퓌러붕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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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국가수상부 청사 근처의 벙커 외부시설.
앞에 있는 두 구조물 중 왼쪽은 입구, 오른쪽은 감시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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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내부의 모형.
1. 개요
2. 구조
3. 패전 이후
4. 현재
5. 여담



1. 개요[편집]


퓌러붕커(Führerbunker; 총통엄폐호) 또는 히틀러 벙커(Hitler's bunker)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퓌러히틀러와 고위 지휘관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를린 중심부에 만들어진 지하 방공호이다. 1944년 10월 23일에 완공되어 1945년 1월 16일부터 아돌프 히틀러에바 브라운이 거주했으며, 4월 30일 패전 직전에 둘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독일이 항복한 후 1947년 12월 5일에 폐쇄되었다.

2. 구조[편집]


벙커 내부는 천장이 낮고 비좁은 방들이 중앙 복도 양편에 모여 있었으며, 대전 말기에는 이 곳에서 매일 회의가 열렸다. 외부 세계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24km 떨어진 초센의 독일 국방군최고사령부와 연결된 전화 교환대와 무선송신기, 무전기 각 1대씩이 전부였다. 또 소련군의 포격이 총리관저의 벽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그 아래에 있는 벙커를 유독가스로 채웠기 때문에 땀이 나고 공기가 부족한 가운데 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졌다.

파일:히틀러 벙커 집무실.jpg
프리드리히 대왕[1]의 초상이 걸려 있던 히틀러의 집무실이다.
약 8.2m 깊이의 지하에 있으며 30개의 작은 방이 있다. 벙커는 약 4m 두께의 철근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있으며 정문과 정원으로 통하는 비상구가 있다. 1차 건축이 1936년에 끝났고, 1943년까지 2차 건축이 이어졌다. 1차 건축 기간에 지어진 부분을 포어붕커(Vorbunker)라 하고 2차 건축 기간에 지어진 부분을 퓌러붕커(Führerbunker)라고 한다. 이 두 곳은 연결 되어 있으며 가장 깊은 곳엔 히틀러의 거처가 있었고 고급스럽고 호화스러운 가구로 도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가구들은 소련군의 전리품으로 남게 된다.

파일:히틀러 방.jpg
히틀러에바 브라운이 자살한 방이다.

3. 패전 이후[편집]


1988년 9월, 건설 노동자로 변장한 사진작가 로베르트 콘라트(Robert Conrad)가 잠입해 촬영한 퓌러붕커의 내부. 포어붕커[2]와 퓌러붕커를 연결하는 통로가 있던 공간이다.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끝난 이후, 퓌러붕커가 있었던 곳은 소련군 점령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당연히 나치와 히틀러에 대해서는 치를 떠는 소련이었기에, 1947년 퓌러붕커와 지상을 연결하는 출입구인 콘크리트 구조물을 폭파했다. 벙커의 감시탑은 이 때 파괴됐고, 벙커 내벽은 무너졌으며, 벙커 천장도 폭발의 충격에 내려앉았다. 그러나 워낙 단단하게 만들었기에 나머지 공간은 이 폭발에도 버텼다. 12년 후, 동독 정권이 다시 한번 폭파시켰지만 이번에도 벙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동독은 지상으로 드러난 출입 계단 같은 흔적만 대충 흙으로 메우고, 풀이 자랄 때까지 방치했다. 이후 1980년대 말에 콘라트가 잠입했을 때는 퓌러붕커의 대부분이 지하수에 수몰된 상태였다.

1986년 동독 정부는 퓌러붕커를 포함해 국가수상부 청사, 옛 외무부 청사가 있었던 자리에 대규모 주거 단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자리에 건물을 세우려면 지하의 빈 공간들을 전부 메워야 했다. 이 건설 현장 지하에는 퓌러붕커 외에도 국가수상부와 외무부의 방공호로 쓰인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대규모 공사를 벌여 나머지 벙커의 잔해들을 모조리 매립하는 작업을 실시했다. 퓌러붕커가 있었던 자리에 퍼부었던 흙을 거두고, 퓌러붕커의 천장까지 지상으로 노출시켰다. 벙커 천장을 뜯어냈고, 없애기 곤란한 벙커의 외벽과 바닥은 흙과 자갈을 채워 완전히 메워버렸다. 이 공사 기간 중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사진작가 로베르트 콘라트가 건설 노동자로 변장해 30차례에 걸쳐 잠입해 내부를 촬영한 것이 퓌러붕커를 찍은 마지막 사진으로 남았다. 여담으로 콘라트가 퓌러붕커에 잠입했을 때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나치 유적에 몰래 들어왔다는 것보다 서베를린 탈출 혐의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지상에선 베를린 장벽이 퓌러붕커 위를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베르트 콘라트의 잠입 촬영을 다룬 슈피겔 기사[3]

4. 현재[편집]


파일:퓌러붕커 터.jpg
2011년에 촬영한 퓌러붕커의 터다.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안내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위치는 'Gertrud-Kolmar-Straße 14, 10117 Berlin, Germany(Führerbunker)'으로, Pflegestation Am Brandenburger Tor(브란덴부르크 문 요양원) 앞마당의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과도 가깝기 때문에 베를린을 여행하면서 들릴수도 있다. 내부 구조물을 모두 철거하지는 않았지만 들어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제거하고 통로란 통로는 모두 흙과 자갈로 매립했기 때문에 벙커의 흔적을 볼 수는 없다. 나치의 쇠락이 남긴 연구 가치가 큰 곳이지만 아돌프라는 이름만 들어도 발작이 나는 독일인들은 이 곳을 영원히 봉인하기에 이른다. 나치 잔당이나 사후 추종 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 폐쇄 작업이 워낙 급하게 이뤄져, 벙커 전체를 완전히 매립하지는 못했다. 당연히 벙커 내부 구조를 면밀히 조사하지도 못해, 히틀러의 집무실과 같은 극히 일부의 주요 공간 이외의 공간은 정확히 어떤 기능이 있고 누가 사용했는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만일 주차장을 다시 파내려간다면 벙커를 발굴할 수는 있을 것이나, 그렇게 되면 네오 나치성지순례가 이어질 가능성이 크고 나치 상징물은 법에 의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발굴 조사가 이뤄질 일은 없다. 조사를 한다고 해도 초음파 조사와 같이 외부에서만 관측할 가능성만 있고, 설령 직접 발굴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저 요양원 건물과 그 주차장을 완전히 철거하고 재개발을 할 때나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조사가 끝나면 그 지하 공간도 함께 철거될 것이다.[4]

5. 여담[편집]


  • 영화 몰락(다운폴) 전반의 공간적 배경이 퓌러붕커이다. 내부 구조 고증도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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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자 대왕이라고도 불렸다. 프로이센의 최고전성기를 이끌어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라 불린다.[2] 1936년에 1차 완공된 구역.[3] 퓌러붕커 이외에 국가수상부, 외무부 청사와 연결된 방공호에도 잠입해 찍은 사진도 함께 볼 수 있다.[4] 이런 식의 발굴조사를 구제발굴이라고 한다.