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선(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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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30년 4월 29일, 함경남도 은율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일성 항일유격대원으로 전사했다. 아버지가 죽은 이후 화전민으로 어렵게 살다가 해방 이후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를 거쳐 모스크바 대학으로 유학했다.

귀국 후 1958년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지도원을 지냈으며 1970년부터 황해북도 당위원회에서 일했다. 1972년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당선되었고 1974년 황해남도 책임비서로 승진했다. 1980년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당선되었다.

1982년과 1986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계속해서 황해북도 책임비서로 있었는지 소련 정부대표단이 1986년에 방북하자 이를 환영하는 1986년 7월 8일, 황해북도 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89년 4월 강희원이 정무원 부총리로 승진함에 따라 그의 뒤를 이어 평양시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재직했다. 1990년에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인민위원장으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도 선출되었다. 1990년 4월 22일에는 레닌 탄생 120주년 기념 보고회도 진두지휘하였다. 1991년 12월에 강현수에게 평양비서 자리를 주고 그와 자리를 맞바꾸어 황해북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이동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였을때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95년에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6월 24일, 사리원시에서 김일성 현지지도 20주년 기념 보고식에 참석하여 보고를 맡았으며 "당중앙위원회 구호를 높이 받들고 올해에 기어이 만풍년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1997년 4월 9일, 청년전위호 포 증정식이 사리원에서 개최되자 김중린, 최룡해, 김정각과 함께 참석했다. 5월 4일에는 김정일의 정방산 현지지도 관철 궐기모임을 조직했고, 9월 28일, 황해북도당 대표회를 개최하여 김정일을 총비서로 추대했다.

1998년 초까지만 해도 조명록과 함께 황해제철소의 붉은기 수여식에 나타나는 등 공개활동을 진행했으나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낙선하더니 로배권에게 황해북도 책임비서 및 인민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퇴임했다. 이후 동정은 보도되지 않고 있다. 김정일에게 뭔가 밉보인 것인지 90도 넘은 나이로 골골대는 건지 애국렬사릉 안장 얘기도 전혀 없다.

3. 참고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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