교회는 사실 그냥 자신의 믿음을 전적으로 신뢰해도 상관없다.[7] 대체로 구약 39권, 신약 27권을 강조한다.[8] 성령이 내용상의 감동은 주었으나 개인의 사고와 의지는 남아있고 그게 성경 기록에 영향을 주었다는 입장.[9] 개신교 성서 기준[10] 토끼도 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레11:6) 부분인데,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다. 즉, 전지한 자가 모르는게 있다는 논리적 오류가 발생한다. 되새김질의 정의를 다른 것까지(토끼가 소화가 덜된 똥을 다시 먹는 것) 포함하게 정의한다면 해결 가능한 문제긴 하지만, 이 경우 미래에 이런 토론이 일어날 것이며 결과적으로 성경에 반감을 가지게 될 사람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결국 신은 전지자이므로 이런 논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서도 이렇게 표기했다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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