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만(1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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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영만.png
출생
1885년[1] 8월 16일
평안도 평양부 대흥면[2]
(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경상동)
사망
1939년 3월 15일
중국 만주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최영만은 1885년 8월 16일 평안도 평양부 대흥면(현 평양직할시 중구역 경상동)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3년경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광산회사에 근무했다. 그러다 미국인의 추천으로 인천개발회사로 전직했고, 이듬해 인천개발회사의 알선으로 하와히 호놀룰루로 건너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그는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지부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참가했다. 자강회 선전기관지로 <신조신문(新潮新聞)>을 발간했으며,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임치정, 이교담(李敎潭) 등과 함께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동포들의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또한 1906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동보국회를 조직하고 문양목과 함께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하여 주필을 맡았다.

1910년 2월 한미무역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국내에 귀국했으나 한일병합으로 미국에 돌아갈 기회를 놓쳤다. 이후 만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하자 국내로 귀환한 뒤 조만식, 명제세, 김영로(金永魯)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여 연락기관을 설치하고, 격문 배포,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20년 1월, 조만식은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 등을 만난 뒤 그해 3월 1일을 기해 서울에서 3.1 운동 1주년 기념 축하시위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에서 보내 온 유인물을 배포하며, 임정 발행의 공채증권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것 등을 협의했다. 그해 2월 서울로 돌아온 조만식은 최영만과 명제세 등에게 이러한 취지를 설명하고 추진 방안을 강구했다.

한편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특명으로 암살단을 조직한 그는 미국 의원단이 한국에 내한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서울역에서 조선총독 등 일본 고관을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고, 결국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20년 9월 22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오산학교 영어교사로 있다가 사상불온자라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재차 만주로 망명하였다. 1938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동변도(東邊道) 총사령관 김탁(金鐸)과 연락을 취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1939년 3월 15일 만주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영만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192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84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대흥면 신수구동·창동의 각 일부가 합병되어 신창리가 신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