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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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음서의 에피소드[편집]
4복음서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대체적으로는 예수가 체포되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제자들 가운데 배신자가 있음을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고[1] 빵과 포도주를 들어 기도한 후 이것이 자신의 피와 살이라 말하면서 나누어준다. 여기에서 성체성사 혹은 성만찬 의식이 나오게 된다.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시고,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그들에게 돌리시며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셔라.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눠주시며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건네시자, 그들은 잔을 돌려가며 마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 잘 들어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 날까지, 나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고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자, 이 잔을 받아 나누어 마셔라. 잘 들어라. 이제부터 하느님 나라가 올 때까지는 포도로 빚은 것을 나는 결코 마시지 않겠다." 하시고는, 또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음식을 나눈 뒤에 또 그와 같이 잔을 들어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하셨다.
이 저녁식사를 두고서 유월절(재앙을 넘기는 절기)을 기념하는 저녁식사였나 아니었나에 대한 논란이 좀 있다. 유월절 식사라면 예수의 십자가 고난이 유월절에 희생되는 어린양처럼 속죄와 희생제사의 의미가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희생제사의 의미가 흐트러진다는 문제가 생기는데... 대체적으로는 유월절 식사라는것이 일반적이지만 반론도 있기는 하다.식사의 메인 메뉴가 유월절을 상징하는 양고기가 아니라 생선 요리로 밝혀졌기 때문으로, 이에 대해서는 예수를 상징하는 생선을 사용한 것으로 최후의 만찬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키는 의미라는 주장도 있다.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린토1서 11장 23-25절, 공동번역성서
하지만, 이미 신약성경은 시작부터 예수는 곧 "어린양"으로 불려지고 있고, 구약에서도 미래의 메시아는 어린양이라고 예언되어있다. 때문에 만찬에 전통적인 양고기가 오히려 올라가 있으면 그것이 더 모순이다. 즉, 예수 스스로 어린양으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 신약성경의 서간문 여러곳에 이미 설명 되어있다.[2]
최후의 만찬에 쓰인 잔이 성배라는 전설도 생겨났다.
2.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편집]
왼쪽부터 바르톨로메오, 대 야고보, 안드레아, 베드로, 유다 이스카리옷, 사도 요한, 예수 그리스도, 소 야고보, 토마스, 필립보, 마태오, 유다 타대오, 시몬 순.
예수가 자신의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 순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벽화는 훼손이 심한 편이다. 다 빈치의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벽을 약간 뜯어낸 뒤, 뜯어낸 크기만큼 축축한 회반죽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빠르게 그리는 프레스코화가 일반적이었다. 이 기법은 그림을 단순히 벽 표면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벽에 미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이 물리적으로 벽의 일부가 되며, 내구성이 상당히 높아진다. 그런데 매우 이례적이게도 다빈치는 가능한 한 매끄럽게 만든 벽에 달걀 노른자 등의 수성 접착제를 입히고 그 위에 유화를 그리는 템페라 기법을 활용했다. 이는 프레스코 기법이 생각하면서 천천히 그리는 다 빈치에게 불편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된다.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벽화는 프레스코화보다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그림이 많이 훼손되었다.[8]
다 빈치는 엄청나게 큰 벽[9] 에 벽화를 그리는 동안 비례가 어긋날 것을 고려해 종이에 미리 스케치한 후, 선을 벽에 따서 세심하게 칠했다. 또한 다빈치는 창문 밖과 식당 조명을 고려해 그림자를 매우 능동적으로 이용해서 인물 한 명 한 명을 생동감 있게[10] 묘사해 원본이 막 완성되었을때 보았다면 거의 실물 묘사에 가까웠을것이라고 하며, 원근법을 잘 살려 그림 상단에 성당 벽 무늬[11] 를 이어 그려서 마치 그림이 그려진 성당 내에서 최후의 만찬이 실제로 진행되는 듯한 착시 효과를 일으키도록 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를 해치지 않았다.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의 모델을 찾다가 한 착한 청년을 만나서 그를 모델로 예수를 그린 후, 세월이 지나서 다시 범죄자를 찾아서 그를 모델로 유다 이스카리옷을 그렸는데 둘이 실은 동일인물이었다는 속설도 있다.[12] 다만 이는 역사적 사실은 아닌 듯하다. 또한 다 빈치에게 "그림이 완성되려면 아직 멀었냐"며 항상 닦달했던 모 수도자가 유다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 역시 확인되지는 않은 이야기. 다빈치의 라이벌이었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경우 이와 비슷한 일화가 있다. '최후의 심판'을 그리던 도중 체세나 추기경이 '그림이 너무 불경하다'고 비판하자, 체세나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왕인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버린 것.
