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산흥

덤프버전 : r20210301



출생
1882년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
사망
1910년 4월 30일(27~28세)
대구형무소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최산흥은 1882년생이며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 통안마을 출신이다. 그는 잡화상을 꾸리던 중 1906년 10월 이경춘(李慶春) 의병장의 휘하에 들어가이경춘 의병부대에서 도십장(都什長) 및 전포장(前砲將)을 맡아 전라북도 태인과 부안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는 이석용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하여 검찰(檢察)이라는 직무를 맡아 총기 100여 정을 휴대한 의병 120여명을 이끌고 임실ㆍ남원ㆍ진안ㆍ용담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월 9일 밤, 최산흥은 부하 10명과 함께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 가서 김대춘, 김봉근 등 부하 10여 명에게 명령해 변대규(邊大主)를 납치해 같은 마을 최덕림의 집으로 끌고 갔다. 변대규는 일본 기병대에게 집을 빌려주는 등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한 친일부역자였다. 변대규에게 군자금을 내라고 했는데 불응하므로 화포실로 보내겠다고 협박한 후, 다른 여러 명과 함께 총을 휴대하고 다시 변대규의 집으로 끌고 가서 엽전 100냥과 백목 3필을 몰수해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그해 3, 4월에는 이석용 의병장과 100여 명 동지와 함께 무기 100여 정으로 무장하고 임실군 상동으로 출동해 임실읍 수비 기병대와 순사 주재소를 습격했다. 기병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부상시켰다. 이후 1908년 4월 친구 양윤숙(楊允淑)이 구림면 국화촌 뒷산인 회문산에서 ‘의격문(義檄文)’을 지어 각지에 보내고 의병을 봉기하자 이에 가담하여 중군장을 맡았다. 그는 순창과 임실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여러 전과를 거두었다.

1908년 음력 8월 무림면(현 구림면) 화암리에서 일본군 순창수비대 및 헌병대와 교전했으며, 9월 구림면 국화촌에서 남원수비대를 기습 공격했다. 11월 일본군 기병대가 사용하는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 소재 민가를 습격해 소각했으며, 1909년 정월 서면 죽전리 순창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했고, 2월 회문산 기슭 산내리에서 순창수비대 10여 명을 공격했다.

또한 부하들과 함께 친일파의 가옥 방화, 군자금 모금 등을 계속했는데 각 이장에게 할당해 징발했다. 1908년 11월 초순 양윤숙 의병장의 지시로 검찰 직무를 맡은 최명칠(崔明七)에게 명해 의병 3-4명을 이끌고 순창군 서기 조명운(曺明云)에게 군자금 제공을 종용했다. 최산흥은 12월 3일과 8일 총을 휴대한 부하 3~4명과 함께 구암면(현 구림면) 치천촌에서 두 차례에 걸쳐 돈 500냥을 받아냈다.

1909년 12월 15일에는 다시 양윤숙의 지시를 받고 임실군 강진면 갈담리에 사는 친일부역자 변대규의 집에 부하 60여 명을 인솔하고 찾아갔다. 그러나 변대규의 집을 소각하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고 체포되었다. 1909년 12월 2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교수형을 언도받고 항고했으나 1910년 3월 3일 대구공소원과 4월 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었다. 1910년 4월 30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최산흥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