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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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운산.jpg
출생
1885년 12월 7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
사망
1945년 7월 5일 (향년 59세)
평안남도 평양부
본관
진산 최씨
본명
최명길(崔明吉)
이명
최풍(崔豊), 최만익(崔萬益), 최빈(崔斌)
최고려(崔高麗), 최복(崔福), 최문무(崔文武)?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수많은 이름들
3. 생애
4. 사후
5. 여담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수많은 이름들[편집]


최운산(崔雲山)은 가명이며, 본명은 최명길(崔明吉)이다. 장쭤린의 봉천군벌에 소속되었을 땐 최풍(崔豊)을 썼으며, 간도에서 만석꾼으로 활동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 최빈(崔斌), 최운산을 사용했으며,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 활동을 할 때는 최복(崔福)을 사용했다고 한다. 다만 그가 사용했다는 이름들 중 '최문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3. 생애[편집]


최운산은 1885년 12월 7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북창평동에서 간도 연변의 '도태(道台)' 직책을 맡고 있던 아버지 최우삼(崔友三)과 어머니 이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설에 따르면, 최우삼은 청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간도 지역이 조선의 영토임을 선포하고 연변 일대에서 청군과 무력 충돌했다가 패배해 국내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후 1904년경 가족과 함께 연변으로 이주한 최운산은 1908년 형 최진동, 최치흥과 함께 동삼성의 중국군 보위단에 군관으로 입대했다.

최운산은 장쭤린의 봉천군벌 휘하에서 군사훈련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장쭤린으로부터 사병 부대 창설을 허락받아 '자위대'를 창설했다고 한다. 한편, 형 최진동은 어느 만주족 대부호의 양자로 들어간 뒤 천만 평에 달하는 토지를 물려받았다. 이후 최운산은 형과 함께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군 기지 건설 활동에 착수했다. 장쭤린 부대에서의 군대 운용 경험을 바탕으로 무장독립군 양성기관인 '봉오동사관학교'를 창립했다. 또한 1919년 자위대를 '대한군무도독부'로 개칭하고, 맏형이었던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추대한 뒤, 본인은 참모장에 보임됐다.

최운산은 독립군 부대 통합의 산파역을 맡아 1920년 5월 북로군정서, 대한국민회, 군무도독부, 대한신민단, 광복단, 의군부 6개 단체 대표가 봉오동에서 연석회의를 열어서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한다. 대한북로독군부의 부대 운영과 전투에 필요한 무기, 식량, 피복 등의 보급은 모두 최운산의 몫이었다고 한다. 그는 땅을 팔아 5만원의 군자금을 마련하여 체코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팔 때 이를 사들여서 독립군을 무장시켰다.

이후 그는 봉오동 전투에서 형과 함께 독립군을 이끌어 일본군을 상대로 승전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 다만 형 최진동이 봉오동 전투에서 지휘관으로서 활동했음을 입증할 기록은 현존하지만, 최운산의 봉오동 전투 당시의 활동상을 입증할 기록은 유족의 증언 외에는 남아있지 않다.

이후 최운산은 간도에서 콩기름공장, 국수공장, 양조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다양한 생필품 공장을 운영했으며, 농산물과 가축을 소련군에 납품하면서 그 대가로 신식 무기를 구입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산 대부분을 군자금으로 소진한 뒤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3년간 투옥되기도 했고, 1939년 창씨개명을 거부했다가 10개월간 감옥에 갇히는 등 일생 동안 6번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1930년대에도 우수리강 전투, 나자구 전투, 대황구 전투, 도문대안 전투, 안산리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러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장남 최봉우가 학도병 징집을 피해 봉오동으로 돌아왔다가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 평양으로 숨어들자, 아들을 보려고 평양으로 갔다가 1945년 7월 5일 평양에 피신해 있던 최봉우의 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4. 사후[편집]


최운산의 행적에 대한 신뢰할 만한 기록은 남아있는 게 별로 없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형 최진동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지만 그는 서훈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다 1977년 최운산의 부인 김성녀 씨가 진정서를 제출했고, 국가보훈처는 이를 심사한 뒤 최운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최문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에 대해 최운산의 유족은 '최문무'는 최운산의 또다른 이름이었다며 국가보훈처가 잘못 서훈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동일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최문무 문서 참조.

최운산의 손녀 최성주 씨는 현재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다. 그녀는 “그동안은 역사학자들이 바로잡아주기를 기다렸으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며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이 완전히 인정받을 때까지 투쟁할 것임을 밝혔다.#

2020년 6월 6일 최성주씨가 할아버지의 공적을 다룬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이 출간되었다.


5. 여담[편집]


2018년 8월,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는 7월 러시아 모스크바 근교의 사진, 영상물보관소에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 소극장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개회식 영상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이 영상에서 홍범도와 함께 찍힌 인물에 대해 러시아 적군 장교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2019년 12월 유족의 증언으로 최진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영상에는 그 외에도 동생 최운산 역시 찍혀 있다고 한다. #

다만 이 영상 속 여운형 오른편에 앉아있는 인물이 최운산이라고 단정지을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아마 최운산의 아들 사진과 얼굴이 유사해서 그렇게 주장했을 듯 싶은데 이건 충분한 근거로 활용되지 못한다. 게다가 최운산은 형 최진동과는 달리 당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파견된 조선대표단 중 한 명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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