일설에는 이 그림을 그리는데 2년 9개월이 걸렸는데 사람들을 그리는 데는 3개월밖에 걸리지 않았고, 나머지 기간은 다 빈치가 그림에 그릴 메뉴를 고르는데 걸린 시간이었다고 한다.[13]
현재 보는 최후의 만찬 그림이 오리지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1977년 복원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최후의 만찬은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고, 이 그림은 22년에 걸쳐서 복원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일부 전문가들은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국의 언론이나 이탈리아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원작이 아니라 화가들이 덧칠한 수준이라는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논란이 된 부분은 예수의 얼굴로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해버린 배경이 되었던 드로잉이 다 빈치의 작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는 평가가 있다. 복원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원본과 변경점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 그림은 실제 역사 기준으로 한 묘사와 꽤 다른 부분이 많다. 먼저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의 만찬으로 유월절 식사는 해가 진 다음에 먹는 건데, 그림에선 창 밖 풍경에서 보이듯 대낮이다.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마셨다고 하는데 포도주 병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테이블 위의 빵이 덩어리 모양인데 유대인들은 유월절에는 네모나게 생긴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다. 몇몇 사람의 복장이 르네상스풍이다. 원래 고대 유대인들의 식사에서 사용한 탁자는 매우 낮은데 그림에 묘사된 식탁은 유럽식 테이블이다.
파일:Triclinium01.jpg
전통적인 고대 유대인들의 식탁은 이렇게 생겼다. 유대뿐 아니라 당시 로마 시대는 연회 때 평상에 누워서 먹었다. 고대 근동지역 아시리아 및 이집트 신바빌론 지역에서 왕 같은 최고 권력자들이 누운 자세로 식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나중에 유대 및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까지 이런 식사자세가 자유민 남성에게 보편적인 생활 방식였다.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ㄷ’자 모양의 ‘트리클린니움’ 식탁에서 먹었고, 방의 출입문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일수록 식탁의 주인이나 높은 사람이 앉는 자리로 여겼으며, 높은 자리의 좌석 왼편에는(즉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 입장에서 오른편에는) 가장 높은 자리를 두어 엄밀하게 상하를 구분했다. 연회 인원이 많다면 상석끼리 또 다시 ㄷ자 모양의 상하자리를 배치했다. 오른손으로 먹는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주로 왼손을 베개에 기대고 우측을 위로 하여 비스듬히 엎드렸다.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왼편으로 누웠다. 왼팔은 몸을 지탱하기 위해 받치는 데 쓰였고, 오른팔은 자유롭게 사용했다. 따라서 예수 오른쪽에 있던 제자는 자신의 머리를 예수 바로 앞에 둘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이에 맞갖게 그가 예수의 가슴에 기대었다고 말한 것이다. 분명히 그는 예수와 친밀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리가 가장 높은 자리는 아니었다. 가장 높은 자리는 주인의 왼편이었다. 그렇지만 사랑 받는 제자가 차지한 자리는 친밀한 친구의 자리였다.
-Charles K. Barre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Westminster, Philadelphia, 1978
그러나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르네상스 시대에는 오늘날에 통용되는 '시대고증'에 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이며, 그 당시는 교회 식당의 벽면을 장식하는 목적이기 때문에 그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식사모습과 그 시대 음식을 묘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묘사된 식사 자리의 배치 모습은 레오나르도 시대 당시의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이다.[14]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피사체의 조화 대칭 비율 등에서 완벽한 명화로 평가 받으나 사실상 역사적인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실제 유월절 식사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
2.1. 음모론[편집]
이 그림은 음모론에 기반한 소설인 다빈치 코드에 의해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댄 브라운은 예수 옆에 앉은 사람이 실은 예수의 제자인 마리아 막달레나이고 베드로가 그녀를 위협하는 것이며 예수와 그녀 사이의 V자형 틈이 바로 성배를 가리키는 암호라는 떡밥을 풀기도 했다. 다만 예수 옆의 여자 같은 인물은 실은 사도 요한이라고 보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사도 요한은 12제자 중 제일 어린 막내며, 전통적으로 젊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림 속에서 베드로 왼쪽 인물의 등에 가려진, 난데없이 식칼(?)을 들고 있는 손이 있는데,[15] 댄 브라운은 이 역시 다 빈치가 숨겨놓은 요소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스펀지를 비롯한 몇몇 방송에서 재현한 결과, 베드로의 오른팔이 꺾여서 그려진 거라고 한다. 다만 소매 색깔이 다르다며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2.2. 기타[편집]
- 유명한 그림들이 다 그렇지만, 패러디가 상당히 많은 그림 중 하나다. 직접 보자.
-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도 발견물로 나오는데, 게임에 밀라노가 없어서인지 제노바 교회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 일부 교회에 사본이 걸려있기도 한다.
- 이 그림을 실제로 관람하기 위해서는 약 3달 전부터 인터넷과 전화로 예약을 해야 하는데, 티켓을 놓고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따라서 방문 계획이 있다면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다만 당일 상황에 따라 여유가 있으면 선착순으로 현장판매를 하기도 하고, 예약 시간에 좀 늦더라도 웬만하면 들여보내주는 듯 하니 참고하자.
- 2007년경 즈음에 MBC의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야의 한 코너인 '크레이지'에서 오정태가 이 그림을 '쫑파티'라고 했다가 개신교 단체로부터 항의를 받은 바 있다.
참 할일 없다웃긴 건 정작 오정태 본인은 개신교 신자다. - 영국왕립미술관에 있는 해당 그림의 복사본이 Just Stop Oil이라는 환경단체에 의해 2022년 7월 5일 훼손된 사건이 발생했다.
3. 대한민국의 영화[편집]
자세한 내용은 최후의 만찬(2003년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일본의 영화[편집]
자세한 내용은 최후의 만찬(2005년 영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